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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그대들
인간은 질병이다. 인간은 질병에 걸리지만 인간 자체도 질병이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독특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인간의 행운이며 인간의 불행이기도 하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나 근심, 긴장, 질병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상태 자체가 인간을 성장하게 만들었고 진화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질병'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질병은 인간을 역동적으로 만들었으며 활동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이것은 인간의 불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초조하고, 불행하며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외하면 어떤 동물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들을 미치게 하지 않는 한, 동물들은 스스로 미치지 않으며 신경과민이 되지도 않는다.
정글 속에 있는 동물들은 미치지 않지만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미치게 된다.
정글 속에서 사는 동물들은 변태가 되지 않지만 동물원에서 사는 동물들은 변태가 되고 만다.
어떤 동물도 자살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자살을 한다.
인간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고 이해하기 위해 이제까지 두 가지 방법이 시도되어 왔다
하나는 의학이고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학은 인간의 질병을 개별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을 알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의학은 신체의 각 부분에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명상은 인간 자체를 질병으로 여긴다. 명상은 바로 인간의 인격(personality)을 질병으로 여긴다.
의학에서는 질병이 인간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한다.즉, 질병이 인간의 외부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견해 차이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의학 역시 "질병을 치료하지 말고 환자를 치료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것은 질병이 다름 아닌 환자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질병들도 그 자체의 개체성과 특성이 있다.
만일 내가 결핵을 앓고 있고 그대 또한 결핵을 앓고 있다 해도 우리는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결핵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른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결핵을 치료한 방법이 그대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근원은 질병이 아니라 환자에게 있는 것이다.
의학은 인간의 질병을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명상은 인간을 깊은 내면에서부터 이해한다.
다시 말해 의학은 인간의 건강을 내부에서 가져오려 하지만, 명상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를 건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의학이 없다면 명상은 완전할 수 없다. 명상이 없다면 의학도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은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을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학적인 오류다
수천년 동안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별개의 실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인간은 오직 영혼뿐이라고 생각하여 육체를 등한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명상은 발달할 수 있었지만 의학은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학은 학문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육체가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사람들은 인간을 그저 육체로만 간주하여 영혼을 등한시하였다.
이들은 의학에서 많은 연구와 발전을 이루었지만 명상 쪽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은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다.
나는 이것도 언어학적인 오류라고 말한다.
인간이 육체이며 동시에 영혼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별도의 두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같은 기둥의 양쪽 끝이다.
인간을 제대로 통찰한다면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합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정신-육체(psycho-somatic)이거나 육체-정신(somato-psychic)이다.
혹은 마음-몸(mind-body)이거나 몸-마음(body-mind)이다.
나는 영혼 중에서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 육체이며,
육체 중에서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이 영혼이라고 정의한다.
비가시적인 육체가 영혼이며, 가시적인 영혼이 육체다.
육체와 영혼은 서로 다른 두 개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같은 실체가 서로 다른 진동상태에 있는 것이다.
육체와 영혼이 두 개라는 개념은 인류에게 막대한 해를 끼쳤다.
우리는 항상 '둘'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한다.
예전에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별개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분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물질이 에너지라고 말한다. 과거의 용어를 사용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질이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한 쪽에서 보면 물질로 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에너지로 보이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들은 둘이 아니다.
이것들은 같은 실체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육체와 영혼도 같은 실체의 양극(兩極)이다.
질병은 양극 중 어디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질병은 육체에서 시작하여 영혼에 이를 수 있다.
사실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진동은 영혼에서 느껴진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육체적으로 완치된 후에도 여전히 아프다고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질병은 육체를 떠났다. 의사는 아무 병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자는 여전히 아프다고 느끼며, 다 나았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양한 조사와 검사 결과 임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환자는 계속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환자는 의사들을 무척 괴롭힌다. 왜냐하면 모든 검사 결과가 질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이 없다는 것이 건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은 그 자체로 긍정적(Positive)인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이 없다는 것은 단지 부정적(negative)인 상태일 뿐이다
가령 우리는 가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시가 없다는 것은 단지 가시의 부재(不在)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꽃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의학은 아직 건강이 무엇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의학은 단지 질병이 무엇인지 밝혀 내려고 노력해 왔다.
의학자에게 질병에 대해 물어 본다면 그는 어떤 정의를 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는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는 질병이 없을 때 거기 남아 있는 것이 건강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기만(欺瞞)이지 정의(定義)가 아니다.
어떻게 건강을 질병과 연관지어 정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꽃을 가시와 연관지어, 삶을 죽음과 연관지어, 빛을 어둠과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남자를 여자와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으며 혹은 여자를 남자와 연관지어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의학은 아직까지 건강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다.
의학은 단지 질병이 무엇인지만을 말해 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의학은 모든 것을 표면에서 파악하며 단지 육체에 나타난 것만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표면에서는 질병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은 오직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힌두어의 스와스티아(swasthya)라는 말은 정말 훌륭하다.
영어의 '건강(health)'이라는 말은 스와스티아와 동의어가 아니다.
'건강(health)'은 '치료(healing)'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질병과도 관련된 개념이다.
건강은 '치료되었다(healed)'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은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사람을 의미한다.
스와스티아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와스티아는 자기 자신 속에 정착한 사람, 자기 자신에 도달한 사람을 의미한다.
스와스티아는 자기 자신 속에서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스와스티아가 건강과 다른 점이다.
사실 세상의 어느 언어에도 스와스티아에 비견될 만한 단어는 없다.
