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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실질적 자유지상주의의 경제철학
- 하이에크의 시장중심주의와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 논의를 중심으로 -
곽 노 완*
[논문개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지주인 하이에크는 시장의 불완성을 인정하면서도, 시장이 경쟁이라는 발견절차를 갖는 자생적 질서라고 본다. 이러한 시장은 당장은 불완전하지만 점차 완전한 방향으로 동학적으로 진화한다고 한다. 그리고 시장은 현존하는 질서 중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기제라고 한다. 그리하여 심지어 중앙은행도 폐지하고 사적인 은행이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하이에크는 새롭게 동학적인 시장중심주의를 주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롭고 자생적인 질서로서 시장이 교란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를 침해하는 요소를 막아줄 최소한의 질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보편적인 강제력을 갖는 법과 국가는 시장교란 요인을 막아줄 최소한의 질서이다. 이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으로서 판 빠레이스는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라는 대안적 경제철학을 제시한다. 그는 형식적 자유에 국한된 하이에크의 자유 개념을 넘어서서, 자유를 누릴 기회와 수단을 포함하는 실질적 자유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실질적 자유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웨이츠만이 제창한 지분배당경제와 미드가 주장하는 기본소득이 결합된 최적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우월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지분배당경제는 임금을 지분배당으로 대체하는 경제체계이다. 이는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노동유인을 극대화하여 실업 등 사회적 자원낭비를 제거함으로써, 신자유주의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성과를 유도하며 따라서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을 보장하기 위한 기획이다. 그런데 그는 기본소득의 재원을 압도적으로 선망 받는 고소득 직업에 대한 고율과세를 통해 조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노동소득을 기존 자본주의보다 감퇴시킬 수도 있으므로, 그가 제창한 최적자본주의의 노동유인과 경제성과를 제약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을 완전히 환수하여 일부는 노동소득 인상 재원으로 활용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가 ‘최적자본주의’보다 우월한 노동유인과 경제성과를 가져오며 따라서 지속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신자유주의, 실질적 자유지상주의, 기본소득, 하이에크, 판 빠레이스.
1. 들어가기: 신자유주의 글로벌시장의 위기
‘정기적인 상품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을 뜻하는 시장(市場, Markt, market)은 원래 물리적 장소성을 갖는 개념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중 시장아고라는 시장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가게를 뜻하는 시전(市典)의 거리로서 시장도 역시 물리적 장소와 결부된 개념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이래 경제학이나 경제철학에서 시장은 더 이상 이런 물리적 장소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비록 일상적인 의미에서 ‘정기적인 상품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시장은 여전히 물리적 장소의 흔적을 갖고 있으나, 경제학적으로 “시장은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 및 수량을 확정하기 위해 구매자와 판매자가 서로 관계 맺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점에서 경제학적으로 시장은 물리적인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거래 관계를 맺게 해주는 모든 메커니즘을 통칭한다.
특히 시장과 사적 소유의 진화와 확장을 자유의 확대로 간주하는 신자 유주의 교리가 현실적인 경제정책으로 채택된 1973년 이래 외환․금융 ․증권 시장의 지구화는 물리적인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시장의 진화와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외환․금융․증권은 물리적인 특정 공간이 아니라 통신과 인터넷을 이용한 사이버스페이스 내지 디지털스페이스에서 거래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거래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 모기지(Mortgage)채권의 증권화, 곧 모기지 채권에 기반한 증권의 발행 및 이의 금융시장으로의 편입은 신자유주의적 시장 확대의 정점을 이루었다. 더구나 당시 미국부시정부의 저이자율정책으로 인해 주택담보대출 및 주택수요는 급속히 팽창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주택가격의 급속한 상승 및 거품이 조장되었다. 매년 두 자리수 이상으로 상승하는 주택가격과 저이자율로 인해 미국의 부자뿐만 아니라 저소득층도 매년 주택담보대출을 늘려서 부족한 노동소득을 보전하여 소비를 확대할 수 있었다. 이는 거시경제적으로 노동소득의 정체와 하락으로 인한 내수부족을 보전하면서 경기침체와 공황을 지연시키는 메커니즘이기도 했다. 하지만 원유가격상승 및 인플레압력에 대응하여 미국 부시정부가 2006년 이후 이자율을 상승시키자, 주택시장거품은 일거에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모기지채권의 증권에 투자하고 투기한 국제 투자은행 및 금융자본의 동반몰락을 초래하면서 글로벌금융시장 및 실물경제에도 가공할 충격을 주었다.
이제 신자유주의자들조차 ‘신자유주의는 끝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 었다. 신자유주의의 지휘자였던 미국의 공화당이 민주당에 패퇴하여 오바마정부가 들어선 데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글로벌시장의 파국이 크게 작용했다. 미국의 오바마정부는 신자유주의인 부시정부와 달리 케인스주의적인 전통을 부활시켜 사회복지확충, 은행 및 거대자본의 국유화 및 녹색뉴딜을 주창하고 있다. 이렇듯 신자유주의 글로벌시장화와 신자유주의 사상은 미국에서조차 위기에 봉착하면서 대안적 정책을 촉발할 뿐만 아니라 대안경제모델에 대한 경제철학적 탐색과 논쟁을 광범하게 촉발하고 있다.
이 글은 이처럼 현재 위기에 직면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사상적 뿌 리를 이루는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의 한계를 살펴보고,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및 대안을 담고 있는 판 빠레이스(Van Parijs)의 실질적 자유지상주의와 비판적으로 대결함으로써 새로운 대안경제의 비전과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한다.
