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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레이온의 이황화탄소중독증
양 길 승
1. 들어가는 말
2. 이황화탄소중독과 직업병 수출
3.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의 역사
1) 제1기:이황화탄소중독의 확인에서 1차합의까지:원진레이온 직업병 제1차투쟁
2) 제2기:직업병 검진과 김봉환씨의 죽음: 원진레이온 직업병 제2차투쟁
3) 제3기:폐업에서 현재까지
4. 원진레이온의 결과와 교훈
1. 들어가는 말
정부가 발표하는 직업병 통계를 보면 진폐증과 소음성 난청이 전체의 98%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에게 대표적인 직업병을 말하라고하면 원진레이온의 이황화탄소중독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88년 올림픽의 열기가 뜨겁던 바로 그때에 직업병환자 집단 발생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이래 거의 해마다 끊이지않고 직업병환자가 쏟아져나오고 있으니 이황화탄소중독이 대표적인 직업병으로 보일만도 하다. 또 우리사회에 직업병의 심각성을 널리 알려주어 직업병에 대한 인식을 높인 공로는 원진레이온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렇게 유명해진(?) 직업병인만큼 이황화탄소중독의 역사는 몇차레의 우여곡절을 겪어왔고 노동자와 회사, 노동부와 전문인이 함께 얽혀 벌려온 그 과정이야말로 우리나라 직업병추방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원진레이온의 사례는 산재추방운동의 기념비로 남아버린 것이 아니다. 비록 원진레이온공장이 문을 닫았지만 원진레이온의 문제는 아직도 끝나지않았다. 올해에도 5월초에 또다시 97명이 새롭게 직업병환자로 확정이 되었다. 환자가 계속 나온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직업병으로 진단만 되었을 뿐 그다음의 대응이 없다는 것이 새로운 문제이다. 이미 6백명이 넘어버린 환자들은 증상에 따른 치료만 제공받을 뿐 악화를 막거나 적절한 치료를 찾기 위한 연구나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이처럼 문제를 확인하고서도 그냥 덮어버려 희생자들만 버려지는 것은 원진레이온의 일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직업병사례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최근에 보도된 20대의 미혼여성 노동자가 폐경기증상과 골다공증으로 치료를 받게되어버렸다는 LG전자의 유기용제중독 집단발생도 더이상의 연구나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세계초유의 피해자들이 앞으로 받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양상의 장애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럼으로 원진레이온의 직업병문제를 다시 돌아보고 원진레이온의 사레가 남긴 문제들을 정리하고 검토하여 앞으로 직업병문제 해결의 올바른 방향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2. 이황화탄소중독과 직업병 수출
이황화탄소(CS2)는 이전에는 고무공장에서 딱딱하게하는 작업에 사용되어 중독환자를 많이내었지만 지금은 비스코스레이온 합성에 제일 많이 쓰이고 그밖에도 셀로판공장이나 농약공장에서도 사용된다.이황화탄소는 색도 냄새도 없는 액체인데 기름을 녹이는 성질이 있어 유기용제의 하나로 사용되는데 상온에서 공기속으로 잘 날라가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황화탄소의 독성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아주 높은 농도에서는 의식이 없어지면서 생명을 잃으며, 1000ppm정도에 폭로되면 성질을 참지 못하거나 환상을 보는 등 정신이상의 증상을 보인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급성중독이 아니라 만성중독이다. 이황화탄소에 의해서 만성적으로 발생하는 건강장애를 나열해보면 신경계통에 있어서는 뇌가 위축되거나 뇌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뇌경색증과 팔다리가 무겁고 아프고 저리고 심해지면 마비가 되는 다발성 신경염이 있고, 혈액순환에 관련되어서는 심장에 피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생기는 협심증과 관상동맥질환이 생기고, 눈속의 작은 혈관이 부풀어오르거나 망막에 변성이 오기도 하며, 콩팥이 망가져 신부전증이 오고 간기능의 장애가 생기며 성기능의 장애와 무정자증이나 기형정자가 생기는 등 여러가지가 있다.
