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증산도와 원불교의 관계
1. 원불교 1대 교주 박중빈
[道典 11편 29장]
통사동 이준세 재실에 모인 성도들
이 때 김형렬 또한 신안(神眼)이 열려 신명(神明)을 부리고 풍운조화를 짓거늘 조철제가 형렬의 교단에 들어가 추종하더라. 이에 상제님을 모시던 성도들도 신력(神力)에 통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통사동 이준세의 재실에 모여 도통공부를 하기로 하니 참석한 사람은 박공우, 김경학, 김광찬, 문공신과 그 밖에 여러 명이더라.
이 때 또 박중빈이 공부하는 자리에 참석하니 대저 박중빈은 영광사람으로 인암 박공우와 재종간이라. 그가 대흥리의 태모님 교단에서 상제님을 신앙하다가 가정형편도 어렵던 차에 박공우를 따라 공부하러 다니더니 상제님을 모시던 성도 몇 사람이 통사동 재실에 모여 ‘수도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간절히 원하여 함께 공부석에 참석하니라.
그러던 중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하여 성품이 급한 김광찬이 공부 도중에 광기(狂氣)가 발동하여 주먹을 휘두르니 성도들이 이 일을 계기로 도통공부에 회의를 품고 모두 흩어져 돌아가니라. 이 때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상제님께서 문왕(文王)의 도수를 붙이신 문공신 성도라. 후에 공신이 당시의 정황을 상제님의 양아들 경형에게 상세히 얘기하여 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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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통사동 재실과 박중빈. 당시 박중빈이 변산 등지에서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공우 성도가 찾아가서 “이 사람아! 그렇게 공부하면 안 되고 제대로 하려면 이렇게 모여서 공부를 해야 한다.” 하여 통사동으로 데려와 함께 수도하였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이의 증언)
29:1 김형렬 교단에 사람이 몰린 이유. 김형렬이 임의용지(臨意用之)는 못하지만 바람도 일으키고 풍운조화도 쓰는 모습을 보고 신심이 동해 몰려들었다.
29:1~10 통사동 재실 관련 사건 연표
연 대 관 련 사 건 내 용
道紀 45(1915) 김형렬 신력에 통함.
道紀 45~46(1915~1916) 통사동 모임 시발 (김경학, 김광찬, 박공우, 문공신 기타 여러 명)
태모님 대흥리에 계시며 첫 방문.
道紀 46~47(1916~1917) 박공우의 인도로 박중빈 첫 참석.
道紀 47년(1917)경 김광찬의 광기 발동으로 대부분 흩어져 돌아감.
道紀 48년(1918)경 1917년부터 선돌부인과 손잡은 조철제, 통사동 재실에 찾아옴.
道紀 49년(1919)경 조철제, 태모님 모셔다 차경석처럼 큰 기운 받으려다 실패함.
道紀 49(1919) 여름 조철제, 약장과 궤 중 궤만 도둑질하여 재실에 감춤.
道紀 51(1921) 조철제, 상제님 성골을 도굴하여 통사동 재실에 모심.
道紀 51년(1921)경 조철제, 통사동 점거하고 성골을 훔쳐다 두고 1년 동안 수도공부.
道紀 52(1922) 1월 문공신 窪ㅏ李 통사동 습격. 상제님 성골 되찾음.
道紀 52년(1925)경 조철제 정씨 부인 모셔 가고 그 해에 무극대도교 조직.
29:2 이준세의 재실. 정읍군 감곡면 통석리 통사동(甘谷面 通石里 通司洞)에 있는 전의 이씨 재실.
29:3 태모님의 첫 왕림. 태모님께서 처음 통사동 재실에 왕림하셨을 때 차경석과 똑같은 놈이라고 “에이 못난 놈들”이라고 꾸짖으셨다.
29:4 박중빈과 보천교. 소태산 박중빈은 고수부님 첫살림 교단에서 신앙했다. 지방 조직의 조직원이었다. (원광대 원로 교수의 말)
29:4 박중빈. 박중빈이 상제님을 신앙한 연대는 박공우 성도를 통한 1910년대 초기부터이다. 박공우 성도를 통해 어천 전부터 말씀을 들었다.
29:4~5 박중빈, 박공우로부터 상제님 말씀 전해 들음.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은 증산도의 첫 난법교단인 보천교 초기의 돈독한 상제님 신도였다. 흥미 있는 사실은 상제님께서 미구에 닥쳐올 대개벽기에 천상의 병겁대장으로 임명하신 박공우 성도와 박중빈이 재종(再從 : 육촌형제)지간이라는 점이다. 박공우 성도와 혈족의 관계로서 부담감 없이 그 누구보다 상제님 말씀과 행적과 이적을 숱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루는 박중빈이 박공우 성도 집에 들렀다가 상제님의 개벽말씀을 전해 듣고 문밖으로 나가면서 “너무 배가 고프니 우선 물질이나 개벽하자.” 하는 말을 하였다(박공우 성도 가족들의 증언). 이것이 후에 증산 상제님의 개벽사상에 근거하여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그 유명한 원불교의 개교 표어가 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증산도 왜곡의 실상』 60쪽)
29:10 문공신 성도의 집이 바로 통사동 재실 근처에 있었다.
29:10 문공신. 문공신 성도는 외곬으로 달리는 성품 그대로 상제님의 운수를 참되게 받으려고 애쓴 분이다. 후일 조철제가 통사동 재실에 상제님 성골(聖骨)을 도둑질해서 숨겨 놓고 도통한다고 해괴한 짓을 벌일 때 성골을 찾기 위해 성골을 가지고 만주로 도망가려던 조철제를 서대전(西大田)까지 쫓아가서 그 불의에 노하여 칼부림까지 했던 분이다.
2. 원불교 2대 교주 송규
[道典 11편 41장]
포교는 먼저 몸닦음을 근본으로 하라
고찬홍이 포교 운동을 크게 일으키기를 청하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차 너희들에게 찾아오는 자만 거두어 가르치기도 바쁘리라. 이제 새로 포교할 바가 아니요, 먼저 몸닦음을 근본으로 삼아 부모를 잘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남에게 척짓지 말고 농사에 힘써 때를 기다리라. 포교는 오는 자는 오는 대로 보고 가는 자는 가는 대로 보아 그들의 뜻대로만 맡겨 두라.” 하시니라.
이 때 경북 성주 사람 송규(宋奎)가 조종리 본소에 태모님을 모시기 위해 찾아오니 태모님께서 그 기운을 한번 보시고 대면치 아니하시고 도문에 들이지 않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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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이를 오해하여 앉은뱅이 신앙 하는 자는 말씀의 참뜻과 때의 일꾼사명을 망각할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시 상황에 준하는 것이다. 지금은 제3부흥시대로 인종추수 개벽의 급박한 시간대에 들어서 있다. 철저히 도전적인 마음가짐으로 상제님의 대도를 전해야 한다.
41:5~6 송규(宋奎, 1900~1962). 소태산 박중빈을 계승한 원불교 2대 교주. 호 정산(鼎山).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출생.