2.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철학으로의 전환
1) 신자유주의의 여러 조류
끊임없이 논란이 되긴 하지만, ‘신자유주의(Neoliberalismus, neoliberalism)’ 라는 새로운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대체로 다섯 가지 흐름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첫째는 하이에크에 의해 집대성되는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는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자로 불리는 오이켄(Eucken) 등의 프라이부르크학파 경제사상이다. 셋째는 밀턴 프리드만(Friedman)에 의해 대표되는 시카고학파의 통화주의(Monetarism) 경제사상이다. 넷째는 루카스(Lucas) 등의 합리적 기대론(Rational Expectation Theory)이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부캐넌(Buchanan) 등의 공공선택이론(Public Choice Theory)라 할 수 있다(이상헌, 1996: 13-34).
이들 다섯 가지 새로운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세계대공황을 ‘시장의 실패’ 로 보는 케인스주의의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한다는 점에서 시장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로크 등의 고전적 자유주의나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와 다르다.
이 다섯 가지 흐름 중에서 철학 및 법학․자유주의 정치이론 등과 경제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결부시킨 흐름은 하이에크의 ‘새로운 경제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하이에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2)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하이에크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자였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하이에크 초기의 경기변동론이 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그의 화폐적 경기변동론은 호황의 종말에 노동력 및 화폐 등 유동자본이 부족해지면서 이자율이 상승하여 새로 만들어진 공장에서 이윤을 뽑아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맑스로부터 맑스의 영향을 받은 투간-바라노프스키, 카셀, 슈피토프, 로버트슨으로 이어진 전통에 맞닿아 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Hayek, 1941: 425-426). 이러한 테제는 자본주의의 시장을 정태적이고 완전한 균형상태가 아니라 동태적인 진화과정으로 보는 그의 후기 경제사상으로 이어진다.
(1) 신고전파와 사회주의의 시장개념에 대한 비판
후기 하이에크의 경제사상은 신고전파 특히 왈라스(Walras)의 일반균 형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왈라스의 일반균형론은 기술과 시장상황에 대한 모든 정보가 알려져 있으며, 각각의 경제주체는 이처럼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이기적․합리적 인간이라는 점을 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완전경쟁이 이루어지는 이상적 시장은 사회 전체적으로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는 최적의 경제상태(일반균형)에 도달하게 된다고 본다. 이 일반균형은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는 만큼, 변동의 가능성을 갖지 않는 정태적인 최적상태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당시 시장에 대해 사전적으로 완전한 계산이 가능하 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는 랑에(Lange) 등의 시장사회주의도 왈라스의 일반균형론과 동일한 시장관에 입각해 있다. 왈라스의 일반균형론에서는 시장기능을 대표하는 경매인이 일정한 가격에서 수요량과 공급량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요량과 공급량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경매인은 가격을 조정하여 수요량과 공급량의 일치하는 균형상태를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랑에는 이러한 경매인의 역할을 계획당국이 담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계획을 통해 조정된 시장사회주의는 최적의 경제적 균형을 보장하는 경제체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이 점에서 계획을 기축으로 하는 사회주의는 극단적 시장중심주의인 신고전파의 자유주의와 완전한 정보와 지식이 가능하다는 가정을 공유하고 있다.
(2) 경쟁이라는 발견절차에 의한 자생적 질서: 새로운 동학적 시장중심주의
하이에크는 멩어(Menger)에서 미제스(Mises)를 거쳐 자신에게 이르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전통을 집대성한 이론가이다. 왈라스와 더불어 신고전파의 대표자로 꼽히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창시자 멩어는 완전한 정보에 입각한 시장이 가능하지 않다고 봄으로써, 왈라스의 일반균형 테제를 부정한다. 오스트리아학파인 하이에크는 이러한 멩어의 완전한 정보의 불가능성 테제를 수용한다. 오스트리아학파에 따르면 인간은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물을 해석하는 데서도 철저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 인식과 불완전 정보로 인해 시장은 균형가격을 낳지 못한다. 이렇듯 오스트리아학파는 개인들의 주관적 인식과 정보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특정한 방법론적 개인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한다. 미제스는 멩어의 이러한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전승하여 1940년에 국민경제. 행위 및 경제의 이론(Nationalökonomie. Theorie des Handelns und Wirtschaftens)에서 연역적인 인간행위론을 발전시켰다. 미제스에 따르면, 불완전한 정보에 입각한 인간행위와 시장은 개인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을 수정해 나가는 ‘발견절차’의 과정이다(Besters, 1986: 107-122).
그런데 개인들의 지식 및 가격체계로서 시장이 이처럼 불완전하다면, 시 장중심주의는 이론적으로 폐기되거나 아니면 그 불완전성이 동학적으로 해소될 수 있음을 밝혀야 한다. 미제스의 제자인 하이에크는 이러한 ‘발견절차’ 개념을 수용하고 이를 ‘경쟁’ 개념과 결합시킴으로써 새롭게 동학적인 시장중심주의를 정초한다.
하이에크는 현실시장에서 개인들은 수요와 공급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가지지 못한다고 본다. 따라서 왈라스적 일반균형이나 파레토최적은 즉각 달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균형이 형성되지 않아도 개인들은 시장에서 교환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판단을 수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단히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경쟁은 새로운 인식적 기능을 갖는다. 첫째, 경쟁을 통해서 개인들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했으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둘째, 경쟁 속에서 개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들도 알게 되고 만들어 낼 수 있다. 셋째, 시장에서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경쟁을 통해 공급자는 수요자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하며 때때로 실패하더라도 결국 수요자의 취향을 알게 되고, 이런 경로를 통해 개별적인 지식이 체제전체로 파급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발견절차인 경쟁을 통해 시장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이지, 정태적인 균형의 보증자가 아니라는 것이다(Hayek, 1978).
