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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빙벽의 대명사 토왕폭의 초등에 얽힌 비화입니다.***
제가 전문 등반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되었던 글이었지요.
山 선배 박인식 형이 1985 년에 발표한 "사람의 산" 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제가 그 형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던 책이었지요.
그 토왕폭을 보면 몸속에서 그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곤 했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잡아끄는 그 무언가가 그 토왕폭에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전에 우리 선배들이 이 토왕폭에 쏟았던 열정을 생각하면서 그 추억의
길로 한번 여러 악우님들을 안내해 볼까 합니다. 꿉벅!
토왕폭의 사나이들
1
노루목의 산모퉁이를 돌아들면 언제나 고개 드는
토왕폭
너는 언제나처럼 낯익은 웃음을 보내지만
너 목소리를 이 겨울
기억하지 못하겠구나
무엇이라 얘기했던가
그 여름
우리의 가슴 가장 깊숙한 곳으로
무작정 내리 꽃던 그 물줄기
그 폭포소리를 잊고야 말았구나
아, 무엇이라 얘기했던가
오히려 네 가슴에 얼어박힌
그 한마디의 슬픈 순수가 이제는
하얗게 얼어 섰구나
우리가 매달려들기에는
너 입은 너무 높고
우리가 딩굴며 소리치기에
너 귀는 너무 멀어 애닯은
우리는 설악가를 부르며
너를 떠난다.
함지덕 산머리 위로 배웅나왔던 너는
어둑어둑하게 돌아서고
우리는 너 등만 황홀이 바라며
귀머거리가 된 채
설악을 떠난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찬 어깨 여위어가며
결국 그 하얀 몸 형체도 없이
다시 하나의 소리가 되어버릴
너를 알아채지 못하고
설악을 떠난다.
2
우리의 설악산행은 언제나 토왕폭을 바라며 시작되고 또 끝난다.
들어갈 때는 버스창가에 앉아 왼쪽으로, 나올 때는 오른쪽으로 고개가
그만 꺾어질때까지 토왕폭을 바라보며 설악을 맞고 설악을 떠난다.
3
76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누구라 하면 앎직한 어센트 산악회의 어느 회원집엘 가본 적이 있다.
등산장비가 너절하게 깔린 그의 방에 사진이 하나 걸려있었다.
얼어붙은 폭포사진이였다. 큼직한글씨로 'I want the first ascender'
라고 써 놓았던 그 사진 아래서 묵묵히 산장비를 추리고 있던 그에게서
묘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아직 생생한 것이다.
그 사람이 처음 오르고자 했던 사진의 폭포는 다름 아닌 토왕폭이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못올랐던......
4
78년 8월인가, 한강성심병원엘 찾아간 적이 있다
안나푸르나4봉을 등정한 유동옥씨가 그 병원에 입원, 등산으로 인한
발가락 절단수술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까지 유씨와는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런 내용의 기사를 보고
찾아갔다.
문안이나 위로보다는 일종의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였다.
그것은 같이 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자리에서 유씨의 친구라는 어떤 산사나이와 악수를 하게 되었다.
그때 서로 손아귀에 쥐었던 힘의 기억이 아직도 뻐근히 남아 있어 그
얘기를 여기에 적는 것이다.
그 굳은 악수는 그가 77년 1월 토왕폭 상하단을 초등한 박영배씨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토왕폭 초등자였다는 점 하나만으로 그는 나의 주먹을 뜨겁게
달구었다.
5
81 년 1 월말 토왕폭 하단을 마치고 상단으로 진출했을 때, 상단 제일
아랫부분에 자일 하나가 걸려 있었다.
자일의 많은 부분이 폭포가 계속 얼어붙는 바람에 얼음 속에 묻혀
있었다.
그 철사줄같은 자일은 꼿꼿이 서 있어 마치 스스로 토왕폭을 올라
가려는 듯 긴장된 힘을 느끼게 했다.
그 자일의 아래 끝은 스타트 지점의 볼트에 연결됐고 볼트에는
비닐봉지가 하나 달려있었다.
그 봉지에는 메모종이가 하나 들어있었다.
메모지를 누가 방수포장해 둔것이다.
그 종이에는 '이 자일은 어센트 산악회가 토왕폭 등반때 사용하고 회수
하지못한것임. 해빙기에 해수할 예정이니 그냥 두기바람' 이라고 적혀
있었다.
토왕폭을 초등하겠다던 그 사람의 후배들이였다.
그 메모의 '해빙기' 라는 말은 어깨 여위어갈 토왕폭의 3월을 잠시
생각케 만들었다.
이 거대한 얼음기둥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까.
헤라클레스가 밀어 붙이는 회랍신전의 기둥같이....... 하는 생각이었다.
가만 돌이키며 언제 그렇게 얼어붙는지, 또 녹아 없어지는지를 한번도
목격하지 못했다.
봄 여름 그 절벽 아래로 물줄기를 쏟던것이 겨울에 보면 어느새 하얀
얼음기둥 으로 화하여 드리워져 있는것이었다.
그것은 하늘의 뿌리같이 높고 컸다.
그리고 또 다음해 봄이면 꿈이었나 싶게 없어져 버렸다.
토왕폭의 거취는 降神 처럼 신화적이었다.
결코 그 변화의 뒷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었기에........
그래서 토왕폭의 아름다움은 더욱 완벽했나...... 하는 깨달음을 그
종이쪽지는 주었던 것이다.
6
작년 12 월 초 부산의 권경업씨 집에 하루를 묵은적이 있다.
그가 히말라야 파빌봉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즈음이다.
그의 방구석에 산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표구한 모양새라든가 걸려있는 낌새가 주인마음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히말라야 등반때의 사진이려니 하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토왕폭 등반때 찍은 것이었다.
그는 77 년 1월말 토왕폭을 두번째로 오른 사람이다.
사진 아래에는 '토왕폭을 완등하고' 라는 글씨가 있었다.
토왕폭을 배경으로 그의 얼굴이 크게 돋보인 사진........ 산쟁이 집에
가면 흔히 볼수 있는 일이다.
한데 사진을 본 순간 왜 그가 그토록 그것을 아끼는지를 알게 되었다.
5 년 전의 사진이긴 하지만 지금의 그를 보고는 상상하기 힘들정도로
그 사진의얼굴은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젊음의 얼굴이었다.
그가 토왕폭에 건 젊음이 사진에 담긴것이었다.
히말라야 등반에 대해서는 시들하던 그에게 토왕폭 얘기를 건네자 다시
눈과 얼굴이 번쩍였다.
정말이지 그때 젊었습니다........ 목소리마져 팽팽 해진다.
토왕폭은 그렇듯 젊은피를 태우게 하는 무엇이 있나?
7
토왕폭은 상중하단으로 나뉘어진다.
상하단은 직벽, 부분적으로 약간 오버행으로 튀어나온곳도 있다.
상하단을 연결 시키는 중단은 40 도~60 도 정도의 완경사다.
하단길이가 120 미터, 중단이 60 미터, 상단이 140 미터로 전체길이는
약 320 미터 정도.
중단이 조금 누웠기 때문에 수직표고차는 이보다 짧은 300 미터 정도.
토왕폭 제일의 특징은 이 300 미터가 넘는 규모와 하늘에 걸린듯 높은
그 위치다
국내 최대임은 말할것도 없는 그 규모의 '큼'은 최대로 끝나는것이
아니다.
두번째 이하의 것들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난다.
군계일학이요 하늘과 땅이다.
해발 1,708 미터의 설악이 갖기에 겨울의 토왕폭은 지나친 느낌마져준다.
크기가 이정도 되면 그것은 물체로 끝나지 않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시켜 꿈꾸게하는 힘을 갖는다.
폭포는 대개 높은곳에 있지않고 계곡에 숨어있다.
그런데 이 토왕폭은 어쩐일인지 능선에서 천길 낭떠러지로 곧장
떨어지고 있다.
지형적으로 그만한 여건이 마련되어서겠지만 외설악입구 노루목에서
보면 믿기지 않을만큼 높이 걸려있다.
땅에서 흘러나온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로 얼어붙은것
같은 하얀 하늘 기둥이 .......... 보노라면 꿈 같다.
그렇다.
환상적이다.
그 환상은 산사나이에게 그 얼음 기둥을 오르려는 또 다른 환상을갖게
만든다.
그리하여 토왕폭의 사나이들이 태어난다.
8
얼음폭은 상단이 20 미터, 하단이 30 미터 정도로 더 넓다.
상하단에 하나씩 2 개의 동굴이 있다.
하단에는 밑부분 20 미터 지점, 상단에는 3분의 2 지점의 가운데 있다.
하단의 아랫부분은 고드름지대, 위로 갈수록 청빙으로 결빙 상태가
좋아진다.
상단은 전체가 거의 고드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겨울철에도 대개의 경우 표면에 물이 흐른다.
근처에 가보면 고드름 사이를 뱀처럼 늘 물이 기어다닌다.
하단에 비해 상단의 낙수가 특히 심하다.
조금 푹한 날에는 아예 샤워장 같아진다.
