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BS 경상 방송,
이렇게 개국 되었다."
-1기 방송요원 李鐘大의 회고록-
(종로구 청운동에서 98. 10. )
1. 이 글을 남기게 된 동기는...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가면서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30여년 전으로 돌아가는 타임 머신을 타고 있다. 그 옛날 내가 뛰고 달리던 꿈의 캠퍼스 칠암 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 동고 동락 했던 나의 영원한 동료들이 환히 반겨 주는...
약속 장소(불교 방송옆 한식집 예촌)에 도착 하니 너무도 많은 후배님들이 모여들었고, 심지어 방송국 커플까지 탄생 한 것을 보니 기쁜 마음 한량이 없었다. 한 알의 밀 알이 썩어서 오늘이 있게 되었다는 한마디에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내가 그 한 알의 밀 알이라면, 뿌리를 알고 싶어하는 여러 후배님들을 위해서 경상 방송 개국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 둠이 도리 일 것 같아 이 글을 적게 되었으며, 훗날 GBS의 기원을 알고 싶어하는 여러후배님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내가 영원히 살아있지는 못할 것이니...
2. 그 당시의 진주는...
어느 날 갑자기 진주시가 발칵 뒤집어 졌다. 진주 MBC가 개국을 한 것이다.(개국 당시는 JBC 진주 민방이었음) TV는 물론 없었고 라디오조차도 귀하던 시절, 고작 해야 유선 라디오 방송을 집집마다 듣고 있던 시절이었다. 무미 건조한(?) KBS만을 듣고 살던 진주 시민에게 마구 쏟아지는 MBC의 경쾌한 CM 송과 방송 멘트들은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촉석루 공원 밑의 시공관에서는 개국 쇼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시가지는 완전히 축제의 분위기였다. 그 당시 나는 방송의 매력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고,어느날 하교 길에 불쑥 진주 MBC를 찾아갔다. 그리고 편성 국장을 찾아가서 무작정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부산 MBC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이상길 씨가 국장으로 있었음) 자신의 명함을 한 장 건네주면서 빙긋이 웃기만 하던 국장은 맨 끝자리에 앉아 있는 허정기 아나운서를 부르더니 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허 아나가 숙직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는 진주 MBC에 가 있곤 했다. 라디오도 귀하고 녹음기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다시 들어본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으나 방송국을 드나들던 나는 이것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나 들이 직접 읽는 그 날치 뉴스 원고를 나도 한번 읽어 볼 수 있다는 기쁨, 또한 녹음 테이프를 허 아나와 함께 다시 들어보면서 발음을 하나씩 고쳐 나가는 즐거움...어쨌든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는 4년제 대학을 나와야만 한다는 사실은 얼마가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3. 진주 농대의 방송 시설은...
대학을 들어가서 방송 시설이 되어 있는지 살펴보니 전무한 상태 였다. 고작 있다는 것은 대학 본부 2 층 옥상에 유니트 스피커 하나만 달려 있고 행사용 앰프와 스피커 그리고 마이크를 보관하기 위한 좁은 창고가 1 층 전화교환실 옆에 있는 정도가 전부였다. (서무과의 용원으로 있던 나이 사 오십된 양 주사가 열쇠를 가지고 관리하면서 행사 때만 앰프를 설치하였음) 허정기 씨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기존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대학을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나타내면서, 이왕 이렇게 된 것 네가 직접 만들면 될 것 아니냐기에 마음을 굳히고 학생과를 찾아가게 되었다.(학생과장 김삼식교수를 통해서 성환순 학장을 만나 허락을 받음) 그리고 방송실 열쇠를 받아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때가 1971년 3월 하순이었으며, 방송 시스템을 점검한 후 정규 방송 형태를 갖추어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71년 4월 1일 부터이다.( 방송 기자재 보관 창고는 대학을 지으면서 이미 만들어졌지만, 제대로 된 방송을 내 보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4. 초창기 방송은 ...
먼저 국훈을 " 맑고 밝은 방송"으로 정하고, 매일 같은 시각에 시작하고 하루도 거르지 말자는 각오로 마이크를 잡았다. 시그널 뮤직은 경쾌한 곡으로서 "바다의 교향시"를 선택했으며, 음악 방송을 주로 하면서 캠퍼스 뉴스도 자주 취급했다. 방송을 들어본 학생들의 호응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었으며, 대학 내 여러 서클들의 임시 모임은 반드시 진주농대 방송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대학 명칭이 진주 농과대학이었으므로 초창기 방송 명은 진주농대 방송으로 하고 콜 사인은 JACBS 로 정했음) 나 혼자서 방송 원고를 작성하고, 직접 음악을 선곡하며, 앰프를 켜놓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마이크에 대고 방송을 했다. 흔치 않은 뉴스거리를 찾아서 다니고, 뉴스 원고를 직접 작성하며, 그 원고를 아나운싱까지 하면서 뛰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던 것이다. 요사이 흔한 말로 만능 엔터테이너 역할을 했었다. 이 당시, 나도 방송을 해 보겠다며 찾아오는 학생이 간간이 있었으나 이들에겐 정중한 거절을 했었다. 다음에 공개 모집을 통해서만 선발하겠다며...
5. 방송 요원 모집은...