원진레이온처럼 비스코스레이온을 만드는 공장에서 처음으로 중독증이 보고된 것은 미국으로 190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미 정신병적 장애와 신경증상이 심각하게 보고되었다. 이렇게 직업병문제가 알려진 이후인 1913년부터 미국에서 일본으로 레이온사업이 이전되어 일본에서 처음으로 중독사례가 보고된 것이 1927년이었다. 그후 일본에서는 공장환경과 근무조건이 변화하면서 두통, 권태감, 기억력저하, 불면증 등 심신장애 증상과 고혈압, 신경염, 콩팥기능장애 등을 호소하는 만성중독보고가 많았다가 60년대에 뇌혈관장애에 따른 정신장애나 마비환자들이 다시 보고되었다. 바로 그시기인 1964년 한일경제원조의 일환으로 도레이레이온의 방사기계가 도입되어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후에 세진레이온을 거처 76년 원진레이온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를 통해 이황화탄소중독이 드디어 수입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600명이 넘는 직업병환자를 양산해낸 그 기계는 원진이 폐업한 이후 노동자와 관계 전문인들이 시위 등 강력히 반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우리나라마저 미국, 일본에 이어 직업병을 수출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은 두고두고 우리국민 모두의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3.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의 역사
1) 제1기: 이황화탄소직업병의 확인에서 1차합의까지
원진레이온이 언론에 맨처음 보도된 것은 1977년 공장에서 나오는 가스에 의해 전철의 안전 이 위협받는다는 것이라고 하고 공장인근주민이 유독가스에 의해 피해를 입고있다는 보도가 81년에 있었다고 한다. 최초로 직업병환자가 보고된 것은 1981년이다. 레이온실을 기계에 거는 작업을 하던 홍00씨가 작업도중 가스에 중독되어 입원치료를 받았는데 증상이 전신마비, 언어장해와 팔다리마비 등으로 이황화탄소중독이었는데 착오에 의해 아황산가스중독으로 보도되었었다. 이러한 사례를 보고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을 산업보건전문가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음으로서 비록 당시의 엄혹했던 사회분위기가 한 원인이 되었다고해도 지금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초래되도록 방치한 책임은 전혀 모면할 수 없다. 그것은 이황화탄소중독을 급성중독 상태에서 막아내 만성중독으로 심화되기 전에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며 전문가가 전문가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뼈아픈 기록으로 남아있다.
원진레이온은 1981년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과 그 시행령에 의해 정기적인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을 해마다 2차례씩 해왔다.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위해서 실시하는 이 제도는 처음에는 경희대부속병원이 그후에는 고려대부속병원과 부속 연구기관에서 규칙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어느해에도 노동자의 건강이 위협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직업병의 고통에서 더이상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이 이번에도 스스로를 구하기위해 나섰다. 14-5년을 일하면서 두통과 성격변화, 기억력 감퇴, 팔다리의 감각이상에서 통증과 마비까지 많은 증상으로 시달리면서도 병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진단조차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1987년 진정서를 보내어 정밀검사를 호소하였고 어렵게 얻은 기회에서 뇌에 여러곳의 작은 혈관이 막혀 뇌경색이 생긴 것이 확인되어 이황화탄소중독으로 진단을 받았다. 중풍이니 뇌매독이니하는 인신공격적인 말들을 들었던 분들이 혹씨나 직업과 관련된 병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드디어 풀게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뒤에 벌어진 일들은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그 네분중에는 그때까지 치료비를 부담하느라 가계를 탕진하거나 가정마저 파괴되어버린 분도 계셨다. 그러나 회사가 이분들에게 강요한 것은 불과 6백만원씩에 민사형사상의 이의를 제기하지않겠다는 것을 조건으로한 합의뿐이었다. 이때 당연히 헀어야할 조치는 또다른 피해자가 있지않나 임시건강검진을 실시하고 기존의 검진에서 왜 이러한 사람들이 보고되지 않았는지, 또 작업환경이 얼마나 열악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밝혀 또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작업과 피해자에게 적절한 치료와 보상을 하여주는 것이다.그러나 오로지 부당한 합의만을 강요하고 이사람들이 잊혀지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우리사회의 양심이 완전히 메마르지는 않았었다. 수은중독으로 15살 소년이 죽어 산업재해노동자장으로 치룬 날이 1988년 7월 17일이었다. 