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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咸平(咸豊)李氏 箕城君派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咸李사랑
咸 李 大 同 譜 改 修 請 願
1989.10.31
咸成君(휘 극해) 후손 李起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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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 李 大 同 譜 改 修 請 願
1989. 10. 31
咸成君(휘 극해) 자손 李起範
차 례
一. 머릿말 ---------------------------------------------3
二. 무진보(1988) 편찬기간 중 논쟁 사실 ----------------------7
1. 1986. 2. 25 파대표 회의사항 -----------------------7
2. 1986. 3. 29 회보 기사 제거 사항 ---------------------7
3. 1986. 4. 15 부원군 종회 건의 사항 --------------------7
4. 1986. 6. 15 서울친목회 월례회 사항 -------------------8
5. 1986. 9. 9 대종회장 등 집단 상경 실황 -----------------8
6. 1986. 9. 12 三파 대표자 회의 사항 --------------------9
7. 1986. 9. 20 三파 건의서 수렴 요청 사항 ----------------9
8. 1986. 10. 2 대종회 주관 3파 대표 연석회의 사항 ---------9
9. 1987. 2. 22 서울친목회 66명 연서명한 권고서신 --------11
10. 1987. 11. 13 교헌옹 족보 인쇄비 자담 발표 -----------12
11. 1988. 7. 9 부원군 종회에서의 편보 자재 통지 ---------12
12. 1988. 7. 11 함성군 종회에서의 편보 자재 통지 ------- 12
13. 수단 제출 지연 ----------------------------------13
(1) 개별 통지 -------------------------------------13
(2) 개별 방문 -------------------------------------13
14. 족보 이해 근거 -----------------------------------13
15. 본문 작성 경위 -----------------------------------13
三. 대종회에 대한 질의 요지 -------------------------------14
1. 시조할아버지 사적 등에 관하여 ------------------------14
2. 호구변의에 관하여 ----------------------------------16
3. 기성군 할아버지의 탈계에 관하여 ---------------------- 18
4. 사산사우의 위패에 관하여 ----------------------------19
5. 호구변의문과 경중통문에 관하여 -----------------------19
6. 홍성 삼세 설단에 관하여 -----------------------------19
7. 함풍부원군 묘역사업에 관하여 -------------------------20
8. 족보 인쇄비 자담 문제에 관하여 ----------------------20
9. 휘 극해 할아버지 사적에 관하여 -----------------------20
10. 대보와 파보의 내용 차이에 관하여 ----------------------21
11. 종친 간의 호칭 문제에 관하여 -------------------------21
12. 편보 강행 결과의 후유증에 관하여 ----------------------21
13. 서울 회보 기사 삭제에 관하여 -------------------------22
14. 우봉 이씨 입적에 관하여 -----------------------------22
15. 대종회장 해명에 관하여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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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머 릿 말
족보는 본래 중국의 문벌 중심의 사회에서부터 만들어 왔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조 중엽에 와서 귀족사회의 보본으로 가승 또는 가첩이 성행하여 필사본으로서 전수하여 오다가 목판간행이 되었다. 우리 함평이씨의 족보는 계유(1633)년 이조 인조 11년에 초보를 수찬하였으며, 그 후 무진(1688)년에 대동보가 발간되었다.
족보는 귀족을 중심으로 봉건주의가 철저한 계급의 제도 하에서는 양반이란 존립을 좌우하는 가보로서 또한 그 시대의 호적 원본으로 효용되어 왔으며, 특히나 출세할 때, 예를 들면 족보가 없으면 상인이나 천인으로 취급되어 출사의 길이 막혀 그 당시의 사람으로서는 가장 귀중한 가보로서 그 위력 또한 지대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난신적자가 나오거나 폐륜을 저지르면 족보에서 빼어버리는 사례가 허다하였으며 또한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사회활동이 제한됨으로서 국가사회 발전에도 중대한 폐단을 가져 온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와서 우리의 족보는 봉건사회 제도 하에서와 같이 효용가치는 상실한지 이미 오래이며 오직 한 씨족의 혈통의 정통성을 보존 유지하는 씨족 사록에 불과한 현실이다.