정산은 경상도 가야산에서 태모님 교단의 교인들로부터 “큰 공부를 하려면 정읍 대흥리의 태모님을 모시고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게 한 다음 정사(丁巳, 1917)년 4월에 정읍 대흥리로 향했다. 그러나 경석의 저지로 만나 뵙지 못하게 되자 대신 객망리를 방문하던 중에 만난 선돌부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석달 후 다시 선돌부인과 객망리로 돌아와 사방으로 태모님 신앙인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하던 중 뜻밖에 김제군 백산면의 어느 신도 집에 머무르시던 태모님을 만나뵙게 되었다. 정산이 얼마간 머물러 있을 때 아들을 찾기 위해 조종골 본소 교당을 찾아온 정산의 아버지에게 태모님께서 “제발 당신네 아들 좀 데리고 가소.” 하셨다.
Ⅱ. 증산도와 동학의 관계
1.동학의 탄생 배경
상제님의 부르심을 받은 최수운 대신사
조선과 동양 민족이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폭압에 침몰당해 가려 할 무렵, 하늘에서 동방의 이 땅에 이름없는 한 구도자를 불러 세워 새 시대의 여명이 열림을 선언토록 하셨나니 그가 곧 동학(東學)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 대신사(大神師)니라.
경신(庚申, 1860)년에 인류의 새 세계를 알리라는 하느님(한울님)의 천명과 신교를 받고 도통을 받았나니 이것이 곧 우주사의 새 장을 열어 놓은 천주님과의 천상문답 사건이라.
그 해 4월 초닷샛날, 천주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너에게 무궁무궁한 도법을 주노니 닦고 다듬어 수련하여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 때 상제님으로부터 “주문을 받으라.”는 말씀을 들으며 열석 자의 주문(呪文)을 받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니라.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수운이 아버지께 가는 생명의 길을 동방의 땅에 닦아 놓고 “인간으로 강세하시는 아버지(성부) 천주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선언하매 이는 전 인류에게 후천개벽세계를 여시는 아버지의 대도 곧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조선땅에서 나올 것을 선포함이니라. 그가 상제님의 천명은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5년 동안(1860~1864) 천주님의 동방땅 조선 강세와 후천개벽으로 열리는 새 생명세계를 천하에 알렸나니 그 장엄한 인류구원의 외침은 바로 이러하니라.
“한울님이 내 몸 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
“만고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는 또한 연천(年淺)해서 억조창생 많은 사람 태평곡 격양가(擊壤歌)를 불구에 볼 것이니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
“어화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無極之運)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 보냐.”
“열석 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 하며.”
“무극대도 닦아 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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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동학의 창시자). 호 수운(水雲). 동학 창도(唱導).
7:3 曰 勿懼勿恐하라. 世人이 謂我上帝라 하거늘 汝不知上帝耶아.(「포덕문」 )
7:4 及汝 無窮無窮之道하노니 修而煉之하여 制其文敎人하고 定其法布德하면 則令汝長生하여 昭然于天下也리라. (「논학문」)
7:5 주문을 받으라. 受我呪文하여…布德天下矣라.(「포덕문」)
7:5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인간으로 오신 천주님을 모시고 새 생명의 조화세계를 여니 만사를 깨닫는 그 큰 은혜를 영세토록 잊지 못하옵나이다.”라는 뜻.
7:7 천명은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1864년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지금의 달성공원 자리인 대구 장대(將臺)에서 사형당함.
7:7 5년 동안. 1862년 탄압을 피해 전라도 남원을 거쳐 보국사에 들어가 「도수사」 릴피逵 뭏 짓고 동학론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차츰 교세가 확장되자 각 지방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주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고, 1863년 교인 3천여 명, 접소 14개소를 확보. 이 해 7월에 제자 최시형을 북접대도주로 삼은 뒤 8월에 도통을 계승시켜 교주로 삼았다.
7:8 「안심가」
7:8 한울님. 우주의 통치자를 수운 선생은 “한울님” “상제님” “천주님”으로 절대자의 호칭을 반복 나열하여 개벽세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천주교, 개신교가 복합된 조선문화 속에서 각 종교의 궁극적 메시아가 동일한 한 분임을 친히 천주로부터 도를 받고 “내가 곧 상제니라.”는 말씀을 들으며 유불선 서교(천주교와 개신교)를 회통해서 깨침으로써 절대자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일깨워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칭을 복합해서 쓴 것이다.
7:9 「안심가」
7:10 「몽중노소문답가」
7:11 「용담가」
7:12 「교훈가」
7:12 열석 자.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열석 자를 말하는 것으로, 천주님에 대한 깊은 뜻을 바르게 깨달으면 인류 문명사의 핵심을 통한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을 모셔야 한다는 이 한마디를 철저히 깨지 못하고는 유불선 기독교 등 동서 철학, 과학문명의 우주관에 도통했다고 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7:13 「용담가」
7:14 십이제국(十二諸國). 세상의 모든 나라
7:14 「몽중노소문답가」
2. 동학과 증산도의 관계
(1)동학혁명
[道典 1편 20장]
전봉준이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키다
1 스물네 살 되시던 해에 금구군 초처면 내주평(草處面 內注坪) 처남 정남기의 집에 글방을 차리시고 아우 영학과 이웃 학도를 모아 한문을 가르치시니, 그 사도(師道)가 비범하여 칭송이 높더라.
2 이 해 갑오(甲午 : 道紀 24, 1894)년에 태인 동골사람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분개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 곧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는지라.
3 혁명이란 깊은 한(恨)을 안고 일어나는 역사의 대지진인즉, 동양 삼국의 국내외 전쟁은 고부를 진원으로 하여 갑오년 1월부터 터지기 시작한 동방 조선민족의 천하대란인 동학혁명으로부터 발원하니라.
4 개벽의 새 시대를 알린 이 혁명은 갑오년 1월과 3월, 9월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나니라.
5 전주 화약(和約) 이후 일본군의 대궐 침범과 이들의 패륜적인 내정 간섭으로 조선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망국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6 척족 세도정치의 부패는 날로 그 도를 더해 가는 가운데 국운의 진기가 다해 버린 망국의 징조가 여기저기서 나타나더라.
청일전쟁 발발
7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정부에서는 외국군 차병설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고
8 청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니 당시 일본정부의 수상은 이등박문이라.
9 초토사(招討使) 홍계훈이 외국군 차병을 정식으로 요청하자 친청파인 민영준과 청나라 원세개의 요청으로 청국군이 들어오니라.
10 이에 때를 기다리던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청일전쟁의 불을 뿜기 시작하니라.
11 이 무렵 전봉준 장군은 53개 집강소를 돌아보고 나주를 마지막으로 하여 고향인 고부로 돌아오니라.
전봉준과 대원군의 만남
12 전봉준은 신묘(辛卯 : 道紀 21, 1891)년부터 3년간 서울을 오르내리며 대원군을 만난 일이 있더니
13 대원군이 전명숙의 뜻을 물은즉 “나의 품은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다.” 하고 대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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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내주평. 현재 김제군 봉남면 내광리 내주평(鳳南面 內光里 內注坪).
20:2 전봉준(全琫準, 1853~1895). 조선 말기 동학혁명의 지도자. 별명은 녹두장군(綠豆將軍).
20:2 온 세상이 들끓는지라. 동학혁명 당시 조선은 국운이 기울어 국정이 심히 부패하였고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자본주의 시장 확대로 인한 패권다툼과 일본, 청국, 러시아 등의 이권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조선은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 20여 국의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불평등한 관계를 수립하고 개항을 강요당하며 침략의 길을 열어 주었다. 봉건적인 사회에서 근대적 국가로 전환하는 이 과정에서 숱한 국내외적인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국가의 기강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아 끝내는 외국 열강세력이 대립하는 지구촌의 화약고로 화하고 있었다.
