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백”에 대한 고증 - 내경(內經)의 구성 연대 토론
河南中醫學院 주발상(周發祥)
河南商丘市 第2人民醫院 곽송지(郭松芝)
황제내경(黃帝內經)(이하 간략하게 일러 내경(內經)이라 한다)중에 “기백(岐伯)”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정리된 내경(內經)의 구성은 황제와 더불어 기백(岐伯), 백고(伯高), 소유(少兪), 소사(少師), 귀유구(鬼臾區), 뇌공(雷公) 여섯 명의 신하와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섯 명의 신하중 뇌공은 황제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나머지 다섯 명은 황제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회답을 했고(의학 방면에 있어서 황제의 스승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중 귀유구는 단지 오운 육기의 일부 문제에 대해 회답을 나타내었고, 백고, 소유, 소사 세 명은 영추(靈樞) 여러 편의 장과 소문(素問) 일부의 장 중에 회답을 나타내었는데, 황제가 제기한 문제의 대부분은 기백이 대답한 것이어서, 기백은 또 천사(天師)라고(소문(素問)․상고천진론(上古天眞論) 을 보면) 존칭되었다. 이런 이유로 기백이라는 이름자는 없는 듯하고, 곧 내경(內經)이라는 의학 경전에도 없는 듯하여, 후세의 중의학에서는 종종 “기황(岐黃)”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지적되어 왔다. 기백이 내경(內經)에서 중요함은 이와 같아, 즉 “기백”에 대해 요약하여 고증해도 괜찮을 뿐더러, 이 한 방면으로부터 내경(內經)이 이루어진 년대를 설명할 수 있다.
기백이란 이름은 최초로 사기(史記)에서 보여지고, 다음은 한서(漢書)에서 볼 수 있다. 사기(史記)에서 세 곳, 한서(漢書)에도 또한 세 곳이다. 사기(史記)․효무본기(孝武本紀) 와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 두 곳의 설명은 완전히 일치하는데, “公玉帶曰:黃帝時雖封泰山, 然風后, 封鉅, 岐伯令黃制封東眞”이라 이르고 있고, 사기정의(史記正義) 의주에는 “기백은 황제의 대의학가이다.”라 이르고, 사기(史記)․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은 “기백으로 하여금 방(술)을 주관하게 한다.”라 이르고,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주에는 “기백은 황제의 신하이다.”라 이르고, 한서음의(漢書音義)에서는 “상은 주관함이다. 기배은 황제태의로 방약을 주관했다.”라 이르고 있는데 한서(漢書)․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은 사기․사마상여열전 과의 설명에 단 한 문(文)의 차이 “기백을 불러서 방을 주관하게 했다.”만 있을 뿐이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에서는 “방을 다루는 것은 …… 태고에 기백, 유부가 있었다.”라 이르고 있는데, 한서(漢書)․교사지(郊祀志) 와 사기(史記)․효무본기(孝武本紀) 의 설명에는 한 자의 차이도 없다. 위소(韋昭)가 주(註)한 한서(漢書)․교사지(郊祀志) 에는 “풍후, 봉구, 기백은 모두 황제의 신하이다.”라 이르고 있다.
위에 인용된 문장을 자세히 관찰하면, 기백은 진실로 대의학가이며, (기백이라는 이름은) 사마상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마상여는 서한(西漢) 시대 사람이고, 기원전 179년에서 기원전 118년까지 살았고, 한무제(漢武帝)와 비교하면 23세 더 많다. 공옥대 역시 서한 사람인데, 생존 기간이 상세하지 않다. 그가 앞서 말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02년이고, 이 때는 사마상여가 죽은 지 16년이 지났다. 사기(史記)는 기원전 91년에 만들어졌고, 한서(漢書)는 동한(東漢) 때 만들어졌다. 사기(史記)중 기백에 관한 세 곳의 원문에는 기백이 “황제태의”란 말이 조금도 없고, “기백, 황제태의”란 말은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사이의 여러 해 동안 후세 사람이 주한 것이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에서 기백이 맡은 일을 “속(소)기백사상방”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방(方)은 방술(方術)이고, 단지 의(醫)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기타 방면의 기예를 포괄하는 것으로 내경(內經)에서는 또한 천사라고 칭하였다. 또 한 가지 면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속기백사상방”이란 말은 사마상여의 대인부(大人賦)안에 나타나 있는데, 소위 “대인(大人)”이란 말은, 즉 선인, 방술을 잘하는 사람, 또한 천사라고 일컫을 수 있다. 한 무제는 신선의 도에 열중하여 이러한 전문 기술을 갖춘 신기한 일을 하는 도사를 길러 고관으로 임명하여 선약을 짓게 하여 장생 불사를 도모했다. 사마상여는 한 무제가 이러한 선가 생활을 동경하는 것을 보고, 곧 한 편의 대인부(大人賦)를 지었다. 한 무제는 이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갑자기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신선의 느낌을 가지기도 하였다. 대인부(大人賦)는 낭만적인 수법으로 쓰여져 영향을 미쳤는데, 기백이란 인물, 그 맡은 일은 사마상여가 허구화한 것이다. “기백, 황제태의”란 말은 대략 후세 사람이 내경(內經)에서 기백이 논한 의학이 상세하고 넓고 큰 것을 보고, 황제 신변의 대의학가라고 유추하여낸 것이다. 서한 여러 책의 허다한 “황제”라는 관명으로써 (판단했을 때), 사기(史記) 이후의 사람이 내경(內經)을 편찬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관명으로써 “황제”뿐만 아니라, “기백사상방”이란 근거로 하여, 황제와 기백의 문답 형식으로 쓰여진 것이 내경(內經)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내경(內經)은 서한 이전에 만들어지기란 불가능하였고, 단지 사기(史記)가 만들어진 연후에야 만들어질 수 있었다. 더군다나 사마천은 신중하게 학문을 다루었고, 여러 책을 두루 보았고, 부자 양 대에 걸쳐 태사령(太史令)을 역임하였고, 수많은 서적을 보고 들은 바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기(史記)에는 의학에 관한 많은 기술이 있는데, 만약 사기(史記) 이전에 내경(內經)이라는 이러한 의학의 거작이 있었다면, 사마천은 보고 듣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사기(史記)에 한 자라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경(內經)이 사기(史記)이전에 만들어지기란 불가능하다. 이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책이 만들어진(허다한 자료를 가지고 하나의 책을 편찬함) 시기, 이것과 책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자료 본래의 생성 시기는 두 가지(다른) 개념이다 라는 것이다.
역자 권충경 / 교정 유애리
원 저 : 북경중의잡지 1994년 5기(94085011)
“岐伯” 考略兼談內經的成書年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