우리 함평이씨의 족보를 상고하여 보면 계유(1633년)초보부터 정유(1957년)보까지 10회에 걸쳐 대동보를 수보하였으나 그 당시의 사회여건으로 보아 한 번도 빠짐없이 서울에 거주하여 온 장양공파에서 주관하여 왔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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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개한 봉건주의 사회제도 하에서 교통 통신은 물론 생활여건 등이 빈약한 관계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종인들로부터 올바른 수단을 수집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하에서 수보를 하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 따른 문벌족보가 되어왔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전래하여 온 누전의 족보의 서문을 보면 그 당시에 족보를 주관하였던 장로들은 한결같이 어찌 족보가 완전하리요 후세에 수보를 할 때에는 명조수족의 대의를 명심하고 충분히 상고하여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올바르게 수보를 하여야 한다는 유지를 구구절절 남기는 고충을 헤아릴 수가 있다.
다행히도 1985년도부터는 전국의 함평이씨를 통괄하고 있는 대종회에서 주관이 되어 대동보를 편찬하게 되므로 휴전선 이북을 제외한 전국 종인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하는 유례가 없는 화합된 값진 족보가 되어, 늦게나마 우리 함평이씨도 단합된 역량으로 융성 발전될 기반이 튼튼하게 되리라 기대에 부풀었던 것이다.
이의 뒷받침을 하기 위하여 종가인 첨서사사공파 대표와 함풍부원군파 대표 그리고 함성군파 대표들은 1986. 9. 12일 서울에서 합동 회의를 하여 누전의 족보에서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상고하는 상고위원회를 대종회 안에 두자는 건의서를 결의하여 제출하였으나, 대종회장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988년 12월 1일에는 누전보의 서문을 번역하여 잘못된 부분을 분석한 책자 (뿌리의 연구)를 만들어 대종회의 편찬위원들에게 고쳐야 할 자료를 제출함과 동시에 전국 종인 들에게도 알린바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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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7. 9일과 1987. 7. 11일에는 함풍부원군종회와 함성군파 종회에서 구보의 답습을 고집함은 씨족의 분열을 자초하는 불행임을 명심하고 종의로서 상고 올바른 족보를 하자는 자제의 권유서를 대종회장에게 보낸 바 있었으며,
1988. 11. 13 서울 명동에 사시는 교헌옹께서는 전국종친이 화합되는 값진 대동보를 하게 된다면 이번의 대동보 인쇄비 전액을 단독 부담하시겠다고 하심에 이 분의 깊은 뜻을 서울의 원로들께서 대종회장에게 서면으로 전한바 있을 뿐 아니라,
그 외 전국 각 지방에 사시는 종인들이 한결같이 이번의 대동보에서 많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허물을 헐고 순리에 의한 족보, 전 씨족이 즐거워하는 족보, 화기에 넘친 족보를 하여 줄 것을 서면 또는 구두로 수없이 요청하였으나, 대종회에서는 이들의 제안을 전부 묵살하고 수단을 안 낸 종인들은 빼어 버리고 편보를 단행하고야 말았음은 한 할아버지의 혈손들 끼리 하는 중차대한 족보를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생각하니 섭섭하고 서글픈 심정 금할 길이 없다.
그리하여 1989년 7월과 8월에는 의심이 된 부분에 대하여 회답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보낸바 있으나 우금까지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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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의 족보가 어떻게 편찬되어 왔으며 그 내용이 어떻게 되었으며 이떤 이유로 편보를 하였는지를 전국 종친들에게 알려드리고 이후 족보를 할 때에는 이번과 같은 아름답지 못한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자는 충정에서 그 내용과 그간의 경위를 밝혀두고자 하는 바이다.
