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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환갑진갑이 다 지난 지금에서 쓰는 이유는 옳은 것이 무었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성공하는 길인 것인가도 정립하지도 못한체 정체성을 잃고 아둥바둥 그냥 저냥 사는데 연연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덧없이 다 성장한 자식들을 바라보며 자식들에게나마 아직도 혼탁한 이 사회를 이대로 물려줄수 없음을 절실히느껴 이제부터라도 내가 살아온 대한민국의 일부분이나마 적어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의 한알이 되고자 기억나는데로 진솔하게 적어나가고자 함이다.
또한 우리사회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분열시켜 파탄에 몰아넣으려는 친북인사들을 앞세워 참전용사들을 살인마와 용병으로 매도한 대한민국의 적법성을 지닌 엄연한 대중매체인 한겨레21에서 근 1년간 시리즈로 대한민국을 농락한 연재물 "아~ 몸서리 쳐지는 한국군"이란 기사를 보고 울분을 참지못한 부분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
한겨레신문은 그 시절 많은 아픔들을 감내하며 살아가야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었다. 창간당시 나 또한 창간 국민주주이기도 하지만 창간동기가 애국적이었고 순수했고 의로웠던 국민들의 신문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한민국의 모순점과 약점들을 교묘히 파고들어 국민들을 현혹하고 이간하여 침몰시키려는 세력들로 가득차있는듯하다.
물론 이 문제는 일제시대 지배자, 통치자, 관리들에게 아부하며 순종해야만 살아남고 출세하여 행세를 부릴 수 있었던 시절을 겪어온 지도자, 지식인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을 관리함에 일제시대에 배운 통치기술에 따라 국민들을 아전인수식으로 호도하고 관리하는 습성을 지닌 짝퉁민주주의를 펼치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위정의 바탕을 만들어 놓은 것이 원죄가 아닌가싶다.
내 조국이 병이 들데로 병들어 지도자들은 자신챙기기에 급급하여 나라의 안위따윈 안중에도 없는 이 나라를 고발하여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뜻도있다.
나는 명성황후님을 보필하시던 황후님의 친척이신 민순(閔舜)할머님과 연을 맺으시어 여주에서 서울로 이주하게 된 할아버님(朴舜九)의 3대 장손 집안에서 4남매 막둥이로 태어나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으나 우리부모님의 꿈이며 집안의 희망이며 기둥이셨고 조선호텔 직원이셨던 만18세의 청년 큰형님께서 6.25전쟁이라는 민족의 아픔속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 그들에게 붙들려 인민위원회로, 인민군으로 끌려다니시다 도망나와 국군에 입대하였으나 혼탁한 전쟁통에 어느 누군가의 밀고로 부역혐의라는 무서운 누명을 뒤집어쓰고 서대문형무소에 입감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어느날 부터는 행방불명이라는 폭탄이 우리가족을 송두리체 흔들어놓았다. 이후 부모님들은 큰아들을 찾으시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시고 홧병으로 일찍 피멍으로 물든 가슴에 한을 않고 전쟁없는, 다툼이 없는 천국으로 가시었고 우리 집안은 풍지박살을 맞이하게 되었었다.
내 나이 16살(고1)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내동댕이 쳐진 신세여서 일명 똘만이라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여 00꼬마, 또는 00깡패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대신하며 영웅심과는 거리가 먼 의리와 깡다구와 악으로 청소년기를 거쳐왔다.
나는 이미 이 시절 사람이던 짐승이던 바로 숨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들을 싸움에서 사용할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나와 싸우던 상대들은 데미지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았다. 큰 싸움이던 작은 싸움이던 내게 맞았던 상대들은 꼭 피를 보였었고 내게 살이 끼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에게 맞은지 몇 개월 후 사망을 하여 우스게 소리지만 내게 맞은 결과라며 나를 주위에 경계하라는 일침으로도 받아 들였었다. 살아 오며 몇 번은 사용하고픈 충동을 느껴 본 적이 있었었던 것도 부인하긴 힘들다.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도 우리 집안, 일가 친척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집안이나 친척들은 말없고 고집불통이고 융통성 없이 착하기만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고아가 되어 골치아프고 짐스런 반갑지 않은 어린 상전 쯤으로만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고 지금까지도 나에 대한 그런 이미지는 별다를 것 없을것이다.