세상의 언어에는 '질병(disease)' 혹은 '질병없음(nodisease)'이라는 말들의 동의어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와스티아의 개념은 바로 질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질병이 없다는 것은 스와스티아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스와스티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다른 극(極)에서 온 어떤 것, 내면에서 온 어떤 것이 필요하다.
비록 질병이 표면에서 시작되더라도 그 진동은 영혼에까지 울려 퍼진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다고 가정해 보자
돌이 수면에 떨어지면 그곳에서는 소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생긴 파문(波紋)은 돌이 떨어지지 않은 호수의 저쪽 기슭에까지 이른다.
이와 유사하게 육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파문은 영혼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임상의학이 단지 육체만 치료한다면 저쪽 기슭에 도달한 파문들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호수에 돌을 던지고 돌이 떨어진 곳에만 집중한다면 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 파문들은 어떻게 될까?
일단 사람이 질병에 걸리면 그 진동은 영혼 속으로 들어간다.
종종 육체가 치료를 받아 완쾌된 다음에도 질병이 존속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질병이 존속하는 것은 그 진동이 환자의 가장 깊은 존재에까지 메아리 쳤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학도 아직까지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명상이 없다면 의학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질병은 치료할 수 있지만 환자를 치료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질병만 치료되고 환자는 치료되지 않아서 환자가 항상 다시 찾아온다면 의사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다!
질병은 반대극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 존재하는 상태 속에 이미 질병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이미 많은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식으로 질병애 걸리거나 초조해하지 않으며 긴장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동물도 마음 속에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는 개다. 개는 다른 것이 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아직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개에게 개 이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개는 동등하게 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어떤 인간에게 인간 이하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동물은 완전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인간은 완전해지기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
이런 불완전한 상태가 인간의 질병이다.
인간이 24시간내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자가 되더라도 단지 괴로움의 수준만 바뀔 뿐, 괴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은 결코 부자가 가지고 있는 근심을 가질 수 없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최소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즉,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자의 근심에는 합당한 근거가 없다.
부자는 자신이 근심하는 이유조차 정확히 모른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근심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유가 있다면 안심할 수 있고 위안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유를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근심이 생긴다면 문제는 커진다.
가난한 국가들은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부유해지는 날 부유한 나라도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인류가 가난한 자의 고통이 아니라 부유한 자의 고통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문제라면 부유한 자의 고통을 선택하는것이 더 낫다.
그러나 그때 초조해지는 정도는 더 심해질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불안과 근심은 세계의 어느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것보다 크다.
비록 어느 사회도 미국만큼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을 보면 환멸이 최초로 고개를 든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처음으로 환상이 깨져 버린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근심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미국에서 밝혀졌다.
인간 자신이 바로 근심이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근심거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인격은 끊임없이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요구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날이 갈수록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가 이미 성취한 것은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니체는 어느 책에선가 인간은 두 개의 불가능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 라고 말했다
인간은 항상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고 하며, 항상 완전해 지려고 한다.
모든 종교가 탄생한 것은 바로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한때 지구상에는 성직자가 의사이기도 하던, 즉 종교 지도자가 의사이기도 하던 때가 있었다.
한 사람이 성직자이면서 의사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같은 상황을 다시 맞이하게 된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단지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의사가 성직자를 겸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육체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졌고,
아울러 육체가 완전히 건강하다 해도 이런저런 문제가 증가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면에 존재하는, 육체와는 다른 측면에 존재하는 질병을 처음으로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기관 역시 원인을 필요로 한다.
만일 다리에 가시가 박히면 그제서야 우리는 다리를 느끼게 된다.
가시가 다리를 찌르지 않는 한 우리는 다리를 의식하지 못한다.
다리에 가시가 박히면 그 사람의 영혼은 화살처럼 다리를 향하게 되고, 자연히 다리에만 관심을 쏟게 된다.
그러나 다리에서 가시가 제거되면 우리는 또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된다.
비록 허기가 채워지고, 좋은 옷을 입고, 집이 잘 정돈되어 있고 원하던 아내를 얻는다 해도
-세상에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지만-그대는 또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자기가 원하던 아내를 얻은 사람의 고통은 끝이 없다.
원하던 아내를 얻지 못한다면 최소한 희망 속에서 약간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하던 아내를 얻게 되면 그것마저도 잃게 된다.
정신병원에 관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정신병원을 방문했다.
병원장은 그에게 병실을 구경시켜 주었다.
어느 독방 앞에서 그가 원장에게 물었다.
"이 환자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자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얻지 못해 미쳤습니다 "
다른 독방에서는 한 환자가 창살을 두드리고, 가슴을 치며 머리털을 잡아뽑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자
원장은 이 사람은 아까 그 사람이 얻지 못한 여자를 얻었는데 그래서 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한 첫번째 사람은 미쳤으면서도 그녀의 사진을 가슴에 지닌 채 행복해했지만,
두번째 사람은 창살에 머리를 부딪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한 연인들은 참으로 다행이다!
사실 우리는 얻지 못한 것을 희망하며 그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희망하던 것을 성취하게 되면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면서 허탈해진다.
의사가 인간의 육체적 문제를 해결하면 그날부터 그는 다음 차원의 일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 인간은 내면의 질병을 자각할 것이다.
처음으로 그는 내면의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며 표면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정상이 아님을 알고 의아해할 것이다.
인도의 24명의 티르탕카라(tirthankara)가 모두 왕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붓다도 왕자였고 라마와 크리슈나도 모두 왕족 출신이다.
이들에게는 육체 차원의 불안은 사라졌다. 그러나 내면에서의 불안이 시작된 것이다.