1989. 10. 31
李 起 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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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무진보(1988) 편찬 기간 중 논쟁 사실
1. 1986. 2. 25 대종회에서 개최한 대동보 각 파 대표자 회의석상에서 부원군 대표 건영의 발언으로 우리 이씨는 종통의 승계가 잘못되어 있으니 이번의 족보에서는 장손인 휘 인원 가로 승계토록 하여야한다고 건의하자 사회자인 대종회장 계옥씨가 모르는 말이라고 반박한 것이 발단이 되어 심한 혈안 격론을 한 사실이 있었으며,
2. 1986. 3. 29 대종회장과 임원 4 명이 상경하여 서울종친회에서 강원도 양양 거주 시행씨의 기고로 서울종친회보 4 월호에 ‘종통계승에 대한 재고’라는 제목으로 종통의 승계가 전리에 역행되었으니 이번 족보에서는 장손 가로 승계함이 타당하다는 요지의 기사가 게재된 것을 확인하고 이 기사는 우리 이씨의 치부를 노출하는 행위가 되니 그 지면을 제거하라고 강요하여 발송을 못하게 하고 발간한 3,000 여 부의 해당 지면을 제거케 한 후 방송케 한 사실이 있었으며,
3. 휘 광봉 함풍부원군 세제 익일인 1986. 4. 15. 10시경, 당시 부원군파 종회장 건영씨가 대종회에 가서 서울종친회장 광주종친회장과 수경 등 수명이 동석한 자리에서 부원 세제일에 총회를 개최하고
(1) 구보 중 호구변의에 대하여 상고하여 의심이 된 점을 해소하여 명문화 할 것
(2) 선대조이신 시조 이하 5세까지는 호구 미상임으로 不書子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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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통의 승계를 합리화 하며 보규 7 항 단서를 삭제할 것 등의 결의서를 대종회장에게 전달하면서 상고하여 줄 것을 건의한 사실이 있었으며,
4. 1986. 6. 15 서울 종친 50여 명이 참석한 서울종친회 월례회의 석상에서 대동보의 편찬에 대한 화제가 오가던 중에 현 서울종친회장 재두씨가
“우리 함평이씨의 종가는 장양공 파”라고 말을 하자 참석하였던 종인들이 “그런 망발이 어디 있느냐?”고 야유 등이 나오자 서울에 사는 재진씨가 흥분된 어조로 “그런 뚱딴지같은 망발이 무슨 뜻이냐? 잘 된 집안이 종가가 된다는 식이라면 이번에는 장관이 나온 평택으로 돌리자.”고 꼬집어 소리치는 등 장내가 소란하게 되자 회장 교헌씨가 “앞으로는 잘 되어 갈 것이 아니겠느냐?”고 설득하여 진정시킨 사실이 있었으며,
5. 1986. 9. 9. 14시경 대종회장 계옥씨 외 17 명이 집단 상경하여 서울종친 사무실 별실과 시내 모 여관으로 회장 교헌씨 부회장 명헌씨를 유치하고 그날 밤 10시경까지 8시간에 걸쳐
(1) 족보에 관한 기사는 서울종친회보에 내지 말 것
(2) 족보를 고쳐야 한다는 불필요한 주장 등을 삼갈 것
(3) 이번의 족보에 모든 종인들이 동참하도록 지원 협조하여 줄 것 등등의 논제로 위세를 행사한 사실이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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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86. 9. 12 서울 중구 저동 소재 금우정 식당에서 함풍부원군파 대표 건영 외 23 명, 함성군파 대표 돈우 외 16 명, 첨서사사공파 대표 재복 외 8 명 등 49 명과 서울종친회장 교헌씨, 부회장 명헌씨, 서울 재두씨 등 여러 종친들이 임석한 가운데 임시의장 건영씨 사회로 회의를 진행하고, 의안으로