하이에크는 이러한 경쟁의 장으로서 시장을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의 한 형태로 본다. 자생적 질서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수단 을 갖고 자기들의 목표를 추구한다. 이 자생적 질서는 누구에게도 특권을 허용하지 않으며 보편타당한 추상적 규율을 따르는 질서이다. 여기서 추상적인 규율은 문화적인 진화의 산물이지 완전한 이성이나 의도의 산물이 아니다. 그는 이성 자체도 자생적 질서와 더불어 발전되어 왔으며 여러 세대동안 전승되고 보존되어 온 것이라고 본다. 어떤 집단의 추상적인 규율이 다른 집단의 것보다 성공적이면 다른 집단은 퇴출되거나 그 성공적인 규율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처럼 최상의 규율은 끊임없이 자연적인 진화를 통해 관철되어 왔다는 것이다. 시장이 이처럼 자연적인 자생적 질서의 한 형태라는 하이에크의 주장은 시장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시장의 진화적 우월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차원의 시장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의 불완전하면서도 진화론적이고 역동적인 시장은, 한편으로는 실업을 낳는 시장의 불완전성에 대한 케인스(Keynes)의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은 끊임없는 경쟁 내지 발견절차를 통해 진화한다고 함으로써, 시장이 국가의 경제개입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새로운 차원에서 정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자의 측면에서 하이에크는 고전파와 신고전파의 시장중심주의를 오히려 확장한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중앙은행을 폐지하고 사적 은행이 화폐를 발행하도록 하자고 주장함으로써, 고전파와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화폐(공급)의 완전한 자본주의적 시장화를 새롭게 제기하였다. 이는 화폐공급 및 화폐정책으로까지 자본주의적 시장을 확장하는 극단적인 시장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Hayek, 1976: 79 이하).
이러한 자생적 질서와 대척점을 이루는 개념은 ‘조직(organization)’ 또 는 계획된 구체적 질서이다. 하지만 “누구도 복잡한 사회의 모든 활동들을 의도적으로 조정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 어느 정도 복잡한 사회에서 완전한 계획이란 없다.”(Hayek, 1981: 6)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에 직면하게 될 특수한 사실들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Hayek, 앞의 글: 9) 따라서 조직 내지 구체적 질서는 “조직자가 자신이 갖고 있지 않는 지식을 사용하는 데 개인들이 협동하도록 원하게 만드는”(Hayek, 앞의 글: 6) 근본적인 문제점을 갖는다. 이는 “다양한 정신들을 활용하도록 하지 못하며 대신에 모두가 하나의 정신에 의존하도록 할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복잡하기보다는 매우 야만적일 것이다.”(Hayek, 앞의 곳) 그에 따르면 이 계획의 방법은 직접적인 명령의 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Hayek, 앞의 글: 7).
이에 반해, 추상적인 규율로서의 자생적 질서는 “특정 개인에게 특정 지 위를 할당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개인들이 스스로의 자리를 창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Hayek, 앞의 곳) 이러한 주장을 통해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의 한 형태로서 시장이 개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가능케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때 하이에크에게 자유란 학문의 자유나 거주이전의 자유 등 적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강압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소극적인 자유이다. 이 소극적 자유란 법에 의한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며 확정적인 규율 외에 어떠한 강압(coercion)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Hayek, 2005: 58).
(3) 강압과 자유: 국가와 법의 역할
이 때 “강압(coercion)이란 어떤 사람의 행위가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타인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의지에 복종하여 이루어질 때 발생한다.” (Hayek, 1960: 133) 하이에크에 따르면 이러한 강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강압을 당하는 자에게 강압이 가해지지 않았을 경우 다른 대안적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자유란 바로 이러한 강압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강압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coercion)라는 개념은 무언가를 향한 자유로서의 긍정적인 자유 개념과는 달리 부정적인(negative) 자유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강압으로부터의 자유는 ‘내가 나의 주인(self- ownership)’이라는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포함한다(Hayek, 1960: 137). 그리고 하이에크에 따르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자유라는 개념은 자유를 부(wealth)와 혼동하는 것이다(Hayek, 1960: 137). 이처럼 자유를 형식적인 자유로 한정할 때, 기아의 위협으로 저임금의 불쾌한 직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더라도 그 직업을 내 스스로 선택하였다면 나는 누구로부터도 강압을 받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니다(앞의 곳).
하이에크가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강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압이 없는 상태로서의 자유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질서가 필요하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최소한의 질서로 추상적이며 보편타당하며 확정적인 ‘법의 규율(rule of law)’을 제시한다. 여기서 보편타당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확정적이라는 것은 불변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보편타당한 법의 규율은, 자유의 안전을 위해 누구에게나 강제되는 권리구조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이에크의 부정적 자유 개념은 앞에서 살펴 본 ‘자신에 대한 소유권’과 더불어 ‘보편타당한 강제적 권리구조(enforced structure of rights)’라는 형식적 자유의 두 가지 요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성인이 해모위를 참조하여 지적하듯이 이러한 보편타당성과 확정성은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진다. 예를 들어 “보통법(common law) 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영미에 있어서도 강간죄는 남성에게만 적용된다. 따라서 모든 이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만이 진정한 법이라면 강간은 처벌할 수 없다. 이것이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더 보장하는 방법은 아니다.”(전성인, 1998: 75) 뿐만 아니라 확정된 법이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이에크 자신이 강조하듯이 인간의 지식은 불완전하고 주관적이다. 따라서 특정한 법에 의해 금지된 행위의 목록 역시 발견절차에 의해 수정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법의 확정성은 하이에크의 체계 내에서 자기모순적이다(전성인, 앞의 글: 76). 나아가 자생적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어떤 법의 규율이 필요한지 알아야만 하는데, 이는 인간의 지식 의 불완전성이라는 하이에크의 자신의 테제와 모순된다는 브로드벡(Brodbeck)의 비판도 일리가 있다(wikipedia.de, ‘Friedrich August von Hayek’: 6).