의학은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도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질병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간이라는 질병은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은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은 그가 얻은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며, 그가 얻지 못한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질병이다.
인간이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다른 모든 질병은 의사들이 치료를 하고 의학이 치료를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이 특별한 질병은 오직 명상으로만 치료가 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의 내면을 분해하고 내면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날, 의학은 완전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해하기로는 우리의 내면에 앉아 있는 병든 자가 육체 차원의 수많은 질병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육체가 아플 때마다 그 진동, 그 파문은 영혼에서도 느껴진다.
이와 유사하게, 영혼이 병든다면 그 파문은 육체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세상에 그토록 많은 치료법이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병리학(病理學)이 진정한 학문이라면 수천 가지나 되는 치료법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질병은 수천 가지나 되므로 그런 일도 가능한 것이다.
어떤 질병들은 역증요법(逆症療法)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
<역증요법 : 치료하려는 질환과 반대되는 증상을 일으키는 약제를 쓰는 치료법, 이증요법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하여 표면으로 옮겨온 질병들은 역증요법이 소용이 없다.
표면에서 시작하여 내면으로 들어간 질병들은 역증요법이 매우 효과적이다.
내면에서 표면으로 옮겨온 질병들은 결코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육체에 나타났을 뿐이다.
이런 질병들의 기원은 항상 정신 속에 있거나,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영혼 속에 있다.
만일 누군가가 정신 속에 질병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어떤 임상적인 약물로도 구제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해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약물이 작용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약물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반드시 어떤 해를 끼치게 되어 있다. 아무 약효가 없는 약만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
가령, 동종요법(同種療法)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동종요법은 아무 약효가 없기 때문이다.
<동종요법 : 19세기에 널리 쓰인 치료법의 하나로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치료한다"는 원칙에 기초하여, 건강한 사람에게
투여했을 경우 어떤 질병이 나타나는 약물을 그와 같은 질병에 걸렸을때 소량씩 투여하며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그렇지만 동종요법은 효과가 있다. 동종요법은 약효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효과를 본다는 것과 약효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두 개의 독립된 현상이다.
누군가가 정신 차원에서 질병을 만들어 내고 있고 그래서 어떤 플라시보(placebo)가 필요하다면, 그는 효과를 보게 된다.
그에게는 플라시보가 필요하며, 위안이 필요하다.
그에게는 자신이 아픈 것이 아니라 단지 아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이런 확신은 탁발승의 유골이나 신성한 갠지스 강물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플라시보라고 부르는 위약(僞藥)에 데한 실험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만일 열 명의 사람이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그 중의 세 명은 역증요법으로 치료받고, 다른 세 명은 동종요법으로,
나머지 세 명은 자연요법(自然療法))으로 치료받고 있다면, 흥미있는 결과가 발생한다.
이 세 요법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비율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비율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내가 보기엔 역증요법만이 과학적인 치료법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비과학적인 면이 있으므로 과학적인 치료법만으로는 효과를 얻기 힘들다.
역증요법만이 인간의 육체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룬다
그러나 역증요법만으로는 모든 질병을 100퍼센트 치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조적이며 투사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증요법이 듣지 않는 사람은 비과학적인 이유 때문에 앓고 있는 것이다.
비과학적인 이유 때문에 앓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대는 과학적인 치료법과 비과학적인 치료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과학적인 질병과 비과학적인 질병이 있다고 말한다.
비과학적인 질병이란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을 뜻한다.
정신에서 시작해서 육체에 나타나는 모든 질병은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치료될 수 없다.
나는 장님이 된 젊은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가 장님이 된 것은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은 손상되지 않았다
안구 전문가들은 그녀의 눈이 정상이며 그녀가 모든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누구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불길 속으로 안내한다면 그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벽에 머리를 부딪혀 다치곤 하였다.
그녀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질병은 의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나에게 데려왔고 나는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의 가족이 그 사람을 보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묻자 그녀는 이 세상에서 그녀의 연인말고는 어느 누구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연인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보지 않겠다는 이 결심‥‥‥
그리고 결심이 그 정도로 강하다면 심리적으로 눈은 장님이 된다.
눈은 장님이 되어 어떤 것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해부해 보아도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눈의 해부학적인 구조는 정상이겠지만, 보는 메커니즘은 기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눈 뒤에 있던 보는 자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매일 경험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육체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육체 속에 현존해 있는 동안에만 작용한다.
다리에 상처를 입은 채 하키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을 생각해 보자,
그는 피를 흘리고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데 30분 뒤에 경기가 끝나면 그는 자신의 다리를 보고 언제 다쳤느냐고 고함을 치며 묻기 시작한다. 통증이 심해진 것이다.
이제 그가 다친 지 30분이 지났다.
그는 다리를 다쳤으며, 다리에 있는 감각 메커니즘은 완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왜냐하면 30분 뒤에 그에게 통증을 알려준 것은 감각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리의 통증은 왜 좀더 일찍 전달되지 않았을까?
그의 관심은 다리에 있지 않고 경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다리를 인식할 수 없었다.
다리는 계속해서 그에게 정보를 주었고 -근육과 신경이 경련을 일으켰음에 틀림없다-가능한 모든 창구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거나 혹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부재(不在)중이었으며 현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30분 뒤에 되돌아왔을 때, 다리에 상처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그녀의 가족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자 부분적인 자살, 즉 눈의 자살을 한 것이라고 가족에게 말해 주었다.
부분적인 자살을 한 것말고는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녀의 연인을 만나게 하라.
가족들은 말했다 "그것이 눈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일단 그렇게 해 보라고 했다.
