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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이토.
1909년 10월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붉은 가슴으로부터 터진 뜨거운 총탄은 그대의 육신과 영혼을 찢어 놓았다. 쓰러진 뒤 그대는 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수행원이 그것이 조선인이며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하자, 그대는 “바보 같은 놈”이라고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것이 정말 그대가 한 말인지, 아니면 수식하기를 좋아하는 그대의 후배들이 지어낸 말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한국의 황제를 핍박해서 한일 합방을 체결하고 고문제도를 합법화 해서 한국의 통치를 확립한 것은 오랫동안 교묘하게 준비한 그대의 권모 술수였다. 그 해 6월 그대는 조선 통감 자리를 내놓고 만주 시찰을 떠난 길이었다. 만주를 또 하나의 조선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바보 같은 놈”이라니. 그대와 그대의 후배들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함으로써 서구 열강의 조선 침략을 막아주었고, 중국을 복속 시킴으로써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켜, 미개한 아시아 전체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는데, 그 철부지 불령선인이 그런 원대한 뜻도 모르고 그대의 꿈을 좌절시켰다는 뜻이었던가.
일어나라 이토. 그대가 저질렀던 그 오만과 파행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보라. 오늘날 그대의 후배들은 하나같이 그대들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에게나 “바보 같은 놈” 이라 뇌까리고 있다. 그대들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바보 같은 놈”이다. 일본의 총리는 전범들의 묘소를 거리낌없이 참배하고 있다. 조국을 위해 죽어간 수 백만 무명의 영령들에 예배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그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무명 용사들에게 의미 없는 전쟁에서 산화를 강요한 전범들이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의 멍청한 눈에 걸린 결의를 보라. 그는 그들에게 철저한 충성을 맹세하고 다음 전쟁에서는 그 전범들이 이룩하지 못한 대동아 공영권을 기필코 이루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참배를 달가워하지 않는 아시아의 이웃은 “바보 같은 놈” 들 이다. 그의 뒤에는 막강한 우익 인사들이 버티고 있다고 한다. 그대가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할 때 그대의 뒤를 굳건히 받혀 주었던 자칭 지사들과 얼마나 흡사한 모습인가. 정한론을 울부짖으며 술을 퍼먹은 뒤, 평화로운 남의 나라 궁궐에 개닷발로 난입해서,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살륙하고, 국모를 시해한 뒤 궁궐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바로 그 불한당들이, 그때 자신들을 일본을 이끄는 지사라고 불렀다. 그대가 저질렀던 전쟁은 오늘날 피해자들의 마음속에 날이 갈수록 선명하게 되살아 나고 있지만, 그 전쟁을 저질렀던 그대들은 엄청난 살상과 파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피해자들에게 잊기를 강요 하고 있다. 보라 그들은 과거에 남을 괴롭히던 기억을 미화하고, 한편으로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바보 같은 놈”들이라고 경멸하면서.
독도에 대한 아우성을 들으라. 그대의 후배들은 20세기 초 그대들의 조선 강점이 시작되던 시기 전후의 그대 자신들의 기록만을 역사로 제시한다. 그 이전의 기록들은 심지어 그대들이 기술해 놓은 것 까지도 외면 한다.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기록과 역사에는 아예 돌아 볼 생각이 없다. 심지어 일본 사람들까지도 일본측의 주장이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가라는 사람들은 무지몽매한 촌부들을 사주하여,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못을 박는다. 그리고 예의 그 심각한 표정으로 이 문제는 전쟁으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선언한다. 그대들은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켜야 하고, 얼마나 많은 패망을 맛보아야 하며, 그대들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생죽음을 당하여야, 전쟁이란 말이 그대들의 입술로부터 사라질 것인가. 중국, 소련과 다투고 있는 센가쿠 열도, 남사 군도, 쿠릴 열도 등이 독도의 영유권 주장과 같은 것이라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헛된 영토의 탐욕 때문에, 거기서도 엄청난 살륙을 다시 경험 하게 될 것이다. 언제쯤 그대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배울 것인가.