20:3 동학혁명의 배경과 전개
동학혁명의 배경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동학 혁명, 그 진원지는 고부이다. 고부는 본래 호남 곡창지대의 노른자위로서 치부의 근거지였다. 당시 이 곳에 부임하기 위해 온갖 뇌물상납과 비리의 흥정이 오가던 차에 척족 세도정치의 모델인물인, ‘조대비의 근친’이며 좌의정이었던 조병세, 전라관찰사 조병호와 동족의 항렬인 조병갑(趙秉甲)이 임진(壬辰, 1892)년 1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였다. 조병갑은 악리의 표본이었다. 수탈이 유행병처럼 자행되던 당시 이듬해(1893) 11월에는 고부, 진주, 익산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원래 동진강이 흐르는 이평면의 배들평야에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어떠한 가뭄에도 걱정이 없이 대풍이 들어 보(洑) 이름을 만석보라 하였다. 그런데 조병갑은
① 하류에 필요없는 둑을 쌓게 하여 다음해에 700석이라는 수세를 거두어 착복했다. ② 또 고부의 유지들에게는 불효, 간통, 도박, 형제불화 등의 온갖 트집을 잡아 가두고 형을 가한 뒤 2만 냥을 착복했다. ③ 그리고 익산군수로 있었던 자기 부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천 냥을 강제 징수하였다. 이러한 토색과 협잡질에 마지막 불을 당긴 것은 조병갑과 친척인 전운사(轉運使) 조필영이다. ④ 세미(稅米)를 서울로 운반하는 도중 날씨가 건조하고 쥐가 먹는다는 구실을 붙여 정량보다 한 가마니당 셋 내지 다섯 되를 추가 징수하여 군민의 원성을 더욱 높여만 갔다. ⑤ 게다가 인간성도 아주 잔학하여 수염을 뽑거나 상투를 매다는 악형을 가하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이렇게 갖은 토색과 협잡질을 일삼으며 무명잡세와 온갖 죄목으로 백성들을 옭아넣고 있던 조병갑은 계사(癸巳, 1893)년 11월 30일자로 익산군수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전라감사 김문현을 설득시켜 유임운동을 벌이며 계속적인 수탈을 자행했다. ⑥ 이 해 11월,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민폐와 탐학에 시달리며 극도로 분격한 고부 16개 면의 대표자로 나서서 조병갑에게 하소연했으나 오히려 몰매만 맞아 그 여독으로 죽고, 부친의 한을 품은 전봉준이 수십 명의 백성들과 함께 조병갑에게 찾아갔으나 역시 늘씬하게 볼기만 맞고 쫓겨왔다.
사발통문(沙鉢通文)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은 신종리 대뫼부락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여 조병갑을 죽이고 탐관오리를 숙청한 다음 전주를 점령한 뒤 서울로 진격하자.’는 내용의 사발통문에 서명하였다. 전봉준은 영향력 있는 동지를 구하기 위해 11월 밤 정읍 과교리에 사는 친구 손화중(孫華仲)을 찾았으나 교주 최시형의 비폭력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래서 12월에 다시 60여 명이 2차로 모여 조병갑을 찾아가 진정했으나 역시 죽도록 매질만 당하고 돌아왔다.
(1) 1차 혁명 거사일 1894.1.9.새벽
1차 집결지 : 이평면 말목장터
그럴 즈음에 조병갑의 유임운동이 성공하여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군민들은 사무친 원한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첫 거사일을 조병갑의 부임일인 갑오년 1월 9일로 잡아 이평면의 말목장터에 천여 명이 모였다.
2차 집결지 : 부안군 백산면
그들이 고부군청을 습격하여 아수라장이 된 사이에 조병갑은 담을 넘어 전주로 도망쳐 버렸다. 전봉준은 옥에 갇힌 억울한 장두(狀頭)들과 불쌍한 백성들을 풀어 주고 부안군 백산면으로 진격하여 일찍이 조병갑이 수탈했던 4천 석의 쌀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 곳 백산에 총사령부를 두고 그 이름을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라 불렀다.
고부에서 쫓겨난 조병갑의 후임으로 박원명이 새로 부임하여 진심으로 선치를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은 어느 정도 원성이 풀려 백산에 모였던 군민들이 모두 해산 귀가하였다.
동학혁명에 대한 정부의 1차 대응
전주로 도망했던 조병갑의 충동질로 정부에서는 민심수습과 고부민란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그는 난리가 끝난 지 한 달이나 뒤인 2월 15일 8백 명의 역졸을 거느리고 고부에 나타나서 동학교도 대검거령을 내렸다. 고부 전역에 역졸들을 풀어놓아 마을에 돌아다니며 부녀자를 강간하고 재산을 강탈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때리고 조기꿰미 엮듯이 포승줄로 묶어들이므로 전 군민의 통분이 뼈에 사무쳐 민심은 순식간에 다시 흉흉해지고 장차 큰 난리가 터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전라감사의 군사마 최영년은 이렇게 통탄하였다. “슬프도다! 호남의 난은 조필영으로 시작되어 조병갑을 거쳐 마지막에 이용태가 저질러 놓은 것은 만고불역의 정론일 것이로다.”
(2) 동학혁명 2차 3월(1894년) 기포와 그 운명
민심의 원한의 마디가 너무 굵어져서 이미 대세가 어긋나 있음을 통감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설득하여 갑오년 3월 21일 백산에 총사령부를 두고 일어나 천하를 호령하니 각지에서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의 칭호를 받고, 손화중 김개남이 총관령, 김덕명 오시영이 총참모, 최경선이 영솔장, 송희옥 정백현이 비서가 되었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동학의 구거두이다.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은 온건파인 북접의 지도자 최시형과 강경파 김개남 사이의 중도파였다.
전봉준은 부친의 복상중이라 백의를 입고 머리에는 백립을 썼으며 105염주를 들고, 포사들에게는 동심의맹(同心義盟)을 쓴 횡대를 매게 하고 ‘5만 년 수운(受運)’이라는 큰 기를 세워 따르게 했다. 맨 앞에는 흰 깃발에 동도대장이라 쓴 대장기와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을 쓴 깃발을 펄럭이며 대죽창을 흔들며 백산을 향해 행군하니 인산인해의 물결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백산에서 기병한 이들이 모두 일어서면 흰 옷 입은 사람의 물결만 보이고, 앉으면 죽창만이 보이므로 “일어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옛 비결이 맞았다고 하였다.
동도대장 전봉준은 무장(武裝)에서 4천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고부로 가서 대폭 강화하여 관군을 격파한 다음, 만석보를 헐어 버리고 황토재로 진군하여 4월 7일 새벽에 관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黃土峴은 해발 35.5m의 나즈막한 황토언덕으로 말목장터와 고부 사이에 위치)
정부의 2차 대응
정부에서는 이용태를 파면하고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전주성으로 보냈다. 경군(京軍)은 야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청국 함선 평원호로 인천을 떠나 군산항에 도착하여 황토현 접전이 있던 4월 7일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머리에 백의민족의 백두(白頭)를 상징하는 흰 띠를 두른 동학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전주성으로 향하지 않고 방향을 돌려 남진(南進)하였다. 남진 이유는 황토현 전투의 여독을 풀고, 남도의 동학세력과 합세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관군을 남쪽으로 유인해 내기 위함이었다.