(1) 금차의 대동보를 수보함에 있어서 구보내에 잠재되어 있는 오류나 의심이 되는 부분을 올바르게 하기 위하여 대종회 안에 상고위원회를 구성하고 상고하여 이정할 것을 전제로 참여하며 협조하기로 결정하고 상고위원 수는 각 문중 별 즉, 인원 인관 인계 인검 인문 안저 안상 수년 8파 종중에서 각각 2 명씩 16 명과 대종회장까지 17 명으로 구성하여 대종회장 주제 하에 상고하여 가동할 것을 건의 하기로 만장일치 가결하고 9. 20 회의록과 건의서를 3파 대표자 명의로 대종회장에게 제출하였으며,
7. 1986. 9. 20 3파가 건의서를 제출한 후부터 2 년여 간에 수회에 걸쳐 3파 대표자들을 대종회장에게 서면 또는 구두로 건의안을 수렴하여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며,
8. 1986. 10. 2. 10시경 대종회 주관으로 광주시내 모 예식장에서 각 파 대표자와 3파 대표자 연석회의가 개최었어 서울종친회장 교헌씨, 부회장 명헌씨, 서울 원로 내범씨, 함평 영헌씨 외 여러 종친들의 임석 하에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의장인 대종회장은 개회인사에서 3파가 건의한 사안에 대하여는 언급함이 없이 인사말을 끝낸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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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 임원들로 하여금 각 파의 족보 수단 취합 상황의 확인과 지시 사항 등을 마치고 폐회할 무렵에 대종회장은 이번의 대동보를 함에 있어서 이의가 있는 파가 있다고 말하고 그 대표자는 나와서 말을 하라고 발언권을 줌으로
건영, 기범이 등단하여 기범이가 3파 대표자 회의에서 결의한 취지와 결의안을 설명하던 도중 함평 영헌씨가 발언을 중지 시키고
“무슨 엉터리 소리냐? 참으로 앙천대소할 일이다.” 라는 발언을 연발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대종회 임원들이 갔다가 준 마이크를 잡고 횡설수설 성토하는 식으로 독점 발언을 함으로써 회의가 정상적으로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시간만 끌자 회장은 폐회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서로 주고받았던 발언 요지를 남겨두기로 한다.
영헌씨가
① 구보가 잘 못 되었다고 말을 하는 사람은 무식한 소치이다.
② 호구는 그 당시 관청에 비치된 호적원본에 의하여 고친 것이다.
③ 장양공 집안이 종가라고 한들 하자는 없는 것이다.
④ 장양공은 같은 일가 이운로와 같은 공신이다.
경철공이 작성한 자기 집의 가승을 보이자
⑤ 모른다. 신빙성이 없다.
⑥ 앙천대소할 일이다
를 연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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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범
① 외국인이 입양하였더라도 큰 집은 큰 집이 아닌가? 순리를 찾자
② 우리 건의한 안건은 왜 상정. 심의하지 않는가?
③ 족보도 다수결로 할 수 있는 것인가?
④ 잘 된 집안이면 멋대로 해도 되는 것인가?
⑤ 왜 발언권조차 주지 않는가?
재복
①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승복할 수 없다.
② 만일 비윤리적으로 족보를 강행한다면 법적 투쟁도 불사하겠다.
③ 우리가 낸 건의안을 왜 오늘 심의하지 않는가?
그 밖에 잡다한 여러 사람들의 발언요지는 생략한다.