그녀가 연인을 만나도 되고, 연인이 5시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문 앞에 가서 기다렸다.
그녀의 눈은 정상이 된 것이다!
이것은 허위가 아니다. 최면술의 실험들은 이것이 허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일 깊은 최면에 빠진 사람에게 조약돌을 쥐어 주고 그것이 뜨거운 석탄 조각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타다 남은 불씨를 쥐고 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는 조약돌을 집어던지고 불에 데었다고 울부짖으며 소리칠 것이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실제로 물집까지 생길 것이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불타는 석탄을 쥐고 있다는 상상만으로 손에 물집이 생겼다면 육체 차원에서 이 물집을 치료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물집은 마음의 차원에서 치료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한쪽 면만을 고려했기 때문에 육체에 침범한 질병들을 서서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음에서 기인하는 질병들은 증가하였다.
오늘날에는 과학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최소한 50퍼센트의 질병이 마음에서 생긴다는 사실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마음의 질병에 걸리려면, 먼저 강한 마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아직 95퍼센트의 질병이 육체에서 생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마음에서 생기는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
마음에서 생기는 질병은 보통 내면에서 시작하여 표면으로 번져 나온다. 이것들은 표면으로 나오는 질병이다
그러나 육체에서 시작하는 질병은 안으로 들어가는 질병이다.
정신에서 기인한 질병이 육체에 발현(發顯)한 것을 치료하려 한다면 질병은 즉시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정신에서 기인한 질병이 한두 군데 혹은 두세 군데에서 나타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의사들은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사들은 질병을 여러 가지 형태로 늘려 놓은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한 군데를 통해서 나을 수 있는 것이 이제 여러 군데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엉뚱한 곳에 댐을 쌓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은 인간의 다른 측면을 치료한다.
약물은 물질에 의존하며 그 화학적 구조에 의존하지만, 명상은 의식(意識)에 의존한다.
비록 사람들은 명상에 사용되는 알약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그런 알약은 없다.
LSDI나 메스칼린(mescalin), 마리화나(marijLlana) 등 수천 가지의 것들이 시도되었다.
명상을 위한 알약을 만들려는 수많은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알약은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런 알약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육체 차원에서만 치료를 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낡은 고집일 뿐이다.
정신이 내면에서 병들었어도 우리는 표면만 치료할 뿐, 결코 내면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는다.
메스칼린이나 LSD 같은 마약은 내면이 건강하다는 환상을 줄 뿐, 실제로 내면을 건강하게 하지는 못한다.
어떤 화학 물질을 통해서도 인간의 내면 깊숙한 존재 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화학 물질의 효과는 약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접근 방식은 덜 중요해진다.
내면에서는 비물질적인 접근 방식, 혹은 정신적인 접근 방식이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편견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의사라는 직업은 세상에서 가장 인습적인 직업 중 하나이다.
교수와 의사는 인습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그들은 여간해서는 낡은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아마도 매우 당연한 이유일 것이다.
의사나 교수가 낡은 생각을 버리고 융통성을 갖게 된다면 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만일 사물들이 고정되어 있다면 그들은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개념들이 불확실하거나 유동적인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변함이 없다면 그들은 가르치는 동안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들조차도 교수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큼의 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수는 자기가 말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직업상 이런 종류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은 인습적이 된다.
교사들은 점차 인습적이 된다. 이것은 커다란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교육은 가장 인습적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이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사들이 발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대학에는 수많은 교수들이 있지만 발명이나 발견은 대학 밖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노벨상 수상자의 70퍼센트 이상이 대학 밖의 사람들이다.
인습으로 가득 차 있는 또 다른 직업이 의사라는 직업이다. 거기에도 역시 직업적인 이유가 있다.
의사들은 매우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환자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의사들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환자는 죽고 단지 생각만 남을 것이다.
의사들이 매우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이론을 실습하며, 매번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다면 거기에도 역시 위험이 따른다.
의사는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며,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은 주로 과거의 지식에 의존한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매일 즉석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과거의 지식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업(醫療業)은 의학적 연구에 비해 30년이나 뒤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환자들이 불필요하게 죽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시도되지 못하는 것들이 곧 시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직업적인 위험 요소이다.
그리고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 가운데 몇 가지는 그들 내면에 매우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인간보다 약을 더 신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意識)보다 화학을 더 신뢰하며, 의식보다 화학을 더 중요시한다 이런 태도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화학에 더 많은 중요성이 부여될 때 의식에 대해서는 아무 실험도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예를 몇 가지 들려줄 테니 아이디어를 얻기 바란다.
아이를 낳을 때 산고(産苦) 없이 출산하는 것, 즉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오래된 과제였다.
물론 성직자들은 고통 없이 아이를 낳는 것에 반대한다.
사실 성직자들은 세상에서 고통과 근심이 사라진다는 생각 자체에 반대한다.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지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직업은 의미를 잃게 된다
세상에 고통과 근심과 불행이 있다면 그때는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 고통이 없다면 아마 신조차도 완전히 무시될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 있을 때에만 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항상 고통 없는 분만에 반대해 왔다. 그들은 출산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출산의 고통은 없어져야 한다. 출산의 고통이 신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신도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의사는 고통 없는 출산을 위해 약물을 투여하거나 마취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의사들이 취하는 이런 조치는 산모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여자들 스스로도 이것을 시행해 왔다‥‥‥
75퍼센트의 아이들이 밤에 태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낮에는 산모도 매우 활동적이며 깨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일이 어렵다.
잠들어 있을 때 산모는 좀더 이완되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기 수월한 것이다.