무장에서 창의문 발표(4월 18일)
4월 7일 정읍의 현아를 습격한 동학군은 흥덕을 거쳐 4월 9일에 고창읍 무장현으로 진입하였다. 무장 신촌리의 여시매봉에서 창의문(倡義文)을 전봉준이 직접 발표하고 계속 영광, 함평, 무안으로 진군하였다. 무장은 정읍의 손화중 포의 근거지로서 금구, 원평의 김덕명 포와 함께 전라도에서 동학의 세력이 가장 컸던 곳이다. 동학군이 무장에 진주했을 때 무려 1만 명을 헤아리는 대군이 되었다.
20:5 전주 화약(和約). 전주성이 4월 28일에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에서는 김학진을 전라감사로 임명하여 안무사 엄세영과 함께 전주로 특파하였다. 그리고 동학군측이 폐정개혁안을 제출하면 그대로 실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무렵 정부(조정)에서 청국군을 끌어들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전봉준은 자칫하면 나라를 위기로 이끈다는 판단하에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봉건적인 민폐의 개혁을 요구하는 13개 조항을 제시하고 5월 5일과 6일에 전주성에서 철병하여 해산하였다. 6월 초에 전라관찰사와 단독 회담하여 53개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관민이 합동하는 지방자치의 근대적 효시가 되는 최초의 민정이 이루어졌다. 노비문서 소각, 천인우대와 양반계급 타파, 남녀평등, 청춘과부 개가 등 새 시대의 가치관을 부르짖어 이 땅에 후천시대의 개벽운을 열어 놓은 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의지할 곳 없는 이 땅의 순민들이 일으킨 이 동학혁명은 본래 반봉건의 기치를 내세우고 일어났다. 충효쌍전(忠孝雙全), 보국안민(輔國安民), 권귀진멸(權貴盡滅),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대의로 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반외세, 반침략의 성격을 띠어 갔다.
20:5 대궐 침범.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은 군을 동원하여 조선왕궁을 점령하고 왕을 볼모로 삼아 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친일적인 개화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후 항일운동과 삼국간섭으로 조선 보호국화 정책이 뜻대로 되지 않자 새로 일본공사로 임명된 미우라 고로는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군민(軍民)을 동원하여 또 다시 경복궁을 점령하고, 러시아와 결탁해 일본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민비)를 참살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20:6 망국의 징조. 이 해 2월에 경복궁에 거처하고 있던 고종은 꿈에 광화문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깨어난 뒤 경복궁을 싫어하여 창덕궁으로 옮기고 즉시 동궁을 수리하게 하였다.
20:7 전주성 점령. 동학군은 장성 황룡촌에서 남진한 홍계훈의 경군과 처음으로 접전을 벌일 때 장태라는 신무기를 써서 관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고 노령을 넘어 전주를 향해 북진해 들어갔다. 4월 27일, 장날을 이용하여 장꾼으로 변장한 동학군은 파죽지세로 밀고들어가 전주성을 무혈로 점령하였다. 전주성을 빼앗긴 경군은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공방전을 계속했으나,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를 외우면서 공격해 오는 동학군의 사기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휴전을 청하는 한편 정부에 보고하였다.
20:8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일본의 정치가. 초대 한국 통감을 지내며 조선 강점을 준비하다 하르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됨.
20:9 홍계훈(洪啓薰, ? ~1895). 조선 고종 때의 무신. 동학혁명 때 양호(兩湖) 초토사가 되어 관군 8백 명을 인솔하고 전주성 수복. 을미사변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을 지키다가 순직.
20:9 민영준(閔泳駿, 1852~1935). 본명 영휘(閔泳徽). 조선 말기의 문신.
20:9 원세개(袁世凱, 위안 스카이, 1859~1916). 중국의 정치가.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조선의 임오군란·갑신정변, 중국의 무술(戊戌) 변란에 관여함.
20:10 청일전쟁. 1894~1895년에 걸친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전쟁.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에 청국이 출병한 데 대하여, 1885년의 천진조약을 방패 삼아 일본도 출병하여 양군이 한반도 안에서 대치하다가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아산·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군에 대하여 전단(戰端)을 열고 8월 1일에 선전포고하였다.
20:11 집강소(執綱所). 조선 말기에 동학 농민군이 설치한 민정(民政) 기관. 지방자치의 효시. 폐정 개혁을 전제로 정부와 휴전한 뒤 전라도 53군에 두어 지방의 치안과 재정을 맡아봄. 총본부를 전주에 두고 대도소(大都所)라 함. 이를 전봉준이 지휘하여 금구 원평 등을 근거지로 전라우도를 관할(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전라좌도 관할)함으로써 호남지방의 행정을 거의 주관하다시피 함.
20:11 고부로 돌아오니라. 그러나 집이 불타 쉴 곳이 없어 8월 초순 태인 평사리 동골로 찾아갔다. 동골 이웃마을 지금실에 사는 김개남과, 이 부근으로 시집간 큰딸 집에 맡겨 둔 불쌍한 자식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사낙안(平沙落G)이라 불리는 이 곳에서 오씨 문중의 과수댁과 재혼하였다.
20:12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고종의 생부(生父). 이름은 하응(昰應). 호는 석파(石坡). 존칭은 국태공(國太公).
20:12 만난 일이 있더니.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 극비리에 밀사로 동학교도 박동진과 정인덕을 불러 ‘을미(1895)년 2월에 군대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와 내정을 개혁하고 일본군을 몰아내기로 하자.’는 밀명을 전봉준 장군에게 보냈다. 이렇게 대원군과 혁신파인 김개남 등의 동지로부터 나라를 건져야 한다는 열화와 같은 독촉을 계속 받았다. 대의를 위해 언제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전봉준의 성격에 외세에 기울어 가는 당시의 국운은 가만히 앉아서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군대는 이미 해산되었고, 때는 6월의 한창 농번기였다.
(2)동학혁명과 증산도
24세 때 광구천하의 큰 뜻을 품으심
1 증산께서 후천개벽세계를 알리는 이 천하대란의 대세를 지켜보고 계셨으니
2 이 때에 전봉준은 40세요 증산은 24세의 젊은 시절이라.
3 증산께서 천하가 날로 그릇됨을 깊이 근심하시고 이 해에 의연히 광구창생의 큰 뜻을 품으시니라.
4 이 해 5월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찾아와 천지 현기(玄機)와 세계대세를 비밀히 논하니라.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심
5 5월에 증산께서 본댁을 떠나시니라. 이 때 유덕안(兪德安)이 부친 흥주의 당부로 증산을 찾아 나서니라.
6 태인 강신리(江新里)에 이르렀을 때 관군이 의병 두 사람을 잡고 덕안을 동학군으로 몰아 포박하여 전주 용머리고개 임시 형장으로 끌고 가니라.
7 두 사람이 먼저 참형되고 덕안이 막 목을 베일 순간에 갑자기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치고 회오리 바람이 불며 불칼이 들어오더라.
8 관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하였으나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깊어 사방이 보이지 않는데 덕안이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사람의 시체만이 짙은 어둠 속에 뒹굴고 있더라.
9 덕안이 먼곳에서 비치는 등불을 향하여 지친 몸을 이끌고 가니 날이 새기 시작한지라.
10 그러나 등불은 간데온데없고 적막한 산중이거늘 정신을 차려 포박을 풀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오니라.