그날로 부터 닷새밖에 되지않은 7월 22일, 한계레신문에 이들의 비참한 처지가 보도되자 곧바로 1주일만에 비슷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피해노동자와 가족의 협의회가 만들어졌고 비슷한 증상의 환자 네사람이 성수의원에 입원하여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싸워나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와 노동과 건강연구회 등 여러단체에서 김록호, 김은혜, 박석운 등 헌신적인 일꾼들이 모여들어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직업병과의 싸움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진상조사와 항의방문, 보고대회와 성명서 발표, 기자회견 등이 8월 내내 진행되고 원진직업병대책위원회(위원장 전태일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여사)가 발족하여 회사와 노동부, 국회를 몇차례를 왕복하며 항의집회와 진정과 호소를 거듭하였고 시민들의 호응이 갈수록 커져가는 과정에서 9월 14일 박영숙 당시 평민당 부총재의 중재로 피해노동자와 회사와의 합의가 이루어졌다.이때의 합의는 지금까지 직업병의 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회사와 피해노동자자 각각 세사람의 의사를 추천하여 이들의 판단을 받아들여 직업병과 장애등급을 판정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실시하며 보상금액도 최고 1급 1억원에서 최저 14급 1천만원으로하는 당시로서는 형식이나 내용에서 획기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의 한고비를 넘어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
2) 제2기:직업병 검진과 김봉환씨의 죽음:원진레이온 직업병 제2차투쟁
1988년 9월 14일, 88올림픽의 성화가 지나갈 길을 점거하고 농성한다는 피해노동자들의 각오와 꾸준하고도 줄기찬 투쟁이 결실을 맺어 원진레이온회사와 피해노동자사이의 합의가 맺어졌다. 이 합의서에는 직업병여부를 판정하는 위원회를 둔 것과 노동부로 받는 산재장애보상과 별도의 장애보상을 1급일 경우 1억원을 준다는 내용이외에도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피해노동자들이 구성한 단체의 대표가 회사의 대표와 합의서를 교환했다는 것과 그 피해자단체에 접수된 피해노동자들과 퇴직자중에서 직업병의 증상이 있는 사람을 신고를 받아 전원 직업병검진을 하도록 한 것이다.
직업병의 증상이 있으려면 유해위험한 환경에서 상당한 기간동안 일해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직자 전원에게 직업병의 증상이 있으면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열어놓은 것은 어찌보면 부당하게 직업병검진 대상을 확대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일부 산업보건의 전문가들은 원진레이온문제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진행되면서 억지스럽거나 비과학적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산업현장의 현실을 외면하고 과학을 형식적으로만 차용하는 비과학적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LG전자부품의 유기용제중독사태가 좋은 예이다. 솔벤트 5200에 의한 무월경증과 골다공증 환자를 양산시킨 2-브로모프로펜이라는 물질은 외국에서는 아예 독성이 없는 물질로 보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서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국소배기장치도 없이 밀폐되다시피한 공간에서 작업을 하였고 따라서 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높은 농도에 노동자가 폭로되어 세계최초의 직업병환자를 보고하게된 것이다.
원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황화탄소가 인체에 해로울 정도로 폭로되는 환경에서 노동자들이 작업하고 있었는가 아닌가는 작업환경측정결과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진행되어온 작업환경측정은 항상 허용기준미만에 머물렀고 따라서 노동자는 전혀 건강에 장애를 받을 수 없다는 과학적인(?)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공장 주변에서조차 환경피해가 70년대부터 계속되어왔고 실제로 담밖에서 측정한 결과가 작업장 안에서 허용되는 수준을 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하니 원진레이온에서 상당기간 일해온 모든 사람들이 직업병의 위험아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0년대에 일했던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작업환경이 극도로 열악하여 우리나라에서 이황화탄소중독의 양상이 중추신경기능의 장애로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언어장애까지 생긴 심각한 상태가 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이황화탄소를 다루는 방사과나 후처리과에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방사과에서 기계를 정비하는 영선부서나 같은 공간안에 있는 작업부서 근무자는 물론 타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에서도 직업병환자가 나오게 된다. 이렇게 직접 이황화탄소를 다루지않는 사람들에서도 직업병의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직업병검진이 진행되면서 계속 문제로 제기되어 갔다.