9. 1987. 2. 22 서울 친목회원 66 명이 연서명으로 대동보는 가장 신성한 중대 사업임을 유념하시고 전 씨족이 공감할 수 있도록 널리 의견을 수렴하여 값진 족보를 하여주기 바란다는 요지의 권고서신을 대종회장에게 보낸 바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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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987. 11. 13 서울 안중학원 사무실에서 서해 교헌옹께서는 서울의 원로 10여 분과 회동한 사리에서 우리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대종회에서 편견을 가지고 자칫하면 편보를 할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말들이 나오자 교헌옹께서는
“족보에 대한 뜻을 모르면 그럴수도 있겠으나 족보란 정책사업도 아니고 영리사업도 아니며 위선하고 화목하는 값진 사업인데 그럴수는 없을 것이다.” 고 말하고
“내가 우리 이씨의 종문의 발전과 어려운 종친들에게 족보라도 한 질씩 모셔지게 하기 위하여 이번의 대동보 인쇄비 전액을 낼 것이니 전 종인이 빠짐없이 동참케 하며, 또한 모든 허물을 헐고 순리대로 하며 분열이나 반목되는 불행함이 없는 값진 족보가 되도록 노력하여 달라”는 당부가 있어서 동 11월 16일 이분의 정성과 뜻을 명헌씨 외 8 명의 연서명으로 대종회장에게 통지한 바 있었으며,
11. 1988. 7. 9 함풍부원군 종회에서는 종회의 결의로서 대종회장에게 편견으로 편보를 하여 동족간에 분열과 반목의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편보자제 통지서를 보낸 바 있었으며
12. 1988. 7. 11 함성군파에서는 종회의 결의로서 대종회장에게 편견으로 불참자는 이유 없이 발보하고 편보를 한다면 우리 이씨의 불행을 자초하는 행위가 될 것이니 편보는 자제하여야 한다는 통지를 보낸 바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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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각 파의 대표자들은 3 파가 건의한 의안이 받아드려져서 상고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희망에서 수단의 제출이 지연이 되자
(1) 1986년 8월부터는 대종회장 명의로 각 지방의 종인들에게 이번의 대동보에 불참하거나 누락되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서신을 계속하였으며
(2) 3 파 문중의 선량한 장로들을 대종회로 나오게 하거나 방문하여 ‘구보를 고치고자 하는 것은 모순이며 옛 어른들이 수백 년 전에 한 족보를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0 0 의 한 말을 믿거나 듣지 말라는 등의 방법으로 이간을 하거나 포삽 동작을 하는 등 3 파 대표의 결의는 물론 수많은 종인들의 충고나 건의 등을 전부 묵살하고 편보를 한 것이다.
14. 족보를 이해하는 방법
1988. 11.1 발간한 뿌리의 연구와 본문 및 질의서와 족보를 대조 고찰하면 이해가 될 것임.
15. 이 사실의 작성 경위
대동보 편찬기간(195~ 1989) 중에 누전의 족보와 고려사, 왕조실록, 국조방목, 전고대방, 족보사실록 등 여러 문헌을 대조 확인하여 분석하고 실제로 체험한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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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대종회에 대한 질의 요지
함평이씨 대종회에서 대동보를 일방적으로 편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문되는 내용에 대하여 누차에 걸쳐 질의서를 보냈으나, 현재까지 아무런 회답을 받아보지 못하였다.
1. 1차 질의서 (1989.7.23)
(1) 시조 할아버지의 사적에 관하여
① 구보와 현보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이씨의 시조할아버지 이신 휘 언 조께서는 고려 태조(918년) 때 신무위대장군의 벼슬을 하셨다는 기록과 태조의 아들 혜종의 이름이 武자여서 그 무자를 범할 수가 없어 신호위대장군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려 광종(950년) 때의 어른이 아니겠는가. 가히 의심이 되나 증거도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② 그렇다면, 과연 우리 시조할아버지께서는 어느 때에 어느 벼슬을 하신 어른이신지요?
③ 누전의 족보에 의하면 우리 시조할아버지께서는 백제인 이시다. 중국의 농서인 이시다, 또는 중국의 우의 왕실이시다 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시조할아버지께서는 과연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어른이라고 신뢰성 있게 모실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요?
④ 이조의 말엽(1820년 경)에 장양공의 후손인 위 익서공이 함평 현감으로 재임 중에 함평읍 영풍에 현 시조할아버지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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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실묘로 확인할 수 있는 사적을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사적의 물증은 무엇이었으며 그 물증은 어느 곳에 보존되어 있는지요?
⑤ 구보에 의하면 ‘증손이신 휘 순지할아버지께서는 검교흥위위대장군의 벼슬을 하시어서 증조부이신 시조할아버지에게 부원군이란 군봉을 영증하셨다’라고 기록하였다가 그 다음의 족보에서는, 연대 등으로 살펴볼 때 오착이 되므로 ‘아니다’라고 기록하였는데, 그렇다면 시조할아버지께서는 어느 때 어떤 훈공으로 함풍군으로 책봉되셨는지요?