11 덕안은 호랑이가 불빛을 비춰 주어 살아난 것으로 믿고 있더니
12 그 후 증산께서 객망리에 문득 돌아오시어 덕안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험한 시국에 위급한 환경을 당하여 고통이 많았습니다. 나를 찾을 필요 없습니다.” 하고 위로하시므로 비로소 자신이 살아난 것을 ‘증산의 감화’ 덕분이라고 믿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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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천지현기. 천지조화의 현묘한 기틀.
21:6 강신리. 본래 고부군 벌미면(伐未面) 강신리였으나 현재 정읍군 태인면 궁사리(弓四里).
[道典 1편 22장]
동학혁명의 패망을 예고하심
1 증산께서 동학군의 전도가 이롭지 못할 줄 미리 아시고, 그 해 7월 어느 여름날 밤에 불을 밝히지 않고 어둠 속에서 깊은 명상에 잠기시니라.
2 조화로 충만한 “천지의 원신(元神)” 곧 우주의 성령을 열고 삼매에 드시어 동학의 운명을 예시하는 옛 시 한 수를 보시고 읽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月黑雁飛高하니 單于夜遁逃라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
欲將輕騎逐하니 大雪滿弓刀라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
3 달빛은 어둡고 기러기 높이 나는데
선우는 밤을 타서 도망하는구나.
4 장차 말 타고 쫓아 잡으려 하니
큰눈 내린 겨울 들판에는 패한 시체만 가득하리라.
5 이로써 동학군이 겨울에 이르러 패망할 것을 아시고 모든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더니,
6 그 해 겨울에 과연 동학당이 관군에게 패멸되니 이 때 이 말씀을 순종한 사람은 무사히 화(禍)를 면했으나 듣지 않고 종군한 자는 모두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니라.
7 증산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증산을 일컬어 말하기를 “신인(神人)이라.” 하고 “공부 않고 날 때부터 아는 사람이라.”고 이르더라.
동학혁명 3차 기포
8 갑오년 가을에 완주군 삼례(參禮)에서 동학군의 수뇌들이 회동을 가진지라.
9 이 회동에서 교주 최시형과 손병희가 반폭력·반혁명을 주장하여 남접과 북접이 갈등을 겪었으나
10 마침내 대세는 개전으로 기울고 남북접의 화해로 전봉준과 북접통령 손병희는 의형제를 맺으니 전명숙이 형, 손의암이 아우가 된지라.
11 9월 18일(양력 10월 16일)에 해월선사가 전국 동학교도에 총동원령을 내리매 재기포(再起包)의 격문을 돌리고 총공세의 준비에 들어가 서울 진군을 위한 교두보로서 백제의 옛 도읍인 공주로 대공세를 시작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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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그 해 겨울. 갑오(1894)년 11월 원평 쩜涇접전.
22:8 삼례. 전주 서북방 완주군(完州郡) 삼례읍.
22:9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조선조말 동학 2대 교주. 호는 해월(海月).
22:9 손병희(孫秉熙, 1861~1922). 항일 독립운동가. 3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천도교 제3세 대도주.
22:9 남접과 북접. 북접(北接)은 교주 해월선사의 보은 중심으로 주로 활동한 호중(湖中, 충북) 이북을, 전장군이 이끄는 호남 이남을 남접(南接)이라 하였다.
22:9 …갈등을 겪었으나. 처음에 해월선사는 혁명이 일어나자 “도로써 난을 지음은 불가함이니 전봉준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라.” 하였다. 이에 오지영은 남북접 조화책을 가지고 삼례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대장소와 보은에 있는 해월선사의 거처를 각각 찾았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 가고 있는 판국에 조화책이 받아들여졌으나 호남 동학군의 서울 진격이 20여 일이나 늦어져 공주영을 관군에게 먼저 점령당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22:11 대공세. 이들은 의기충천하여 도심으로 장렬한 대행군을 하면서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보리.” 이 노래의 속뜻은 갑오세(甲午世)에 결판을 내야지, 을미적거리다 을미(乙未)년이 지나면 병신(丙申, 1896)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9월의 거사는 1 차 기포의 반봉건적 성격을 넘어 반외세, 반침략, 반제국주의의 정신으로 승화되어 “조선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항일구국의 정신으로 점화되어 갔다.
[道典 1편 23장]
동학의 운명을 전하고자 동학군을 찾아가심
1 이 해 10월에 태인 동골에 가시어 동학 접주 박윤거(朴允擧)를 방문하시니
2 마침 태인 닥뱀이에 사는 안필성(安弼成)이 한마을에 사는 동학신도 최두연(崔斗淵)과 함께 와서 윤거에게 도담(道談)을 듣고 있더라.
3 증산께서 마루에 걸터앉으시어 윤거와 성명을 통하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4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장래의 대세를 전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3월에는 동학군이 황토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번에는 겨울에 이르러 전패할 것입니다. 그래서 동학군의 발원지인 이 곳에 효유하러 왔습니다. 접주인 그대에게 무고한 생민들을 전화에 그만 끌어들일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5 윤거는 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 드디어 접주를 사면하고 전란에 참가치 않으나 최두연은 믿지 않고 윤거의 뒤를 이어 접주 겸 명사장(明査長)이 되어 부하를 인솔하고 출전하니라.
6 동학 혁명군의 김개남(金開南)은 남원포에서, 김덕명(金德明)은 금구 원평에서, 차치구(車致九)와 손여옥은 정읍에서, 최경선은 태인에서, 정일서는 고부에서, 유한필은 함열에서, 오동호는 순창에서, 기우선은 장성에서, 손천민과 이용구는 청주에서 일어나 호남 53주의 강산과 전국을 뒤흔드니라.
7 동학군이 서서히 삼례를 떠나 공주를 공략하기 위해 은진과 논산 쪽으로 대진격하니
8 삼례를 떠난 동학군이 머지 않아 서울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온 나라안에 퍼져 나가니라.
9 안필성은 이 때 “남원으로 가서 종군하라.”는 군령을 받고 도중에 전주 구이면 정자리(九耳面 亭子里)를 지나다가 그 곳 노상에서 갑자기 강증산을 뵙게 되니라.
10 필성이 태인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어 대뜸 증산을 알아보니라. 필성이 “아니, 어쩐 일이십니까?” 하고 인사를 올리니 “음, 그대가 올 줄을 미리 알고 있었네. 나와 동행하는 게 어떤가?” 하고 말씀하시니라.
11 증산께서 필성과 더불어 두어 마장을 더 걸어 임실(壬實)에 이르러 인근 마군단 주막으로 들어가시니 사람들 사이에 온통 동학군의 소문과 일본의 대궐 침범 이야기로 시끄럽더라.
12 증산께서 술 한 상을 시켜 목을 축이시고 말씀하시기를 “날도 차고 하니 이 곳에서 쉬어 기다리라. 남원에서 자네가 만나려는 사람은 이 곳에서 만나리라.” 하시니
13 필성이 아뢰기를 “노자가 다 떨어져 여기서 만일 그 사람을 못 만나면 참으로 곤란하겠습니다.” 하거늘 증산께서 이르시기를 “글쎄, 내 말을 믿고 밥 굶을 걱정은 말라.” 하시니라.
14 두 시간쯤 지나니 문득 길 건너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리며 인마소리가 가까이 들려 오니라.
15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 보니 수천 명의 동학군이 대포를 쏘며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라 쓴 오색기를 흔들고 창을 휘두르며 행군해 가더라. 동학군의 긴 행렬로 대평야는 사람의 물결로 뒤덮이니라.