어쨌든 하이에크는 법의 규율을 시장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한다는 점에 서 흔히 생각하듯이 무정부주의적인 극단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법의 규율에 따라 국가가 소유권의 보호, 사법적 질서의 유지 및 사회구성원들 간의 갈등 조정, 국방, 시장낙오자에 대한 최소한의 복지 기능을 떠맡아야 한다고 본다(Hayek, 1979: 54). 이 점에서 하이에크는 지나치게 나아간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보다 자유주의에 해악을 끼친 것은 없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앞의 곳). 이처럼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의 한 형태인 시장은 최소한의 인위적 질서 및 이를 가능케 하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적인 극단적인 자유주의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그는 오히려 어떤 국가적 제한도 없는 순수한 민주주의나 시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는 억압적인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이에크의 ‘법의 규율’은 가격기제, 자유경쟁, 소유권 등 시장기제의 핵심적 제도가 작동하기 위한 정부의 필수적인 기능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의 규율은 민주적이며 자유로운 공론화 등을 거부하고 법률만능주의적인 ‘작지만 강력한 정부’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조철주, 1999: 35).
시장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기제라고 주장하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적 시장중심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앞에서 보았던 것 외에도 많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내시의 게임이론에서 제시된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에 입각하여 시장의 한계를 논증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두 공범자 A와 B가 있는데, 공범자 A가 범죄사실을 고백하고 다른 공범자 B가 범죄사실을 부인할 경우 A는 석방되고 B는 5년형을 받는다. 그리고 A와 B가 모두 범죄사실을 고백하면 A와 B는 각각 3년형을 받는다. 또 A와 B가 모두 범죄사실을 부인하면 각각 1년형을 받는다. 이 경우 A, B 각자의 입장에서 최대의 이익이 되는 것은 범죄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각자의 최대이익을 쫒아서 A, B 모두가 범죄사실을 고백하면 A와 B는 합쳐서 6년형을 받는다. 그리고 이 결과는 A와 B 모두가 범죄사실을 부인할 경우 받게 되는 합계 2년형에 비해 A, B의 집단뿐만 아니라 각자에게도 명백히 손해이다. 이처럼 개인이익의 최대화가 사회전체 이익의 최소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은 개인이익의 최대화에 입각한 시장중심주의가 사회 전체적으로는 최대의 이익이 아니라 최소의 이익이나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김세균, 1996: 78-82; 이용주, 1999: 191 참조).
또 국가역할의 확대를 주장하는 올슨(Olson)의 말대로 무임승차의 가능 성이 크게 증대한 현대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국가와 같은 외부적 권위체계를 통한 강제적인 문제해결의 필요성이 커진다는 논증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박근거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방의 혜택이나 공해문제의 해결을 통한 혜택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가지만, 개인은 이를 위한 조세부담을 회피하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같은 권위체계의 기능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김세균, 앞의 글: 82-83에서 재인용).
이러한 비판 외에도, 신자유주의는 임노동을 내포한 자본주의적 상품시장 을 단순상품시장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는 점(김세균, 앞의 글: 84), 시장은 자유로운 경쟁의 장이라기보다는 자본의 힘에 따른 불평등 거래를 강제하는 장이며 독과점체제를 조장한다는 점(이용주, 1999: 190), 나아가 시장중심주의는 사회성원의 양극화를 촉진하며 빈부격차를 확대한다는 점(이용주, 앞의 글: 192-194) 등도 신자유주의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비판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은 윤리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신자유주의보다 우월할 때만 실현 및 지속 가능할 것이다. 판 빠레이스가 지적하듯이, 그러한 대안만이 이론적으로 고찰할 가치가 있다(Van der Veen/Van Parijs, 2006a: 3).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자유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윤리적․경제적으로 이보다 우월한 새로운 대안경제모델을 논증하는 판 빠레이스의 시도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3. 판 빠레이스의 실질적 자유지상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새로운 비판과 대안
하이에크에 대한 판 빠레이스의 비판은 사회주의와 케인스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하는 ‘실질적 자유지상주의(Real-libertarianism)’라는 새로운 이론틀에 기초하여 전개된다는 점에서 새롭다. 나아가 그는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와 케인스주의 모두를 넘어서는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독창적이다.
1) 실질적 자유: 하이에크적인 자유 개념 넘어서기
판 빠레이스에 따르면, 하이에크의 자유 개념은 ‘형식적 자유(formal freedom)’만을 포착하고 ‘실질적 자유(real freedom)’는 배제하는 개념이다(Van Parijs, 앞의 책: 23). 앞서 보았듯이, ‘강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하이에크의 자유 개념은 (1) 안전을 위해 ‘보편적으로 강제되는 권리구조’(제도화된 법적 장치) (2)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라는 형식적 자유의 두 가지 요소들을 담고 있다.
판 빠레이스의 실질적 자유 개념은 이러한 자유의 이러한 형식적 요소 들을 배제하지 않는다(앞의 곳). 하지만 그는 하이에크와 달리 자유는 형식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유 개념을 확장한다. 판 빠레이스에 따를 때, 굶어죽거나 불결한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그 직업을 그만 둘 실질적 자유란 없다. 이러한 실질적 자유를 위해서는 기회(opportunity)라는 세 번째 요소들 자유 개념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이는 하이에크나 부캐넌과 달리, 자유에 긍정적인(positive)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앞의 책: 22).