⑥ 시조할아버지께서 함풍군으로 책봉되셨다면 우리 이씨의 득관 시조로서 우리 이씨는 함풍이씨가 분명할 것일진데, 어떤 이유로 지명을 따서 본관을 함평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는지요?
⑦ 우리나라 성씨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시조가 있으며, 기세 득관조가 있는데, 우리 이씨의 득관조는 어느 할아버지이신지요?
⑧ 1633 년부터 장양공가에서 우리 이씨의 종가로 행세하여 오면서 계유초보(1633년)부터 정유보(1957년)까지 10 회의 대동보를 독답하여 왔으며, 1986년 5월 16일, 현 서울종친회장인 재두씨는 “우리 이씨의 종가는 장양공가가 된다”고 망발하였다가 전 종인들의 야유를 받은 바가 있었으며,
⑨ 1986년 10월 2일 광주의 파대표자회의 석상에서 함평의 영헌씨도 “장양공파가 종가라 하여도 하자가 없다”고 망발을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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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휘 극명할아버지를 증병조판서 함평군으로 책봉된 것 같이 한 것은 그 할아버지를 득관조로 하기 위한 것인지요?
⑩ 그런 이유로서 이번의 대동보 보규 7 항에 ‘종통은 종전의 예에 의한다’라는 단서를 붙여놓고 이를 고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 아니었는지요?
⑪ 함평읍 영풍 시조할아버지의 묘전비에는 ‘고려 신무위대장군 함풍이공 휘언지묘’라 표작하였으나 후면의 음기를 안 쓴 이유가 무엇인지요? 쓸 수 없는지 또는 사적이 불확실하여 못 쓰는 것인지요?
⑫ 시조할아버지의 묘비는 함풍이씨라고 표기하였고, 삼세설단비에는 함평이씨라고 표기하였는데, 후손들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되는 것인지요?
(2) 호구변의 사실에 관하여
① 제 4보인 임술(1742년) 대동보부터 특정한 몇 분의 조상을 일정한 연령에 올려놓고, 이 조상을 중심으로 연갑을 맞추기 위하여 연령을 일갑자 즉 60년을 끌어 올림으로서 전후좌우의 연령이 틀려짐에 따라, 그 이후부터는 매 번 수보할 때마다 종파간의 다툼이 심하게 발생되었었는데, 종친은 이를 상고하여 본 사실이 있으신지요?
② 호구변의의 내용을 살펴보면 육세조 휘 요께서 1242년에 출생하시어 1276년에 졸(돌아가심)하시었는데, 아들 5형제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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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제 2자이신 위 인관조께서는 아버지이신 휘 요조께서 돌아가시던 1276년에 출생하신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그렇다면 제 3자이신 휘 인계, 제 4자이신 휘 인검, 제 5자이신 휘 인문 할아버지들은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되고 말았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옳겠는지요?
③ 무진보(1688년)를 살펴보면 휘 인문조의 증손이신 휘 손수할아버지는 함풍부원군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탈계된 것이 아닌지요? 무진보의 기록에 의하면 휘 인문 조상님도 함풍부원군의 후손이 아닌지요?
④ 1790년 눌행재 휘 사직공의 책자로 발간한 <함평이씨족보사실록>에 의하면, “휘 수봉, 휘 인옥 할아버지들께서 휘 인문 할아버지는 함풍부원군의 후손에서 휘 림 조의 가문으로 투탁(붙이기로 들어감) 하였다”는 구절이 있는데, 연구하여 본 사실이 있었는지요?
⑤ 1755년 휘 경철(휘 극명 조의 9대손) 공이작성하여 전해 내려오는 그 집안의 가승에 의하면, 휘 극명할아버지의 연령이 영종 정통 13년 무진생(1448년)이 분명한데, 그의 아드님이신 휘 종생 장양공의 생년이 태종 영락 21년 계묘생(1423년)으로 식재(고정시키는 것)하였으니, 부자간에 연령이 도착(거꾸로 되고 어긋나서 틀림)된다고 하여 일갑자 60년을 끌어 고려 홍무 21년 출생으로 개수함으로써
⑥ 휘 극명 조의 조부이신 휘 현우 조의 족보 기록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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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차이후 입아조”라고 하였으니, 이 기록에 의하면 이 할아버지부터 이조(1392년)의 어른이시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조손간의 연령차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옳은지요?
