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의 어머니 배화고녀 시절
연도(年度)는 분명치 않으며 사진 뒤 면에 1월 1일이라 쓴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시면서 사직한 초등
학교 교편생활을 해방되기 1년 전부터 시작했다는 말을 감안하여
추정해 본다면 아마도 1943년 새해마지 기념으로 찍은 것이 아닐까
한다. 장소는 어머니가 배화 고녀를 졸업했으니까 당시의 그 교정이
거나 아니면 서울의 모처(某處)일 것이다.
사진을 찍은 다섯 분 중, 왼쪽에 서 계신 분이 우리 어머니이다.
본관이 덕수(德守)인 이순환(李順煥) 님이시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의 후손인 어머니의 항렬은 "烈"자와 "煥"자인데 외할아버지께서
외삼촌은 물론이요, 두 분의 이모 님들도 "烈"자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지으셨는데 맏딸인 어머니에게만 "煥"자 항렬로 작명하신 까닭은
무엇이었는지 들은 바가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소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
듯이 생전의 어머니도 세 가지의 자부심을 가지고 사셨다.
첫째는 자신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과,
둘째는 당신의 아버지(李種哲 氏. 우리 외조부)가 제일고보(경기고등
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이라는 것.
셋째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 님이 배화고녀 선배라는 것이었다.
이 사진의 내력에 대해서는 당사자의 딸인 나보다도 사위인 남편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고증(?)에 도움을 받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을 남편에게만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는 사람이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의 고리들
때문이라 해야할까? 남편은 지금도 우리가 살고있는 보령 웅천(熊川)
출신인데, 어떤 계기로 고등학교를 온양으로 유학을 오게되었고,
우리가 함께 한 학생문학 동아리에서 처음 만나서, 그 때부터 남편이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남편이 대학시절에 우리 집에 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따님을 사랑하여 장래까지 굳게 결심하고 있으니 우리의
사귐을 허락하여 주십사", 고 정중히 말씀드리게 되었다.
아버지(裵相信)는 왜정 때 전주사범을 다니실 때부터 신석정 시인을
스승으로 문학공부를 하셨고, 친구들이라면 모두 박용래 시인 등,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시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계셨기 때문에 좋은 친구를 만난 듯이 남편을 귀하게 맞아주셨다.
어머니가 남편의 고향을 물으셨다. 그 당시에 나는 알지도 못하는
웅천이라고 하자 그 때에 어머니께서 이 사진을 꺼내 놓으시고 남편
에게 이 사진의 내력을 대강 설명하시게 되었다. 이 사진의 원 주인
은 오명순 님의 것으로서, 어머니의 사진은 6.25 전란 중에 앨범
채 모두 타 없어져버려서 웅천에서 사시는 오명순 님을 찾았을 때
사정을 얘기하시고 배화고녀 학창시절의 사진 석 장을 얻어오셨는데
이 사진이 그 중의 한 장이다. 오명순 님은 웅천의 오 주부(吳 主簿)
댁이라는, 대단한 명문가의 따님이며, 원로 성우이자 탤런트인
오승룡 씨의 고모 되시는 분이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는 대동아 전쟁 중 일본이 패전의 기색이
짙어가던 시기로서 식민지 조선을 더욱 악랄하게 옥죄던 때였지만,
신년기념으로 찍은 사진이어서 그런지, 꿈에 부풀어 표정은 밝고
희망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시선의 지향점이 각기
다 다른 것을 보면 미래의 꿈이 다 각각이란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우리는 이 사진 중에 오명순 님이 계시다는 것만 알았지, 정작 어느
분이 그 분인지 몰랐었는데 최근에야 오른 쪽에 서 계신 분이 그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대 사대를 졸업하시고 보령시
수협 조합장과 대천시 의회 의장을 지낸 분으로서 지역 정가에서
남편을 각별히 아껴주시던 분이 계셨는데, 여러분과 담소 중에 그
분(田晩秀 氏)이 오명순 님의 여동생과 부부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찾아뵙고 사진을 보여드리니 오른
쪽에 서 계신 분이 당신의 언니이신 오명순 여사라고 했다.
1983년도에 어머니는 당뇨와 합병증이 심해 55세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오 여사님께서도 위암으로 56세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사진 속에서 서 계신 두 분은 환갑도 못 사시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는데, 무에 그리 바삐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암시라도 하듯, 두 분은 서 계신 모습이다. 앉아 계신 세 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직장을 따라서 초등학교는 평양에서 졸업을 했고, 배화
시절에도 이북의 친구들이 많았다니까 남북 어딘가에 앉아 계신 그
모습대로 느긋이 살아 계실 것만 같다. 살아 계신 분을 찾을 수만
있다면 찾아서 인사드리고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다. 두 분은 고인이
되었고 다른 분들은 지금 어디에 살아계신지 모르지만 60년 전의
꿈 많은 여고생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이 사진 한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하여 올려본다.
목련 배 금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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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의 어머니 배화고녀 시절(60년전 사진)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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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6.0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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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련님! 모친께선 덕수이씨 직계손 이라니~ 반가워요.저의 친할머니 와 같은 문중 이니까요. 온양 송곡! 현충사 있는동네 가 진외가 입니다. 일정시대,덕수이씨 들은 충무공 후손으로 얼마나 탄압 받고 살았는지...우리 할머니 께선 친정부모 모셔다 봉양하시고,조카들 데려다 교육 시켰대요.
설원 님, 그러면 저의 어머니와 님의 할머니는 가까운 집안이었군요. 어머니는 현충사 있는 뱀밭이 고향이니, 뱀밭과 송곡은 거기가 거기죠. 외할아버지 이, 종자, 철자.(李 種哲). 학병으로 안 끌려가시려고 일찍 조흥은행에 입사하셨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심없이 충성을 다한 성웅 이순신 장군의 피가 외가를 통하여 조금 섞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부끄러움없이 살아갑시다. 어머니의 사진 두 장을 더 올려야겠네.
하, 뱀밥? 뱀밭 아닌가요? 그 이름 생각 나요. 어려서..참 뱀도 많은 곳인가벼~ 생각 하고 뱀처럼 징그런게 없는디~ 동네 이름 앞에 붙일까? 그게 싫었던 생각도 나요. 할머니 는 늘~ 조카 이름 달고 사셨는데 부를때 종성! 이라 하시드니 돌림자 가 種字 였나봐요. 정말 반가워요. 난,글재주 도 없는데~ 어찌 표현 할까?
그렇지요. 씨 종(種)를 쓰는 게 독특하다고 생각했지요. 충무공의 16대 손이 씨 種 자 항렬로 알고 있어요. 충무공 후손 중 박 정희 정권 때에 해군참모총장을 거쳐 수산부 장관을 하신 분도 種자 돌림이었는 데, 정확한 함자가 기억나지 않는군요. 하여튼 충무공 직계 후손의 항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