여기서 실질적 자유의 개념은 센(Sen)의 접근법과 유사하다. 센에 따 르면, 자유는 우리가 높게 평가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real opportunity)와 관련이 있다. 그러면 기회란 무엇인가? 판 빠레이스에 따르면 실질적 자유의 핵심요소로서 기회란, “누군가 하고자 원할 수도 있는 것을 하는 것(to do whatever one might want to do)”을 의미한다(앞의 책: 23). 여기서 실질적 자유의 한 요소인 기회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할 수도 있는 것’으로 서술한 이유는 ‘원하는 것’이 독재자 등에 의해 조작될 수도 있어 이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기회의 개념은 무엇을 향한 자유(freedom to what)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판 빠레이스에 따르면,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라는 문제는 일찍이 근대에 들어 볼테르에 의해 답해진 바 있다. 볼테르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곳에 나의 자유가 있다”(Van Parijs, 1997: 18에서 재인용)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판 빠레이스는 선호(preference)가 타인이나 권력에 의해 조작될 수 있으므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음’을 ‘무엇을 향한 자유’에 대한 충분한 대답으로 간주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만족하게 된 노예(contented- slave)’라는 문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곧 볼테르의 정의에 따를 때 ‘만족하게 된 노예’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전제하는 자유 개념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또한 판 빠레이스는, ‘공공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거나 일반의지에 동의하는 등 각자가 해야만 하는(ought to do) 것을 방해 받지 않고 하는 것’을 자유로 정의한 루소(Rousseau)의 경우도 자의적인 규범적 기준에 입각하고 있으므로 이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자유를 ‘외부에 의해 부과되거나 조작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경우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특정 시점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은 그 이전에 원했던 것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과정은 무한 소급될 수 있고 과거에 원했던 것 중에 외부에 의해서 선호조작된 것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앞서 제기되었던 ‘만족하게 된 노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반해 판 빠레이스는 자유 또는 자유의 한 요소인 기회를 ‘누군가 원할 수도 있는 것을 하는 것’으로 규정하면, ‘만족하게 된 노예’가 자신의 노예상태에 불만을 가진 노예보다 더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Van Parijs, 1997: 18-20). 물론 이는 자유와 기회에 대한 불충분한 정의이고 따라서 보완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판 빠레이스도 스스로 인정한다(앞의 곳).
판 빠레이스는 이처럼 기회를 실질적 자유의 요소로 포함시킴으로써, 하 이에크처럼 강압만을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로 보는 견해를 거부한다(앞의 책: 23). 그러나 이는 하이에크의 자유 개념이 담고 있는 위의 두 가지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하며 여기에 기회라는 세 번째 요소를 자유의 개념에 추가함으로써 하이에크의 자유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앞의 곳).
그런데 이처럼 판 빠레이스까지 이르는 근대 이후의 개인의 선택권을 우선시하는 자유 개념도, 사회를 벗어난 개인의 자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 속의 개인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를 정의하는 문제는 ‘자유로운 사회’를 구상하는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판 빠레이스는 (실질적) 자유의 세 가지 요소로 제도적인 안전,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 누군가 원할 수도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와 연계된 ‘자유로운 사회’는 이 세 가지 요소를 필요조건으로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에 따라 ‘자유로운 사회’를 ‘성원들 모두가 가능한 한 실질적으로 자유로운 사회’라고 정의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로운 사회’란, (1) 강제된 권리구조를 갖추고 있으며(안전), (2) 각자 자기 자신을 소유하며(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 (3) 각자 자신이 원할 수도 있는 것을 할 기회를 가능한 한 최대로 갖는 사회(기회의 최소극대화(leximin, maximin))라고 한다(앞의 책: 25).
여기서 기회의 최소극대화란 롤스의 차등의 원리인 최소극대화 원리를 적 용한 것으로, 최소의 기회를 갖는 사람의 기회가 극대화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최약자의 기회 증가가 사회 전체 기회를 대폭 감소시킴으로써 최약자의 기회를 오히려 감소시키지 않는 한, 최약자의 기회는 더욱 증가하여야 한다. 이에 따르면 사회전체의 기회가 줄어들더라도 최약자의 기회는 증가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증가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판 빠레이스는, 좌파를 최소 수혜자의 이익에 응하는 입장으로 정의할 경우 자신의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는 이른바 ‘좌파 자유지상주의’보다 더 좌파적이며(앞의 책: 27) 롤스주의의 좌파적 변형이라고 한다(앞의 책: 232).
물론 롤스의 최소극대화원리를 거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만약 현재의 최소수혜자가 너무 많은 수혜를 받아 사회 전체의 몫을 크게 감소시키고 있어 결국 최소수혜자마저 더 적은 몫을 받게 되었다고 본다면, 현재 최소수혜자의 몫은 보다 감소되어야 하며 이는 조만간 사회 전체의 몫과 최소수혜자의 몫을 원래보다 증가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하이에크도 동의할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의 부자감세 및 사회복지 축소 정책은 이러한 신조에 기초한 것이다.
이처럼 판 빠레이스가 주창한 실질적 기회의 최소극대화는 하이에크의 형식적 자유와 달리 자유를 향유할 실질적 수단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소득은 자유를 향유할 실질적 수단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앞의 책: 30). 따라서 그의 논의는 최약자의 소득 최소극대화로 이어진다. 물론 지금까지 보았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의 소득 최소극대화 논의가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윤리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신자유주의보다 우월하며 지속가능함을 입증해야 한다(Van der Veen/Van Parijs, 2006a: 3).
2) 실질적 자유지상주의와 지속가능한 최대의 기본소득
앞에서 보았듯이 하이에크와 부캐넌은 자유를 원래의 좁은 의미(강압으 로부터의 자유)에 국한한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자유를 힘이나 능력과 결부시키는 경우에는, 자유를 부(wealth)나 예산묶음과 혼동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판 빠레이스는 오히려 하이에크와 부캐넌의 자유 개념은 형식적인 자유만을 포착한다고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할 수도 있는 것을 하는 수단을 갖는 정도에 따라 실질적으로(really)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Van Parijs, 1997: 32-33). 그러므로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 내지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는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것과 병행하여 최저소득을 가능한 한 극대화시키는 구매력의 최소극대화를 요청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이 주장하는 실질적 자유가 단지 사람들이 소비하기를 원할 수도 있는 재화의 다양한 묶음들 중에서 선택할 자유를 주창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원할 수도 있는 다양한 삶을 선택할 자유를 주창하는 것이라고 한다(앞의 책: 33). 그에 따르면,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은 사실상 강제노동에 속박된 기존의 노동중심 패러다임을 전복하여 각자에게 보다 원하는 삶과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경제적 조건으로 작동하게 되며 사회 전체성원들의 자유시간을 크게 증가시키고 자유시간의 질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기존의 강제노동 패러다임을 자유시간과 향유 중심의 삶의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Van der Veen / Van Parijs, 2006a: 13 이하).
