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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대흥사 ‘새벽숲길’에 동참한 한일선우회 회원들은 지난 10월23일 수계를 받았다. 템플스테이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다.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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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들려오던 단풍소식은 어느새 땅끝 마을 해남까지 내려왔다. 붉게 물든 두륜산이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대흥사의 원래 이름은 대둔사(大芚寺). 백제시대 창건된 이래 대둔사로 불렸으나 조선시대 이후 대흥사로 사명이 바뀌었다. 두륜산 초입, ‘두륜산 대둔사’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린 산문이 보인다. 문을 넘어서니 숲길이 나타났다. 초입에서 일주문까지 거리는 10여리.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아홉 개의 다리를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다리를 하나 지날 때마다 마음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일주문에 다다르면 무겁게 짓누르던 삶의 무게를 놓아버릴 수 있다. 길다면 긴 이 길이 힘들지 않은 까닭은 붉고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벼워진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10월22일, 대흥사 템플스테이 ‘새벽숲길’에 반가운 얼굴들이 참가했다. ‘한일선우회’ 회원 30여명이 그 주인공.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일은행 퇴직자들이 주축이다. 한일은행 불자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퇴직 후에도 ‘뭉쳐’ 신행활동을 하고 있다. 가을단풍을 보며 멀리 나와서인지, 성지순례만 다니다 모처럼 사찰에서 하룻밤 머무를 생각 때문인지 참가자들은 마냥 즐거워 보인다. 매서운 ‘서울살이’로 찌든 얼굴이 감색 수련복마냥 환해졌다.
베테랑 불자들의 템플스테이는 시작부터 다르다. 별다른 오리엔테이션 없이 바로 입재식에 들어갔다. 예불을 마친 뒤 문수전에서 ‘스님과의 대화’시간이 한창이다. 먼 곳을 온 참가자들을 위해 도근스님이 시간을 냈다. “대흥사는 예부터 차가 유명한 곳입니다. 초의선사가 이곳 일지암에 주석하면서 고려시대 이후 끊어진 차맥을 되살렸어요. 차의 성지에 오셨으니 차나 한잔 하고 가십시오.” 30여명에게 차를 내기위해 스님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물이 끓는 사이 잠시 침묵이 흐른다.
“고찰이라서 그런가요? 아늑하고 느낌이 참 좋습니다.” “두륜산의 유래를 보면 중국 곤륜산에서 시작돼 백두산으로 이어진 그 맥이 이곳까지 뻗었다고 전해집니다. 백두산과 곤륜산에서 한자씩 따서 두륜산이 된 셈이지요. 유명한 산은 아니지만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어 부처님 품처럼 포근하지요.”
“차 맛은 잘 모르지만, 차의 성지에서 마셔서 그런지 맛이 일품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차는 자기 입에 맞는 차라고 하지요. 밤하늘에 쏟아질 것 같은 별, 차가운 바람 등 자연의 모든 것을 가슴깊이 새기고 마시세요.”
스님과의 대화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가을밤은 더 깊어간다. 한 잔, 두 잔, 세 잔…. “첫째 잔은 목구멍과 입술 적시고/ 둘째 잔은 외로운 번민 씻어주네/ 셋째 잔은 메마른 창자 찾나니/ 생각나는 글자가 오천 권이나 되고/ 넷째 잔은 가벼운 땀 솟아 평생의 불평 모두 털구멍으로 흩어지네/ 다섯째 잔은 기골이 맑아지고/ 여섯째 잔만에 선령과 통하였다네/ 일곱째 잔은 채 마시지도 않았건만/ 느끼노니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나네.” 당나라 시인 노동(盧仝. 775~835)이 노래한 칠완다가(七碗茶歌)와 함께 마음 속 번뇌도 씻어간다.
오전4시, 사방을 깨우는 도량석과 함께 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새벽예불을 마친 참가자들이 수계식을 기다린다. 템플스테이에서는 예외적인 순서이긴 하지만, 한일선우회 회원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순서다. 계사로 나선 주지 몽산스님의 법어를 들으며 장궤합장을 하고 참회진언을 외는 참가자들이 자못 엄숙하다.