바람 또한 토왕폭 얘기에 빠질수 없다.
하단에서마저 등반자끼리 20~30 미터 떨어지면 육성으로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을정도로 이 바람은 낙수로 젖은 옷과 몸을 순식간에
동태로 만든다.
이 체감 온도는 자칫 등반 의욕마저 동결시키는 토왕폭의 마성이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매년 고정불변한것은 아니다.
이점은 토왕폭을 더욱 헷갈리게 한다.
그해의 강우량, 강설량, 풍속, 기온 등의 복합적인 변수를 지닌다.
그 변수에 따라 심한 경우 얼음질과 폭과 경사도 낙수량 등이 달리 결정
되어진다
심한경우 빙벽의 폭이 평년의 반도 안되는 해가있다.
고드름의 양과 단단한 정도로 달라진다.
'토왕폭에 초등이란 있을수 없다. 매년 처음 오른 팀마다 초등이다'
라는 말도 그러한 관점에서 어느정도 이해되어야할것이다.
하지만 토왕폭이 등정되기 전까지는 이 등반을 '불가능' 이라고 많이들
생각했다.
70 년대 초까지의 장비와 기술로는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토왕폭 등반이 히말라야의 8,000 미터급 거봉등정보다 더
의의가 있다는 얘기까지 돌았겠는가.
그리고 바다건너 일본친구들까지 잔뜩 눈독 들였겠는가.
9
토왕폭을 처음 올라보고자 젊은피를 끓인 팀과 사람은 많다.
송준호, 오세진, 백인섭씨의 요델산악회, 김종욱, 유기수, 최윤식,
박일환씨 등의 에코클럽, 박영배, 남순철, 유동욱, 김항원씨 등의
크로니,최수남, 이원영씨 등의 하켄클럽, 김재근, 민병국씨 등의 어센트
그리고 악우회 등 서울의 전통있는 산악회들이 모두 그 대열에 끼었다.
동국대를 비롯한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서울공대, 서강대 등의
대학팀들도 그 이름들에서 뺄수없다.
지방 산악인들도 예외일수 없을것이다.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울산, 마산의 많은 산사나이들이 겨울 눈길도
언제나 토왕폭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의 계곡, 토막골, 잦은 바윗골 등의 설악의 다른 빙벽을 오르면서도
그들의 마음이 고이는곳은 늘 토왕폭이었다.
토왕폭은 그렇도록 높이 걸려 있었다.
10
토왕폭 등반은 토왕벽이라 불리는 그 좌우측 암벽과 떼내어서 생각할수
없다.
토왕벽 등반은 전초훈련, 정찰 등의 성격으로 토왕폭 등반전에 많이
이루어진다.
76 년 무렵까지 당시의 장비로는 고드름 상태의 확보가 큰 난점중의
하나였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암벽과 동시등반하며 빙벽등반대원의 확보를 암벽
등반대원이 보아 주거나 갈지자로 오르며 암벽에 록하켄으로 확보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빙벽을 염두에 둔 암벽등반을 우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토왕벽의 등반력은 그 빙벽보다 오래 되었다.
토왕폭 등반을 가장 열망해오던 에코클럽에 의해서 74 년 8 월 하계벽이
뚫렸고 하계 좌측벽은 75 년 5 월 부산 청봉산악회에 의해 초등 되었다.
아이스햄머, 짧은 샤프트에 예각을 가진 피켈, 앞니가 있는 아이젠,
설치 회수가 간단한 아이스하켄 등의 얼음장비와 긴 자일, 유마르 등
새로운 장비들의 출현은 토왕벽 등반과 함께 70 년대 중반기 이후부터
이 '불가능의 얼음기둥' 을 녹일 가능의 불씨를 산사나이들의 가슴에
던졌다.
특히 이들 장비를 사용한 프론트포인팅 빙벽기술과 유마링 기술
은 '가능성'을 넘어 '자신감' 까지 심었다.
이 신속한 등반 기술은 토왕폭에서의 '시간'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주었다.
토왕폭은 낙수와 결빙으로 그 위에 머무는 모든것을 빙벽과 하나로
만들어 버리려했기 때문이다.
이 빙벽에서 살아나려면 빠른시간에 빠져나가는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프론트포인팅과 유마링은 빨리 치고 빨리 빠질수있게 해준것이었다.
그렇게 토왕폭 등반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11
77 년 1 월은 토왕폭의 잔치날이었다.
이 폭포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산꾼들이 토왕골로 몰려 토왕폭 시집
보내는 축제를 마련했다.
유기수씨의 에코클럽, 박영배씨가 이끄는 크로니산악회, 오영복 도창호씨
의 동국대팀, 그리고 강창호, 이정희, 권경업, 이종양씨 등의 부산
합동대 등의 산사나이들이 저마다 토왕골에 텐트를 치고 하늘높이 걸린
이 하얀 얼음기둥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올해는 누군가가 해치울것 같다는 낌새를 느끼며.........
75 년 2 월 어센트산악회의 강원도 춘성군 구곡폭포 초등은 국내 빙벽
등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사용되었던 장비와 프론트포인팅 기술은 토왕폭 등반에의 확실한
자신감을 심었고 많은 산꾼들로 하여금 76 년 한해를 토왕폭에 전념
하도록 만들었다.
구곡폭포는 얼음상태와 생김새가 토왕폭 하단과 유사하다.
그것은 이 폭포에서 토왕폭등반의 가능성을 가늠케했다.
75 년 2월 9일 어센트산악회의 김재근씨와 일본인 하다께야마 산시로씨
가 초등에 성공했다.
이때 산시로씨가 가져온 샤레와 제품의 아이스하켄(바르트훅이다) 이
국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고드름 빙질 빙벽에서의 이 하켄의 효율성은 토왕폭을 노리던 산쟁이들
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당시 국내 등산장비 제작의 최고명이던, 그리운 이름 모래내금강(M.K) 의
故 김수길씨는 76 년 한해동안 몹시도 바빴다.
주문받은 바르트훅 제작으로 ..........
산시로씨는 김재근씨에게 3개의 바르트훅을 주었다.
그 3개의 하켄은 김씨의 친구들 손을 거쳐 김수길씨의 입김으로 손오공
의 털처럼 수백개의 새끼를 쳤다.
그 M.K 의 바르트훅은 토왕폭의 사나이들에게 범의 날개를 달았다.
크로니의 박영배씨도 김재근씨가 준 바르트훅 하나를 들고 모래내를
찾아갔으며 부산의 산사나이들도 동국대의 도창호씨에게서 얻은 볼펜
굵기의 바르트훅을 들고 대장간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 하켄과 신형 아이스햄머를 갖추고 프론트포인팅의 효율성과 그 동안
의 훈련에 의한 기술과 체력을 믿으며 많은 사나이들이 자신감을 갖고
77 년의 벽두에 토왕폭으로 모인것이다.
76 년 2 월 토왕폭은 자칫 일본인에게 그 첫 순결을 낼뻔 했다.
구고폭포를 처음오른 산시로씨가 가와사끼, 고히로 등 5 명의 동료를
끌고와 토왕폭 하단을 2 월 7 일부터 2 박3 일 (등반에 14 시간 소요)
에 완등한 후 상단의 3 분의 1 까지 진출했던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어쩐일인지 돌아섰다.
만약 그들이 성공했다면 한국산악계는 씻지못할 한을 토왕폭에
남겼을것이다.
제 계집을 남에게 빼앗기는 못난 한을...........
때문에 더욱 77 년 토왕폭 사나이들의 눈은 번쩍였다.
77 년의 토왕폭은 비감한 기운까지 도는 출사표를 던진 산사나이들의
광장이 되었다.
12
이 4 팀중에서 누가 먼저 오르것인가?
토왕폭은 2 팀이 한꺼번에 붙을수 없다는것을 누구나 다 안다. (당시 기준)
어느 팀이든 먼저 붙으면 다른팀은 기다려야한다.
그런데 4팀이 모였다.
곤란한 얘기다.
제일 먼저 도착한 팀은 76 년 12 월 29 일의 크로니였다.
크로니는 다른팀이 없는 상태에서 77 년 1월 1일 등반을 시작했다.
크로니의 이 등반에 가장 당황한 팀은 1월 7일 닿은 동국대. 그들은
전 해의 하단초등에 이어 상단도 마무리 짓고자 1년간 전력투구하여
등반대를 꾸렸으나 크로니보다 몇일 늦은것이었다.
그들은 닭쫓던 뭐 모양 구경하는수 밖에 없었다.
에코클럽은 크로니가 하단을 등반하는동안 최윤식 김도섭 대원이
우측벽을 등반했다.
그들은 1 월 8 일 도착했다.
크로니가 상단으로 진출하자 에코는 토왕폭 하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1월 8 일 도착한 부산팀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초등의 기회를 동국대에 주는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그 전해 하단만 초등한 동대의 우선권을 인정한 것이다.
그들은 동국대의 등반이 끝난다음 시도하는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크로니의 등반이 끝날때까지 소토왕골 등지를 돌며 훈련하며 상황을
관망했다.