88년부터 직업병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접수하여 시작된 검진은 회사측과 피해노동자가 각각 3명씩 추천한 판정위원회를 통해 1989년 35명, 90년에는 34명이 직업병으로 진단을 받아 치료와 함께 보상금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퇴직자들이 직업병검진을 신청하고나섰다. 그러나 검진기관이 고대병원 한곳으로 지정되어 88년 9월에 합의한 사람들이 90년 6월에야 결과가 통보될 정도로 늦어지면서 검진을 기다리던 노동자가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검진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되었다. 검진을 받기위해 필요한 요양을 신청한 사람들도 근무부서에 따라 비유해부서에 근무하였다는 이유로 회사가 신청서 발급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항의와 시비가 계속되었다.
원액과에 근무하던 김봉환씨는 이처럼 회사로부터 요양신청서를 받지 못하였지만 의사로부터 이황화탄소중독의증이라는 소견서를 받아 노동부에 진료를 받게해달라고 사정을 호소해 왔다. 그러다가 노동부로부터 직권으로 요양신청서를 내주겠다는 말을 듣고 서류를 준비하던 바로 그날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검진을 받지않은 채 돌아가신 분들이 자료부족이라는 이유로 직업병판정위원회에서 한명도 인정을 받지 못해 왔었다. 따라서 사망에 이르게 된 원인과 직업병 여부를 가리기위한 부검이 최초로 실시되었으나 부검을 실시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직업병 여부에 대한 판단을 내릴만한 지식과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사인이 뇌출혈이라는 일반적인 사항의 보고만을 제출하였고 서울대병원에서 실시한 조직검사의 소견을 놓고 직업병진단을 내리기 충분한가 아닌가하는 논쟁이 회사측 추천의사와 피해자측 추천의사 사이에 장시간 벌어졌다. 논쟁의 핵심은 김봉환씨의 경우 이황화탄소에 의해 생기는 혈관벽의 변화 등이 있지만 이황화탄소 이외의 원인으로도 올 수 있기 때문에 꼭 이황화탄소 때문에 온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과 다른 이유에서 왔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없으므로 이황화탄소중독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직업병판정위원회는 만장일치에 의해 판정을 내리게되어있는 합의조건에 의해 직업병진단은 내려지지 못하고 유족을 포함한 피해노동자단체와 일반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대책위원회’는 김봉환씨의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매일 두 번 이상의 항의집회를 회사정문에서 여는 등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그동안에도 직업병진단을 받는 사람은 계속 나오고 언론이 이를 보도함으로서 일반시민들마저 직업병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내는가를 알게되면서 여러사회단체가 ‘대책위’활동에 함께하면서 이제 직업병은 일부 특수한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전체가 같이 걱정하는 문제가 되었다. 계속되는 집회와 항의방문 끝에 국회는 실태조사소위원회를 파견하였고 소위원회는 김봉환씨가 “직업병에 이환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한 것으로 판단됨”이라는 보고서를 공표하였다. 보고서를 기반으로 회사와 피해자, 노동부 등이 장애등급 7등급에 해당하는 보상을 하기로 합의하여 실질적으로 직업병인정을 받아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 91년 1월 5일 돌아가신 날로부터 무려 137일이 되는 5월 21일의 일이다.
제2차 투쟁은 여러 가지 성과와 발전을 남겼다. 형식적인 작업환경평가에 의해 실제로 유해위험작업환경에서 일하면서도 특수건강검진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 드러남으로서 부당하게 억울한 처분을 받아온 직업병피해자들을 합리적으로 구제할 방법을 만들어 내었다. 또 검진방법이 이황화탄소중독의 피해를 제대로 밝혀내고 있는가를 조사하고 보다 과학적인 진단방법을 찾아내고 중독의 피해를 평가하는 방법을 정립하기위한 역학조사를 실시하도록 하여 그이후 이황화탄소중독의 진단기준을 재정립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또 직업병이라는 명백한 증명을 요구하던 기존의 제도에서 작업환경측정이나 특수건강검진 등 직업병을 증명할 기본자료들이 대부분 엉터리였다는 것과 직업병 진단의 어려움이 많은 현실을 감안하여 직업병일 가능성이 많을 때에는 직업병을 인정하도록하는 ‘개연성의 인정’이라는 발전을 만들었다. 실제로 업무상 질병인정기준에서는 “명백한 인과관계”에서 “상당한 인과관계”로 기준을 바꾸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직업병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사회의 인식이 생긴 것이 중요하며 그러한 인식을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일반시민들과 당사자인 노동자들이 나서서 하게된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산업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재난으로 체념하거나 나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해결할 수 있고 또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직업병추방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진레이온의 직업병문제는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새로운 시련속에서 잘못된 결과로 나아가고 만다.
