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란 이필이의 삶과 무용
정연규(마산예총사무국장)
- 춤으로 시를 노래하다.
애욕에서 무욕의 시간으로 접어들 때 몸과 마음은 순수한 영혼이 깃들고 춤사위는 허공을 가르며 향기를 뿜기 시작한다. 마치 시를 쓰듯 춤을 추기 시작한 소녀의 몸속에는 이미 오래전에 춤의 예인으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봄빛이 완연한 경치 아지랑이 피어오를 때 추산 언덕을 한 달음에 오르내리며 뛰놀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듯 돌연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육신과 정신을 소용돌이치며 사슬처럼 감아오는 아픔조차도 그녀에게서 춤을 뺏지 못하였다. 이제 그 춤은 후인들을 감전시키며 전이되었다. 춤은 억지로 만들어 지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고 몸을 펼쳐야 춤이 된다고 말한다. 그 마음은 솔직 담백하여 마치 소녀 같았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솔깃해진다. 귀가 여리다. 그러나 아픔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74년의 춤 외길 인생을 걸으며 많이도 삼키고 삼켜왔다. 아픔들을.....
20여년간 정신적 동지로 아주 작은 일조차도 함께 의논하고 항상 길을 물었다. 정해진 외길이지만 세상사를 함께 만들어 가는 동반자가 필요하였다. 기꺼이 함께 길을 찾았다.
춤에 관한 한 타고난 재능을 초․중학교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칭찬들이 소녀를 춤꾼으로 변화시키고 있었으며 그녀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다시 찾아리라'던 기약없는 약속만 믿고 떠난 스승 이미라선생님(당시 성지여중 무용교사,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의 제자)을 찾아 무던히도 헤매었으나 끝내 조우하지 못하고 2009년 3월 17일에 74년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 약속 한마디가 이필이를 춤의 예인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춤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영원한 내사랑
이필이
진정한 벗이여, 나의 생명이여
정열과 괴로움, 정성과 인연의 희로애락이로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이여, 바람이여, 폭풍이여
굳굳한 바위처럼 영원한 나의 님
춤이 있기에 오늘도 내일도
영원한 내 사랑
- 어린 시절
이필이선생은 1935년 4월 19일 마산시 자산동 778번지에서 아버지 이찬종과 어머니 구막달 사이의 3남 4녀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당시 항구도시 마산이었지만 자산동은 대부분 논, 밭농사로 생업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선생의 집은 적지 않은 농토로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9살 되던 해인 1943년 인근 완월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각종 교내행사에 춤에 대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공연을 하게 되면서 '이필이' 하면 춤 잘추는 아이로 통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그 끼는 부친으로부터 이어 받았다. 농요를 구성지게 잘 부르시고 농악단을 조직하여 상쇠노릇을 하시던 신명을 가지신 분이다. 부친은 자식교육에는 엄하여 선생이 춤추는 것을 금하자 몰래 춤을 추기도 하였다. 광복이 되자 무학국민학교로 전학하게 되고 교내 무용발표회에는 안무를 도맡아 공연하기도 하였다.
1949년 성지여자중학교에 진학하자, 당시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의 제자인 이미라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이미라 선생은 소녀 이필이의 춤 소질을 알아보고 한국무용에서 발레, 인도춤까지 가르치게 되고 그 소녀는 다양한 춤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중학 2학년때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이미라선생을 따라 졸업 때까지 진해 해군부대, 마산육군병원 군부대 위문공연을 갖게 되는데 이때가 어찌 보면 선생의 삶의 가장 행복한 시기였으며 이후 중학 졸업과 동시에 긴 시련의 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 수틀을 안고 다락방에서 꿈을 찾다
중학 졸업한 당시 무용 뿐만 아니라 전 학과목에서 성적이 우수하여 성지여고에 장학생으로 진학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서울로 올라간 이미라선생의 '다시 연락하겠다'는 약속만 믿고 진학을 미루게 되는데 1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무작정 상경하게 된다. 6.25전쟁 직후인 1953년 19세의 나이로 스승을 찾아 서울시내 여러 무용학원을 탐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게 되자 낙원동에 있는 김천흥무용학원에서 춤을 배우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우선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선 일자리를 필요하여 인근 안국동에 있는 표구사에서 비단에 수(동양자수)를 놓아 병풍을 만드는 일거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다. 주인은 손재주 몇가지 테스트한 후 선생께 일감을 맡게 된다. 판잣집 이층 다락방을 얻어 마룻바닥에서 배고픔과 고된 일로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며 낮에는 김천흥 뿐만 아니라 김백봉, 임성남선생님으로부터 전통춤에서 발레까지 섭렵하고 밤에는 골방에서 수틀과 씨름하게 된다. 그 수틀은 선생의 춤에 대한 열정과 필생의 꿈을 이루게 한 소중한 물건이었기에 자산동 선생의 방에 임종의 순간까지 걸려있게 된다. 1956년 마산으로 귀향하기전까지 서울생활은 가정교사를 하기도, 무용학원 조교제의를 거절당하는 등 꿈을 실현해 가는 혹독한 시간이자 춤인생 외길을 걸어가는데 강한 의지를 달군 시기였다. 22세의 성숙한 여인이자 춤꾼으로 성장한 선생은 마산에 내려와 추산동 구시립도서관에 1년간 취직하였으나 그만두고 1957년부터 춤에 대한 뜻을 실천하기 위해 무학국교나 자신의 마당에 가설교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무용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58년 10월 29일 마산 시민극장에서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마산에서 춤의 씨앗을 심기 시작한다. 당시 포구락무, 화관무, 부채춤 등 전통무용에서 모던발레, 인도춤까지 선뵈였다. 이후 후학 양성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무용활동과 더불어 자신을 춤인생을 펼치기 시작한다.
