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켈틱 기독교와 일상의 영성
1. 켈틱 영성(Celtic Spirituality)
1) 켈트족(the Celts): 켈트인들은 과거 터키 지역에서 거주하다, 일부가 지금의 영국과 아일랜드 지방으로 이주한 종족이다. 인종적으로 볼 때, 앵글로 색슨이나 게르만족과는 구분되며, 또한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과도 구분된다. 오히려 그들은 터키 및 동유럽에서 비롯되었기에, 나중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서방교회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문화보다는 동방교회의 전통에 더욱 수용적이었다. 이들은 기질적으로는 매우 감성이 풍부하고, 더불어 즐기는 삶을 좋아하고,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살았다. 켈트인이라고 할 때는 우선 아일랜드 토착민들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판단되는 데, 단순히 아일랜드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가장 일찍 뿌리를 내린 원주민으로 볼 수 있다.
켈트인들은 비범한 예술적 영혼을 소유했던 민족이었다. 그들은 이미지와 상징, 이야기, 시 등을 매우 정교하고 다채롭게 즐기던 민족이었다. 기독교가 보급되기 전까지 켈트족은 드루이드교라고 하는 태양을 숭배하던 종교를 믿었다. 여기서 성직자 역할을 하던 드루이드들(the Druids)은 예언자이자, 재판관이며, 시인과 마술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켈트인들은 글을 몰랐으며 추상적인 개념 보다는 춤과 노래, 이야기,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익숙한 민족이었다.
2) 성 패트릭(St. Patrick): 성 패트릭은 390년경 영국의 북동부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16살 때 켈트족 해적에게 붙잡혀 아일랜드에 노예로 끌려온다. 그는 아일랜드의 어느 켈트 부족의 추장 아래서 소를 치는 목동으로 6년간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데, 춥고 황량한 벌판에서 밤새 가축을 돌보는 힘든 일들을 하면서, 소년 패트릭은 자신의 인생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세 가지 중요한 체험을 하게 된다. 비록 패트릭은 그의 할아버지가 사제였고, 어려서부터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노예로 붙잡혀 가기 전까지 다소 명목적인 신앙을 지녔던 것 같다. 하지만, 노예지에서의 삶은 오히려 그의 인생과 신앙을 질적으로 혁신시키는 성숙의 시기가 되었다.
첫째로, 벌판에서 소를 지키는 목동으로 일하는 동안 패트릭은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을 체험하는 소위 ‘자연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바람과 피조물, 별들이 빛나는 밤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했다. 이를 통해 패트릭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둘째로, 그는 아일랜드 캘트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력은 오직 그들과 더불어 살 때에만 가능한 심오한 차원의 것이었다. 셋째로, 패트릭은 자신을 노예로 붙잡아간 켈트인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소망하게 된다. 어느날 그는 켈트인들을 자기 민족으로 느끼게 되었다. (사실, 패트릭도 영국에 거주하던 켈트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노예로 잡혀 온지 6년 뒤, 어느 날 밤 패트릭은 꿈속에서 한 음성을 듣게 된다. “너는 이제 집에 돌아갈 것이다. 너를 위해서 배가 한 척 준비되어 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패트릭이 일어나 해안으로 가보니 배가 한 척 있었고, 패트릭은 그 배를 타고 고향으로 극적 귀환을 하게 된다. 그 뒤 패트릭은 로마에 가서 사제 수업을 받고 영국에서 수십 년간 사제로 봉직하였다. 그러던 중, 48살이 되던 해 패트릭은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는 또 다른 꿈을 꾸게 된다. 빅터(Victor)라고 하는 천사가 그에게 다가와 과거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추장의 편지를 주고 간 것이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 패트릭은 켈트족들이 절규하며 호소하는 소리를 듣는 듯 했다. “거룩한 노예 소년이여, 와서 우리를 도와 다오.”