불제자로 거듭나는 순간, 어제의 태양은 오늘과 다르다. 어제 본 도량도 오늘과는 다르다. 도량을 순례하며 하나하나가 갖는 의미를 가만히 새겨본다. 참가자들이 1000좌의 부처님이 모셔진 천불전 앞으로 모였다. “1000분의 부처님 얼굴을 잘 살펴보세요. 자신과 닮은 얼굴의 부처님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신을 닮은 불상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도 옥돌로 조성된 부처님 앞을 좀처럼 떠나지 못한다.
“대흥사에 가면 천불전 꽃살문을 보라는 얘기가 있던데요.” 누군가 옥불에서 꽃살문으로 화제를 돌린다. 순간 30여명의 시선이 일제히 꽃살문에 꽂혔다. “햇살이 비출 때 그 아름다움이 더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낯선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래된 나무 위로 빨갛고 파란 육각형의 꽃은 담담하다. 비와 바람을 이겨내면서 화려함 대신 수수함을 택한 까닭이다.
표충사로 올라간 이들은 서산.사명.처영스님의 영정과 위패를 참배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분으로 구국 3화상이라 불립니다. 현재 묘향산 보현사와 밀양 표충사 그리고 대흥사에 세분 스님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세워져있습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당 앞에서 멈춰선 사람들. 잠시 동안 세월을 거슬러본다.
성보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산사체험의 모든 일정을 끝낸 참가자들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다. 표원종(56. 서울 강남)씨는 “멀게만 느껴졌던 스님과 지난밤 차를 마시며 세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며 “성지순례와 달리 차분하게 사찰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새벽예불, 수계식 내내 환희심을 느꼈다”는 이동희(57. 서울 잠실)씨는 “짧은 시간이지만 산사의 아늑함과 포근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며 종종 산사체험에 참가할 뜻을 밝혔다.
대흥사 ‘새벽숲길’은 이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사찰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 도입을 시도하는 중. 차 문화나 남도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수련원장 법인스님은 “생활에 찌든 도시인들이 찾아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사찰이다. 이것은 누가 설명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며 “대흥사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숲길을 걸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차를 마시며 삶의 번뇌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대흥사=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대흥사 새벽숲길 템플스테이 대표브랜드 전국 사찰 벤치마킹도
대흥사 템플스테이는 차와 새벽숲길 산책으로 유명하다. 템플스테이 이름도 이를 본 따 ‘새벽숲길’이다. 산사체험의 효시(嚆矢)이기도 하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템플스테이가 시작되기 이전, 대흥사는 이미 일반인을 위한 주말수련회 ‘새벽숲길’을 시작했다. 2002년 종단의 종책 사업으로 선정된 이후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새벽숲길’을 벤치마킹했다.
템플스테이가 대중화되는 가운데 대흥사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매월 첫째, 셋째 주는 기존의 산사체험 형태를 유지하고, 둘째 주와 넷째 주에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남도문화체험과 초등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새벽숲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차(茶)다. 곡우를 전후로 열리는 ‘차 문화체험’은 대표적인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찻잎을 직접 수확해 차를 만들고, 자신이 만든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또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스님이 주석했던 일지암에서 차를 마시며 스님과 다담을 나누는 시간도 있다. 차의 성지라 불리는 이곳에서 두륜산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차 맛을 잊지 못하는 수련생들도 많다.
‘새벽숲길’은 여름과 겨울수련회 기간을 제외하면 연중 내내 열린다. 인터넷 홈페이지(www.daeheungsa.com)나 수련원(061-535-5775)에서 신청이 가능하며, 1박2일과 2박3일 중 선택할 수 있다.
대흥사 성보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많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제일 먼저 서산.연담.초의스님 등 대흥사 스님들의 부도밭이 보인다. 보물 제1347호인 서산대사 부도를 시작으로 곳곳에 있는 대흥사 성보들을 찾아보자.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48호)은 1000좌의 불상으로 유명한 대흥사 명소다. 250년 전 경주 옥돌로 조성된 천불상은 해남으로 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일본까지 갔다 되돌아온 사연을 갖고 있다.
연못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이 보인다. 3개관으로 분류된 이곳은 왼쪽은 초의관, 오른쪽은 서산관이다. 본관에는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이 전시돼 있고 대흥사의 13대 종사 및 강사에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특히 서산관에는 서산대사의 금란가사,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모형도, 승군다표지물, 방패 등 많은 유물(보물 제1357호)들이 갖춰져 있다.
이밖에도 지난 9월28일 국보 제308호로 승격,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해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성보 문화유산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교신문 2176호/ 11월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