16 이 때 진군하는 복잡한 행렬 속에서 접주 최두연이 필성을 보고 다가와서, “남원으로 가지 말고 전주로 집결하라는 군령(軍令)이 떨어졌으니 그리 알라.” 하며 대열 속으로 사라지니라.
17 한편 동학군의 대본영은 논산포에 있었고 관군은 충주와 괴산을 토벌한 후 남하하는 중인데, 당시 남원에서 기병한 김개남 장군의 1만여 동학군은 청주성을 공략하여 관군의 남하를 막으려고 후방 부대를 전주에 집결시키는 중이더라.
18 바로 이러한 때에 최두연을 다시 만나시게 된 것이라.
19 증산께서 필성을 데리고 군마의 뒤를 멀리서 따라가시다 전주 수통목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오늘은 전주에서 살상이 있을 터이니 이 곳에서 자고 내일 전주로 가도록 하라.” 하시니 장렬한 동학군의 행군 모습에 필성의 마음이 더욱 조급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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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접주(接主). 동학의 교구 또는 집회소의 책임자. 포주(包主). 장주(帳主).
23:2 안필성(安弼成, 1870~1962). 본관 순흥(順興). 태인 닥뱀이(옹동면)에서 금산면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
해방 후부터 6 5 남북전쟁 전까지 안운산 종도사님께서도 자주 만나 보셨다.
23:6 차치구(車致九, 1851~1894). 본관은 연안(延安). 이름 중필(重弼). 치구(致九)는 자(字). 철종 2년에 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서 출생.
23:9 정자리. 정자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하룡리(下龍里)라고도 함. 70년대 초반(72~73)에 새마을사업으로 모두 벌목하였다. 현재 완주군 구이면 백여리(白如里) 소재.
23:11 마장. 10리나 5리가 못 되는 거리를 이르던 말.
23:19 수통목. 전주시 동서학동 노루목재 북쪽에 있는 마을. 남원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산모퉁이로 돌아가는 좁은 목을 말함.
[道典 1편 24장]
길거리에 나가면 볼 것이 있으리라
1 이튿날 필성을 데리고 전주에 이르시어 조용한 곳에 머물곳을 정하시니라.
2 동학의 가르침으로 ‘새 세상을 개벽하리라’는 기대와 외세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건진다는 대의(大義)에 불타오르는 그의 마음속에는 증산께서 깨우쳐 주시는 어떤 충언도 들려 오지 않더라.
3 저녁에 필성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거리에 나가면 볼 것이 있으리라.” 하시고
4 함께 나가시어 한 곳에 이르니 싸늘한 가을 바람이 부는 길바닥 위에 잘려진 머리 셋이 뒹굴고 있더라.
5 증산께서 크게 놀라는 필성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기를 “저것을 보라! 이렇게 위험한 때에 어찌 경솔하게 몸을 움직이리요. 종군하는 길에 부디 몸조심하라.” 하시니라.
6 증산께서 필성과 이 곳에서 작별하시니라.
전봉준 장군을 만나심
7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중국본토까지 밀고 올라가 대승을 거두고 동학군 토벌책을 세우니
8 이로부터 전국의 각 군에서는 동학군이 닥치는 대로 피살, 포살되기 시작하더라.
9 10월 말경에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는 공주를 공략하기 위해 비장한 공세를 펼치니라.
10 증산께서 몰살의 큰 위기에 처한 동학군의 운명을 내다보시고 곧장 전장군 진영이 있는 공주로 찾아가시어 말씀하시기를 “무고한 창생만 죽이고 성공치 못하리니 전쟁을 그만두라.” 하고 타이르시니 그가 듣지 않는지라.
11 이 때 안필성이 종군한 김개남 부대는 전주를 떠나 청주병영을 공격하기에 앞서 여산(礪山)에 잠시 진을 치니라.
12 필성이 여산에 이르러 길 한쪽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증산을 세 번째로 만나니라.
13 증산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종군하느냐?” 하시니 필성이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이 길이 크게 불리할 것이니 극히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니라.
나는 대세를 살피러 온 것
14 행군은 계속되어 진잠읍(鎭岑邑)을 지나 태전 유성(儒城) 장터에서 하루를 쉬니라. 다음날부터 청주성을 공략하기 위함이더라.
15 이튿날 새벽 청주성을 약 30리 남겨 놓은 곳 길가에서 증산께서 필성을 다시 만나시니라.
16 증산께서 “그대의 진중에 중(僧)이 한 사람 있느냐?”고 물으시니 필성이 대답하기를 “예, 그러합니다.” 하거늘
17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이 길을 따르지 말고 이제는 나의 말을 믿으라. 그대들은 저 요승(妖僧)의 말을 듣고 필경 멸망을 당할 것이로다.” 하시니
18 필성이 대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러한 중대사에 그런 불길한 말씀만 하십니까?” 하니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19 “자네는 도대체 나의 말을 믿지 않는도다. 내가 왜 동학군이 미워서 그러리요. 머지 않아 닥칠 그들의 장래가 지극히 불리하므로 화를 면하게 해 주려 함일 뿐이로다.” 하시니라.
20 “그러면 선생님은 왜 이 곳까지 계속 쫓아오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나는 동학에 종군(從軍)하러 온 것이 아니라 대세를 살펴보러 온 것이로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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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1894년 7월에 불이 붙은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은 승전을 거듭하여 육군은 성환·평양 등에서 전승하고 요동을 공격하였으며 해군은 아산만 앞의 풍도 꽁鷺등에서 청 해군을 격파, 여순 ㎸蔓 威海衛)를 육해 양군이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듬해 1895년 4월 17일 청나라는 화의를 청하고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일본에 요동반도 釉룃팽호도(澎湖島)를 넘겨주고 고평은(庫平銀) 2억 냥을 지불하였다.
24:11 여산.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지역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도호부. 여산(礪山)은 1404년(태종 4)에 여량(礪良)의 ‘여’자와 낭산(郎山)의 ‘산’자를 합쳐서 여산현으로 한 데서 비롯. 여산은 전라도와 서울방면 간의 길목으로 관내에 양재역이 있었다.
24:14 태전(太田). 지금의 대전으로 1909년 이후 왜곡된 지명. 이것도 일제식민사관 잔재의 하나이다. 본래의 이름으로 바로잡는다.
[道典 1편 25장]
동학혁명의 전쟁터에서 다시 만난 김형렬
1 이 때에 금구군 수류면 환평(水流面 環坪)에 사는 김형렬이 필성의 곁에 있다가 증산께서 필성과 나누시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를 청하거늘
2 형렬은 일찍이 친면이 있던 터라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니 증산께서 형렬에게도 “종군하지 말라.”고 권하시니라.
3 필성과 형렬은 종군하지 말라는 간곡한 충언을 저버리고 계속 종군하여 앞서가니
4 청주 병영 앞 산골에 이르자 좌우에서 갑자기 복병이 나타나서 포화를 퍼부으매 많은 동학군이 전사하는지라.
5 필성과 형렬이 황급히 소나무숲 속으로 몸을 피하니 증산께서 그 곳에서 기다리기라도 하신 듯이 서 계시다 부르시며 “그대들은 잘 피해 왔도다. 이 곳은 안전하니 안심하라.” 하시니
6 형렬은 일찍이 증산께서 신동임을 들었던 터라 증산의 지감(知感)이 비상하심에 새삼 감복(感服)하니라.