에코클럽은 크로니가 상단으로 진출할무렵 하단을 끝내었다.
토왕폭에 유창서(*주: 일명 설악산 반달곰, 권금산장의 장주 ^^ 털보임),
故 김종철 회원이 등반 시도한 68 년 이래, 가장많은 정열을 쏟아온
에코클럽은 그 열정을 구경만으로 달랠길없어 크로니에 합동등반을 제의했다.
1월 10 일밤, 토왕폭 중단에 설치된 크로니와 에코의 텐트에서 양팀 우두머리 모임이 있었다.
협상은 깨어졌다.
합동등반은 크로니쪽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밤 에코는 빨간 불빛을 몰고 토왕골을 내려가 버렸다.
합동등반을 제의하고 그것이 깨어지자 그날 밤으로 내려가버린 에코의
심정과 또 그것을 받아들일수없었던 크로니의 입장도 모두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 문중에 미안하지만 저는 이 말에 찬성하지 못합니다. 받아들여졌어야 한다고 봅니다.
등반은 무상의 행위이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하지 그깟 허명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토왕폭은 이미 크로니에 의해 그 물빛 만큼이나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처녀 토왕폭과 사나이 크로니와의 계약은 크로니가 아니고는 누구도 깰수없는것이 이미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남의 아내에 손댈수없는 사회규범과 같은 등반의 윤리였다.
동국대는 크로니팀의 등반이 끝날때까지 지켜보고 있었고 12 일 초등이 이루어지자 바로
하산해버렸다.
그리고 부산 합동팀은 다른팀이 없는 상태에서 13 일 등반을 시작했다.
넉살좋은 크로니는 그런 우여곡절끝에 77 년 1 월 12 일 토왕폭 초등을 이루었다.
칠복이란 놈도 먹쇠란 놈도 눈독들이던 최진사집 세째딸을 달싹 채간 칠복이 처럼........
13
80 년 여름 크로니의 박영배씨가 아이거북벽 동계등반을 제의해왔다.
그는 벌써 두 번의 아이거 원정 경험이 있을때였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어느 후배는 박씨와 함께 원정하는것을 말렸다.
그 후배는 산악계의 뒷 얘기는 모르는게 없는 귀크고 혀긴 놈이었다.
박영배씨가 산 사나이다운 책임감이 없다며 한 자일을 묶지 말라고 당부한것이다.
왜냐는 물음에 그는 망설이며 답했다.
토왕폭 초등에 얽힌 얘기 였다.
그 후배가 알기로는 톱으로 먼저 오른 박영배씨가 라스트인 송병민씨의 확보를 봐주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는것이었다.
그래서 송병민씨는 확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올라갔다고.........
이것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 현장에 있었기에 웬만한 사람이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람과 어떻게 아이거 북벽에서 한 자일을 묶겠느냐는 얘기였다.
토왕폭 초등 상황에 대해 좋지않은 소문이 돌고 있다는것을 그때 알았다.
그 후 무교동에서 박씨와 진하게 소주를 마신적이 있다. 술병 숫자를 기억못할때쯤 이러이러한
소문이 돌고 있다. 사실을 얘기해 달라. 형의 얘기를 듣고 형의 행위에대한 꺼림직함이 없어지고
믿음이 생긴다면 같이 가겠다며 얘기를 꺼냈다.
그는 사나이의 이름에 맹세를 했다.
그때 그의 눈빛의 진지함을, 그 말의 진실됨을적어도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엄청난 오해를 낳은
소지도 있었다는 점과 그 구설수에 대해 그가 얼마나 괴로와하고있나 하는것도 알았다.
등반시작 14 일만에 박영배씨가 토왕폭 상단에 토왕폭상단에 완전히 올라섰을때 이미 주위는
어두웠다. 밑의 송대원이 자일을 조금 내려달라고 하여 나무에 맨 자일을 풀고 그곳에 하켄을 박고
확보하려다 장비조작이 잘못되어 그는 자일을 놓치고 말았다.
몸의 주자일을 푼것은 물론 실수였다. 아래의 송병민씨는 혼자가 되어 버렸다.
송씨는 앞이 아뜩해졌다. 더구나 헤드랜턴도 고장난 상태였다. 박씨는 중단을 내려다보며 마구
고함질렀다. 자일 한동을 더 지원해 달라고.
하지만 어두웠고 세찬 바람에 그의 그의 목소리는 마냥 하나의 비명이 되어 날렸을뿐이었다.
이제 그 후배를 살리는 길은 하나, 좌측 계곡으로 내려가서 빨리 자일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 험한 계곡을 짐승처럼 기어내려왔다. 자일도 없이......
죽든 살든 내려가야할판이었다. 그의 목숨은 그의 후배것이기에. 하지만 도중에 길을 잃고 밤새
헤맸다. 필사적으로 텐트주위까지 온 그는 탈진으로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밑, B.C 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빛 하나가 올라갔고 , 고함 소리가 들리는듯 했고........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누구도 움직일수 없었다
송병민씨는 매달려 있었다. 어둠속에서 자신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던 그는 기다리다말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송 대원이 벌인 투쟁은 삶과 죽음의 하얀 허리를 넘어서는 토왕폭
사나이의 기본 모형이 되었다. 그 후 토왕폭 등반사는 제2, 제3의 송병민을 낳았다.
송병민은 갖고 있던 예비자일을 사용, 박영배씨가 촘촘히 박아놓은 아이스하켄을 침착히
인공등반하여 새벽에 무사히 올라섰다.
자일과 설치된 장비는 그대로 빙벽에 남겨둔채. 이것이 박영배씨가 밝힌 토왕폭 초등의 내막이다.
그 얘기를 듣고 그에관한 헛 소문이 생겨난것도 , '山' 지 77 년 3 월호 에 실린 등반기의 마지막
부분의 모호함도 이해할수 있었다.
그 "마지막은 "...... 이란, 고도에서 헤드랜턴에 의지해 프론트포인팅 하는것은 쉬운일은
아니었다. 10 여 미터를 프론트포인팅한후 드디어 12 (11 일을잘못쓴것 같다) 일 오후 6 시 30 분
(실제는 자정 무렵) 정상에 도달했다.
밑에서 빌레이를 보고있던 송병민 대원은 박영배 대장하고 의사를 소통 하려 큰소리를 질렀지만
얼음벽에 가로막혀 잘 들리지가 않았다.
밑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대원들은 이 소리에 매우 불안해 했다.
송병민 대원은 한 지점에서 몇 시간이나 빌레이를 보았기 때문에 온 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정상에 올라선것은 12 일 오전 2 시경이었다." 라고 적혀있다.
등반의 속 사정을 안다면 이 등반기의 시간과 내용이 정확치 않은것임을 짐작할것이다.
기록자의 고충도 아울러.
14
76 년 동국대의 하단초등은 7박 8일의 긴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1월 7일에 스타트, 1월 14 일 오후 4시 5분에 라스트인 이동훈 대원이
하단위에 올라섰다.
동대는 70 년 1월 첫시도를 했으며 그 후 거의 매년을 정찰해 왔었다.
75년 봄 도창호, 이동훈, 신인섭씨 등이 구체적인 등반 계획을세웠다.
75 년 한해를 자료조사, 장비구입 등 문제점 해결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보냈으며 가을에는토왕폭 상단벽을 정찰등반 하기도했다.
76 년 1 월 4 일 서울을 떠난 대원들은 신인섭(대장), 이상선, 김형태,
강승모,김성배, 안호근, 안규섭, 이종량, 김용일, 이동훈, 도창호,
이영복씨 등 12 명.
그들은 1 월 7일 하단 동굴로 진입한 후 왼쪽으로 고드름 지대를 횡단
하여 왼쪽 벽의 록밴드로 나아갔다.
11 일 그곳에 록볼트 2개를 설치 테라스를 만들었다.
요즘 동대테라스로 불리는 곳이다.
그곳에서 다시 빙벽 가운데로 나온 후 직상하여 1월 14 일 7박 8일의
긴 투쟁끝에 도창호, 이동훈 두 대원이 하단을 마무리 지었다.
등반중 스크류 29 번, V 형과 U 자형 아이스하켄을 13 번 총 42 번의
하켄을 설치했다.
거의 인공등반으로 이룬셈, 토왕의 하얀 허리에 첫길을 내며 사나이들은
삶과죽음의 갈림을 의식했고, 아침 아이젠 밴드를 묶으며 왜 이짓을
해야 하는가를 회의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 얼음 기둥에 젊음으로
자신을 걸었고 끝내 토왕 하단을 넘어 자신을 넘어섰다.
선배가 손수 등반자의 자일을 매어 주기도 하며................
15
8 명의 크로니 산악회원들은 76 년 12 월 29 일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을 떴다.
박영배를 대장으로 김태성, 남순철, 서정학, 이건호, 송병민, 임상섭 대원의 77 크로니
토왕폭 등반대.
크로니는 76 년 1 월 정찰 등반을 가졌고, 76 년을 준비의 해로 보냈다.
그들은 모래내에서 독일 샤레와 제품의 바르트훅과 같은 모형으로 23 개를, 또 그것보다는 조금
작게 변형시킨것을 10 개 제작 하였다.
