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조금은 놀란 목소리로- 사실은 그의 말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시 말을 하는 쓸데없고도 비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에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른해, 아니면 우울해. 둘 중 하나겠군.
도시 속에 세워져있는 낡은 아파트의 5층에 그의 방은 자리잡고 있었다. 발코니와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방문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파트 아래쪽에 나 있는 4차선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매우 잘 보였다. 나와 그는 그 발코니에 몸을 기댄 채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시작했던 '매우 일상적인' 대화는 어느샌가 끊겨버렸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 따위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방에 놓여진 대형 구식 컴포넌트에 달린 CDP -그런 고물 컴포넌트에 CDP가 달려있다는 사실이 신가하기도 하다- 에서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노래가 무한히 반복되고 있었다.
"those old melodies, still sound so good to me, as they melt the years away..."
'카펜터즈'였던가, 'Yesterday Once More'라는 곡을 부른 그룹이. 맞다. 지금 그의 컴포넌트 스피커에서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는 바로 그 곡이었다. 그의 집을, 그의 방을 찾아올 때는 언제나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가 듣는 곡은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조금뿐이다. 지금이야 따사롭지만 30분전만 해도 녹을 것처럼 느껴지던 햇빛을 한몸에 받으며 서 있던 그는 아직도 장초를 아무생각 없이 휙 하고 던져버렸다. 휘리릭 하는 작은 의성어가 내 귀를 가르고, 담배는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4차선으로 날아갔다. 그는 담배를 던져버리고는 잠시 라이터를 매만지다가 -그의 라이터는 언젠가의 생일에 내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피식 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커피? 주스?"
"커피, 블랙으로."
벌써 몇 년째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해 주고 있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물어온다. 저 정도쯤 되면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에 다시 물어온다고 하기는 좀 그렇군. 사람이 아니고 오징어라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대답해주었으니까. 결국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의 질문에 '그거 말이야 그거, 언제나 그거잖아!' 라고 대답하는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질문할 때마다 친절하게 나의 기호를 인지시켜주게 되었다. 혼자 화를 내고 열을 내 봤자 다음 번에 또 물어볼 게 뻔하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 사라졌고 혼자 그의 방에 남은 나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Yesterday Once More'와 그의 방에 있는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조금 떨어진 그의 집 찬장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걸 알 수 있다.
"When I was Young, I listen to the radio waiting for my favorite songs...."
"여기."
어느 샌가 두 개의 커피잔을 들고 방안으로 다시 나타난 그는 그 특유의 투박한 검은색 커피잔을 나에게 내민다. 날이면 날마다 나의 기호를 친절하게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번거롭지만, 그가 끓여주는 커피는 상당히 향이 좋다. 블루 마운틴이라는 고급 커피인데, 매일 가난하게 살며 돈이 없다고 투덜대는 그의 처지에 비해 커피만은 지나치게 고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웃긴 것은 내가 블루 마운틴의 원두(原豆)를 사서 직접, 그것도 매우 정성스럽게 갈아서 커피를 끓여도 그가 끓여주는 커피 같은 맛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며 다시 시도해보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결국 그가 끓여주는 커피 맛을 나는 낼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응? 아, 커피 말이야."
"커피가 왜?"
"나는 왜 아무리 정성스럽게 끓여도 이런 맛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끓여주는 거잖아."
"........"
설마 했지만 저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요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그는 커피 대신에 들고 온 김이 펄펄 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렇게 피우다간 폐암으로 죽어."
"남이사."
그는 퉁명스레 대답하며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까 그 말, 무슨 뜻이야?"
"뭐? 아아... 우울하다는 얘기?"
"응."
'우울하다였군....'
"모르겠어."
".....너 말이야."
"응?"
"의미도 없는 말을 마구 내뱉어서 옆에 있는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지 말라고."
"왜 의미가 없어? 난 우울해. 정말로."
"이유도 모른다며?"
"그래. 하지만 우울해."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손을 들어 발코니 바깥쪽을 가리켰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그런 거겠지.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우울해. 아침에 CD를 걸어놓다 보니 CD에 흠집이 너무 많이 생겨서 우울해. 커피를 끓이다 보니 필터가 다 떨어진 것 같아서 우울해. 담배가 떨어져서 또 사러 나갈 걸 생각하니 우울해. 라이터 기름이 다...."
