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성장발전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년전인 기원전 177년 진한땅의 표암봉으로 하강하신 우리의 시조이신 표암공 알평께서는 양산촌의 촌장으로서 부족을 다스리며 다른 촌장들과 회의를 열어 더망있는 현인을 뽑아서 임금으로 모시고 어지러운 나라와 사회 질서를 바로잡자고 하던 중에 때마침 남쪽에 이상한 소리가 나며 전광빛이 번쩍이는 지라 그곳에 가보라고 하니 백마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는 것을 소벌도리 고허촌장께 큰박동 같은 알이 있어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의 시조께서 깨어보니 그속에서 옥동자가 나와 주위 촌장들은 무척이나 기뻐들 하고 잘 자로도록 보살펴서 그가 열세살 나던 해에 임금으로 모시자고 회의를 하던 것이 그유명한 화백회의로서 그 이름이 바로 [박혁거세]인 신라의 초대 임금으로 초대하자고 회의를 주동 하셨던 어른이 바로 우리의 시조라는 것을 삼국지나 삼국유사와 동경지 등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음을 현세의 우리들도 똑똑히 볼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조는 신라국가를 건립한 공로로[신라건국일등공신]이며 인자하신 어른의 공을 치하하는 뜻에서 법흥왕께서는 536년[문선공]이라고 시호를 주셨고 그후에 다시 무열왕께서는 나라를 창건하시고 박혁거세왕을 양육하신 공로는 마땅히 왕부의 대우를 하는 것이 지당하다 하시어 656년에는 우리의 시조를 [은열왕]이라 추봉하시고 그배필을[서열왕후]라고 증봉하셨던 것을 역사나 족보에서 영역히 알 수 있는 것이니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시조를 모시는 경주이씨로 태어난 긍지를 가질만하다.
또 후세들이 나라의 큰 일꾼으로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시조로부터 36세손인[거명]께서는 소판공이라는 벼슬을 하셨다. 이벼슬은 [진골]이라야 할 수 있는 벼슬로서 [진골]이라 함은 어느 한쪽이[왕가]가 아니고서는 진골이라 부르지 못했다. 이와같이 [진골]의 집안으로 예날 부터 내려 왔다는 것은 우리의 경주이씨가 [왕가]나[왕족]과의 혼인을 하였으므로 진골이라는 귀족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 후로는 여러 선조께서 왕의 사위 [부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문헌을 통해 감히 왕손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핏줄은 후손에 흐르고 흘러 고려시대에 우리 경주이씨들이 정권을 좌우 할만큼 귀세가로서 문무 애국지사가 많았으며 [익제] 선생께서는 멀리 중국에까지 가셔서 일곱 임금을 모시고 네번이나 영상에 오르셨는가 하면 임금의 부당한 정치를 교화시켜 나라일을 바로 잡던 선조들도 계셨고 수많은 선조들은 바른말을 하시다가 왕의 눈밖에 나셨다.
토산이나 섬으로 귀향 하셨던 대표적인 선조로는 [국당공]과[석탄공]을 비롯 하여 [백사]오성대감 등은 청백한 애국자 중의 애국자였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솔선하여 국운에 참여하셨고 꾀임에 빠진 임금을 교화시켜서 평안을 도모하셨다. 또한 잊을 수 없는 최근의 한 분이 있다. 다름아닌 한일합방의 불미스러운 나라일을 걱정하시며 벼슬을 버리고 사재를 정리하여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무관학교를 건립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8.15 해방으로 귀국하시어 초대 부통령을 지내시며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사퇴하셨던[성재선생]의 청백이념이야말로 최근 우리 선조들의 표본적인 처세라 할 수 있다.
우리 경주이씨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표암공 알평 할아버지를 비로소 삼고 있으면서 한때 계보를 실전하여 소판공 [거명]을 중시조로 모셨던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동안[소판공 거명]을 1세로 하여 계대를 대었으나 계보를 찾은 후로는 [소판공 거명]을 36세로 이어서 계대한다. 앞에서 말한바 잊지마는 질골이라는 것을 성골과 함께 신라때 사회 계급의 최상급으로서 父계나 母계중 어느 한쪽이 왕족이고 다른 한쪽이 귀족인 것을 뜻하며 부모 양계가 모두 왕족일 때에는 성골이라고 한다는 것을 재차 말해둔다.
경주이씨의 세계는 시조로부터 51세대인 고려 말기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11개 대파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파로 분파 되었으며 11개 대파는 평리공파 이암공파 익재공파 호군공파 국당공파 부정공파 상서공파 사인공파 판전공파 월성군공파 시랑공파이다전통있는 씨족의 하나인 경주이씨는고려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이조에 들어와서도 팔명의 상신과 3명의 대제학을 비롯하여 10여명의 공신들외에 수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고 문과 급제자가 178명으로 고려때부터의 상신급을 합처보면 100명에 이르는 많은 선조들이 있었으며 왕을 모시던 봉군록을 살펴보면 57명이나 되고 [청백리]편에 살펴보면 10여명의 선조들이 [청백리공]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후 이조때에 11개 대파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기는 상서공파의[백사집안]이 단연으뜸이고 익재공파의 세칭 [8별파]집안과 유명한[이완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한다.
이조때 경주이씨가 배출한 상신 명현등 대제학 가운데 [백사집안]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의 [팔별집안]에서 좌의정1명 대제학 1명 국당공파의 정순공파에서 좌의정 1명나와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어 오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 대표적인 인물은 익재공 이제현이다. 당대에 손꼽던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그는 26세때 충선왕이후 공민왕에 이르는 6대 임금을 섬겨 온 명신이었다 고려시대에 있어 대표적인 인물은 익재공 이제현이다. 당대에 손꼽던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그는 26대 충선왕이후 공민왕에 이르느 6대 임금을 섬겨 온 명신이었다. 익재공은 시조로부터2세요 소관판공으로 부터는 17세이다. 그의 아버님은 문정공이며 호는 동암공이다. 충숙왕 때 원나라에 가 있던 왕자가 만권당을 세워 그를 불러 들이자 연경에 가서 그곳의 이름난 학자들과 함께 여러 고전을 연구했다.
당대의 명문가로 이름을 떨쳐 특히 복잡한 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했으며 백이정 선생의 주자학을 계승 그 기초를 확립는가 하면 원나라 조맹조의 서체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교습시키기도 했다. 그는 충숙왕때 계림부원군에 봉해지고 공민왕때 우정승을 두 번 지낸 뒤 문하시중에 이르렸다가 공민왕6 서기 1356에 노령을 핑계로 벼슬을 떠나 실록을 편찬했으며 저술과 문학에 힘섰다. 뒤에 요사스러운 중인 신돈이 정권에 참여하자 그는 왕에게 신돈의 골상이 옛날 흉인의 관상과 같으니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간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신돈의 미움을 샀는데 뒷날 왕은 과과연 뒷일을 미리 점쳐보는 어진 노재상이라고 칭찬하셨다고 한다.
공께서 남기신 익재난고 소악부에 7십수의 고려 민간가요가 7언절구의 00로 번역되어 있어 오늘날 고려가요연구에 더 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익재공은 일찍이 원나라 연경에 가서 있을 때 원나라 화가인 진감여가 공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양병룡이 찬을 썼는데 그 그림이 있다. 저서로는 익재난고 이외에도 익재집 역옹패설 효행록 서정록 사략 등이 있다. 익재공의 아들 운와 충순공 이달존은 이재 백이정의 사위였으며 음보로 벼슬에 나가고 역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유명한 8별은 바로 익재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