7 두 사람이 종일 먹지 못하여 주림을 이기지 못하거늘 증산께서 돈을 내어 주시며 “저 곳에 가면 떡집이 있으리니 주인이 없을지라도 떡값을 수효대로 떡그릇 안에 두고 떡을 가져오라.” 하시매
8 필성이 명하신 대로 떡을 가져오니 증산께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시니라.
이 곳에서도 또 많이 죽으리라
9 증산께서 두 사람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동학군이 오래지 않아 쫓겨오리니 우리가 먼저 떠남이 옳으니라.” 하시고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실 때
10 진잠에 이르러 문득 말씀하시기를 “동학군이 이 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 하시니 두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불쾌히 생각하니라.
11 이에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들을 미워함이 아니요, 사태가 진전될 기미를 말할 뿐이니 아무리 듣기 싫을지라도 불쾌히 생각하지 말라.” 하시니라.
12 산속의 한 은벽한 곳에 쉬시는데 잠시 후에 총소리가 어지럽게 일어나더니 격전 끝에 동학군이 많이 전사하더라.
13 동학군의 운명의 대세가 기울어 가고 있는 이 때, 증산께서 김형렬과 안필성을 데리고 진잠의 산길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걸어 내려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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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많은 동학군이 전사하는지라. 이 때 청주의 주력부대는 북접군과 김개남 군의 1만여 명이 있었다. 한일 양군이 서울을 출발, 충주 セ遠밗거쳐 청주성에서 대혈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들이 청주병영 앞 산골에 이르렀을 때 이두황의 관군과 복병(伏兵)이 소나기같이 퍼붓는 포탄과 총탄 속에서 무수히 죽어 넘어갔다.
25:13 기울어 가고 있는 이 때. 안필성이 종군한 이틀, 김개남 장군의 동학군은 계속 대전부근 회덕까지 후퇴하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목천(木川) 세성산(細城山)으로 북진하였다. 10월 21일(양력 11월 18일) 북접의 효장 김복용 군대와 함께 이 세성산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혼성 부대와 대혈전을 벌였으나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멸당하다시피 하였다. 이 세성산 전투의 대참패는 동학군의 사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공주 전투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道典 1편 26장]
갑사에서 하루 머무심
1 그 곳을 떠나 산길을 가시던 중 어디서 목탁소리가 들리거늘 찾아가니 곧 계룡산 갑사(甲寺)더라.
2 증산께서 경내에 들어서시며 말씀하시기를 “해가 지려면 아직 이르나 더 가다가는 해(害)를 입으리니 이 곳에서 자고 가자.” 하시고 쉬시더니
3 조금 뒤에 한 중이 이르러 말하기를 “동학군이 노성(魯城)에 진을 치고 머무르며 도망하는 군사를 붙든다.” 하거늘
4 필성과 형렬이 크게 근심하니 증산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곳에서 쉬자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화를 피하려 함이라. 내일 아침에 떠나가면 아무 사고가 없으리니 염려하지 말라.” 하시니라.
5 이튿날 갑사를 벗어나 산길을 따라 한참 걸으시다가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씀하시기를 “이로부터는 그대들에게 큰 화가 미치지 않으리니 각기 갈려 가도록 하라.” 하시니
6 이들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좀더 동행하기를 간청하거늘 증산께서 웃으시며 이를 허락하시니라.
7 여산(礪山)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만일 읍내를 지나면 옷을 빼앗기리라.” 하시고 샛길로 들어 고산(高山) 인내장터로 향하시니라.
8 이 때에 여산읍으로 지나는 동학군은 모두 읍내 사람들에게 옷을 빼앗기고 벗은 몸으로 흩어져 가니 이는 지난번에 동학군들이 북상할 때 읍사람들의 옷을 빼앗아 갔음을 보복함이더라.
여산에서 전주로 오심
9 그 길로 전주에 이르시어 두 사람을 각기 돌려보내실 때 필성과 형렬이 숙박비가 없음을 걱정하매 증산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곳에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라.” 하시니라.
10 이에 증산께 작별하고 형렬은 구릿골로, 필성은 닥뱀이로 각기 돌아가니라.
11 그 뒤에 동학 전군은 11월 25일 원평(院坪) 접전과 27일 태인(泰仁) 접전에서 연전 연패하여 모두 흩어지니라.
12 증산께서 이 민족에게 큰 시련과 좌절을 가져다 준 슬픈 겨울을 보내고 25세의 봄을 맞이하시니라.
13 그러나 따뜻한 봄날에 차가운 비극의 소식들이 찾아오니, 체포당한 김개남,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등이 삼사십 대의 젊은 나이에 참형을 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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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노성.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 일원의 옛 지명. 조선시대의 정조 때 노성현으로 개칭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논산군에 편입되었다.
26:11 원평 접전. 전봉준은 논산 패전 후 3천 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돌아와 며칠 지내다가 23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했다. 원평은 호남의 유명한 접주 김덕명의 고향이요, 본거지이다. 관병 350명과 일본군은 금구에서 11월 25일(양 12월 21일) 출발하여 원평에 이르니 동학군 수만 명이 ‘品’자형으로 포진하였다. 아침부터 접전을 벌여 포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 동학군은 원평리 동쪽 구미란 마을 뒷산에 있고, 관병은 구미란 마을 앞 벌판에 있었는데 사방 주위에서 함성을 지르고 불과 연기가 덮여 원근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다가 관군 최영학이 돌격대를 이끌고 산 위로 올라가 동학군 37명을 사살하니 모두 도망하고 해가 저물었다.
26:11 태인 접전. 11월 25일 원평 싸움에서 패전한 전봉준은 5천여 명을 거느리고 태인으로 후퇴하여 최후의 방어전을 시도하였다. 태인은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은 물론 많은 유명 접주를 배출한 곳으로 김덕명의 본거지인 원평과 아울러 동학혁명의 중추를 이루었던 곳이다. 동학군은 전봉준 김문행 유공만 문행민을 대장으로 성황산(城隍山) 한가산(閑伽山) 도이산(道伊山) 등 세 곳의 읍 주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수가 5,6천을 헤아렸다. 관군에게 함성을 지르며 천보총(千步銃)을 쏘아댔다. 관군은 조선군 230명과 일본군 60여 명이었다. 접전이 계속됨에 따라 동학군은 후퇴하여 성황산으로 집결하였다. 성황산은 동학군이 큰 나팔을 불며 회룡총(回龍銃)을 쏘아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 관군이 흩어졌다가 다시 네 갈래로 돌격해 올라가니 포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동학군은 도망하고 관군이 20리까지 추격하여 40여 명을 사살, 50여 명을 생포하였다. 전봉준은 공주 패전 후 노성-황화대-전주-원평-태인에서 최후의 항전을 계속했으나 일본군의 신무기의 위력에는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26:11 모두 흩어지니라. 최후의 패배와 정읍에서 동학군 해산, 이 때 동학군은 공주의 참패 이후 논산에서 전주로 계속 후퇴하고 있었으며, 북접군은 이미 대부분 흩어졌다. 남북접의 지도자들은 마지막 전열을 가다듬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금구 원평에서 작전회의를 열었다. 전봉준, 손병희,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차치구, 손천민 등의 지도자들이 회동하였다. 그 후 이들은 원평(11월 25일)과 태인읍내 성황산 전투(11월 27일)의 마지막 결전에서 패배하였다. 그리하여 전봉준 장군이 정읍에서 동학군을 해산하니 증산 상제님께서 전주에서 이러한 대세를 바라보시면서 귀향하셨다.