76 년 12 월 31 일 하단빙벽 아래 B.C 를 설치, 77 년 새해 첫날 붙었다.
그들은 동대루트와는 달리 동굴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을 바로 올라붙는 루트를 택했다.
2일 동대 테라스를 거처 3일 오후 5시 40분 박영배,송병민 두 대원이 하단을 끝내었다.
전 해의 하단 초등때보다 엄청 시간이 단축되었다.
4일은 중단의 설전에 전진 캠프를 설치, 5일부터 토왕의 더 높은 마지막 아성, 상단을 공략했다.
비옷과 고무장갑까지 동원항여 낙수 속을 헤쳐올랐고 김태성, 이건호 두 대원은 떨어지는 얼음
조각에 헬멧이 깨어지는 위기를 넘어, 10일, 3분의 2지점의 동굴 테라스까지 나아갔다.
11일 동해바다에 씻긴 아침 햇살을 받은 토왕의 이마는 토왕폭 산사나이 의 첫탄생을 계시
하려는 듯 토함산 부처이마의 보석처럼 성스러이 빛났다.
그 해와 더불어 토왕폭의 가슴에 매어달린 두 사나이는 그 해가 서편 함지덕 머리 너머로 사라질 때
토왕을 넘었다.
토왕폭의 사나이는 그렇게 산세계에 나왔다.
77년 1월 12일 새벽.
상단을 시작한지 7박 8일만이었다.
상하단 전 등반은 12 일만에 이루어진 셈.
크로니는 등반때 총 70 여 회의 아이스 하켄을 설치했었다.
16
크로니의 등반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토왕의 사나이들이 있었다.
부산합동대.
토왕폭등반에 뜨거운 젊음을 태워온 그들은 10개월 가까지 준비하고
훈련해왔다.
76년 8월 1일부터 30일간 토왕골 주위의 선녀봉,노적봉,숨은벽, 토왕상단
우벽등을 오른 훈련등반까지 가졌다.
그들은 동대로부터 얻은 모래내제품의 바르트 혹을 여럿 만들었고
몇가지 장비를 특별히 고안해 내기도 했다.
애숭이(이것은 훅hook이라는 이름으로76년 쯤 外誌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바있다) 와 토왕77이 그것.
특히 토왕77은 국내 최초의 아이스 볼트로 회수와 재사용이 불가능하며
빠른시간에 조작설치할 수 있는 확보용이었다.
강창호(엑셀시오), 이정희(청봉)씨를 대장으로 배종순(엑셀시오),
김문식,권경업, 이종양(부산클라이머스), 김원겸(엑셀시오), 이정호
(청봉), 한성진(엑셀시오) 등 아홉 부산젊은이들이 함께 손을 잡았다.
1월 8일 설악산에 도착한 합동팀은 다음날 토왕폭의 상황을 알았다.
크로니가 등반중이며 동국대는 기다리고 있고 에코 클럽은 암벽등반
하고 있다는 것을...
토왕폭하단 설전에는 야영할 자리조차 없었다.
그들은 비룡폭 위에 B.C 를 쳤다.
11일 저녁 소토왕골에서 훈련등반을 마치고 B.C로 돌아가던 그들은
토왕폭상단에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다. 도깨비 불 같은.
시집간 그녀의 첫날밤인가, 깊은 밤 소리없는 눈 처럼 까닭모를
안타까움이 차곡차곡 사나이들의 가슴에 내려 앉았다.
크로니팀의 랜턴빛이다, 아니 별빛이다 라며 사나이들은 잠 못이루었다.
12일 새벽 토왕골에서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를 그들은 들었다.
궁금증은 더욱 목을 태웠다.
아침, 토왕폭은 아무일 없다는 듯 다시 선녀봉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하얀 이마는 어제 오늘 없이 빛났다.
그들은 토왕폭으로 달려갔다.
토왕폭이 꺾이는 길목에서 하단만 재등하고 하산하는 동국대팀을 만났다.
상하단 초등을 크로니에 주고 돌아선 동곡대 사나이들의 뒷모습에
쓸쓸함을 느꼈다.
마음에 품었던 여인을 두고 뒤돌아선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은.
초등, 2등에 전혀 개의치 않았던 부산팀은 13일 부터 등반에 들어갔다.
이날 동굴을 거쳐 권경업, 배종순대원이 동대테라스까지 진출했다.
다음날 권경업,김원겸대원이 공격조가 되어 유마르로 테라스까지 올랐다.
그곳에서 권대원은 7~8m 간격으로 확보용 하켄을 치며 프른트로 시원스레
빠져 나갔다.
하지만 토왕폭은 그를 쉬 놓아주지 않았다.
테라스에서 20m쯤 나아갔을 때 힘껏 휘두른 왼손의 클라이맥스가
어이없게 두동강 나버렸다.
부러진 나무토막만 남기고 머리통은 빙벽아래로 근두박질쳤다.
남은 것은 오른손의 포레스트(Forest )아이스 햄머와 멍청한 브래이드가
붙은 타격용 햄머 뿐이었다. 그 타격용으로 등반할 수는 없다.
햄머 하나로 오르든지 그곳에서 하강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밑에서 보고 있던 강대장이 지원조에서 급히 지시했다.
오른쪽 릿지를 통해 아이스 햄머를 지원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빨라도
30분 이상이 걸린다.
불안한 상태로 30분을 그냥 머문다는것은 또 다른 위험을 부를수가 있다.
차라리 그냥 오르기로 권대원은 결심한다.
그는 햄머 하나로 토왕의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히려보는 사람이 손에 땀을 쥐었다.
그는 개구리처럼 움츠렸다 뛰는듯 몸을 펴며 두 손으로 모아 잡은 햄머를
날쌔게 위로 찍었다.
토왕폭도 등줄에 땀 같은 물을 흘렸다.
그는 남은 40여 m 를 끝까지 침착하게 올라 하단을 끝내었다.
하단을 끝내고 B.C로 돌아온 대원들을 뜻밖의 구조활동까지 벌여야 했다.
구경온 사람이 실족, 의식을 잃는 바람에 등반에 지친 몸을 쉴 새도 없이
부상자를 업고 2km를 뛰어내렸다. 그 때문에 16, 17일은 휴식,18일과
19일은 중단에 전진 캠프를 설치, 20일 상단으로 진입했다.
김문식, 이종양, 권경업대원이 21, 22일 시도한 오른쪽 코스를 버리고
23 일 빙벽 가운데 루트로 김원겸, 김문식 두 대원이 60m나 올라 오후 4시
하강. 24일은 상단의 3분의 2 지점인 동굴까지 나아간 후 하강했다.
25일 오전 8시 10분 상단 출발점을 떠난 두 김대원은 지켜 보던 대원들
의 뜨거운 격려 속에 오후 4시 5분, 상단을 완전히 올라섰다.
두 사람은 마지막 테라스에서 크로니 산악회가 철수하지 못한 주자일이
하켄에 카라비너로 연결된 채 얼음 깊숙이 정상까지 냉장된 것을 보았다.
몇일 전 토왕폭이 첫순결은 내며 입은 상흔 같은, 그대의 웨딩드레스에
꽃혔던 부케꽃 같은... 이로써 토왕폭 제 2등은 깨끗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단이 1박 2일.
상단이 4박 5일로 합쳐 1주일이 걸린 셈이다.
하단에 붙기 시작하여 완전히 끝난것은 12박 13일간이었다.
등반에 사용한 인공지점은 테라스 확보용 15번, 등반용으로 48번의
하켄을 설치했다.
부산합동대 완등의 하객인지 등반을 마친 1월 25일 두 사람의 산사람이
토왕골로 찾아들었다.
서울 마운틴 빌라팀 소속이라는 두 산사나이는 말없이 토왕폭을 바라
보다가 돌아갔다.
그들도 언젠가는 틀림없이 돌아오리라.
무엇인가를 결심하고는...... 왜냐하면 토왕폭이 다시 부르기 때문에.
토왕폭은 그 점에 실패한 적이 없다.
혼까지도 부른다.
토왕골의 길목은 언제나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이 엇갈리는
곳이다.
등반을 마치고 비룡폭 모퉁이를 돌 때 불쑥 나타난 또다른 토왕폭의
사나이들에게 토왕의 사나이는 말없이 바톤을 건네는 것이다.
젊음이라는 이름의 그 바톤은 언제까지나 산사나이의 손으로 전달될
것이다.
토왕폭이 있는 한......
17-1
장경덕 대장이 이끄는 마운틴 빌라(서울고 산악부 O.B회)의 토왕폭
등반대 9명은 78년 1월 11일 토왕골로 들어섰다.
물론 장경덕, 최영규 대원이 오후4시 시등, 5시 30분 동대테라스에
도착, 자일을 고정시켜 놓고 하강했다.
13일 11시에 장, 최 두대원은 다시 등반을 시작, 오후4시에 하단을 끝내
버렸다.
놀라운 속도였다.
다음날 상단을 공략, 80m를 올라 그곳에 제2 테라스를 깎았다.