춤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것이 한이 되어 6.25전쟁으로 인해 단국대 마산분교가 1955년 설치될때 1년간 정외과를 다니다 분교가 부산으로 철수 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게 되는데 훗날 이 경력이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하였다.
- 무용활동과 삶
이필이 춤인생의 기점은 15세때인 1949년이지만 무용활동의 기점은 1957년 이다. 이필이선생의 마산에서 춤활동은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무용연구소를 만들어 당시 무용의 불모지 마산, 어린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며 무용발표회를 통해 시민들에게 우리 전통무용의 멋을 알리면서 맥을 이어 갈 수 있는 바탕을 일구기 시작한다. 당시 대표적인 시민축제인 마산종합문화제에 무용콩쿨을 만들어 무용문화의 확산을 꾀하고 1962년에는 김해랑선생과 더불어 한국무용협회 경남(마산)지부를 창립하게 된다. 1970년부터 1987년까지 17년간 한국무용협회 경남지부장을 맡게 된다. 특히, 1971년에는 배달어린이무용단을 만들어 후학양성과 더불어 발표회와 위문공연을 작게 된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30여회의 개인무용발표회와 수백회의 무용공연을 수행하게 되는데 수많은 무용인을 배출하였고 자신은 다양한 작품활동을 통해 명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92년에는 이필이무용단과 더불어 경남춤아카데미를 창단하게 되고 난무회, 청소년무용단을 조직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또한 전국적인 춤꾼들이 모임'선무회' '우정회' 에 소속되어 각지의 춤공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필이선생은 24살에 결혼했다. 무용학원 제자의 엄마가 자신의 남동생을 소개하여 3살 위인 남편을 만났다. 연애를 해본적인 없는 선생는 결혼으로 한때 행복한 가정을 영위했다. 그러나 신문기자였던 남편의 방탕한 생활 등 성격차로 인해 29세에 소송을 통해 이혼을 하게 되었다. 이혼판결이 확정되자 몸만 빠져 나오다 보니 어릴 때 사진이나 제1회부터 제4회까지의 개인무용발표회 자료나 사진이 하나도 없단다. 25세 때인 1959년 아들 류희철(50세)을 낳았다. 그후부터 춤과 더불어 혼자 지내 왔다. 그러나 몸속에 많은 비밀소런 병들을 안고 살았다. 60세가 넘어서 부터는 이명증상이 심해져 귀속에 늘 전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으며 허리디스크가 발생해 2000년 무용극' 도'공연(통영)에는 출연하지 못하였고, 2005년 무용극'효'공연(남해)을 앞두고 다리가 퉁퉁 부어 병원에 가니 심한 당료병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공연에 자신의 역할을 일부 변경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 2006년경부터 유방암이 발병 하였고 병마와 긴 투쟁속에서도 후학양성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으며 2008년 12월 7일 춤인생60년 무용대공연이 마지막이 되었다.
- 작품
마산포교당 강양우 주지스님이 지어준 호 일란(一蘭) 이필이선생의 춤에 관한 일성(一聲)은 이렇다. '마음을 비우고 몸을 펼쳐야 선이 곱다' 춤은 마음을 비우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음 다스리는 일이 먼저라는 것이다. 예인의 기질을 타고난 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춤꾼들의 춤의 마디를 쉽게 찾지 못한다. 선생의 창작춤은 문학성과 사상성, 신앙성이 그 바탕이 된다. 늘 공부하며 책과 자연으로부터 춤의 소재를 찾았다. 어릴 때 시인 김남조선생(당시 성지여중 교사)으로 문학적 소양을 기른 덕택에,
마산 시민극장에서 첫 무용발표회부터 30여회의 발표공연을 하는 동안 ‘뱀의 춤’, 이미라가 안무했던 1인 2역의 춤 ‘선과 악’ ‘회상’(71년), ‘설화’(72년), ‘번뇌’(78년), ‘사랑’(81년), ‘굴레’(86년), ‘맥’ ‘일란’(이상 87년), ‘난대별곡’ ‘사군자’(이상 2001년) 등을 창작하고 안무했다. 뿐만 아니라 지옥도(1986) ‘도’(2000년), ‘이성지합’(2002년), ‘성신대제’(2003년), ‘효’(2005년), ‘운림지’(2006년), ‘목련존자’(2007년) 등. 이미라를 비롯해 김천흥, 고 최현, 고 김해랑, 이매방, 권려성 등 당대 최고 무용가들의 춤을 사사하거나 함게 춤을 추면서 자신의 춤의 세계를 완성해 간다.
그 중 산조춤인 '일란'은 1995년 12월 제자 장순향이 무보집을 발간함으로 명무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널리 추어지고 있다.
- 추모사업
이제, 일란 이필이선생은 갔지만 선생의 춤의 향기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 수제자 이순자가 주축이 되어 많은 제자들이 이필이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추모사업을 앞으로 펼쳐나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