이를 위해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안전 및 자신에 대한 소유권 보장과 더불어 최대의 무조건적인 소득”(앞의 곳) 곧 롤스의 최소극대화 원칙에 따라 ‘지속가능한 최대의 무조건적인 기본소득(basic income)’을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추가로 지급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서 ‘무조건적’의 의미는 자산이나 소득에 대한 심사 없이 모두에게 준다는 뜻이다. 이는 기존의 노동강제와 연계된 워크페어(workfare) 사회복지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혁신적인 기획이다. 이러한 ‘무조건성’이 기존의 워크페어에 비해 갖는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심사과정에 소요되는 인건비와 사무실 유지비를 포함한 막대한 관리비가 절감된다. 그리고 심사과정이 폐지되어 사회적으로 막대한 시간이 절약되고 사회성원들의 자유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또한 수혜자에 대한 자기 자신과 타인에 의한 낙인효과가 사라진다. 그리고 빈곤과 복지사각지대를 완전히 근절하게 된다.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이에 대해 이해관계를 갖게 되고, 손쉽게 자신의 유․불리를 따져볼 수 있다. 따라서 압도적인 다수에게 유리한 모델로 설계될 경우 빠른 시간 내에 사회 다수 성원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그만큼 실현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실질적 자유와 관련시켜 본다면, 사용처를 묻지 않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노동의무나 노동강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를 획기적으로 증대시켜 줄 수 있다. 또한 다른 소득에 더해져 추가로 누구에게나 지급되기 때문에, 실업자나 노동능력상실자에 특혜를 주는 기존의 워크페어복지와 비해 임노동자의 노동유인을 감퇴시킬 가능성이 낮으며 오히려 경제적 안정망으로 작동하여 각자 보다 원하는 노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시간당 노동생산력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앞의 책: 35-38; Vanderborght/Van Parijs, 2005: 46-51).
그리고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다른 논자들과 마찬가지로 판 빠레이스는 기본소득은 현금으로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현물지급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기존의 연금, 실업급여, 기초생활보장급여 등 현금지급형 사회복지는 단일의 현금급여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보편재인 주택․국방․교육․의료․보육․학교급식․맑은 공기․깨끗한 도로 등은 지금보다 더욱 확대된 무상의 현물로 지급할 것을 주장한다(Van Parijs, 1997: 42-45; Vanderborght/Van Parijs, 2005: 37-38). 이는 사회성원들이 합의한 보편재의 경우 굳이 현금을 지급하고 이를 다시 현금으로 구매하는 이중의 낭비적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실질적 자유를 위한 수단으로서 판 빠레이스의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은 사유화를 통해 시장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하이에크 등의 신자유주의와 대비된다. 나아가 그는 무조건적인 기본소득만으로는 실질적 기회의 최소극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장애유무 등 내적․외적 천부의 차이로 인해 실질적 자유를 향한 기회는 불평등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액커만(Ackerman)이 내적 천부에 대해 적용한 ‘비우월적 다양성(undominated diversity)’ 원칙을 확장하여, 비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제외한 사회성원 모두가 잠재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열악하다고 볼 수도 있는 내적․외적 천부의 소유자(예를 들면 장애인)에게는 기본소득과 별도로 자유를 향유할 실질적 기회를 최소극대화 원리에 따라 누릴 수 있도록 현금 및 현물로 목적성 급여(targeted transfer)가 차별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본다(Van Parijs, 1997: 60, 73, 77 및 84). 이렇듯 빠레이스가 주창하는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은 내외적 천부의 진정한 비우월적 다양성(및 잠재적인 선망부재envy-freeness)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비우월적 다양성을 위해 차별적인 목적성 급여가 상대적으로 많이 필요한 나라에서는 사회복지의 재원이 일정할 경우 기본소득의 재원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사회․문화적 평등지수를 높여 사전적인 비우월적 다양성을 확장한다면, 차별적인 목적성 급여와 기본소득은 상쇄적인 관계에서 상생적인 관계로 전환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전에 정치․사회․문화적 차원을 포함한 비우월적 다양성이 클수록 기본소득의 재원은 상대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앞의 책: 84). 뿐만 아니라 세원을 추가로 발굴하여 현금+현물로 이루어진 ‘차별적인 목적성 급여+기본소득’의 전체 재원을 획기적으로 증대할 수 있다면, 선별적인 목적성 급여와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은 더욱더 상쇄적인 모순관계를 벗어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획기적인 추가적 세원발굴이 핵심적인 관건이다. 판 빠레이스는 선망 받는 고소득직업이 각자 노력의 대가라기보다는 교육환경이나 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소질 및 부 등 외적 천부에 의해 획득된 특권적인 재산이며 이는 고용지대를 낳는다고 본다. 따라서 이에 대해 고율의 고용지대세를 부과함으로써 기본소득의 재원을 획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선별적인 목적성 급여와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의 상쇄적 악순환은 극복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앞의 책: 113-125).