다음 날 아침 패트릭은 자신의 꿈을 사도 바울이 들었던 ‘마케도니아인의 음성’과 같은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복음을 들고 아일랜드로 건너가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아일랜드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결국 패트릭은 아일랜드 지역의 주교로 첫 번째 선교사 주교로 임명받고, 일단의 사제 및 다른 신학생들과 더불어 주후 432년 아일랜드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로 오기 전에 이미 로마 교회는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측한다. 다만, 432년경 성 패트릭이 다시 발을 디뎠던 북 아일랜드 지역에 로마 교회의 교구가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5세기 초반 유럽의 정치판도가 불안정해졌고, 로마 교회가 유럽의 언저리에 있는 아일랜드 지역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일랜드 지역은 자연스럽게 로마 교회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지게 되었으며, 그다지 내실 있는 선교, 특히 토착민에 의한 전도의 열매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아일랜드의 ‘야만인’ 선교는 패트릭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패트릭의 켈트족 복음화가 성공을 이룬 데에는 몇 가지 유리한 정황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아일랜드 지역은 약 150개의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전체 인구는 20만에서 5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모두가 동일한 언어를 쓰고 있었으며, 패트릭은 이미 노예생활 시절 이들의 언어와 문화를 통달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이미 켈트족 선교를 위한 최적의 준비와 안목을 갖추고 있던 것이다. 또한 아일랜드에는 5세기까지 드루이드 종교 외에는 마땅한 외래 종교가 소개된 적이 없었다. 이는 켈트인들로 하여금 패트릭이 전하는 신선한 기독교 복음을 관심어린 자세로 듣게끔 해주도록 만들었으며, 게다가 과거 그들의 노예로 부당하게 일했던 자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위하여 새로운 종교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소문은 켈트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3) 수도원과 일상적 영성: 패트릭과 그 일행의 선교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교지에 도착한 다음, 패트릭은 부족의 추장이나 지도자들을 찾아 가서 자신들이 선교의 목적을 갖고 찾아왔음을 알려주고 원주민들이 거하는 인근 지역에 캠프를 치고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와 같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패트릭과 일행은 사람들과 대화하며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또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기독교 복음을 주로 비유나 이야기, 시, 노래, 그림, 상징, 또는 드라마 등으로 상상력과 정서적 감수성이 풍부한 켈트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원주민들이 복음에 반응을 하게 되면, 자신들의 선교 공동체로 영접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삶을 나눴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에 참여한 원주민들을 토대로 그들의 친지나 지인들에게로 전도의 열매들이 번져나가게 한 것이다. 패트릭과 그의 동역자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선교의 주된 목표로 삼고, 28년간 여러 부족들을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다.
켈트인들의 수도원은 당시 동방교회의 수도원 운동으로부터 많은 발상을 얻긴 했지만,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으로 달랐다. 동방 수도원 운동이 로마 세계의 물질적 타락과 교회의 부패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시작된 반면, 켈트 수도원은 세속사회 속으로 침투해서 교회를 연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동방의 수도사들은 수도원으로 후퇴하여 자신들의 영혼을 수련하고 고양시키지만, 켈트 수도사들은 다른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수도원 공동체를 조직했다. 동방의 수도원은 고립된 장소에 위치하고 있지만, 켈트 수도원은 많은 이교도들이 거주지로부터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물론 켈트 수도원에도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있어서 영성수련을 했으나, 그들 외에도 교사들과 학자들, 장인, 예술가, 농부, 가족 등이 수도사들과 함께 어울렸다. 성직자 중심으로 움직이는 장소가 아니었기에, 켈트 수도원은 일종의 평신도 운동이라고도 불린다. 일부 성직자들도 있었지만, 수도원 내에서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더욱 쉽게 다른 세속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따라서, 예배와 공부, 일이 한데 조화를 이루는 곳이 수도원 공동체였던 것이다.
4) 생태적 영성: 기독교적 전통에서 자연세계에 대한 관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연세계가 전적으로 타락의 영향 아래 놓인 것으로 보는 견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시급한 문제는 자연세계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보존 보다는, 죄의 파괴적인 결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문제로 본다. 또 하나의 관점은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의 출발을 타락에 앞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으로 조성된 선한 창조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세계의 근본적 선함과 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에 동참시키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켈트인들의 기독교는 자연세계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당대 로마교회와 비교해볼 때 매우 전향적인 입장을 취했다. 로마교회는 어거스틴의 원죄론과 전적부패론에 따라, 자연을 타락이라는 틀 아래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강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종교개혁자들을 비롯한 서구기독교 전통에서 일관된 흐름이었다. 도시문명이 취약하고, 자연세계와의 친화성이 강했던 비문명인이었던 탓인지, 켈트인들은 넓은 들과 나무, 바람, 시냇물, 새와 동물들과의 교감이 강했던 민족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러한 자연세계의 선함을 인정했고, 그 자연세계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켈틱 기독교인들이 자연을 즐기고 선하게 인정했던 데에는 세 가지 원천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Ian Bradly, The Celtic Way. DLT, 1993: 53-54) 첫째로는 성경적인 원천이다.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 뿐 아니라, 자연세계를 만물하시고 “참 좋았더라”고 긍정하시는 장면이 반복됨을 볼 때, 창조세계의 선함은 신학의 매우 강력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더 나아가 구약의 시편을 보면, 해와 달, 산과 강 등의 자연만물이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동참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반영하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이사야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자연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동참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박력 있으면서도, 서정적인 싯구로 쓰인 창조세계의 선함과 하나님 경배는 자연친화적인 켈트인들에게 매우 큰 공명을 불러 일으켰음직하다.