내가 대학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도 아님으로 내뒤를 이을 후배 방송 요원을 뽑아야 겠다는 생각에서, 학생과 실무 담당 서영배 주사와 상의하여 제 2기 방송 요원을 공개 모집하게 된 것이 72년 봄이었다.(현재 경상대학교 서영배 총장님이 당시엔 학생과 행정 주사였음) 남. 여 2 명을 선발하는데 십여명이 응시했으며 그 중 김인술씨( 수학교육 2)와 정은주씨( 가정교육 1)가 뽑혔다. 지난 1년간 혼자서 뛰던 대학 방송에 변화가 온 것이다. 남녀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칠암 캠퍼스를 수놓았으며, 맑은 음질에 밝은 방송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어서 73년 봄에는 제 3기 방송 요원으로 김태억씨( 농학 1)가 선발되었으며, 이런 식으로 매년 3월 신학기만 되면 새로운 가족이 생기게 된 것이다.
6. 경상 방송으로 부른 것은...
우리의 모교는 본래 진주 농과대학이었다. 그러나 1970년에 교육학부가 신설되면서 명칭에 혼란이 오게 되었으며,(진주 농대 교육학부 ○○교육과 라는 명칭이 말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2년반 가까이를 보내다가 경남 대학이라는 명칭을 마산의 사립대쪽에 빼앗기자, 궁여지책으로 생각 해낸 이름이 경상 대학이었다.(이때가 72년 7월 11일이며 농학부와 교육학부가 양립해 있었다.) 이런 와중에 대학 방송 이름도 진주농대 방송에서 경상 방송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콜 사인은 GBS( Gyeongsang college Broadcasting Station)로 정했던 것이다.
7. 방송 예산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의욕만 가지고 뛰다 보니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새로운 음반도 사야겠고 최신 기자재도 필요하며( 릴 테이프의 녹음기와 고급 턴테이블 그리고 믹싱용 콘솔 등) 방송 요원들의 제작과 취재를 위한 활동비도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당시 학생회장인 박창명씨(현재 육군 대령)와 협의하여 대의원회에 방송부 예산서를 상정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과 시켜 매학기 등록금에 방송비를 포함하여 징수토록 하였다.(나 자신이 과학교육과 과대표를 맡아 대의원회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예산안 통과가 한결 용이하였음) 실제 등록금에 포함하여 징수 한 것은 내가 졸업한 이후인 74년 3월 학기 부터였다.
8. 생각 나는 방송 활동과 행사들은...
1. 71년 학생회장 선거 개표 실황을 대학 본부 2층 회의실에서 생중계 한 일.( 당시 오태룡후보와 이동근후보가 박빙의 경합을 이루었으며, 대학 본부앞 잔디밭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개표 방송에 귀 기울이며 득표수가 역전 될 때마다 환호성을 터뜨리곤 했음.)
2. 칠암인의 상징인 개척의 탑 제막식 때 직접 진행 사회를 보았던 기억.( 이 탑의 상석을 찾아서 서영배 주사와 학생회 간부들이 서부 경남 일대를 누비고 다닌 일이 생각 남.)
3. 칠암제 행사의 일환으로 진주 MBC의 공개 방송을 유치하여 대학 강당에서 수많은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행사를 치른 일.(이날 진행을 본 방성진 아나가 학장을 소개하면서 학장 선생님이라 불러서 학생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
4. 지리산에 있는 본 대학 임학과 실습림 도벌 사건을 방송 뉴스로 내 보내자, 이 방송을 듣곤, 나를 곧 바로 학장실로 호출하여 불 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다며 퇴학하라던 학장의 얼굴. (그날 이후 뉴스 원고는 학생과의 철저한 사전 검열을 받게 됨.)
5. 명사 초빙 강연회의 사회를 수차례 보았으며 그 중에서도 시인 김남조씨 초청 강연회의 진행 사회를 본 것이 기억에 남음.( 전날 저녁 숙박하는 여관을 찾아가서, 내일 강연에 대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일.)
6. 각종 서클의 가을 체육 대회때 중계 방송을 의뢰 받고는 김인술씨와 함께 목이 쉬도록 슛-을 외쳐대던 기억들.(체육 대회의 진행 방송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여러 서클(동아리)들이 중계 요청을 해 왔으며 축구, 배구, 농구등 여러 종목에서 기성 아나운서 빰치는 중계를 해 내어 많은 학생들의 인정을 받았음.)
7. 카톨릭 음악회와 협조로 나병 환자 수용소인 성심원(산청군 소재)을 찾아 위문 공연하면서 진행을 본 일과, 진주 칠암 성당에서 연말 불우이웃 돕기 성금모금 음악 감상회를 개최하여 진행 DJ를 보았던 일.( 나병 환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그들의 마음을 감싸주었던 기억. )
8. 인삼통 크기의 카세트 녹음기 하나만 들고, 여름 봉사 활동을 나가 있는 각 서클의 봉사 현장을 찾아다니며 녹음 취재했던 일.( 지리산 중산리 계곡, 합천군 가회면 오지, 산청군 생비량면 시골길 등 여러곳을 돌아 다녔다.)
9. 대학 축제인 칠암제 행사의 일환으로 행운권 추첨이 있었는데, 대학 강당에서 수많은 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 속에 김인술씨와 같이 진행했던 기억.(그해 최고가의 행운 상품은 농학과의 김현경양이 차지했으며 너무 감격해서 울기까지 하던 기억이 난다. 김 양은 내가 창립한 동아리 로타랙트 클럽의 후배이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