그에 따르면, 이러한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의 발상은 자유지상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와도 연계성이 높으며, 최근의 ‘녹색’ 및 삶의 질․자기실현 ․친밀관계보존 등을 지향하는 ‘대안운동’과도 조화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 과거 과학적 사회주의 및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핵심요소들을 가장 간단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Van Parijs, 1997: 33). 따 라서 그만큼 다수의 정치세력으로터 연대를 이끌어낼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획의 경제적 우월성과 지속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판 빠레이스는 무조건적 기본소득이 지나치게 높을 경우 현재 사회의 부를 탕진하여 미래의 경제적 몰락을 초래할 수 있음을 감안하여 지속가능한 수준에서 지급액이 결정되어야 한다고 본다(Van Parijs, 1997: 38). 따라서 그는 실질적 자유의 한 요소로서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지속가능한 최대의 기본소득’으로 정교화 한다(앞의 책: 39). 그리고 각 나라의 부와 인구 상황 등에 따라 기본소득의 연령별 지급규모는 차별적일 수 있다고 본다(앞의 책: 39). 예를 들어 노령층에 대해서는 연금 이상의 금액을 지급해야 하지만, 어린 세대에게 지급되는 규모는 출산율과 인구증가율에 반비례하여 이루어 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앞의 곳). 기본소득의 경제적 우월성에 대해서는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자에게 지급되는 기존의 복지체계에 비해 노동유인 감퇴효과가 적어 현재보다 노동인구가 늘어나며 이로 인해 노동자들 각자의 세부담이 줄어들거나 기본소득의 재원이 될 세입이 증가할 것이고(Van der Veen/Van Parijs, 2006a: 11), 보다 원하는 노동을 선택할 수 있으므로 시간당 노동생산력이 급증하여 국내총생산이 증가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앞의 글: 12-13). 그리고 기본소득은 부모의 재산이나 각종 외적 천부에서 비롯되는 지대(판 빠레이스는 고소득직업도 지대를 낳는 외적 천부의 재산으로 간주한다) 소득에 대한 조세를 재원으로 하여 대다수 사회성원들의 실질소득을 증가시키는 방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Van Parijs, 1997: 89-131). 따라서 판 빠레이스가 구체적으로 지적하진 않았지만, 고소득층의 소비는 다소 줄더라도, 소비성향이 상대적으로 높은 저소득층의 소비는 급증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그리하여 민간소비가 전체적으로 증가하여 생산이 확대됨으로써 추가적으로 국내생산이 증가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을 추가로 받게 되는 노동자들은 기존의 잔업 등 장시간노동에 자발적으로 속박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경제적 안정망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 각자의 노동시간이 급감할 것이며 이에 따라 일자리가 추가로 급증하게 되어 기존의 비자발적 실업자들을 상당부분 흡수함으로써 실업률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이는 국내총생산과 기본소득의 재원을 추가로 증가시키는 요인이다(Vanderborght/Van Parijs, 2005: 74-80).
그런데 판 빠레이스는 이러한 실질적 자유의 일부를 이루는 무조건적 기본소득이 최적사회주의보다는 최적자본주의에서 더 잘 실현될 수 있으며 더욱 더 지속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최적사회주의가 실현된다 하더라도 자본 및 고급노동자가 유출될 뿐만 아니라 경쟁이 크게 완화되어 기술혁신과 경제성장이 둔화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다시 중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을 제약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n Parijs, 1997: 214-226). 그리하여 이러한 최적사회주의는 기존의 신자유주의로 인한 불평등의 확대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지만,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은 최적자본주의에서 보다 실현가능성이 높다고 진단 한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불평등의 확대로 국한하지 않는다. 그는 신자 유주의가 자본주의에 고유한 문제인 시장의 실패․범죄증가로 인한 낭비적인 활동․과소소비로 인한 공황․실업 등 경제적인 낭비를 극대화하는 경제체제라고 본다. 그렇다고 케인스주의적인 노사 협조주의적인(corporative) 복지국가모델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사 협조적인 복지국가모델은 노동특권층의 권리와 임금상승압력을 높여 이윤압박(profit-squeeze)에서 오는 과잉생산공황을 야기하는 한계를 갖는다. 최적자본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에 고유한 문제를 최대한 극복하며 실질적 자유 및 지속가능한 최대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체제이다. 판 빠레이스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케인스주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최적자본주의로, 웨이츠만(Weitzman)의 ‘지분배당경제(share economy)’와 충분한 기본소득을 포함하는 미드(Meade)의 파트너십 경제모델인 ‘아가토토피아(Agathotopia)’를 결합한 모델을 제시한다(앞의 책: 206). 웨이츠만의 지분배당경제는 노동자들이 고정된 임금을 받지 않고 기업의 이윤이나 수익 중 일정 비율을 배당받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더 많이 공급할 수 있다. 고정임금으로 인해 공황 시 파산에 처할 위험이 크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커다란 경제적 낭비인 실업은 거의 근절된다(앞의 책: 205). 그리고 미드의 아가토토피아의 세계에서는 충분한 기본소득이 보장된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고정급이 아니라 일정비율의 배당금을 받는 웨이츠만의 지분배당 시스템을 쉽게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앞의 책: 206). 반면에 웨이츠만의 지분배당 시스템으로 인한 고용증가는 경제성장을 유도하여 기본소득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판 빠레이스는, 웨이츠만의 ‘지분배당경제’와 미드의 ‘아가토토피아’의 결합은 상생적으로 작용하면서 신자유주의로 인해 극대화된 대부분의 경제적 낭비와 실패를 상당부분 해결하면서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 및 실질적 자유를 뒷받침하는 최적의 경제적 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제이(Jay)가 제안한 대로 ‘노동자들의’ 1인 1표 결정권을 체현하는 협동조합을 촉진하는 효과를 갖는다고 한다(앞의 책: 210). 이러한 협동조합의 장점은 파업으로 초래되는 경제적 낭비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앞의 책: 209). 이러한 협동조합은 사적으로 소유되며, 이윤동기에 의해 운영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인 기업이라고 할 수 없으며 여전히 자본주의의 경계 내에 있는 기업이다. 판 빠레이스는 이렇듯 ‘지분배당경제+충분한 기본소득의 아가토토피아+노동자들의 협동조합’이 상생적으로 결합한 최적자본주의는 모두가 자유를 누릴 실질적 수단으로서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을 가능케 해 줄 것이라고 본다(앞의 책: 210). 그리고 자본주의의 정당화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극대화된 자본주의의 폐해가 최소화되고 모두들 위한 실질적 자유가 보장되는 이러한 ‘최적자본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앞의 책: 233).