계속 올라가겠다는 최영규대원을 말려 장경덕대장은 자일을 고정시키고
하강했다.
장, 최 그리고 김기환대원은 이날 중단의 설동에서 잤다.
15일 오전 8시 반 최영규, 김기환대원이 설동을 출발,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오후 4시, 110m지점에서 제3 테라스를 깎았다.
남은 것은 불과 20 여 m 토왕폭 완등이 잡힐듯 가까이 왔다.
이를 지켜본 이건성 부대장이 시간상 그곳에서 하강하기를 권유했다.
하지만 최대원은 계속오를 것을 고집, 김대원을 오후 5시 30분
제3 테라스로 올렸다.
6시에 테라스를 출발한 최대원은 어둠 속의 토왕폭을 계속 올랐다.
밤 11시 30분까지 확보를 보고 있는 김대원의 손에서 자일은 계속 위로
빠져나갔다.
이제 정상은 7m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경사도 누웠다.
눈 앞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최대원은 나무를 향해 나아갔다.
토왕폭 등반을 최단시간내에 이뤘다, 하는 순간 비명소리와 함께 김대원
의 손에 잡힌 자일이 어둠 속으로 마구 빠져 나갔다.
눈더미로 채 박히지 않은 최대원의 아이스 햄머가 빠지며 최대원은
30 여 m 를 떨어진 것이다.
제 3테라스 5~6 m 아래 지점에서 추락은 멈추었다.
이 추락으로 피톤은 3개가 빠졌고 최대원의 양 발목이 부러졌다.
김대원이 필사적으로 그를 테라스까지 끌어올렸다.
두 대원은 그곳에서 하강키로 결정, 김대원이 제2 테라스로 먼저
하강했다.
하지만 조난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당황하여 자일이 엉켰다.
그는 두 번째 테라스로 내려서지 못했다. 테라스 3m 위에 매달리고 말았다.
그것으로 두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끝났다.
그냥 그 냉혹한 밤의 얼음기둥 위에 매달려 있는 수밖에......
함지덕 위로 찬 조각달만 걸렸고 사방은 고요해졌다.
시간이 갔다.
새벽 1시 30 분 장경덕대장은 설동에 닿았다.
이건성 부대장이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 16도 안팎, 다행히 바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추위 속에서 두 다리 골절상으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는
최대원이 맞을 동상과, 자일에 매달린 채로 공포심에 탈진상태에 시달릴
김대원을 생각할 때 구조대는 날 밝기만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터질듯 관자놀이를 때렸다.
날이 밝으려면 5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조난대원의 상태로 보아 빨리 구해내지 않으면 체력을 전부
앗길 것이다.
그러면 참혹하게 될 것이 뻔하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라고 판단한 장대장은 새벽 2 시 30 분 때마침
토왕하단을 등반하고 야영중이던 서울 봔트 클럽대원과 이건성, 이만영
대원을 이끌고 오른쪽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은 바위면도 덮었다.
나무를 확보지점으로 이용하여 눈을 헤쳐 미세한 바위홀드를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왼쪽의 빙벽에서 김대원의 신음에 가까운 흐느낌이 구조대원의 가슴을
찢었다.
"형! 손이 썩어 들어가요, 빨리 구해줘요......"
나머지 대원들은 설동까지 나아가 두 대원에게 격려를 보냈다.
"형! 나 의근이야. 자지 말고 손발을 계속 움직여."
김대원의 거의 혼수상태로 반응이 없고 최대원은 침착하게 자신의
상황과 바램을 똑똑히 전해 왔다.
04시 30 분 후등자를 확보하며 강대장은 김대원의 졸음을 막아주기
위해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고 조용했지만 끈적한 무엇이 토왕의 골로 퍼져나갔다.
'인왕의 억센 바위..."
아래의 설동에서도 따라 불렀다.
최대원도 불렀다.
어둠의 토왕폭은 그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부르고 듣는 토왕폭 사나이들의 눈시울이 모두 뜨거워졌다.
장대장의 눈에도 걷잡을 수 없이 별빛이 눈물에 묻어 흘렀다.
그 순간 이상한 힘에 휩싸여 그는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정신없이
정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장대장이 정상 부근에 도착한 것이 오전 7 시.
그는 40 m 자일 4동을 연결시켜 조난지점으로 내려 보냈다.
여러 번 끝에 최영규대원이 자일을 잡았고 뒤이어 김기환대원도 잡았다.
그 두 대원에게 음료수와 음식을 자일을 통해 내려보냈다.
그 음식으로 어느 정도 원기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본격적으로
구조작업에 들어갔다.
17 - 2
5 명의 구조대원은 어센더와 유마르를 사용하여 김대원 부터 필사적으로 끌어 올렸다.
토왕폭을 오르는 것보다도 몇 배나 힘든 4 시간 30 분의 격심한 몸놀림 끝에 토왕폭 상단의
설사면 위로 김기환 대원의 얼굴이 떠 올랐다.
생명의 불꽃이 막 사그라져가던 그 얼굴을 얼싸안은 토왕폭 사나이들의 눈에 다시 격정이
이슬졌다. 따뜻한 옷을 갈아입히고 음식을 떠먹였다.
가벼운 동상을 입었을뿐 탈진해 가던 그는 쉬 기력을 되 찾았다.
12 시30 분 최영규 대원도 정상에 올려졌다.
최대원의 왼손은 심한 동상에 걸려 있었고 양쪽 발목은 부러져 40도 정도씩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발목 이하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조급히 신발을 벗길 수도 없었다.
출혈이 있는 경우 상태가 더욱 나빠질 수가 있으므로......
빨리 안전한 곳으로 내리는 것이 최선의 구조책이었다.
햇살이 비끼자 기온은 급강하하고 토왕골은 다시 거센 바람에 휩싸여갔다.
봔트 클럽의 최영국대원이 2 시간에 걸쳐 빙벽으로 하강, 설동에 도착했다.
그는 해먹(Single anchor hammock) 을 자일 끝에 달아 올렸다.
움직일 수 없는 최대원은 빙벽으로 직접 내려보내고 원기를 회복하고 있는 김대원은 왼쪽
계곡으로 하강시키기로 장대장은 결정했다.
해먹에 최대원을 넣고 발목에 부목을 대어 아이젠 밴드로 고정시켰다.
하강기를 사용하여 천천히 내려보내면서 자일연결 부분을 지날 때는 앞쪽 나무의 슬링 카라비너
2개를 통과시켜 그립비레이로 고정시켰다.
연결된 자일 길이가 250 m 나 되어 설동까지 끌고갈 만했다.
오후 4시 30중, 천신만고 끝에 최대원은 설동에 도착했다. 이를 확인한 장대장은 김기환대원을
이끌고 왼쪽 계곡으로 향했다. 그 게곡의 설사면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확보할 나무조차 없었다.
피켈 두 자루를 교대로 꽃아 불안한 하강을 계속했다.
밤의 계곡은 끝없이 느껴졌고 그때마다 모진 바랍이 토왕골을 휩쓸었다.
토왕은 이미 비정한 산으로 변해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를 얼려버리겠다는 듯 바람은 모졌다.
하지만, 그 바람도 추위도 토왕폭 사나이들의 미지막 피까지 얼리지는 못했다.
마지막 빙폭에 아이스피톤 3개를 고정시키고 하강을 끝낸 것이 밤 10시 30분, 고함소리를 듣고
여러 대원들이 마중 나왔다.
서로 살아 만남을 기뻐할 힘도 없을만큼 누구없이 지쳐있었다.
밥도 먹지못한 채 죽음 같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설동에서 윤태규 대원은 최대원을 간호하며 그 설악의 밤을 하얗게 새웠다.
다음날인 1월 17일, 오전 8시 30분 최대원을 다시 하단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지쳐 있어 행동이 몹시 느렸다.
마침 도착한 에코 클럽의 박일환씨가 도와 오후 3시경 해먹에 싸인 최대원은 하단 빙벽 아래의
설사면에 내려졌다.
그곳에는 낮선 또 다른 토왕폭의 사나이들이 있었다.
토왕폭은 언제나 계주되어지는 것이었다.
새 바톤을 이어받을 그들은 광주서 온 바자울 팀이라 했다.
바자울 팀은 최대원을 비룡폭 아래까지 내려주었다.
오후 7시 30 분 비룡폭을 지나 토왕골 입구에서 목말을 태워 노루목 여관에 도착한 것이
밤 11시 30분.
속초서 이기섭박사가 오밤중인데도 급히 달려와 응급치료했다.
이박사는 될수록 빨리 서울의 종합병원으로 옮기라고.
다음날 새벽 서울의 이성환 간사장과 백병원 정형외과장인 권칠수 선배에게 연락하여 최대원을
서울로 후송하기 시작했다.
강광소씨와 사진작가 석동일씨의 도움으로 영동고속도로를 달렸으나, 폭설로 속모른 택시는
느렸다. 결국 서울 근교 야전병원에서 안타깝게 또 한밤을 보냈다.