⑦ 또한 중형이신 휘 극해할아버지의 연령이 1431년 출생으로서, 형의 생년은 1431년이고, 아우인 휘 극명의 생년이 1388년이면, 형님보다 아우의 연령이 43세나 연상이 되는데 이 또한 해결이 불가능한 오착이 아닌지요?
⑧ 1986년 10월 2일 광주에서 개최한 과대표회의 석상에서 우리 이씨의 족보를 가장 잘 안다는 함평읍 거주 영헌씨는 독점 발언을 하면서, “호구를 고친 것은 그 당시 관청에 있는 호적원본에 의하여 고친 것이며 누전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무식한 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라는 등의 장광설을 늘어 놓으면서 자기의 선대조이신 휘 경철공이 작성한 자기 집안의 가승조차도 모른다고 하면서, “앙천대소할 일”이라고 연발하면서 터무니 없는 원색적인 주장을 하였는데, 1742년도(임술년)에 있었다는 호적원본을 이 회시문에 꼭 첨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3) 휘 긍 기성군할아버지의 탈계에 관하여
국립도서관 및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보존된 국조방목에 의하면, 휘 긍할아버지는 부에 계선, 조에 지화, 증조에 인검으로서, (1405년 문과에 급제) 휘 인검할아버지의 증손임이 분명한데, 이떤 이유로 탈계하여 휘 인문할아버지의 고손으로 기록하였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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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산사우의 위패에 관하여
함평군 나산면 사정촌에 있는 사산사에 배행된 위패를 보면 함풍부원이란 위패가 있는데, 이 할아버지는 어떤 할아버지이신지요?
(5) 호구변의문과 경중통문에 관하여
이번의 대동보에 누전보의 서문을 알기 쉽게 번역 등재하면서도, 가장 중요ㅎ며 전 종인들이 알아야 할 호구변의문과 경중통문 등은 무슨 이유로 은폐하고 등재하지 않았는지요? 이 또한 전 종인들을 무시한 처사에서가 아닌지요?
(6) 휘 림, 휘 요, 휘 인원, 三世할아버지의 묘역 사업에 관하여
위 인원(첨서사사공)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우리 함평이씨의 종가이면서도 문운이 쇠퇴하여 후손들이 유리산거(떠돌아다니면서 흩어져서 사는 것)하고 마약하여서 선대 조상님들의 묘역 실전은 물론 세일제 조차 제대로 봉향하지 못하여 왔었으나 늦게나마 후손들이 혈성을 모아 시거지였던 충남 홍성군 내문산에 三世祖를 설단하고 몽한을 달래드릴 세일제를 봉향키로 하였으면 대종회에서는 이를 적극 지원함과 동시에 전 종인들이 참향토록 권장함이 책무일진데, 무슨 이유로 이를 흠 잡아 왈가왈부하며 이번의 족보에 그 묘역의 사진까지도 등재하지 아니하였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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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함풍부원군할아버지의 묘역 사업에 관하여
함평읍 만흥리 초동에 휘 광봉 함풍부원군할아버지와 아드님이신 휘 연할아버지를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예도에 따라 초혼성분하고 석물을 배설 근구하고 세일제를 봉향하게 되었는데, 대종회에서는 무슨 이유로 이론을 제기 하였는지요?
(8) 족보 인쇄비 자담 문제에 관하여
1985년 대동보를 함에 즈음하여 오류가 있으니, 종의로서 상고하자는 시비가 일어나자 자칫 잘못하면 동일 조상의 후손들 사이에 주자지란(일가끼리의 파벌싸움)이 되어 불화 반목 분열 질시 등의 심허ㅘ될 것을 우려하신 서울 명동에 사시는 서해 교헌옹께서는 188년 11월 13일, 전 종인이 화합할 수 있는 원만한 분위기 하에 수보가 된다면 대동보의 인쇄비 전액을 자담하시겠다고 자청하심에, 재경 함평이씨의 대표자들은 이 분의 뜻을 서면으로 대종회장 계옥씨에게 통지하였는데, 대종회장 계옥씨는 무슨 이유로 이를 부인하고 그 분을 매도하였는지요?