또 한가지 이유를 들자면 자라면서 부모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중 "집안의 체통을 잃지말고 남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 "남에게 도움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음도 부인하지 못할 부분이지만, 가진것 없었고 가난하기만했던 집안들 중심의 일원이었기에 모든 친척들에 누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도 자리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고, 한편으론 베품으로 집안을 돌보셨던 내 부모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일가 친척들은 중심을 잃고 서로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절에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내 자신을 느끼면서 가슴 속에 야속함과 미운 마음들도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성장기에 부모를 잃고 잘 먹지 못한것이 원인인지 집안에서 제일 외소한 163cm 키와 47kg의 작은 체격으로 남들이 보기엔 외소해 보였지만 가슴둘레 120에 왕자 복근에 눌러도 들어가지 않는 쇠말뚝 같은 근육에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인간 흉기였으며 정신력 또한 누구에 뒤지지 않았다.
나는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 다가오면 그 싸움이 무서웠고 두려웠었다. 그래서 싸우지 않을 방법을 모색도 해보고 좀 망설여지기도 하지고 싸움이 한 두번 이어지고 본 싸움에 들어가면 눈이 뒤집힌다. 힘으로 나를 이길 사람은 많았지만 싸움은 힘만이 아니다.
그것은 싸울때 이 싸움에서 나는 죽는다였다. 그러니 동네 패싸움에서 상대를 죽일려고 싸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죽음과 연결을 짓고 싸움을 하니 상대방들은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치며 나중에는 아무데 꼬마는 건드리지 마라였다.
그런 생활을 하던 중 훌륭하신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으며 더우기 나에게 외로울 시간을 주지 않았던 내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싶없었던 보석같고 가족같이 소중한 친구들과 은사님들이 계셨다. 이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보물로 생각한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 적지 못하겠으나 내겐 그런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신 모든 신에게 감사하며 생활해 왔다. 그 많은 친구들과 좋으신 분들의 도움으로 우주로켓을 만들겠다는 청운의 꿈을 열 학문으로 복귀하여 그들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나 뭐버릇 남주냐는 식으로 불의를 보면 또 발동이 걸리기 일쑤였다.
66년도에 징병대상에 유보 되었다가 68년도 여름에 징집영장을 받고 집결지에 나갔으나 텅 비여있는 집결지에 놀라 당시 수원으로 이전한 도청을 방문하여 김신조 사건으로 복무기간이 늘어난 이유로 징집에 차질을 빛어 연기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다음 해인 69년 3월 10일에야 소위를 달고 입영하는 학군의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뒤 늦게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논산 훈련소 28연대를 거쳐 후반기 금마훈련소에서 LMG와 로켓포 주특기 104를 받아 26사단 75연대 ?중대(경기도 일영)에 배치되었다.
우측은 고등학교 1년 후배인 오충근, 월남참전까지 하고 와서 제대 후 나를 면회왔던 시절이다. 오충근은 복서출신으로 이름도 있던 후배였는데 제대 후 10년도 못살고 암으로 평화로운 곳으로 갔다. 나중에야 고엽제문제가 대두되어 그나마 치료들을 받고 있으나 오충근은 그 훨씬 전이기에 그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갔다. 아이 둘을 있었는데 가족들은 어찌 사는지...
당시 이등병시절 마이가리? 대위라나 하던 모자 계급장 위에 공수 뺏지를 올려 달았던 중대장이 매일 잠복시간 되면 4cm정도 굵기에 1m2~30 정도 길이의 반질반질한 껍질 벗긴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군장검열 하면서 열병한 졸병들에게 "너, 군인의 길" "너, 혁명공약" "너, 보초의 수칙" 하며 암기사항을 지적하는데 우물쭈물하면 가차없이 없디려 뻣쳐 시키고는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의 정확한 가격점을 사정없이 5대를 내리치는데 한대 맟는 모양이 개구리 뻣듯 자빠지는 모습에 옆에서 보는 병사들은 눈을 질끔 감고 몸서리를 쳐대고 하는 생활이 무섭고 두려워 당시 3명의 병사가 탈영한 상태였고 사회에선 맟는 것 보단 때리는데 이력이 나있던 나 또한 탈영할 틈을 였보고 지내던 어느날 신삥 하사들이 전입을 왔는데 장기하사 일반하사가 섞여 있었다,
그 중 어느 일반하사에게 접근하여 '당시엔 장기하사들이 부족하여 강제적으로 장기하사로 만든다는 소문들이 있던 시절'이라 하사관 학교에 가면 말뚝이 안되는가? 훈련 량은 어느 정도인가 언제 어떻게 지원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그 때가 마침 지원자들이 부족한 상태라 각 중대별로 3명씩 차출 내려온 시기라는 것을 알게 되여 인사계 선임하사에게 찿아가 신청을 하였는데 중대장이 널 중대요원으로 찍고 있더란 인사계의 말에 더욱 놀라 선임하사에 매달려 제발 하사관 학교로 보내달라며 애원도 하고 보내주지 않으면 탈영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나의 굳은 의지를 밝혔더니 선임하사의 보고를 받은 중대장이 직접 불러 면담을 하면서 아쉽지만 너도 장교도 될수 있는 제원이고 하니 하사관이라도 되어 열심히 군복무를 하라는 격려까지 받으며 작은 체구에도 불구히고 우여곡절끝에 하사관 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강원도 원주 1군 보병하사관 학교 75기 후보생 시절(학교장 오창보 대령), 당시 대대장 백호준 소령?께서 졸업때 쯤 그동안 내가 공들여 지어놓은 하사관 학교 기념관을 관리하는 관리하사관으로 학교에 남을 것을 지시 받았을 때 나는 서울과 너무 먼 원주가 싫어 거부의사를 밝혔더니 "이 놈 참 군생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놈"이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전방으로 가겠다고 고사하여 26사단 76연대 8중대?(송추 쪽과 사기동 김신조 루트 잠복 중대)로 배속 받아 소대 분대장을 잠시하다 선임 작전계(일반하사)가 제대하자 중대장의 부름을 받아 중대본부 교육,작전계 및 본부내무반장을 맡아 생활했었다.