19일 아침에야 백병원에 닿은 최대원은 山선배의 집도로 오른쪽 발가락 5개와 왼손 약지 한 마디를
잘라내어야 했다.
마운틴 빌라의 등반은 그렇게 끝났다.
마운틴 빌라가 하단을 6시간 30분망에 마쳤고 상단을 15시간만에 거의 다 끝냈다는 것은 상하단을
12일 만에 이룬 그 전해의 초등때와는 비교가 안될 빠른 속도였다.
이는 토왕폭 등반양식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토왕성빙벽 위의 밤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명피해 없이 이뤄낸
구조작업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혼신의 힘을 바친 구조대원 뿐 아니라 견뎌낸 조난자와 말없이 도와준 다른 산사나이들의 가슴에
그 인간승리는 토왕폭 만큼이나 희고 높게 결정될 것이다.
그 젊은 날의 토왕폭은 순수와 자유를 살아가려는 사나이들의 가슴에 언제나 젊은 투혼으로
되살아 날 것임에 틀림없다.
18
마운틴 빌라의 속도등반은 만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다 진취적인 등반양식을 추구하는 당시의
첨예적인 클라이머들의 기술과 체력에 의한 자연스런 속도로 파악되어진다.
1시간 걸리는 곳을 10분에 오르라면 무리지만, 10분에 걸리는 곳을 1시간에 오르라면 그것 또한
부자연스런 것이다.
그것을 등반의 리듬이라 한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속도가 훨씬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빌라팀이 철수한 지 보름만에 또 토왕골로 찾아든 산사나이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단 12시간 반의 등반시간 동안 토왕폭 3등을 이룬 그들은 악우회원들과 대구 왕골산악회의
손칠규씨였다.
신성삼, 인근성, 백승기, 이진섭, 이진우대원의 지원을 받은 악우회의 윤대표씨는 손칠규씨와
2월 3일 11시 30분 하단을 시작했다.
하단의 동굴을 거치지 않는 왼쪽 루트를 통해 오후 1시 윤대원은 동대 테라스에 도착했다.
윤대원은 77년 유한규씨와 토왕폭을 시도한바 있으나 동대테라스 에서 심한 낙수로 패퇴 했었다.
그때 윤 대원은 발톱을 6 개나 뽑는 심한 동상에 걸렸었다.
하지만 이번에 물줄기가 동대 테라스의 오른쪽으로 트여 등반 루트에는 낙수가 심하지 않았다.
라스트인 손 대원이 하단을 완전히 올라선 때가 오후 4 시.
하단에 4 시간 30 분이 걸린 셈.
이때 윤 대원은 2 자루의 피켈과 2 자루의 아이스햄머(한 자루는 비상용) 를 사용했으며 까다로운
부분에서는 아이스햄머와 피켈의 손잡 이 슬링에 자일을 통과시켜 후등자의 확보에 몸을 의지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낙빙의 위험이 있는 중단의 설사면을 피해 오른쪽 급사면에 전진캠프를 설치한 이들은 다음날
11 시 40 분 상단등반을 개시했다.
토왕폭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채 얼지않은 물을 흘리고 있었다.
3 자루의 아이스햄머를 적절히 사용하여 윤 대원은 오후 4 시경 3 분의 2 지점 테라스에 닿았다.
뒤 이은 손 대원은 5 시 15 분 그곳에 올랐다.
테라스 윗부분의 소위 얼음 골짜기에서 윤 대원은 토왕폭 등반의 고비를 맞았다.
얼음골짜기는 얼음으로 살짝 도배해 놓은듯했다.
아이젠과 아이스햄머의 이빨이 얼음을 물지 못했다.
피로와 허기로 지쳐가는 몸으로 몸부림쳐 보는 토왕의 사나이를 두고 해는 함지덕 뒤로
빠져 버렸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 양 손마디의 감각과 함께 정신을 잃어가던
윤 대원은 푸석얼음에 얼굴을 문지르고 손가락을 깨물며 안간힘을 썼다.
허물어지는 빙벽에서 그는 프론트포인팅 대신에 킥 스텝으로 억지 발디딤을 만들어 오르며 때로
무릎을 양쪽 얼음벽에 밀착시켜 잼잉 하기도 하여 그 어둠속의 얼음골짜기를 빠져 나왔다.
무사히 정상에 올라선 그의 숨결과 맥박이 자일을 통해 손 대원에게 전달 되었다.
오후 7 시 40 분 두 명의 토왕폭 사나이는 정상에서 뜨겁게 얼싸안았다.
1 박 2 일에 걸쳐 12 시간 30 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룬 이 3 등은 이후로 토왕폭 등반 양식과 그
개념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상 하단에서 총 20 회 정도의 하켄을 설치했다.
이 등반의 시간 단축과 하켄설치 회수의 놀라운 줄임은 토왕폭 등반이 올만큼 왔고,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지 않을까 하는 한계성을 느끼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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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년 겨울철은 이 산사나이들의 하얀 광장이 드물게 잘 얼었던 해.
그 전해인 79 년 시즌에는 아무도 오른 팀이 없어 쓸쓸했을 토왕폭이 우정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산사나이들을 부른 걸까.
이 4,5 등이 며칠새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제4등은 부산 청봉산악회에 의해 81년 1월 6일, 그리고 제 5등은 사흘 후인 9일 어센트 산악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80 년 겨울 시즌의 연이은 토왕폭 등반은 단지 재등에 의의가 있는것이 아니었다.
이 두팀은 각자 토왕폭을 몇번째로 오르느냐가 아닌, 어떻게 오르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왕골로 모였다.
그것은 토왕폭의 등반양식의 한계성의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으며 선배가 물려준 바톤의 참의미를
깨달은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7년 1월에 토왕폭 2등을 이룬 부산합동대의 핵심멤버로 이미 토왕폭 등반에 참여한 바 있고, 7
5년 토왕폭 좌측암벽 초등 경력이 있는 청봉은 토왕성 좌측 암벽과 빙벽을 동계 한 시즌에 모두
끝내보겠다는 대과제를 안고 80년 12월 21일 설악산으로 왔다.
어센트 산악회는 토왕성의 빙벽과 암벽 연장등반을 계획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암벽과 빙벽을 차례로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암벽과 빙벽이 연결된 하나의
벽이라 가장하고 극지법 등반방식을 적용하여 완전한 연장등반을 해보고자 계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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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수대장이 이끈 청봉이 등반대는 정대희, 홍복광, 이정호, 이재섭, 권찬근,양진현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80년 12월 21일 설악산에 닿은 그들은 27일 등반을 시작했다.
우선 75년에 하계 초등한 바 있는 360 m 길이의 좌벽을 공략, 정대희 대원과 홍복광대원이
정상에 섰다.
81년 새해 첫날 부산의 사나이들은 쉬지 않고 토왕폭 빙벽하단에 붙었다.
등반조는 이정호, 홍복광대원.
동굴을 거쳐 동대테라스로 트래버스한 그들은 그곳에서 폭설로 일단 후퇴했다.
다음날 일찍 정태희대원과 이정호대원이 등반을 재개, 4시간 만에 하단을 끝냈다.
1월 5일 중단에 설치된 C2를 출발한 정태희, 이정호대원은 다음날인 1월 6일 오후 6시 10분
토왕성 빙벽의 정상에 섰다.
좌측벽 동계초등과 더불어 토왕폭빙벽 제 4등이 깨끗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들은 상하단 전체빙벽에서 35회 정도의 애숭이와 하켄을 설치했다.
바르트 훅 보다는 애숭이가 더 많이 이용되었다. 그것으로 청봉은 멈추지 않았다.
여러대원들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청봉은 계획대로 1월 8일 전체 대원을 고루 투입하여 450 m 의
우측벽을 오르기 시작, 5일째 되던 1월 12일 그 정상에 올라섰다.
이로써 청봉의 사나이들은 24박 25일에 걸쳐 '토왕성 좌우암 빙벽 한 시즌 등반이라는 과제를
풀어냈다. 전체 등반 길이는 1200 m 였다.
그 토왕폭의 사나이들의 정상에서의 울부짖음은 토왕골, 골을 울리다 어디로 퍼져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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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센트 산악회는 토왕폭 빙벽과 그 우측벽 연장등반이라는 엄청스런 계획을 안고 81 년 1 월 2 일
토왕골로 들어섰다.
그들의 연장 등반계획은 벽 등반에서 알파인 스타일과 극지법을 혼용하여 등반 루트를 제외하고는
지원을 받지 않으려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청봉 산악회의 경우처럼 단지 빙벽과 암벽을 계속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시스템에
완전한 극지법을 적용, 말하자면 공격조의 식량과 장비를 지원조는 오르기 쉬운 우측능으로
우회하여 운송하거나 미리 수송해 놓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오로지 공격조가 개척한 루트를
따라 지원하고, 또 철수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1월 2일 전두성대장을 비롯한 6명의 어센트대원은 토왕폭하단 아래에 B.C를 설치했다.
1월 5일의 스타트는 제천산악회의 허영호씨 팀보다 늦었다.
제천팀이 동굴을 통해 동대테라스로 트래버스하는 동안 김명춘, 이정렬 대원은 왼쪽 지상루트를
통해 하단을 올랐다.