3) 제3기 : 폐업에서 현재까지
김봉환씨의 죽음으로 시작된 제2차 원진 투쟁이 137일만에 타결을 보아 그 성과의 하나로 이황화탄소 중독에 관한 역학조사가 처음 이루어졌다. 원진레이온의 전직, 현직 노동자를 대상으로하고 이황화탄소에 폭로된 경험이 없는 대조군을 포함하여 총 1,552명을 대상으로한 이 역학조사는 당시 서울대보건대학원의 원장이셨던 김정순교수가 맡아 역학, 예방의학, 가정의학과, 안과와 신경과 등 여러 전문과목의 전문의를 동원하여 91년 8월에 시작되어 그 보고서가 이듬해 5월에 나왔다. 그 결과 원진레이온에서 일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중독과 관련한 건강장애의 양상이 상당수 밝혀졌고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이황화탄소중독 진단의 기준이 바뀌게 되었다.
단일 사업장으로 그렇게 많은 중독환자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에 원진은 곧 직업병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원진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하는 것은 앞으로 직업병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것인가를 가름할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역학조사 이후에도 계속 중독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끊이지않고 또 시간이 갈수록 중독환자의 수가 늘어가면서 원진레이온은 비극적인 결말을 강요당하고 만다. 유해사업장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자 기업이(더 정확하게는 79년 이래 법정관리를 맡고있던 산업은행측이) 경영의욕을 잃고, 보다 안전한 생산조건과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원진레이온을 폐업하므로서 원진의 오명을 회피하고 그 땅을 팔아서 이익을 보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에 해당 노동자는 물론 양식있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였지만 당정협의회를 통과하고 정부의 의결을 거쳐 폐업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폐업은 결코 직업병문제를 바르게 풀어가는 방법이 아니다. 원진레이온 공장은 노동자가 직업병에 대한 두려움없이 일하는 현장으로 개선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실제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개선된 방식으로 비스코스레이온을 생산해 수출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하기 이를데 없는 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이 생계 등으로 고통을 받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밖에도 원진레이온회사측에서 직업병이 문제가 되면 직장이 없어질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해온 협박이 실제상황이 되어버림으로 앞으로도 직업병문제가 시끄러워지면 좋지 않다는 잘못된 선례를 남기게 되어버렸다.
1993년 7월, 많은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외면한채 원진은 36년의 역사를 직업병환자 생산공장이라는 오명으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모두가 두고두고 부끄러움으로 기억해야할 공장설비수출이라는 만행도 저질러졌다. 그러나 아직도 원진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환자와 이황화탄소에 폭로되어 직업병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원진 폐업을 앞두고 산업은행과 노동부는 앞으로 보고될 수 있는 직업병환자와 이왕에 직업병으로 진단을 받은 노동자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었고 그 기금으로 총 150억원을 현금 50억원, 파산채권으로 50억원, 그리고 잉여금 발생시 50억원을 산업은행이 내도록하고 환자진료를 위한 진료기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약속하였다. 산업은행측이 그 땅을 팔아 얼마나 남을지 알 수 없다는 것과 앞으로 보고될 환자의 수를 낮게 계상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측에서 요구한 500억의 30%정도로 결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폐업하던 93년에 111명이 추가로 직업병으로 진단을 받았고 94년 44명, 95년 178명(폐업때 실시한 퇴직자 전원을 대상으로한 정밀검사의 결과가 이때 나왔다)이 보고되어 총 541명으로 환자가 늘어났다. 또 96년에도 새로 진단을 받은 사람이 무려 97명이나 되어 이제 이들에 대한 민사배상금을 대신한 위로금이 지급되면 앞으로 원진재단으로 들어올 총금액에서 23억원이 남게 된다. 96년 7월 지금 이시간에도 새로 이황화탄소에 폭로된 경력이 10년이 넘는 사람들이 중독증상을 호소하며 검진을 바라고 있어 이제 내년이면 위로금을 지급할 재원이 없어질 지경이다.
