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 우리 가족 4, 강구 가족 2(봉주), 박주오 가족 2(보람) 장병효 가족 3(두혁, 윤석) 모두 11명에 가이드 부부, 그 외 할머니 자매 일행 5.
장병효 안사람은 연수관계로 불참함. 장병효의 곧이 곧대로의 성격을 모두 탓함.
동원이는 병무청 서류를 지참하지 않아서 하마터면 발목이 잡힐뻔 함.
대한항공, 좁은 기내(좌 3열, 우 2열), 더욱이 날개 뒷자석이라 시야가 가려 있었음.
기내식은 샌드위치와 중국떡 그리고 쵸코랫 등.
1시간 40분 쯤 후 상해 포동 공항 도착.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려 11:30 (한국 시간 12:30)
한글 간판이나 안내문이 사라지고 중국 간자체의 한문이 중국을 떠날 때까지 줄기차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중에는 멀미가 날 지경이 된다.
여행은 머무르지 않아서 좋다. 머무름은 언제나 감정의 소용돌이를 낳고 정체의 썩음을 유발한다. 여행은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다.
써먹지도 못할 중국말과 간자들을 부지런히 수첩에 담고 입에 외어댄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니츠발로마? (당신 식사하셨어요?) 셰셰, 니하오, 자이젠. 洗手간, 빙수이(찬물), 차수이(茶水), 行李(luggage), 칭송칭송(輕松輕松:힘을 빼고 느긋하게 하세요)
샹하이(上海)다. 바다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일명 호라고도 하는데 삼수변에 戶를 쓴다. 모든 자동차 넘버판(licence number)에 그 성(城)을 상징하는 첫글자를 쓰고 그 도시의 크기에 따라 알파벳이 순서대로 따르고 그리고 일련번호가 붙는다. 예를 들어 蘇A05460하는 식이다. 상하이에서는 모든 자동차(氣車)가 바로 이 호로 시작한다.상해는 원래 자그마한 어촌이었으며 호는 그 어부들이 사용하던 색구(索具)중 하나였다고 한다.
첫 관람지는 상해.
포동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중앙분리대 대신 대를 구획지어 심어 놓았다. 칸나와 협죽도가 여름꽃답게 붉고 열나게 피어있었다.
오른쪽으로 교각이 늘어서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묻자 자기부상열차의 철로를 건설중이라고 한다.
현지가이드가 전용버스에 동승하다. 김성(金星)이라는 조선족 교포. 광주에도 여러번 다녀갔다고 하는데 우리말이 능숙하다.
상해는 거대한 도시였다.
도심으로 진출할수록 거대하고 높은 빌딩들이 눈에 띄었다.
빌딩들의 특징은 표면이 상당히 입체적이었고 어떤 건물은 콘크리트를 칠 때 사용하는 비계가 아직 철거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모던하고 예술적이었지만 약간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사는 냄새는 역시 언듯 언듯 스쳐보이는 뒷골목의 풍경이었다. 내걸린 빨래들, 윗통벗은 사내들, 내걸린 솥, 표정없는 얼굴들이 중국의 이면을 숨김없이 드러내주었다. 흔히 중국은 백년이 공존한다고 한다. 특히 상해는 중국의 급속한 발전의 최첨단 기지이기 때문에 이 공존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겠지만 상해도 역시 신전이었다. 크고 위대한 신전과 마취된 군중들의 끝없는 흐름이었다.
동방명주탑
明珠는 진주(pearl)를 의미한다. 거대한 꼬챙이에 두개의 핑크빛 진주가 꽂혀있는 형상이다. 상해의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띈다. 그 곳 전망대에 서 바라보는 상해는 긴 황포강이 휘감아 도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마치 우리나라 안동의 하회마을을 연상케하는 지형이었다. 그곳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이곳에 온 느낌이었다.