앞장 섰던 김명춘 대원은 제천팀의 낙빙에 맞아 코를 다치기도 했지만, 곧 하단을 끝내었다.
그리고 7일에는 중단에 C1을 설치했다.
그들은 실제로 그 고지식할 만큼 철저한 등반원칙을 지켜 나갔다.
고정자일이 빙벽에 파묻히거나 자일의 표면이 얼어붙어 유마링이 거의 불가능해질 수도 있는
토왕폭의 기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등자가 오른 루트를 따라 짐을 수송해 냈으며,
B.C 로 귀한할 때도 옆능선으로 돌아내려오지 않고 정석대로 빙벽하강을 감수했다.
상단 빙벽 공격을 위한 물자도 하단 빙벽 루트를 통해 C1으로 올려졌다.
8일 하단에 설치된 장비를 회수, 9일 김명춘, 신동우 대원이 상단 등반에 나섰다.
어두워질 무렵 간신히 정상에 올라선 김명춘 대원은 나무에 자일을 고정시키고 신대원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갑작스런 충격에 자일을 고정시킨 나무가 부러지면서 자일은 계속 빠져나갔다.
유마링이 안 되어 옆으로 트래버스하던 신대원은 몸의 균형을 잃고 50여 m를 추락했던 것이다.
스타트지점까지 떨어진 그는 무의식중에 자일에 맨 프로직크매듭 때문인지 거짓말처럼 전혀
다치지는 않았다. 대신 김명춘 대원은 언 몸으로 정상에서 혼자서 밤을 새워야만 했다.
가혹한 추위와 어둠 속에서 끝까지 견디어낸 또다른 토왕의 송병민인 그는 이 사고로 발가락
다섯개를 절단했다.
11일 어센트는 연장 등반을 포기하고 장비를 회수하기 시작, 22일 완전히 토왕골을 철수했다.
토왕폭 제 5등반을 이루고......
상단 하부에는 미련 같은 자일을 걸어논 채, 토왕골을 뒤돌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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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어센트의 연장등반 계획은 큰 문제점을 제기했다.
그것은 나란히 놓인 두개의 루트를 연결한 정도의 보다 큰 루트와 어느정도 유사성을 가질수
있으며, 그 유사성의 오차한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가능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모색케 한
실험적 등반이었다.
이러한 연장등반은 1,000m급의 산밖에 없는 우리 나라의 자연지리적인 여건을 극복하려는
산사람들의 초월적 의지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사고로 그 가능성이 제대로 가늠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산악계는 어센트의 선구적 실험등반으로
하여 1,200m의 거벽이라는 인위적인 등반활동 공간을 관념적으로나마 넓히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자유공간의 확대일 것이다. 하지만, 토왕폭의 겨우 상황은 원칙 이상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토왕폭 상단의 경우 두 사람이 빠른속도로 등반한다해도 낙수로 인해 후등자의
확보와 유마링은 늘 문제가 된다.
이곳에서는 후등자나 지원조가 공격조보다 훨씬 위험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토왕폭에서는 빙벽에 붙어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이러한 곳을 통해 등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기술과 장비로는 분명
넌센스다. 그것은 스스로 조난을 부르는 행위가 될 위험마저 있다.
하지만 연장등반의 겨우 그 지원방식은 어센트로서 택한 극지법을 필수로 요구한다.
공격루트만 통해 지원과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연장등반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장등반의 요구조건과 토왕성의 등반 조건은 서로 모순된다.
이러한 등반의 모순성은 산사람들이 안고 있는 영원한 숙제의 하나일 것이다.
빙벽등반을 끝내고 우측벽으로 계속 연장등반했을 경우를 가정해 보자.
B.C 바로 옆에서 스타트할 우측벽에 필요한 사람, 장비, 식량일체가 토왕성빙벽을 거친 다음에야
우벽 스타트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배낭 하나를 바로 앞에 있는 파트너에게 전해주기 위해
자일이 얼어붙는 320m의 토왕성 빙벽을 올라갔다가 도로 그 빙벽을 내려와야 한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그 조그만 보따리를 허기진 당신의 파트너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가능할까? 또 빙벽과 좌우벽을 모두 연결했을 때는 더욱 기막힐 것이다.
등반에서 이러한 곤란함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배낭을 그러한 과정을 밟지 않고 눈 앞에 있는 파트너에게 전해준들 호루라기를 불 심판도, 야유를
퍼부을 관중도 없다. 그러한 '곤란함'은 '보다 힘들고 보다 어렵게' 라는 가치질서의 머메리즘의
토왕폭 연장등반적 변용일 것이다.
만약 그 곤란함이 등반자 자신의 내재율에 자연스레 받아질 수만 있다면, 토왕성의 빙벽 위에
좌측벽을 또 그위에 우측 벽을 올려 놓은 1,200m의 거벽을 우리는 만들어내는 것이다.
빙벽을 제일 아래 두는 것이 불만이라면 취향에 따라 빙벽을 제일 위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알파니즘에 그러한 공간변형의 시대도 올까, 한국 사람이 그 선구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센트의 토왕폭사나이들은 토왕폭포 소리 같은 한마디를 한국 산악계에 던지고는 총총 토왕골의
산기슭 뒤로 어깨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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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년 시즌에는 서울의 중동 O.B 팀이 올라 토왕폭 제 6 등을 이뤄냈다.
82 년 1 월 3 일 토왕골로 들어온 중동 O.B 의 등반대 (대장 이두원) 는 1 월 10 일 하단등반에
들어가 김운창, 신장섭, 두 대원이 11 일 토왕 상단의 정상에 섰다.
황인준, 김규영, 인정근, 김종열 대원이 이 등반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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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부산기계공고의 선후배로 구성된 동악회는 창립 반년만인 82년 1월 2 일 토왕폭 완등이라는
큰 성과를 이뤘다.
82 년 시즌으로는 초등인 이 등반은 토왕폭 제 7 등이 되는셈,
지방고교 O.B 팀이고 또 그 구성원들이 거제, 인천, 마산 등지에 흩어져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때
그 어려움을 극복한 이 등반의 의의는 높이 평가 되어야 할것이다.
구곡폭포를 2 회나 완등하고 일부러 물 맞는 연습까지 한 여덟 동악의 사나이들은 82 년 제야를
토왕골에서 보냈다.
박계현 대장을 비롯한 김수남,이승호, 안시준, 박진수, 정동락, 손상익 대원들은 동행해준
대우중공업 산악회의 박홍규 씨와 토왕폭 하단 아래 의 B.C 에서 조촐한 망년회를 가졌다.
송준호를 비롯한 그들의 많은 선배 토왕폭사나이들이 그러했듯 동해에 씻긴 새해의 첫 햇살이
토왕의 이마에 빛날때 그들도 신들린듯 토왕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이승호 대원등 3 명은 4 시간만에 작년에 그들이 실패했던 하단을 끝내었다.
이날 그들은 중단에 전진캠프를 설치했다.
1월 2 일 싸락눈이 내리는 음산한 날씨에도 박, 김, 이 3 공격대원은 오전 9 시 15 분 상단의
시작부분을 떴다. 전체 3 피치를 3 명이 교대로 리드하여 오후 6 시 40 분 그 하얀
꼭대기에 섰다.
83 년 세 토왕폭의 사나이들은 그곳에서 비박하고 다음날 무사히 캠프로 내려왔다.
깨끗한 등반 이었다.
2 박 3 일의 등반기간 동안 하단에 4 시간, 상단에 9 시간 25 분을 매달렸던 셈이다.
주로 아이스훅을 많이 사용했으며 총 24 회의 인공지점을 설치했다. (테라스용 제외)
전체 루트를 3 명이 등반한것은 이때까지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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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공 O.B 팀의 등반이 있은 23 일후인 83 년 1월 25일, 또 다른 산 사나이가 토왕의 얼음끝에
섰다. 토왕푹 제 8등을 이룬 인하대 산악부의 천병태, 이승권 대원이었다.
토왕폭을 완등한팀은 77 년 이래 이상의 8 팀이다.
초등서부터 제 8등까지 이루어진 6년간 토왕폭 등반양식은 점진적인 발전을 보여왔다. 초등때
12 일이나 걸리고 70 여 회의 하켄을 설치하던 일이 최근에 와서는 대개 2박 3일에 30 여회의
하켄설치로 끝난다.
그것으로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산쟁이들은 1일 등반, 단독등반, 연장등반 등을 구상하고 있고
실제 몇팀이 시도까지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여러가지 새로운 형태의 등반이 실현되리라 본다.
지금까지 발전된 등반 추세를 보면 하루만에 토왕폭 상하단을 해치우거나 혼자서 올랐다는
사람이 , 또 토왕폭의 아가씨가 4,5 년 내로 나오리라 본다.
그만큼 토왕폭 등반양식은 달라져 가고 있다.
