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의 경우, 제정신을 차리며 현실을 자인하는 순간, 삶의 의미가 없어지고, 왜소해지는 반면, 망상을 가지고 나설 때 무언가를 하게 되고, 무언가가 되어간다. 물론 현실에서 패배하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고양된 존재로 만들어가는 에너지는 망상에서 나온다.
망상은 주체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좌표가 정해져 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면 ‘주체’로서의 삶은 실체를 비우고,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체로서의 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피곤하면 자야한다. 반면 ‘주체로서의 나’는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피곤함을 모르며, 러시아의 어떤 소설에서는 그러한 인간을 ‘특별한 인간’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적 이상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네오’와 같이 우리가 새로운 세계의 구원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주어진 몫이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이념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인간은 어찌 보면 미친 인간이지만, 미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젝은 우리의 자기와 실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기에 ‘틈새’가 있는 것이며, 그것의 이름을 ‘주체’라고 말한다. 인간이 틈새를 가진 것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다. 우리시대 청년들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실체로서 뿐만이 아니라 주체로서도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며, 우리 안의 광기와 계속해서 화해해나가야 할 것이다.
"돈키호테 얘기를 좀 하자면, ‘맘부리노의 투구’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이게 좀 특이한 광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반적인 광기라면 저것은 그냥 이발사의 세숫대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게 어떻게 세숫대야냐. 저건 맘부리노의 투구다. 너는 눈이 삔 것이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할 텐데 돈키호테는 좀 다릅니다. 그 상대성을 인정하죠. “너에게는 세숫대야로 보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투구로 보인다”는 거죠.
저는 ‘망상’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미친다고 할 때,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찮은 존재로 보일 거라는 걸 다 알지만 나는 이런 망상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거죠." - 로쟈(서평가/ 이현우)
첫댓글 평소 쉽게 할 수 없는, 심사숙고를 요하는 일을 감행하고자 할때 이렇게 다짐하곤 합니다.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때의 미쳐야 한다는 의미는 돈키호테의 맘부리노 투구와 같은 것이죠. 미치긴 미치되, 남들이 객관적으로 봤을때, 지극히 하찮커나 코웃음 칠 수 있다는 것. 미치긴 했어도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