밤에는 산모도 잠을 자며 좀더 이완되어 있다.
그래서 75퍼센트의 아이들은 태양이 떠 있을 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 산모는 아이가 태어나려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장애를 만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는 나중에도 많은 장애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산모는 장애를 만들기 시작한다.
의사들이 취하는 조치 중의 하나는 약물을 투여해서 산모의 육체를 잠잘 때처럼 이완시키는 것이다.
이런 조치가 취해지고 있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의식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신뢰가 계속 줄어들면 의식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로젬(Lozem)이라는 의사는 인간의 의식을 신뢰했다.
그래서 수천 건의 무통 분만을 유도해 냈다. 이 방법은 산모의 의식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산모는 출산시에 명상적으로, 의식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가 출산에 대항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출산을 환영하게 해야 한다.
출산의 고통은 아이의 탄생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산모가 아이의 탄생에 저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산모는 아이의 탄생과 관련된 신체의 모든 메커니즘을 위축시키려고 한다.
출산의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서 생긴 이 저항이 아이의 탄생을 막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려고 할 때, 두 사람 사이에는 난투가 벌어진다. 산모와 아이 사이에는 커다란 충돌이 생긴다.
이런 싸움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이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싸움과 저항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산모의 저항을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산모에게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는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 이유가 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아이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사실은 두 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태어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의 여자가 어머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무의식 상태에서 태어나면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가 일그러진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태어나지 않고 단지 유모만 남게 될 것이다.
나는 화학 물질이나 다른 피상적인 방법으로 산모를 진정시켜서 아이를 출산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산모는 분만하는 동안 충분히 의식적이어야 한다. 바로 그 의식 속에서 어머니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 사실을 통감한다면 산모의 의식은 분만에 대비해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산모는 명상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
명상은 산모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산모가 저항하거나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모는 분만 과정에 협조해야 한다
마치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바람이 불듯이, 낙엽이 떨어지듯이
산모는 자기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에 완전히 협조해야 한다.
만일 산모가 분만시에 완전히 협조하고, 저항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명상적으로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면, 고통 없는 출산이 가능하다.
고통은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이 방법을 이용한 많은 실험들이 행해졌다.
앞으로 산모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파급효과는 상당히 클 것이다.
첫째, 우리는 처음 대할 때부터 고통을 주는 일이나 사람에게는 나쁜 감정을 갖기 시작한다.
처음 만날 때부터 싸우게 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적의(敵意)를 갖게 된다. 이것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
처음부터 마찰을 일으켰던 사람과는 협조라는 교량을 만들기가 어렵다.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산모가 아이를 낳는 데 협조할 수 있고, 충분한 각성 속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여기 흥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말은 들어 왔지만 '출산의 행복'이라는 말은 결코 들어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모가 충분히 협조한다면 '출산의 행복'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통 없는 탄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탄생에 찬성하는 것이다.
의학의 도움으로는 기껏해야 고통 없는 탄생을 이를 수 있을 뿐, 결코 행복한 탄생을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의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행복한 탄생을 이를 수 있다
그리고 탄생의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산모와 아이 사이에 의식적인 내면의 연결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면으로부터도 무엇인가가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한 가지 실례에 불과하다.
질병에 걸릴 때마다 우리는 단지 표면에서만 질병과 싸우려고 한다.
문제는 환자가 내면에서도 정말 질병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사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질병은 환자가 자초(自招)한 것일 가능성도 많다. 사실 환자가 자초한 질병의 수는 많다.
제 스스로 찾아오는 질병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질병은 환자가 자초한 것이다.
물론 질병이 찾아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그 질병을 초대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있는 어느 사회에서도 성교와 아이의 탄생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없었다
거기에는 아홉 달이라는 긴 시간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원인과 결과를 서로 연결 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교가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굳이 그 둘을 연결시켜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인간이 아홉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지금 아이의 탄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질병과 관련해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종종 질병을 초대하지만 질병은 나중에야 찾아온다.
그 둘 사이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우리는 둘 사이에서 어떤 연결 고리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파산 직전에 놓였던 한 남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시장이나 상점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거리를 걷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어느 날 그는 욕실에서 나오다가 넘어져서 그만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온갖 방법으로 치료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반신불수가 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반신불수가 되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혹은 그가 반신불수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는지 아닌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 그는 반신불수에 대해서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혹은 그의 무의식에서
그는 시장이나 상점이나 거리에 나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것이 첫번째다.
둘째, 그는 사람들이 덜 적대적이기를 바랐다. 그는 사람들이 동정심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이제 육체가 그를 도와 줄 것이다. 육체는 항상 그림자처럼 마음을 따른다. 육체는 항상 마음을 도와 준다.
그리고 마음은 항상 모든 조치를 취해 준다. 사실 우리는 마음이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대가 하루 종일 굶었다면 마음의 배려에 의해 밤에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마음은 꿈속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하루 종일 굶었으므로 틀림없이 시장할 것이다. 그러나 궁전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석하라'
그대는 꿈속에서 음식을 먹게될 것이다.
마음은 육체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조치를 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속에서 보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마련한 대용품이다.
낮에 할 수 없었던 것을 밤에 하는 것이다. 마음이 모든 조치를 취해 준다.
가령 밤에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마음이 알람을 울려 줄 것이다 마음은 꿈속에서 그대를 화장실에 보낼 것이다.
그래서 방광의 긴장을 덜 느낄 것이다. 그대는 화장실에 다녀왔으므로 모든 것이 편안하다고 느낄 것이다.