요즘 숫제 하단은 연습코스 정도로 인식되어갈 만큼 하단을 여러번 오르거나 한꺼번에 여러명의
인원이 오른팀이 많다. ' 오르냐 마느냐' 가 곧 '죽느냐 사느냐' 는 햄릿의 묵직한 문제이던 10 년 전
하고는 확실히 격세지감을 줄 만큼 토왕폭 등반의 이미지는 변했다.
달나라에 처음 갈때에 비해 두번째 간 우주인이 훨씬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해도 첫 길만큼
사람들은 흥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토왕폭의 열기도 등반이 거듭될수록 상당히 식어갔고
앞으로도 점차 그러할 것이다.
그만큼 토왕폭의 신비도 많은 베일을 벗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달나라에 가는 일
자체는 여전히 어려운 일로 남듯, 토왕폭을 오르는 문제는 보다 곤란함을 추구하는 등반양식의
가치관만 변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어려운 문제로 남을것이다.
그리하여 토왕폭의 사나이는 관심도에 상관없이 대를 이을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시간개념 안에서는 영원토록 토왕폭 자체의 제반여건은 초등된 당시와 변함이
없을것이고 이는 곤란함을 찾아 헤매는 산(山) 사람의 변함없는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큰 지각 변동이 없는한 몇만년 안으로 토왕폭의 경사가 45 도 로 눕는다든가 길이가
30 m 로 쪼그라들거나, 겨울이 없어진다든가 혹은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터이므로........
오히려 변하는것은 인간이고 그들의 의식이다. 초등 당시부터 지금까지 토왕성에서 보인 등반
양식의 변화는 토왕폭 자체의 변화가 아닌 바로 산악문화의 변화를 얘기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제반 문화의 한 구성형태로서의 산악문화가 결코 자기 완결적이고 분리독립적일수 없다는것, 즉
등반은 그것이 이루어질 시대의 사회문화적 제반여건과 한 세트로 이루어진다는것을, 피켈의
각도가 그렇게 구부러질때 까지의 과정과 원인을 안다면 ' 너는 열흘에 오른것을 나는 하루만에
올랐노라" 고 큰 소리 치는 일은 없을것이다.
그리고 요즘처럼 급변하는 제반 문화조류의 급류속에서 한국의 첨예적인 클라이머들, 바로
토왕폭의 사나이들이 책임져야할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토왕은 그래서 소리내어 우는것이다.
그 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 소리가 있는한 토왕폭은 영원히 살아 매년 겨울 하늘 높이 걸려 山사람의 뜨거운 피와 넋을
부를것이다. 지금도 많은 山사나이들이 함지덕 山머리까지 배웅나왔다.
어둑어둑 돌아섰던 토왕의 하얀 등을 그리며 황홀하게 눈을 감고 있을 것이고, 그들의 선배들이
오르는것을 지켜보며, 또 산무덤이 있는 노루목의 산자락에 앉아 토왕의 이마를 넋 놓고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다짐하고들 있을것이다.
그 위에 너를 위한 케룬을 쌓고 그 위에 네 피켈을 꽂으며...
(83. 5 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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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왕폭의 사나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하얀 얼음 기둥 너머는 무엇이 있을까.
그 서릿발 날선 파아란 얼음 끝에서 울부짖던 그들의 젊은 함성은 어디로 가 무엇이 되었을까.
그 하얀 다리 너머에는 하얀 산나라가 있었다. 그 젊은 함성은 바로 하늘과 땅 사이를 방황하는
야성의 젊은 넋이 되었다.
그들은 바로 하얀 산으로 간 것이다.
70 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진 하얀 산에의 해외원정은 거의가 이 토왕폭의 사나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토왕폭 하단을 초등한 동국대는 집념의 마나슬루에 맺힌 김정섭 형제의 원을 풀었으며,
초등때의 주역 도창호씨는 에베레스트 및 북극원정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상 하단을 초등한
크로니의 박영배씨와 송병민씨도 마찬가지. '아이거 박' 이라는 별명의 박씨는 우리나라 사람
으로는 처음으로 아이거 북벽 원정을 꾀했으며, 요즘도 아이거 동계 단독 등반을, 그리고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꿈꾸고 있다. 송씨는 지난해 마칼루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또
크로니의 유동옥씨는 안나푸르나 4봉 정상을 밟기도했다.
토왕폭 2등을 이룬 부산의 사나이들도 히말라야로 뻗어갔다.
권경업씨 등이 주축이 된 그들은 작년 파빌봉의 새 루트를 통해 하얀 꼭대기에 섰다.
제 3등을 이룬 악우회의 해외등반 활동은 여기서 새삼 들출 필요가 없을것이다.
알프스 3대 북벽 등을 오른 그들은 곧 제 2차 바인타브락2 원정을 떠난다.
윤대표씨와 같이 등반했던 대구 왕골 산악회의 손칠규씨도 눈에 뛰지 않았지만, 많은 하얀 산을
돌아 다녔다. 히말라야의 5,000 ~6,000 m 급 봉우리를 혼자서 여럿 오른 그는 지난 겨울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를 혼자 올랐다가 실종, 열흘 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한 괴짜 산꾼이다.
제 4등의 청봉은 그 멤버 그대로 마터호른 동계 북벽을 성공적으로 올랐다.
하단을 등반한 제천 산악회 허영호씨가 토왕폭의 하얀 허리를 이어 마칼루 정상에 선 것은
말할것도 없다. 제천 산악회원을 데리고 금년 포스트 몬순에 마나슬루 단독등정길에 나서는
그도 국제 역마살이 낀 산꾼이 되어 버렸다.
제 5등의 어센트는 토왕폭을 오르기 전부터 이미 우리산악계의 중추적인 역활을 해 왔다.
전병구 대장을 비롯한 안나푸르나4봉 원정대가 거의 어센트 멤버였으며 마칼루의 함탁영 대장과
민병국 대장도 역시 역시 어센트다.
6, 7, 8 등을 이룬 나머지 팀의 활약은 아직 두고 봐야 겠지만, 그들도 머지않아 하얀 산을
찾을것이다.
토왕폭 등반과 같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넘는 산행은 그것을 거친 사람에게 스스로를 세울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준다. 그것이 산의 진정한 보상이다. 산은 산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산행의 큰 의미 이기도 하다.
토왕폭의 사나이들이 토왕의 하얀 허리를 지나 도달한 곳은 늘 하얀 곳이었다.
토왕폭은 분명 하얀 산에 이르는 가장 듬직한 하얀 다리였다.
이것은 토왕폭이 한국 산악계에 준 최고의 의의 일것이다. (83. 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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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토왕폭의 혼을 빼는데 내 외국인을 가릴 리는 없을것이다.
75 년 2 월 구곡 폭포를 초등한바 있는 일본인 하다께야마 산시로는 76년 1월 설악산 노적봉을
등반하다가 그만 토왕폭을 보아 버렸다.
집에 돌아가서도 삼삼하게 떠오르는 토왕의 자태에 그는 2 월 4 명의 산친구를 데리고 다시
설악으로 달려갔다. 물론 토왕폭이 초등되기 1 년 전이다.
잘 다듬어진 체력에 우리 여건으로서는 구하기 힘든 최신 장비를 갖춘 그들은 하단을 14 시간만에
끝마치고 상단으로까지 나아갔다. 상단 3분의 1 지점까지 나아간 산시로는 뭔가에 망설였다.
그 심정을 등반기 (일본의 山과 溪谷社 에서 발행하는 "岩과 雪" 77년 8 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 하고 있다. 그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의 것이었다.
"...... 이런 속도로 오른다면 오늘밤이나 내일 아침에는 정상에 닿을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토왕폭 등반의 기회이다. 그리고 잘 다져진 멤버와 완전한 장비를 갖고 있어
초등할 자신이 있다. 그러나 토왕성 빙폭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벽이고 이것을 초등하는
것은 한국 산악인의 꿈이다. 그들의 꿈을 자유로운 출국과 충분한 장비의 혜택을 받는 우리
일본인이 빼앗아 간다면 ..... 옳은 일일까? 우리에게는 더 높은 목표가 있지않은가.
"그만 내려가자....." 는 내용의 글을 보았을때 그만 아뜩해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자칫 초등을
일본인에게 빼앗길뻔 했다는 아찔함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욕심을 내어 끝까지 밀어 부쳤다 하더라도 꼭 성공 했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또 토왕폭이
사람이 아닌만큼 일본인이 초등했다 하더라도 토왕폭이 달라지기야 했으랴며 놀란 가슴 다독거려
봤지만 좀체 그 흥분된 가슴은 가라앉지 않았었다.
그것은 승리가 동정에 의한 양보 였다는것을 알아챘을때와 같은 굴욕감 같은것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하필이면 일본인에게 동정 받을게 뭐람 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토왕폭이 일본인에게 첫 등정을 허락했을리야..... 라며 노루목의 송준호
무덤에서 토왕폭을 향해 고개를 들다 깜짝 놀랐다.
83 년 4 월 7 일의 토왕폭은 그 황홀하던 하얀 허리를 뚝 잘라 토왕골로 흘려버리고 그 상반신만
함지덕에 우뚝 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4 월의 토왕폭은 다시 하얀 몸 풀며 하나의 소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83. 5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