그대들이 일으킨 전쟁은 때때로 독일의 이차대전과 비교된다. 그대들은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라며 강변한다. 비교 될 수 없는 면도 있지만 유사한 면도 많다. 독일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전쟁의 준비가 완벽한 이웃나라에 쳐들어 가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벌였다. 그러나 그대들은 달랐다. 그대들과 영토 분쟁을 일으킨 적이 없는, 전쟁이란 꿈에도 생각지 않던 이웃나라에 쳐 들어가서 살륙하고 승리를 구가했다. 그런데 그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대들은 얼마나 독일의 흉내를 내었던가. 화학무기의 인체 실험을 통한 실험실에서의 처참한 살육, 불복종 민간인에 대한 집단 학살 등 잔혹이 독일 보다 덜 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또 그대들은 그대들의 한국 강점과 중국 침략을 넌지시 영국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 암시한다. 어림없는 이야기다. 그대들은 영국인들이 그들의 식민지에서 받았던 존경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다. 영국이 그 식민지에 주었던 것만큼 베푼 적도 없었다. 조선을 그대로 두었으면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을 그대들이 막아주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이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일본의 안보가 위태로워 지기 때문에 조선을 점령해야 했던 것이라고도 강변한다. 누가 그대들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며, 자기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다른 무관한 나라를 침략해도 좋다는 논리는 어디서 배운 것인가. 또 어느 나라가 그대들처럼 건실한 국방체제를 갖추고 있던 나라를 침략했겠는가. 그러면서 그대들의 어린이들에게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그래서 일본이 점령해도 조선은 아무 할말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중국보다 더욱 잘살게 해주었기 때문에 고마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대들 섬 민족과 달리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여건 때문에 조선은 대륙의 강대국들과 전쟁보다 친선에 주안점을 두었었다. 조공을 바치는 것은 주권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을 평화롭게 지키기 위한 현명한 외교적 제스처였다. 그대들이 미국에 아양을 떠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한반도 옛 정권들의 중국과의 관계보다, 훨씬 더 주체를 잃은 식민지 같아 보인다. 주인의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온갖 아양을 부리다, 주인 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짖어 대며 위협을 하는 강아지 같아 보인다. 끓임 없이 아양을 떨다가 주인이 방심한 사이에 느닷없이 주인의 종아리까지 물어서 주인으로부터 개 패듯 매를 맞기도 하는 강아지와 흡사해 보인다.
그대들의 역사 왜곡은 그대들의 우월주의에서 시작된다. 무엇이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그 천박한 근성 때문이다. 천황이 자신의 혈통이 백제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임나 일본부설이 판을 치고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고쳐지고 있고, 그대들의 저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유물을 조작해서 일본 역사의 기원을 앞당겼다고 주장하다가 그의 일생 동안 쌓아온 명성을 하루 아침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다. 극열한 애국심에 불타는, 일본의 지성이라고 불리던, 토쿄 지사는 끓임 없이 일본 민족의 우수성과 주변 국가의 열등함을 강조해서 그의 글을 읽었던 사람들에게 한없는 자괴를 안겨 준다. 왜 역사를 고치려고 하는가. 왜 그대들은 우월함을 강조하는가. 그대들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위장일 수 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그대들은 끓임 없이 탈 아시아를 부르짖고 서양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그 왜소한 몸으로 그 짧은 언어 구사 능력으로 서구인들을 흉내 내려 해 왔다. 서구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시아의 우매한 이웃을 벗어나서 그대들의 우월성을 나타내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나 그것은 우월감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인들에게서 끊임없이 받아온 멸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우리에게는 이해된다. 아시아가 우매한 대륙인가. 아시아인이 열등한 인종인가. 지난 십구 세기 말, 이십 세기 초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게을러서,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한동안 이탈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는 그대들이 끊임없이 떠들어 대듯, 같이 하기에 너무 미개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대들 지식의 원천이었고, 같이 살아나가야 할 그대들의 동반자였다. 