황포강에 흐르는 배
느릿느릿 잔뜩 낮게 엎드린 방주형의 배들이 끝없이 이어 흐른다. 대선단을 이루어 바다로 나아간다. 거의 한 척의 거스름도 없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단들은 정말 장관이었다. 대부분 모래나 건축자재들을 실은 운반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배에 익숙치 못한 우리들의 눈에는 한꺼번에 그 많은 배들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뭔가 시대를 초월하여 흘러가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상해임시정부
상해의 뒷골목에 위치한 초라한 건물
- 눈덮힌 길을 걸을 때 발길을 흐뜨리지 말라
금일 나의 행적이 후일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서산대사의 詩를 김구 씀)
가파른 계단이 그 시대의 협착함을 증언하고 있었다.
침실도 있었고 가마솥이 걸린 부엌도 있었다.
원탁에 앉아 구국의 일념으로 회의를 했었을 님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붉은 대문. 담쟁이 덩굴이 곱게 자라는 건물들. 일자로 뻗어있는 대나무 빨래 건조대. 여자의 속옷들까지 부끄럼없이 걸려있었다.
거리에는 플라타나스가 고색의 창연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상해는 뒷골목에 그 낭만과 활기가 남아있다.
홍구공원
중국의 문호 魯迅의 기념공원이다.
그 한모퉁이에 梅軒(윤봉길)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 공원에서 그 유명한 도시락 투척 의거가 있었던 것이다.
호수가를 따라 심어진 협죽도가 한창이었다.
기념관에서는 그 투척 의거를 담은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동작이 끊어지는 무성영화시대의 필름이었지만 폭파장면과 의사가 끌려가는 표정은 비교적 생생했다.
공원입구의 부채 장수들은 상당히 끈질겼다.
들어갈 때는 천원에 4개 하던 부채가 나올 때는 5개, 6개로 늘어났다.
길을 건너서 한참을 따라오며 거의 애걸하다시피 물건을 드밀었다.
공원 안에는 죠깅을 하는 노익장들이 많았다. 이 곳도 곧 노인들이 넘쳐나는 노인 사회가 될것이다.
부채 그림을 즉석에서 그려파는 거리 화가도 있었다.
짧은 핫팬티를 입은 소녀의 다리가 거의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여성의 다리가 주는 아름다움은 거의 신의 축복이다.
상해의 밤거리에서 보았던 유모차를 끌던 그 여성의 다리가 성숙한 아름다움이라면 이 소녀의 다리는 풋풋한 자작나무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식탁에 어물이 오르면 원탁을 돌려서 어두와 어미가 가리키는 쪽에 앉은 사람이 술을 한잔씩 비워야 한다고 한다.
음식은 조금 남기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大廈(hotel), 肯德基 (kenturky chicken), 加油店(주유소),麥堂勞(Mcdonall)등의 간판이 이채롭다.
상해에서 무속까지 호정고속도로를 달리다. 현지 시간 오후 8:40
캄캄한 밤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틀째 무석
원래는 주석 산지였는데 전시에 많은 주석을 채굴해버려서 무석이란 이름이 되었다고 함.
황금해안호텔(Golden Coast Hotel) 1105호 투숙
6시 모닝콜, 7시 아침 식사
연변족 현지 가이드 탑승- 연변족은 대개가 두만강을 건너온 함경도 출신이라고 함.
매원(梅院) - 중국 홍콩의 부자가 어머니를 위하여 이 정원을 만들어 드렸다고 함. 때가 맞지 않아 매화꽃은 볼 수 없었지만 그 절절한 효심은 정성들여 가꾼 정원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무석도 역시 강과 운하의 도시였다.
수양제가 북경에서 이 무석까지 대운하를 건설했다고 한다.
강남의 식량을 수로로 북송하기 위하여, 그리고 황제의 교통로로 이용하기 위하여 이 남북으로 뻗은 대운하를 건설했다고 한다.
한 때 황제가 이 운하를 타고 내려올 때면 노를 사용하지 않고 강 양 언덕에서 긴 비단천으로 배를 끄는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그 배를 끌기 위하여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 운하에 연결되는 수많은 지류들. 그 강과 운하를 타고 느릿느릿 흐르는 정크와 운송선들. 중국의 배들은 강에 엎드린 듯이(혹은 누운 듯이) 길고 납작한 것이 그 특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