26:13 손화중(孫華仲, 1861~1895). 동학의 정읍대접주. 갑오동학혁명 지도자.
26:13 최경선(崔景善, 1859~1895). 동학접주이며 동학혁명 당시의 농민군 지도자.
26:13 전봉준.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된 다음 악형과 위협 속에서 혁명가로서의 기개를 보이며 1895년 3월 2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전환기에 선 고뇌의 시대에 살다 간 전봉준 장군은 죽기 전에 그의 담력과 인물됨, 진실이 가득 찬 충정이 담긴 시를 이렇게 읊었다(이 시의 앞 두 구절은 본래 제갈공명이 남긴 글로 전해지고 있다).
시래천지개동력(時來天地皆同力),
운거영웅불자모(運去英雄不自謨).
애민정의아무실(愛民正義我無失),
애국단심수유지(愛國丹心雖有知)!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내 편이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찌할 길 없구나.
백성을 사랑한 정의 무슨 허물이더냐.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아주리.
[道典 1편 27장]
천하사에 뜻을 두고 호남지역을 유력하심
1 스물다섯 살 되시던 을미(乙未 : 道紀 25, 1895)년 봄에
2 고부 유생들이 난이 평정되었음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斗升山)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 때 증산께서도 참여하셨더니
3 한 노인이 증산을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증산께서 그 책을 통독하시니라.
4 증산께서 동학혁명이 일어난 24세부터 천하사에 뜻을 정하시고 주로 호남지역을 주유하시니라.
중들을 꾸짖으심
5 하루는 전주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송광사(松廣寺)에 가서 여러 날 동안 지내실 때에 하루는 어떤 중이 무례하게 대접하는지라.
6 증산께서 노하여 큰 소리로 “요망한 무리들이 산속에 모여 불법을 빙자하고 백악을 감행하여 세간에 해독을 끼치니 이 소굴을 뜯어 버리리라.” 꾸짖으시고 커다란 법당기둥을 손으로 잡아당기시니 기둥이 한 자나 물러나는지라.
7 온 절이 크게 놀라 여러 중들이 몰려와 절하며 사죄하거늘 이에 노를 그치시고 그대로 두셨더니
8 그 뒤에 법당을 여러 번 수리하여도 물러난 기둥이 원상대로 회복되지 아니하더라.
백남신 아우 소실의 친가에 오래 머무심
9 그 뒤에 전주에 가시어 전주 부호 백남신(白南信)의 아우 소실인 기생 춘월의 친정집에 거처를 정하시고 오랫동안 머무시는데
10 그 기생이 친정에 다니러 와서 머물다가 증산의 우아하신 풍모를 탐내어 하루는 밤을 타서 거처하시는 방으로 들어오거늘 “나는 이미 아내가 있는 사람이라.”고 꾸짖어 보내시니라.
11 그 뒤로도 다시 몇 번 들어오거늘 그 때마다 잘 타일러 돌려보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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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을미년 봄(동학혁명결과). 상처받은 이 민족의 텅 빈 마음을 채워 주고 갈 길을 제시해 줄 ‘새 메시아의 출현’은 이미 결정적인 운명의 시운(時運)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민중의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제까지 직접 대세를 지켜본 증산 상제님은 자신이 처한 민족과 인류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보다 근원적인 판밖의 새 길(道)을 열기 위해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 동학혁명은 새 시대 부르짖음의 큰 자취만 남긴 채 절망의 함정에서 일시적 탈출의 시도로 보였다.
27:3 책 한 권. 후천개벽의 천지대세를 논한 책으로 전한다.
27:5 종남산. 전북 완주군 용진면 윤중리 소재.
27:5 송광사. 전북 완주군 소양읍 대흥리 종남산 기슭에 위치. 867년(경문왕 7) 도의(道義)가 창건한 뒤 폐허가 된 것을 고려 중기 보조국사가 이 곳을 지나다 영천(靈泉)의 물맛을 보고 큰 절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샘 둘레에 돌을 쌓아 두었다가 뒷날 그 자리에 절을 중창(重創)하도록 당부했다 한다. 1622년(광해군 14) 응호(應浩), 승명(勝明) 등이 중창. 현존하는 절집으로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웅진전, 약사전, 관음전, 칠성각, 십자`각, 천왕문, 금강문, 일루문 등이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70호인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팔작(多圃八作) 지붕이다.
27:9 백남신(1858~1920). 본명은 백낙신(白樂信). 전북 완주군(옛 임실군) 관두면 관철리(방수리) 출생. 둘째 아들로서 백현수의 집에 양자로 들어감. 대실업가. 상제님의 9년 천지공사에 불멸의 공덕을 남긴 성도이다.
Ⅲ. 증산도와 동학과 원불교와의 관계
1. 증산도와 원불교
원불교의 1대 2대 교주는 증산도에서 공부하려 했으나 그들의 성품을 보신 태모님께서 쫓아내셨다. 그 뒤 박공우성도로 부터 개벽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배가 고프니 물질부터 개벽하자는 말을 하고 그 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을하고 그것이 원뷸교의 핵심교리가 되었다.
2. 증산도와 동학의 관계
동학을 세운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무극대도가 나올것을 8년전에 미리 알리는 사명을 받았고, 증산도는 동학의 예고대로 나온것이다. 곧 동학은 증산 상제님의 강세와 상제님의 가르침인 무극대도가 세상에 나올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사명을 받았다.
3. 도운(증산도의 역사)
증산 상제님의 탄강기는 1871년이며, 1901년까지 세상을 주유 하시다, 1899년부터 시작된 3년 천하 주유를 끝내시고, 1901년부터 1909년까지 9년 천지공사를 보셨다.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다 보신후 어천하셨고, 19011년 태모고수부님에 의해 첫째교단살림이 시작된다. 이때 태모님의 이종 사촌인 차경석이 배신하여 보천교를 세우고, 700만신도를 모으고 후에 시국이라는 나라까지 세운다. 또 상제님 어천후 상제님을 따르던 성도 및 종도들이 각기 교단을 차리며, 뒤에 태모님의 통합교단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보천교를 세운 차경석과 김형렬 성도 교단에서 신앙하다 증산 상제님의 동생인 선돌부인을 해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판 차린조철제는 태극도를 세운다.
그뒤 태모님이 차경석의 공작으로 보천교에서 떠나시고 통합교단은 깨어진다. 그뒤 성도님들의 교단(판밖의 난법)이 증산계열의 한 축을 이루었다.
태모님께서 세살림 도수와 10년 천지공사를 맡으셨고 1880년~1935년으로 인간의 삶을 마감하시고 선화하셨다. 1변(1911~1935년)
그 뒤 1945년부터 1954년까지 증산도의 2변인 증산교의 역사가 이어진다. 그뒤 100만신도가 운집하고, 한국전쟁과 훼도자(판안의 난법 ;이상호, 이성영형제등)들에 의해 2변은 깨어지고, 20년간 긴 휴게기를 갖는다.
그 뒤 1974년 증산도의 역사가 시작된다. 증산도는 안경전 종정님이 2변의 주역인 안운산 종도사님을 모시고 시작한다. 곧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오늘의 증산도가 되었다.
증산도는 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현실에서 집행하는 단체로 5대 사상으로 [해원, 상생, 보은 원시반본, 가을개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