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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 노씨(交河盧氏)시조와 근원의 유래 |
중국 주나라 건국공신 강태공(姜太公)의 후예 후(候)가 제나라 노현(盧縣)에 살아 노씨가 된 후 곤주자사 노진순(袞州刺史 盧震順)의 아들 노수(盧穗)가 범양(范陽 )에 살다가 신라 효성왕 14년(755)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정착 귀화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이 전부 높은 벼슬길에 올라 광산백, 교하백(塢), 풍천백(址), 장연백, 안동백, 안강백(坤), 연안백(增), 평양 백(坂), 곡산백(坦)으로서 9형제가 모두 봉작됨에 따라 각각 본관을 광산(光山), 교하(交河), 풍천(豊川), 장연(長淵), 안동(安東), 안강(安康), 연일(延日), 평양(平壤), 곡산(谷山)으로 삼게 되었다.
교하 노씨 시조 오(塢)의 아들 강필(康弼)이 기계(杞溪)에 살면서 본관을 장산(章山)으로 하였으며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어 태자 태사로 삼한공(三韓公)에 시호를 받았으며 자손들이 연달아 벼슬을 하여 오다가 그의 10대손 척이 충열왕 당시 경영옹주와 결혼 삼중대광 첨의 정승으로 경양부원군에 있으면서 아들 서원군 제(瑞原君 濟), 창성군 진, 경원군 언, 신양군 영, 딸 원순제비 (元順帝妃)와 4남 2녀를 두었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가 공양왕 3년(1392) 7월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 삼척에서 살해한 후 조선조를 창건 왕씨 일가를 멸족하게 되자 노한은 당시 보종사랑적경서승(補從仕郞積慶署承)으로 있다가 어머니 개성왕씨와 아들, 딸을 데리고 현 탄현면 성동리(작골) 오두산하 삼도품(임진강과 한강 합류지점) 어귀에 아들 물재(物載)와 더불어 석벽에 굴을 깊이 파놓고 은신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이 부락을 작굴이라 부르고 있다.
노한은 조선조 개국이후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당시에는 경기 황해도 감찰사 한성부윤 형조판서 우참찬겸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하다 퇴임하였으며 노량진 강가에 효사정을 건립 고향을 오르내리며 이웃마을 법흥리 약산동으로 이주 휴율강이 흘러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학당을 건립 후학을 지도하였다 하여 이 지역이 학당포라고 전해지기도 하나 지금은 경지정리로 말미암아 농경지로 변모되고 말았으며 또한 이 집터에는 빈집(노재 순가)과 그 앞에 500여년 가량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집을 지켜주고 있다.
여러 벼슬을 거쳐 호조판서 대제학을 지냈고 예종즉위(1468)의 대공신 3등과 좌찬성이 되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성종2년 (1471) 좌리공신 3등이 되어 이조판서를 겸했고 영돈령부사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와 휴율강이 흐르는 송리산 남맥 끝머리 아담한 곳에 정자를 건립 삼국사 절요를 편찬하였다. 이로 인하여 본관을 선성(宣城) 또는 교하(交河)로 개관하 였으며 이 연유로 15대조 노오(盧塢)를 교하백으로 봉작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 동안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에는 훈구파의 중신으로 유자광과 함께 세조를 비난한 김종직의 규탄에 동조했으나 사림파를 전부 몰아내려는 데에는 반대하여 많은 선비들을 구출하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조, 성종의 신망을 받아 경국 대전과 호전, 향약집성방을 서거정과 함께 국역하였고 여지승람을 강희맹, 양성 지 등과 편찬한 대학자이시다.
연산군 4년(1498)에 돌아가시니 문광으로 시호 되었으며 서울 노량진 금천고 사동에 안장되었으나 도시계획에 따라 고향 근처인 파주읍 백석리(도장골)로 1942년 9월 증조모 개성왕씨와 조부모(노한) 아들 공필 (公弼), 공유(公裕), 계종(繼終)이 이장됐다.
참고자료:경기도 파주시청 홈페이지(http://www.dmzpaju.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