왜구로서의 노략질밖에 할 줄 몰랐던 그대들, 툭하면 대륙 정벌을 외치는 그 못된 그대들을 좋다고 할 선량한 이웃이 있었겠는가. 그런 소외감이 오히려 그대들로 하여금 이웃을 버리겠다고 아우성 치게 한 것이 아니었던가. 역사는 도도히 흘러 제 갈 길을 간다. 소인배들이 바꾸려 하나 바꿔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토, 도요토미의 그 우스꽝스런 전쟁놀이를 생각해 보라. 조선을 치고 명나라를 정복해서 그 나라들을 그의 공신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그 허황한 망상을 생각해 보라. 무방비의 조선에 들어가서 그들은 약간의 남의 땅을 밟아 보았고 수많은 살육을 즐겼겠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한민족으로부터의 영원한 증오와 끊임없는 저항,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선량한 그대 백성들의 의미 없는 죽음과 궁극적인 패배뿐이었다. 그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그대들의 역사는 그것을 승리로 호도하고 있다. 이차대전이 도요토미의 치매 어린 살륙광기와 다른 것이 있다고 보는가. 넘쳐나는 사무라이들을 처치하는 수단으로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왜 선량한 남의 나라 백성들이 참혹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이차대전에서는 도요토미의 놀이보다 더 많은 그대들의 백성들이 죽었고, 의미 없는 살육으로 평화스런 아시아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 살육에 선량한 그대들의 동포를 몰아 넣기 위해 위안부 부대까지 함께 끌고 다녔다. 이 세상 역사에 위안부를 끌고 다닌 전투부대가 있었던가.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 역사상 위안부를 끌고 다니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는 그런 썩어 빠진 군인들이 있었던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이 그대들의 실상이었고 그대들이 역사를 제대로 기술하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부끄러운 짓을 저질러 놓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그대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수없이 많은 사과를 했다. 식물인간 같은, 세상 어느 것에도 책임질 줄 모르는 그대들의 황제는 되풀이 하여 과거에 대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었다. 정치가들이, 심지어 촌부들까지 한국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충분히 사과를 했으며 더 이상 사과 할 것이 없다고 강변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사과했던가. 수많은 살육을 인정했던가. 위안부를 강제로 데리고 다녔던 것을 인정했던가. 인간의 생체 실험을 인정했던가. 강제 모병과 강제 징용을 인정했던가.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약속했던가. 사과는 했는데 인정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오직 꼭두각시들의 입에 발린 구두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의 사과란 것이, 이웃을 더 오래 지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더 학살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로 오해되는 것이다.
일어나라 이토. 그대 일어나 안 중근 의사를 똑바로 다시 보라.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려는 그대의 원대한 구상을 무너뜨린 “바보 같은 놈”이라 아직도 말할 수 있는가. 아직도 그대의 이웃 아시아 인들이 그대들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하고 무지한 “바보 같은 놈” 들로 보이는가. 보라. 지난 30년 동안의 한국의 발전을. 그대들은 이차대전 중 강대국 노름을 했었고, 전쟁에서 지고 도탄에 허덕이다가, 한국 전쟁의 특별한 경기 덕택에 다시 살아났다. 우리는 그것 없이 그 변화를 그 발전을 그 짧은 기간에 이루어 냈다. 만일 그대들에 의한 수탈의 세월이 없었다면, 그대들의 강점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한반도의 분단이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 어디쯤 있을 것으로 보는가.
보라 오늘날의 세계의 움직임을 보라 이토. 모든 나라들이 역사의 바탕 위에 성실하게 그들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는 역사는 왜곡되고, 진실은 사라지고 있다. 그대들의 젊은이들은 거짓의 지붕아래서 자라고 있다. 진실을 모르는 그들은 이웃을 이해 할 수 없게 되고 이웃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할 것이고 어느 이웃도 받아 들이지 않는 외톨이가 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발작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원자 폭탄의 세례를 받았던 일본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원자폭탄으로 붕괴될 것이다. 일어나라 이토. 일본 열도는 갈아 앉고 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를 보지 못하는 그대의 “바보 같은 자손”들을 일으켜 세워라. 더 늦기 전에 가르쳐라. 역사가 무엇인가. 세계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이 세상에 살게 하는가를.
일어나라 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