자그마한 외모를 지닌 내가 하사를 달고 처음 분대장으로 부임했을때, 일병으로서 분대 아니 중대 내 제일 고참이었고 위험인물이였던 32세 남한산성을 거쳐 온 제대 얼마 남겨놓지 않은 제주 출신의 고참을 처음 대면할때 덩치는 크나 그의 악의없는 얼굴과 양순하고 온순한 자세로 보아 싸움꾼이나 사고자가 될수없는 인물인데 어쩌다 사고자가 되었는지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김일병은 의식적으로 분쟁의 장소를 피하고 나와도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고 눈맞춤도 피하려 했던 그가 내게 도전한 것은 당시 소총중대들의 분위기가 그랬듯이 병들의 신삥하사 길들이기에 누군가의 부추김에 총대를 멘듯 하였다.
전입간지 얼마 안되어 북노고산 산악 돌격훈련(아마도 1군 훈련이나 또는 전군 훈련 아주 큰 훈련이었다.) 분대 텐트속에서 였다. 분대텐트에서 분대원들과 휴식들을 취하고 있는데 그 김일병이 내게 다가와...
"어이 박하사 나하고 이야기좀 해"하며 반말조로 명령을하는데...
".........?????"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안 나는 기가 막혀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앙물고 독이 서서히 오르기를 기다렸다.
준비를 하고 일어나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니 김일병이 선수를 치고 나오는 것이다.
"야 이 세끼야 뭘 쳐다봐!"
하며 주먹이 날아오는 것이다. 그는 내 바램대로 싸움꾼이나 운동을 한 친구가 아니었다. 덩치만 크고 망나니기질만 있었지 그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피하며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엎드린 자세의 김일병에게 무릅으로 명치를 가격하니 그는 맥없이 자빠져 나뒹굴어졌고 분대원들이 일어나 일부는 밖으로 나가 망을 보는 분대원도 있었고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우왕좌왕이다.
나는 발동이 걸린 것이었다. 여세를 몰아 김일병 옆구리를 워커발로 걷어찼더니 "욱"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고 있는 그를 더 걷어챠려 할때 분대원들이 몰려들어 나를 감싸안고 참으시라며 구석으로 떼여놨다.
분도 안 풀렸지만 옆에있던 야전삽을 들고 김일병 등짝을 내려쳤고 다시 곡괭이로 만들어 등짝을 찍을 요량으로 야전삽을 들고 온 중대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너 오늘 임자 잘 만났어. 임마! 사람 잘 보고 골라야지. 오늘로 너와 함께 나도 남한산성간다"
분대원들이 펄펄뛰는 나를 에워싸고 장교들 다 듯는다며 내 입을 막고 김일병을 데리고 나가고 난리 법섞을 떨고 말도 아니였다.
분이 안 풀린 나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를 데리고 오라하니 또 사고를 칠가봐 눈치를 보는 분대원들을 뿌리치고 찾아 나가려 하니 분대원들이 나를 붙잡고 풀죽은 김일병을 데리고 왔다. 그는 들어오자 마자 내 앞에 무릅꿇고 잘못햇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다.
나는 싸움에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군사교육에서도 비슷한 교육을 받아 마음만 먹는다면 싸릿가지라도 가지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경지에 있었다.
그를 한참 노려보며 분을 삭인 나는 그와 마주 무릅을 꿇고 "어떤 이유인지는 묻지 않겠지만 나이도 생각하여 얼마 남지 않은 군생활을 마치고 가족들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를 위로해 주었더니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며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를 앉혀두고 밖으로 나와 홀로 먼 하늘을 바라다 본 일이 있었다.