(9) 휘 극해할아버지의 사적에 관하여
1986년 11월 경에 계옥 회장은 하수인 수 명을 나주군청 관계자에게 보내어 ‘나주군 인물지’ 질의편에 휘 극해할아버지께서는 “1467 년 이시애 난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적개공신에 녹하고 함성군으로 봉하였다”라고 기록된 것은 사실과 다른 허위라면서 삭제하여 달라고 강요하였다는데, 그러한 진의는 무엇이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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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보와 파보의 내용 차이에 관하여
함평이씨 족보의 수보 과정을 살펴보면 계파의 독점물로 종의가 없이 지배자와 피지배자 격인, 일방적인 편보가 진행된 관게로 해서, 그 결과는 보체. 계보. 차서 등이 호착되어 대보와 파보의 내용이 서로 다르게 기록되는 족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불행한 사실을 종친은 연구하여 본 적이 있는지요?
(11) 종친 간의 호칭 문제에 관하여
지금까지 열거한 바오 k같이 우리 이씨의 족보는 보체. 보계. 차서 등이 뒤죽박죽 된 내용으로 편보한 결과 계촌하기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근친 간을 제외하고는 적합한 호칭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종친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통상적인 예의가 아닌가 사료되는데, 종친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2) 일방적인 편보 강행 결과의 후유증에 관하여
이번에 대동보를 함에 있어서, 올바른 족보를 만들자고 집요하게 상고를 주장하였던 수 많은 종인들을 빼돌리고, 또 한 서문에는 근거도 없는 편견으로 “이번 족보에 불참한 종인이 있음은 지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탈보한 종인들과 결별을 고하였고, 족보를 올바로 하자는 수 많은 종인들을 따돌리고 오착된 족보를 농가성진하기 위하여 편보(쪼각족보)를 강행하여, 먼 훗날까지도 같은 조상의 후손들 끼리 수습할 수 없는 분열과 반목을 조성, 심화시킨 이 불행을 계옥 회장은 책임질 수 있다고 자신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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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二차 三차 질의서
(1) 서울종친회보 기사 삭제에 관하여
1986년 4월호 서울종친회보에 강원도 양양 거주 시행씨의 투고로 ‘종통 승계에 대한 재고’라는 기사에서 “금차의 대동보에서는 장양공 가에서 장손인 휘 인원 가로 승계해야 한다.”라고 게재하였는데, 동 년 3월 하순 경에 대종회장과 임원 수 명이 상경하여 그 기사를 삭제토록 서울종친회 회장과 부회장에게 강요하여 제거하였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대종회의 집단 위세 행동에 관하여
1986 년 9월 9일 오후 2시 경 대종회장 외 17 명이 대거 상경하여 당시 회장 교헌 옹고 부회장 명헌 씨를 시내 모 여관방으로 유치하고 오후 10시경까지 장장 8시간에 걸쳐 보사에 관한 사안을 회보에 싣는 등 보사업무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 등으로 위세를 행사하였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3) 타 성씨인 휘 운로의 잠적에 관하여
족보는 그 씨족의 정통성을 보존ㄴ 유지하는 소중한 사록인데, 하필이면 국적의 수과인 이완용의 선대조인 우봉이씨 이운로 종성군을 휘 인검 조의 고선인 파조로 끌어들여 잠록 미화한 해괴망측한 사실은 우리 나라의 성씨 중에, 어느 성씨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데, 그 끌어들인 연유는 나변에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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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종회장의 해명 촉구에 관하여
전기 일차. 이차 질의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종의를 무시하고 오착된 족보를 농가성진의 요행으로 해명하고, 다음 호의 대종회보에 각 항목별로 물증에 의한 정확한 해답을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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