수면이 방해받지 않도록 마음이 조치를 취한 것이다. 마음은 그대의 욕망이 충족되도록 하루 종일 조치를 취한다.
이 남자는 반신불수가 되어 쓰러졌다. 이제 우리는 그의 반신불수를 치료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치료는 사실 그에게 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반신불수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병을 부른 것이다.
그의 반신불수를 치료하더라도 그는 두번째나 세번째 혹은 네번째 질병에 걸릴 것이다.
그는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질병으로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쓰러지자마자 그는 모든 상황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이 비관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변명거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제 그는 채권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가 어떻게 당신 돈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보지 못합니까?"
사실 채권자는 돈을 달라고 하기가 부끄러울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를 돌보고 아이들은 시중을 들고 그럴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이 그를 만나러 올 것이고,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가 질병에 걸리기 전에는 결코 그에게 사랑을 보여 주지 앉는다.
그러니 사랑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질병에 걸려야 한다.
여자들이 항상 질병에 걸리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리 남편들을 집에 잡아 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집에 잡아 둘 수 없지만 질병은 남편을 잡아 둘 수 있다.
일단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이것이 마음 속에 새겨진다면, 우리는 동정을 받고 싶을 때마다 질병에 걸리게 된다.
사실 아픈 사람에게 동정심을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동정심을 통해 그의 질병에 어떤 냄새가 더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대는 단지 그를 치료해야 할 뿐이다.
반신불수가 된 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기껏해야 그로 하여금 질병의 종류만 계속 바꾸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질병에 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깊은 자기암시일 뿐이다
이 남자의 반신불수는 그 기원(起源)이 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반신불수가 된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해 동안 반신불수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일어설 수도 없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불이 나자 가족이 모두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그들은 이 남자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남자가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남자는 앉아 있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가족이 그가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 남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사람들을 놀린 것이 아니다.
그의 질병은 육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환자의 질병이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할 때 환자는 그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 말은 환자가 불필요하게 질병을 앓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아프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사람은 없다.
질병에 걸리는 데에는 정신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육체가 질병에 걸리는 이유만큼이나 중요하다.
혹은 그보다도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실제로 육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가 비록 실수로라도 어떤 환자에게
그가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질병에 걸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의사의 잘못이다.
환자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의사에게 씁쓸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태도를 갖지 못한다.
만일 내가 다리를 다쳤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동정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이 아프다면 사람들은 마치 내가 무슨 잘못이나 한 것처럼 그것이 정신적인 질병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내가 다리를 다쳤다면 나는 동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을 앓고 있다면 그것이 마치 내 잘못인 양, 나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마음에서 기인하는 질병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의사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의사들은 단지 육체에서 기인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법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들은 의사의 치료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질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그는 이런 질병이 자신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그대에게 다른 타입의 의사를 찾아보라고 조언해 주어야 한다.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은 먼저 내면을 치료한 이후에 표면을 치료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은 안에서 바깥으로 치료해 나가는 방법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붓다를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철학자입니까? 아니면 사색가입니까? 아니면 성자 혹은 요기(yogi)입니까?"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단지 치료하는 사람, 즉 의사일 뿐이다. "
붓다의 이 대답은 정말로 경이롭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단지 치료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면의 질병에 대해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 그대와 이야기하고 있다.
육체에서 기인한 질병을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으므로
마음에서 기인한 질병에 대해서도 무슨 조치를 취해아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날,
우리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 우리는 의학과 명상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 간격을 메우는 데 의학보다 더 도움이 되는 학문은 없다.
화학은 아직 종교에 가까워질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물리학과 수학도 아직은 종교에 가까워질 이유가 없다.
수학은 종교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수학이 종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대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수학이 종교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수학은 그 게임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다. 수학은 단지 게임일 뿐,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명을 다루고 있다.
아마 처음으로 종교와 과학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은 의사일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은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문명이 발달하고 이해력이 있는 나라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다.
의사들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jung))은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근본적으로 종교가 없어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그는 의사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지적이다.
만일 환자들에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면 그들은 다시 건강해질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은 알아둘 만하다. 삶이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되면‥‥‥
서른다섯 살까지는 오르막길이나 그 이후의 삶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된다. 서른다섯이 삶의 절정이다.
그러므로 서른다섯 살까지는 명상에서 가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까지는 육체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마 이 단계에서의 모든 질병은 육체의 질병일 것이다.
그러나 서른다섯 살 이후의 질병은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제 삶은 죽음을 향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성장할 때 그것은 외부로 확장된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에는 안으로 수축한다.
노년기는 안으로 수축해야 하는 시기이다.
노인들의 모든 질병은 대부분 죽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아무개가 이런저런 질병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개가 죽음 때문에 질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질병에 걸리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는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며 질병에 걸리기 시작한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내일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질병에 걸릴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이다. 체온이나 혈압, 맥박 등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이다.
청진기로도 아무 이상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일 죽게 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릴 것이다.
24시간 안에 걸릴 수도 없는 수많은 질병에 걸릴 것이다.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모든 질병에 대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이다. 그는 질병에 저항하기를 그만둔 것이다.
그는 죽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내면에서 모든 질병에 대해 보호막을 만들어 주던 의식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이제 그는 죽을 준비가 되었으므로 질병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은퇴한 사람들이 일찍 죽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퇴하려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
은퇴한 사람들은 5년이나 6년 정도 일찍 죽는다.
일흔 살에 죽을 사람은 예순 다섯 살에, 여든 살에 죽을 사람은 일흔다섯 살에 죽을 것이다.