그렇게 신삥 하사 분대장 신고식?을 치룬 그날 소대장, 중대장들은 물론 전 중대원이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사고자와의 일이라는 것과 결과가 잘 해결된 것으로 쉬쉬하고 묻혀 두고 지나갔다. 물론 그 후론 중대내에서 나에대한 예우가 반듯했으며 하사생활에 지장없이 지내게 된 추억도 있다. 아마도 이 일로 훗날 중대본부 내무반장 겸 작전계를 맡을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김일병은 얼마 후 제대를 할때 내 손을 잡고 고맙다며 제주도에 오시면 꼭 연락하라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주고 그렇게 떠났다.
나는 그 후로도 분대나 중대에서나 나를 겨냥하거나 전체에 해가 되는 일만 아니면 일대 일로 계습장 떼고 웃통벗고 한 2번 일을 치룬적은 있으나 전체 기합이나 폭행등은 한번도 행하지 않았었다.
특히 중대본부 내무반장 시절엔 나 보다 나이가 훨신 많은 사고자(28세~32세)들과 마음을 나누고 많은 사랑을 주었고 그들 일부도 무사히 제대시키면서 연대에 온 사고자들을 우리 중대로 많이 보내와 사고자 전문중대라 불평하던 중대원들도 있었으나 내 주위는 사고자들이 나를 보호하듯 든든한 힘이 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뿌뜻했던 일들이기도 했었다.
그렇게 생활하던 차에 3소대 부소대장과 사고자 문제로 큰 충돌이 있었고 기왕에 힘들게 고생 할 군대라면 차라리 월남의 전쟁터에 가서 죽더라도 가족들에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과 어쩌면 꿈과 현실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가슴속의 멍들로 생활에 지친 내 모습이 싫었고 삶의 뚜렸한 비전이 없어 삶을 포기 하고 싶었던 잠재의식도 한 몫을 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살아 돌아오기보단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어 가족들에게 집안을 일으키는 힘이 되겠다는 의지가 더욱 작용했던 것 같았다.
일명 용산깡패 성구용과 작전 후 만나 반가움에... 정글에 갈갈이 찢겨진 첨병복장과 일반 참전자들과 복장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이 사진을 보며 다시한 번 느끼게 한다.
성구용일병은 당시 26~7세로 나이가 많았었다. 성구용이 송추 사기동에 있던 우리 중대로 전입을 와서 본부 이발병으로 보낸 것이 발단이 되어 3소대 부소대장(중사) 과 마찰이 일어 월남가는 계기가 되었었는데 내가 월남으로 간 후 중대본부 인사계를 비롯 본부요원들 거의가 월남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는 내가 월남행을 택한 계기의 원인이었던 3소대 부소대장이 민간인 인명사고를 낸 관계로 중대장이 문책을 받아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야했고 온 중대가 쑥밭이 되어 본부요원들 대부분이 월남으로 왔다는 가슴아픈 사연을 알게되었다.
이름은 잊었지만 아직도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3소대 부소대장은 경상도 출신으로 덩치가 산만했으며 술을 입에 댓다하면 3박4일을 마시고 다녀 나는 그를 3박4일이라 칭하기도 했다. 술을 마실땐 중대 내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하였고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나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그는 술을 안 마실땐 참으로 순박했고 선한 하사관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군복을 벗고 사회 민간 형무소로 가야했다고 들었다...
그 사건으로 중대장 입장을 난처하게 했던 나는 아껴주시고 형님 같았던 중대장에게 죽으려고 작정하며 살아가야하는 서글펐던 내 인생을 마무리 하려 월남으로 보내달라 졸라서 월남전쟁에 참전하는 길을 택하게 된 참으로 요령없고 앞 뒤 계산없고 고지식하던 쌩뚱맞던 하사관이었나보다. |
첫댓글 추억이떠오르는 글립니다 잘보고갑니다
글을 올리고 답변을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이 글은 본인 사이트에 올렸던 글인데 월인전이 발족했다 하여 복사하여 올린 글입니다. 건강하세요...^^
고엽제 돌아가신 후에도 판정 받으면 아마 유족에게 혜택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보훈 처에 물어보시면 될턴데요 ..
더구나 암이면 말이죠
혼바산 일대를 쥐잡듯이 뒤졌던 기억이 한 순간에 몰려와 눈시울을 붉게 만드네여.리한 우리 파월 동지들... 그리고 혼바산에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한 순간도 방심 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생존께임.전우애. C-레이션.K-레이션. 타식조명탄.크레모아. 모기약. 3일분 전투식량. 수류탄 2발. 실탄 300발. 야간 매복..떤지. 어다우.라이라이. 슝어다우.께꼴락.똥통(대통령).M16 소총.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우리 전우들. 눔물 감사 OT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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