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동서베를린으로 나누어져 있었을 때의 장벽사진. 뒤에 있는 건축물은 통일 전 동 ·서베를린의 경계 부근에 있는 브란덴부르크문이다.
1945년 5월 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그해 2월에 있은 미국·영국·소련의 3국 정상 얄타회담에서 이미 독일의 처리방법을 결정한 대로 프랑스까지 합하여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되었다. 이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수뇌회담에서 나온 ‘포츠담선언’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에 당분간은 중앙 정부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정치·경제적 통일성의 유지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非)나치화, 즉 민주화에 있어서는 4개국이 제각각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점령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1946년 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함으로써 1947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km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이 장벽을 쌓은 후로는 브란덴부르크문을 통해서만 허가를 받아 왕래가 허용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에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7시. 동독 공산당(SED) 정치국원이자 선전 담당 비서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긴급 기자회견을 방송을 통해 듣고있던 동독 국민들은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지금 이순간부터 동독 국민들은 모든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이게 정말인가. '모든 국경을 넘어'라면 서독으로의 여행도 포함된다는 말 아닌가. 더구나 '지금 이순간부터'라니…. 시민들은 '체크 포인트 찰리'를 비롯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검문소로 밀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벽을 열어라". 시민들은 외쳤다. 초소 경비병들은 우왕좌왕했다. 상부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 것인가, 발포할 것인가. 흥분과 긴장이 팽팽히 교차했다.
같은 시각, 서독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본의 연방하원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본회의 도중 동독의 국경 개방 소식이 전해지자 회의를 중단하고 독일 국가를 합창했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장벽으로 달려갔다. 베를린 장벽 검문소에서 경비병들과 대치하고 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자칫 유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비대는 여전히 상부로부터 명백한 대응 조치를 지시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날 샤보브스키가 국경 개방의 시점을 '지금부터'라고 발표한 것은 '실수'였다. 공산당 정치국은 이때까지 국경 개방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장벽을 돌파하려는 시민들에게 발포한다면 그것은 곧 파국임이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밤 10시쯤 마침내 동베를린 시민들은 검문소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샴페인 폭죽이 이들을 맞았다. 환호와 눈물, 격렬한 포옹….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세기적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됐다. 무엇이 베를린 장벽을 허물었는가. 90년 1월 1일 베를린 특파원으로 현지에 도착해 받은 첫 느낌 속에,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독일인들의 철저한 현실 인식이었다. 장벽이 무너진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독일인들은 이미 '현실'로 돌아가 있었다. 장벽을 망치로 쪼아대며 공연히 흥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독일인들은 이미 '감격'을 접고, 철저하게 현실적인 관점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벽 붕괴는 89년 여름, 헝가리로 휴가를 간 동독인들이 서독 대사관에 들어가 서독 행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면서 예고되기 시작했다. 이어 동독 내에서 민주화 시위가 불붙고,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동독을 방문, "늦게 오는 자는 역사가 처벌한다"는 말로 호네커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버림으로써 현실화됐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서독 정부는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상황을 관리해 나갔다. 헝가리 정부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도록 해 동독 국민들이 이곳을 통해 서독으로 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동독 정부에 국경 개방의 결정적 압력을 넣은 것도 서독 정부의 은밀한 '작업'의 결과였음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61년 베를린 장벽의 구축은 동독이 서독과의 체제 경쟁에서 스스로 패배를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후 서독은 가능한 동독과의 접촉과 교류를 넓혀가면서 통일을 위한 국제 환경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소련과 동구권의 개혁 열풍 속에서 '기회의 창'을 발견하고 이를 놓치지 않았다. 장벽 붕괴를 11개월 만에 통일(90년 10월3일)로 완성시켜 가는 과정은 마치 신이 써준 각본처럼 완벽했다. 막대한 통일 비용이나, 동서독 주민간의 심리적 장벽 등이 지적되곤 했지만 45년간의 '분단 후유증' 치고는 차라리 너무 가벼워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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