은퇴하고 있는 10년이나 15년의 세월은 죽음을 준비하는 데 소비될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삶에서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거리에서도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가 사무실에 있을 때는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경제 원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사무실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으며 이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계속 인사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그를 잊을 것이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뿌리째 뽑힌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자식들도 자기 아내들과 극장에 가기 바쁘다.
전에는 그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갑자기 그는 나약해지며 죽음에 대해 완전히 열려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언제 내면에서 건강해지는가?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내면 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는 때이다. 보통 우리는 내면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느낌은 손이나 다리, 머리, 가슴 등 모두 육체와 관련된 것이다. 거기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없다
우리의 모든 자각은 집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집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일 집이 무너진다면 나는 내가 무너진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 자체가 나에게 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단지 집에 거주하고 있을 뿐이며, 비록 집이 무너져도 나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그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명상을 하지 않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명상의 첫번째 의미는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 속에 있는 동안, 의식은 항상 다른 것을 자각한다. 의식은 결코 의식 자체를 자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홀로 앉아 있을 때 졸음을 느끼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고 있다면 깨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어두운 방에 홀로 있으면 졸음이 올 것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므로 의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면 잠자는 것말고 무엇을 하겠는가? 달리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이 홀로 있다면, 잠이 그대를 엄습할 것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잠과 명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같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라.
잠은 홀로 있지만 혼수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명상은 홀로 있지만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홀로 있을 때 그대 자신을 자각할 수 있다.
어느 날 붓다와 함께 앉아 있던 사람이 발을 흔들고 있었다.
붓다가 그에게 물었다.
"왜 발을 흔들고 있는가?"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괘념치 마십시오. 단지 발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발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
붓다가 말했다.
"발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그 발은 누구의 발인가? 그대의 발인가?"
그 남자가 말했다.
"그것은 제 발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까? 어서 하시던 말씀을 계속해 주십시오."
붓다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발의 움직임을 자각하도록 하라. 그러면 두 줄기의 각성이 생길 것이다.
그대는 발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주시자도 자각하게 될 것이다. "
자각은 항상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밖으로 진행하고 다른 하나는 내면을 관통한다.
그러므로 명상의 기본은 육체와 자신을 동시에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이 생기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의학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한다면 인간이라는 질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을 연장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금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
사람들은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죽음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의학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킨 나라에서 어떤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는가?
바로 안락사를 위한 운동이다. 노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헌법에 명시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그들을 병원에 묶어 둘 뿐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산소 탱크에 넣어서 끝없이 살아 있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를 계속 살아 있게 할 수 있지만 그런 삶은 죽음보다도 못하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산소 탱크에 연결된 채,
거꾸로 혹은 다른 이상한 자세로 병원에 누워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금세기 말이면 세상에 있는 모든 문명국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헌법상의 인권으로 갖게 될 것이다.
당사자의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계속 살아 있게 할 권리가 의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킴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다.
인간을 좀더 건강하게 하는 것 역시, 그를 좀더 행복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는 결코 죽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런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명상은 이런 불멸성, 즉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오직 껍데기만이 죽을 뿐이다.
그대는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육체를 돌봄으로써 육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그대의 문 앞에 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자각해야 한다.
이렇게 내면을 이해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내면에서의 명상과 표면에서의 치료를 통해 의학은 완전한 학문이 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명상과 의학은 같은 과학의 양극(兩極)이다. 그러나 아직 연결 고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서히 명상과 의학은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주요 병원에서는 최면술사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최면은 명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걸음 다가선 것이다
최소한 인간의 의식에 대해 무엇인가가 행해져야 하며, 육체를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현재는 최면술사가 병원에 들어갔으므로 다음에는 사원(寺院)이 병원에 들어갈 것이다. 아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면술사 다음으로는 모든 병원이 요가과(yoga科)나 명상과(冥想科)를 신설할 것이다.
사실 그래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육체는 의사들이 돌볼 것이고, 마음은 심리학자들이 돌볼 것이며, 영혼은 요가나 명상이 돌볼 것이다.
병원이 인간을 전체로서 받아들이고 전체로서 치료하는 날, 그날은 인류에게 환희의 날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그날이 빨리 올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사랑과 침묵으로 나의 이야기를 경청해 준 그대들에게 감사하다.
끝으로 그대들 모두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신에게 인사드린다. 나의 인사를 받아 주기를.
-OSHO-
園 譯註
1) 구자라트 : 인도의 서해안에 있는 주(州).
2) 아마다바드(Ahmadabad) : 구자라트 주(州)의 주요 도시로 서인도에서는
봄베이 다음가는 대도시다.
3) 임상의학(臨床醫學, clinical medicine) · 직접 환자와 접촉하면서 진료하는
의학의 한 부문. 의학은 기초의학·사회의학 임상의학으로 대별된다.
4) 티르탕카라(tirthankara) :자이나교에서, 윤회라는 삶의 흐름을 건너는 데
성공한 후 다른 사람들이 따를 길을 만든 구원자를 가리키는 말. 자이나교
신앙에 따르면 각각의 우주적 주기마다 24명의 티르탕카라가 나타난다고 한다.