그런데 판 빠레이스는 금융투기소득․금융공황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 의 결정적인 한계를 간과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기술혁신과 경제성과가 뒤떨어지는 사회라고 단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기본소득 및 노동소득 증액을 위한 재원으로 전환한다면 이 새로운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는 ‘최적자본주의보’다 우월한 기술혁신 및 경제성과를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자본주의에서 이자․배당․지대 등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증권양도차익․환차익․부동산 양도차익 및 평가차익 등 투기소득은 가처분 국내생산의 60%-7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이자․배당․지대는 약 40%를 차지한다. 하지만 투기소득은 국내총생산 통계에 계상되지 않으므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명칭과 성격이 변경되겠지만 이 부분은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에서도 여전히 산출된 경제성과로 남게 된다.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60-70%의 국내생산 중 50% 정도를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10 -20%는 실질 노동소득을 증가시키는 데 전용할 수 있다. 그러면 새로운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에서는 노동소득도 자본주의에서보다 증가한다. 따라서 노동유인과 경제성과는 자본주의에서보다 훨씬 높게 유지될 수도 있다(곽노완, 2007: 205-212).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소득+이자․배당․지대+투기소득+공적부조>를 새로운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 분배모델인 <노동소득(+α)+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으로 대체함으로써 노동유인 및 경제성과가 확대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인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의 완전한 환수를 전제로 하는 이 모델은 생산수단 및 토지의 완전한 공유로의 전환을 내포한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현대자본주의보다 우월할지라도 레드콤플렉스 및 현실사회주의의 트라우마 등을 고려할 때, 당장 정치적 실현가능성이 낮을 수 있다. 이를 고려하여 이행적 모델로 <노동소득+이자․배당․지대(-α)+투기소득(-β)+기본소득(α+β+기존의 공적부조)>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판 빠레이스가 생각하는 ‘최적자본주의’에서 특히 투기소득의 비율은 크게 감소하지 않으며 실질 노동소득은 떨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선망 받는 고소득직업을 지대를 낳는 재산으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고율과세를 통해 기본소득 재원의 대부분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며 자본주의적 투기소득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 빠레이스가 구상한 ‘최적자본주의’에서도 투기소득은 극대화되며, 노동소득은 지분배당경제에 따라 기존 배당소득의 일부를 포함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고율의 고용지대세로 인해 현재보다 감소할 수도 있다. 이러한 판 빠레이스의 최적자본주의에서 소득은 결국 <노동소득(-α)+이자․배당․지대(-β)+투기소득+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α+β+기존의 공적부조)>으로 분할될 가능성이 있다. 노동소득의 감퇴를 초래할 수도 있는 이 모델은, 노동소득증가+기본소득을 담고 있는 새로운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 모델이나 이행적 모델에 비해 노동유인과 경제성과가 낮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새로운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가 ‘최적자본주의’보다 오 히려 경제적으로 우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지구화시대의 투기소득 구조를 분석하면 쉽게 도출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아직은 가능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판 빠레이스는 신자유주의의 주요한 특성인 금융투기소득․금융공황을 간과함으로써,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가 ‘최적자본주의’보다 경제성과에서 열등할 것이라는 거꾸로의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4. 나가며
지금까지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및 이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담고 있 는 판 빠레이스의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를 살펴보았다. ‘최적자본주의’를 가장 우월하며 지속가능성이 높은 대안으로 보는 데서 무리한 추론을 전개하고는 있지만, 판 빠레이스의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는 자유 개념을 실질적 자유로까지 확장하여 기본소득이라는 구체적인 경제정의를 자유의 개념과 결합시킴으로써, 하이에크의 형식적 자유 개념을 넘어서고 있다. 나아가 그는 실질적 자유지상주의라는 새로운 이론틀을 정초하고 이에 기초해 지속가능한 대안경제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대안경제체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따라서 향후 ‘최적자본주의’ 및 ‘최적의 사회주의 내지 코뮌주의’ 등과 관련된 논의는 그의 연구성과에 기초해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향후 논의전개를 위한 첫걸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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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tschaftsphilosophie des Neoliberalismus und Reallibertärianismus
Kwack, No-wan
[Abstract]
Hayek als der prominenteste Vertreter des Neoliberalismus betrachtet den Markt als den evolvierenden Mechanismus. In dieser Hinsicht hat Hayek den dynamischen Marktzentrismus neu rekonstruiert. Demgegeüber formuliert Van Parijs den Reallibertärianismus und den Realfreiheitsbegriff als die Kritik an Hayek. Die Realfreiheit solle das Mittel zur Freiheit enthalten. Sofern geht der Realfreiheitsbegriff über den formalen Freiheitsbegriff von Hayek hinaus. Und er argumentiert für die Einführung des Grundeinkommens als das Mittel zur Realfreiheit. Der Optimalkapitalismus mit dem Grundeinkommen und der Weitzmanschen Dividendenwirtschaft sei die wirtschaftlich überlegene Alternative zum Neoliberalismus. Aber wenn wir die Maximierung des Spekulationseinkommens und die Minimierung des Arbeitsmotivs vom Kapitalismus berücksichtigen, dann lässt sich das Gegenargument schlußfolgern, dass der neue Optimalsozialismus bzw. Optimalkommunismus mit den Grundeinkommen und erhöhten Arbeitseinkommen wirtschaftlich noch überlegener als sein Optimalkapitalismus sein könne.
Key words: Neoliberalismus, Reallibertärianismus, Grundeinkommen, Hayek, Van Parijs
논문접수일:2009년 7월 26일 논문심사일: 2009년 8월 5일 게재확정일: 2009년 9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