또 지금까지 직업병으로 진단을 받은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일반환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치료를 받고 있을 뿐 이황화탄소중독에 알맞는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역학조사 이후 그 경과를 확인하고 최선의 진료요양방법을 찾기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또 이 환자들을 집단적으로 치료를 맡아 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만들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지난 7월 23일에는 원진직업병피해자협회와 원진비상대책위원회가 피해자와 가족 등 400여명과 함께 산업은행을 방문하고 국회 대회의실에서 공청회를 갖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원진이 문닫은지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단체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직업병에 관한 상담을 하고있고, 또 치료를 받고있는 직업병 환자들도 해마다 목숨을 잃어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직업병진단 당시와는 다른 증상으로 고통을 계속 받으면서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등 여러 가지 고민을 호소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산업은행이 원진 부지를 팔았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서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을 돌보거나 배려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않았다는 위기의식이 커진 것이다. 자신들의 건강을 희생시켜가며 세워진 원진레이온이 다행히 1,600억원이상의 이익을 산업은행에 남기게 되었다면 너무도 당연히 그 대부분을 이 희생자들의 복지와 치료에 써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서 원진레이온이 폐업함으로서 방기해버린 책임을 다시 다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참으로 정당하다. 그것은 최소한의 사회정의의 회복이자 양심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외롭고 힘든 새 투쟁이 올바른 결실을 맺도록 사회의 따뜻한 관심과 참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4. 원진레이온의 결과와 교훈
우리사회에서 한시기를 확실하게 구분시키는 사회적 사건들은 많지 않다. 1987년, 6월 민주화대투쟁에 뒤이은 7, 8, 9 노동자대투쟁은 1980년대말에서 90년대에 까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바로 그 대투쟁의 그늘에는 산업재해에 쓰러진 노동자와 직업병으로 괴로워하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흥건히 고여있었다. 그 괴로움의 늪은 노동자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나락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여 빈민가의 상당수가 산재와 직업병의 희생자로 채워져 있었다. 그 어두운 시기를 꿰뚫어 산재추방운동의 깃발을 세운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의 역사는 민주화투쟁의 중요한 한부분이었고 바로 민주화투쟁이 사람을 살리는 운동임을 잘 보여주었다. 문송면군의 죽음에 뒤이은 원진레이온투쟁은 우리사회에 직업병에 대한 경각심을 확실히 심어주었고 노동자들의 산재․직업병추방투쟁의 불을 붙였다.
이제 산재․직업병추방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연구와 조사작업을 진행하고 과학적인 받침위에서서 노동자를 위한 산업보건제도와 정책을 요구하고 현장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위험작업중지권을 얻어낸 노동조합이 늘고있고 특수건강검진과 작업환경측정을 노동조합이 한 주체가 되어 기관을 지정하는 곳이 많다. 이러한 변화는 실질적으로 산업현장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참여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는 원진레이온이 그 많은 어려움속에서 헌신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온 산재․직업병추방운동의 중요한 결과의 하나이다.
그밖에도 원진은 우리사회의 노동자의 희생이 어디까지 가버렸는가를 웅변으로 보여주어 이제 사회전체가 직업병과의 싸움에 나서야 한다는 공감을 만들어내었다. 직업병이라는 말이 전문가만이 쓰는 용어가 아니고 일반인들도 알아야만 하는 용어로 바꾸어 버린 것이 원진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관심과 인식이 없이는 노동자의 건강이 제대로 지켜질 수 없기 때문에 원진이 이부분에서 이룬 공적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원진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아직도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살인적인 직업병생산설비를 우리보다 규제나 관리를 잘하지 못할 것이 너무 분명한 중국으로 수출하도록 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또 원진을 이제 ‘귀찮은 짐’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리려만 하면서 우리가 같이 나누어야할 책임을 저버리는 것도 부끄러워해야할 잔인한 행동이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우리속에서 얻은 고통을 외면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사람다운 삶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회복하고 잘못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진레이온의 희생자들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함께 나서서 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