티르탕카라는 회화나 조각에서는 카요트사르가(kayotsarga 육신으로부터의 해탈)
라고 알려진 부동의 자세로 서 있거나, 사자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형상은 종종 대리석 또는 그
밖에 매우 반들반들한 돌이나 금속에 새겨지는데, 그 차가운 느낌을 주는 표면은
일상세계에 대한 냉엄한 초연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티르탕카라들은
완벽한 존재이므로 상징적인 색깔이나 표상을 제외하고는 서로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5) 라마(Rama) :가장 널리 숭앙받는 힌두교 신들 중의 하나로 무용(武勇)과
미덕의 화신. 인도 전승(傳承)에 따르면 세 명의 라마(파라슈라마·발라라마·
라마찬드라)가 나오지만, 라마라는 이름은 주신(主神)인 비슈누의 일곱번째
화신인 라마찬드라를 주로 가리킨다. 라마는 고대 인도의 영웅으로서 뒤에는
신격화 되었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6) 크리슈나(Krishhna) 인도의 신들 가운데 가장 널리 숭배되고 사랑받는 신의
하나. 최고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고 힌두교 비슈누 신의 여덟번째 아바타라
(avatars)로 숭배되기도 한다. 박티(bhakti)를 강조하는 수많은 종파들이
크리슈나를 중심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오랜 세월 시 ·음악·회화 등의
분야에서 풍부한 종교적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가장 널리 알려진 크리슈나의 모습은
청년 크리슈나가 그를 흠모하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피리를 부는 모습이다.
7) 병리학(病理學, pathology)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질병 발생의 기전
(機轉), 시간 경과에 따른 장기(臟器)조직의 변화를 육안적 ·조직학적으로
관찰하며, 아울러 기능적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궁극적으로 질병의 본태를 밝히고,
시간의 경과에 따르는 형태학적 ·기능적 변화를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8) 역증요법 : 치료하려는 질환과 전혀 반대의 증상을
일으키는 약제를 쓰는 치료법. 이증요법(異症療法)이라고도 한다.
9) 동종요법(同種療法, homeopathy) : 19세기에 널리 쓰인 치료법의 하나로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치료한다(like cures like)"는 원칙에 기초하여,
건강한 사람에겐 투여했을 경우 어떤 질병이 나타나는 약물을, 그와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에 소량씩 투여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동종질환동종치료
(同種疾患同種治療法)에 기초한 이 치료체계는 1796년 독일의 의사 사무
하네만이 도입했다. 이 치료법의 기본 요점은 첫째, 건강한 사람에게서 그 병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는 약물이나 치료법이 질병치료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둘째 특정 약물이 치료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사람에게서
그 효과가 '증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동종요법의 또 다른 특징은 용량론이다.
동종요법 전문가들은 의약품이 매우 소량 투여되어도 작용한다고 믿는다.
20세기에 들어서 동종요법은 의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호응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특히 질병의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질병의 원인을 밝혀 내려는 연구에는
소홀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10) 플라시보(placebo) 약리작용을 갖지 않았거나 가졌더라도 직접적인
결과보다는 심리적인 효과를 목적으로 환자에게 약을 투여하는 것으로, 가약
또는 위약이라고도 한다. 플라시보는 라틴어의 placere(위로하다
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보통 유당(乳糖, lactose)을 많이 사용한다.
11) 자연요법(自然療法) ·공기 태양열 ·물·온천 · 열 등
자연계의 물질이나 환경을 치료에 응용하는 물리요법을 말한다. 화학요법이나
침술요법 등을 위주로 하는 현대 임상의학과는 대립적인 면이 있는 요법으로
의료 및 건강법의 보조적인 부분이다.
12) LSD : 맥각(麥角) 알칼로이드의 일종인
리세르그산 디에칠아미드의 약칭으로, 리세르기드라고도 한다
LSD는 입을 통해 20mg만 섭취해도 중추신경계 및 말초신경계의 기능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물체의 윤곽은 파도치듯 찌부러져 보이고, 주위의
사람 또한 이살하게 보이며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객채의 변화로 전환되어,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색채나 형태가 변화한다. LSD를 연용하면
점차 효과가 저하되는 내성이 생긴다.
13) 메스칼린(mescaline) :선인장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구슬선인장의 일종인
로포포라(Lophophora williamsii)의 꽃머리 페요테(peyote)에 들어 있는
마취성 알칼로이드의 하나. 페요테는 선인장의 혹 위에 생긴 단추 모양의 것인 데
메스칼린 등의 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를 함유하고 있다. 이 성분은 진해
(鎭咳) ·진통 작용이 있으나 대마(大麻)처럼 명정( drunkenness) ·망상을
일으키며 구토 현기증 동공산대(瞳孔散大)를 일으키기도 한다. 중독되면
다채로운 색채가 나타나는 환시나 음악이 들리는 것 같은 환청 등이 나타난다.
14) 마리화나(marijuana) : 칸나비노이드(cannabinoide) · 하시시(hashish) -
대마(大麻)라고도 한다. 인도대마초(Cannabis sativa roar indicts)의 잎 꽃·
줄기를 말린 것으로, 옛날부터 아시아에서 끽연 등의 기호품이나 치료약으로
사용되어 왔다. 끽연 등의 수단으로 마리화나를 사용하면 도취상태가 되고,
비현실감·기분좋음·환각·망상 불온(不穩), 사고의 혼란, 공간 및 시간 감각
의 왜곡 등 정신변용(精神變容)을 초래하게 된다.
15)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Jung, 1875∼1961) :스위스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영향을 받아 분석심리학을 세웠으며 외향성
·내향성 성격, 원형(原型) 등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개인의 무의식 속에
역사적 배경을 가진 집단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 애들러 등과
함께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였으나 리비도에 대한 프로이트와의 의견대립으로
탈퇴한 후 치료와 저작에 전념하였다. 주요 저서로 (리비도의 변전과 상징기, 무의식의 심리학) 등이 있다.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앞으로 대추님 자료 보고 올릴만한 거 정리해서 하나하나 올릴게요(_ _)
작약님.....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