둘째로는 켈트인들 고유의 이교도적인 유산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기독교가 소개되기 이전 아일랜드의 토착종교였던 드루이드교는 강과 숲, 언덕 등을 각종 신과 신령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숭배하곤 했다. 자연과 밀착해서 살던 원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교도 켈트족들은 자연세계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고 물을 함부로 오염시키거나 나무를 벌목하는 것을 금하곤 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이들은 이와 같은 경외심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켈트족에게 전도하던 선교사들과 수도사들은 이들의 이러한 자연친화적 사상을 기독교적 창조관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수도원 공동체는 종종 이교도의 신들이 거하는 숲속에 지어졌고, 신령이 거하는 곳으로 여겨졌던 샘이나 우물들은 성인들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또한 농작물 추수기의 축제들은 교회력으로 편입되었다.
셋째로, 켈트족 그리스도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가까이 살면서 자연을 음미하고 연구함으로 창조의 선함에 대한 감각을 계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수도원 공동체를 자연세계 속에 조성하여, 늘 곤충과 동물의 울음이나 새의 노래, 바람 속의 나뭇잎이 움직이는 소리 등에 익숙해 있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동물들과 함께 지내셨던 기록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켈트 전도인들의 동물과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온다. 한번은 켈트 성인 중의 하나인 콜룸바누스(Columbanus)가 홀로 숲속에서 시편을 묵상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열두 마리의 늑대가 나타나 평화롭게 곁에 있다가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콜룸바누스가 곰을 설득해서 곰의 동굴을 자신을 위한 영혼의 은신처로 바꿨다는 전설도 있다.
켈트인들의 이러한 생태적 신앙은 후일 성 프란시스의 자연친화적 영성으로 계승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대 기독교 신앙 운동에서 이미 자연세계를 긍정하고 교감하는 영성의 흐름이 있었다는 것 또한 오늘날처럼 환경문제가 심각한 시대에 기독교회의 소중한 유산으로 회복할 만한 실체가 된다.
2. 켈틱 기도문
고대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비록 문명화되지는 못했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감성이 풍부했던 켈트인들을 위하여,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 깊이 관여하는 기도문을 지어서 함께 낭송하며 영적인 성장을 장려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드리는 기도, 아이의 얼굴을 씻으면서 드리는 기도 등과 같이 매우 구체적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의 기도문이 교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느낌이나 경험 위주로 작성된 것은 아니었다. 켈틱 기도는 자연과 일상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기반은 철저하게 기독교의 핵심 신앙인 삼위일체교리에 자리 잡았다. 다음의 한 기도문을 예로 보자.
나를 지으신 성부의 눈앞에서
나를 대속하신 성자의 눈앞에서
나를 정결케 하신 성령의 눈앞에서
친밀함과 사랑 가운데 내 무릎을 꿇습니다.
실습
1. 먼저, 자신의 삶에서 매우 사소하고 구체적인 영역 한 가지를 고르라.
2. 당신이 그러한 영역에서 시험당하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 영역에서 온전하게 추구해야 할 목적은 무엇인가?
3.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 각각 기도할 내용을 생각해보라.
1) 성부: 성부는 우리 삶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며 계획하신다.
그 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전폭적인 신뢰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2)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삶에 모델이 되신다.
3) 성령: 보혜사 성령께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위로하시며 능력을 주신다.
'성 패트릭의 흉패'(St. Patrick's breastplate 혹은 '사슴의 절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 앞에 계신 하나님, 내 뒤에 계신 하나님, 내 안에 계신 하나님, 내 밑에 계신 하나님, 내 위에 계신 하나님, 나의 우편에 계신 하나님, 나의 좌편에 계신 하나님, 내가 누운 곳에 계신 하나님, 내가 앉은 곳에 계신 하나님, 내가 일어선 곳에 계신 하나님!"
삼위일체 기도 (사6:1-8, 엡1:3-14, 요14:8-17) - Tom Wright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께서 우리 가운데 그 나라를 세워주소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인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호흡이신 성령님, 저와 이 모든 세상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