"됐어, 거기까지만 해."
들어주다간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적당한 선에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뭐야. 한마디로 일상의 작은 일들이 우울하게 만든다는 거야?"
"그렇지."
"하지만 좋은 일도 있잖아?"
"아... 그거야 그렇지. 오늘 아침에 기다리던 백업 CD가 도착했고, 내가 사놓은 주식이 상한가를 그리고 있으며, 전화로 언제나 시끄럽게 떠들던 관리실 아저씨가 오늘은 조용하고, 네가 찾아오는 덕분에 이야기할 상대가 생겼고..."
"또 됐어, 거기까지만 해."
다시 말을 잘라버렸다. 정말이지 이 남자는 단순하게 사는 건지 복잡하게 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리고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남자를 찾아온 건, 특히 오늘은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 아니었다고.
"편집장님이 원고 언제 줄거냐는데."
"아? 아... 원고. 완성됐어. 벌써."
"뭐? 그런데 왜 안가지고 왔어."
"......귀찮아서, 인가."
"......"
이 남자의 무기력증에는 정말로 할 말을 잃게 된다. 나는 순간 커피잔을 그 얼굴에 던져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이 남자가 집에서 시원하게 선풍기나 쐬고 음악이나 듣고 있을 때 나는 이 땡볕을 20분이나 걸어서 이 집에 왔는데. 하아... 정말이지.
"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미안해."
"그게 8년이나 알고 지낸 친구한테 할 소리야?"
"뭐 어때."
"....좋아, 일단 원고는 가지고 갈게."
"응... 어, 가려고?"
"안그래도 편집장님이 마감 지났다고 길길이 뛰고 난리인데. 원고가 이렇게 버젓이 다 되어있는 걸 아시면 무사하지 못할 걸."
"그건 내 얘기고 넌 상관없잖아."
"친구의 걱정을 그 따위로 무시하는 거야?"
"하지만, 우울한걸."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잠깐만 있어."
"....."
그의 눈빛을 보니 달리 거절할 만한 구실도 생각나지 않고, 나도 저 땡볕으로 다시 나가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는 탓에 나는 조금 더 여기에 있기로 했다. 어느새엔가 꽁초가 되어버린 담배를 비벼끄고 그는 내 앞의 작은 작업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네가 옆에 있으면 한가지가 좋아."
"뭐가?"
"우울해지지가 않아."
"내가 웃기다는 거야 뭐야."
"아니, 편안해."
"오오, 그러셔. 그거 영광이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우울함을 많이 느낀다는 것을. 그와의 8년간의 대인관계 속에서 그가 나를 아직도 만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지 내 옆에 있을 때는 그가 그리 우울해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가 언제나 나에게 '커피, 주스?'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나는 그의 말에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결국은 동일선상, 아니 평행선상인가. 8년 동안 그와 나의 관계는 여기까지다. 더 나아가지도, 더 물러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관계.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서로 너무나 많이 아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관계. 나는 그의 생일을 알고, 그도 나의 생일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있다. 나는 커피잔 안에 아직 남아있는 커피를 후룩 하고 들이켜버렸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여보세요."
[이봐 자네! 왜 아직까지 원고를 안 가져오는 거야! 그 친구 뭐래?]
"아... 지금 막 끝났어요."
[빨리 가져와! 인쇄소로 출발해야 한단 말이야!]
"네, 편집장님. 금방...."
[딸칵!!]
귀에서 울리는 금속성의 소리에 나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조금은 심드렁해진 심정으로 말했다.
"편집장님이야. 인쇄소로 원고 보내야 하니까 빨리 가지고 오래."
"그럼, 가봐야겠군."
"그래."
"....그래, 잘 가. 나중에 또 오라고."
"단순히 커피 마시기 위해서라면 그러지."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며 내가 보는 동안 벌써 4번째인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멍한 얼굴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의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문득 그를 생각했다.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8년이나 알고 지낸 남자. 정말로 이상한 취향을 가졌지만 그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 커피를 잘 끓이는 남자.
나는 피식 웃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바보같은 남자를, 나는 좋아하는 건지.
언제나 무한 루프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사이일 뿐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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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글 속의 '그'의 모델은 10년 후의 나.
그리고 '나'의 모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