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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慶北) 안동(安東)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로 약 30Km 떨어진 학가산(鶴駕山) 북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중남부에서 가장 온전한 상태를 보전(保全)하고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정확한 지명은 안동시(安東市) 북후면(北後面) 석탑리(石塔里) 구억들 마을이고 이 피라미드 옆에는 석탑사(石塔寺)가 있어서 피라미드를 지켜주고 있다. 지명(地名)이 말해주듯 오래 전에서부터 이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너무 오래 흘러서인지 아니면 옆에있는 고목(古木)이 뿌리를 뻗으면서 피라미드 남쪽을 주저앉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원래에는 분명 정방형(正方形)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데, 맨 아랫단의 길이가 한 변은 13.2m, 다른 한 변은 12.7m로 약간 직사각형의 모양이다. 높이는 대략 4.5m이고 가장 윗부분이 근래에 덮어놓은 돌로 인해 한 단이 가려져 보이는 데, 이를 포함하면 총 6단이 된다.(1)
석탑에 쓰인 돌들은 강돌이 아닌 깬돌로서 주변의 바위에서 채석한듯 보이며, 이 근처에서 흔히 볼 수있는 자연석(自然石)을 그리 다듬지 않고 쌓아 올렸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에 전체적으로 약간 주저앉은 것 같다. 석탑의 위치는 앞에 석탑천(石塔川)이 가늘게 흐르는 조골산(照骨山)의 서쪽 기슭으로서 남쪽과 서쪽에는 학가산(鶴駕山, 870m)의 자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비록 산으로 둘러싸인 좁다란 계곡에 형성된 평지이지만 이 석탑 만큼은 남쪽에 여유있게 자리잡았으며, 석탑의 북서쪽 모서리에서 이십여미터 거리에 석탑사가 자리하고 있다. 북서쪽 하천가에 위치한 석탑사의 배치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서울 석촌동의 피라미드는 큰 피라미드의 모서리에 작은 피라미드를 배치하고 있으며, 또한 의성 피라미드도 피라미드의 현위치에서 북서쪽 근거리에 절자리가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전형(典型)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매우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북서쪽 모서리에 배치되어 있는 '석탑사'는 석탑을 보좌(保佐)하는 역활을 하지 않았나 생각되며, 석탑과 석탑사의 위치는 거의 동시에 자리잡은 것이 분명할 것이다.
석탑의 좌향(坐向)은 각 변(邊)이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어서 장군총(將軍塚)하고는 좌향이 다르다. 계곡의 입구는 북쪽이며 남쪽에 학가산이 있다.
이 학가산은 과거에는 하가산(下柯山)으로 불리웠으며,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로서 상봉(上峰)에 올라서 주변을 보게되면 소백산을 포함하여 안동지역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현재는 중계소(中繼所)가 자리잡아 과거의 흔적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정상 부근에 축성(築城)의 흔적이 있고 또한 옹달샘도 있다.
주민들이 전하는 전설(傳說)은 여러가지인데, 첫번째는 아주 먼 옛날, 이곳에서 2백리(약 40Km) 떨어진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3천 승려가 그들이 먹을 공양(供養)밥을 신통수(神通手)를 부리는 학가산의 능인(能仁)대사가 훔쳐간다는 말에 격분, 그를 죽이자고 돌을 들고 여기까지 떼지어 왔으나, 이 낌새를 예지하고 이곳에 미리와 대기하고 있던 능인대사가 대성일갈, 그들의 행동을 꾸짖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승들은 살상을 목적으로 갖고온 돌을 공손히 한 자리에 모아 탑을 쌓아 지금의 돌탑(石塔)과 절(殿閣)이 세워졌다 하며,(2) 두번째는 옛날 명인도사(明認道士)와 마고선녀(麻姑仙女)가 바위집에 살면서 돌신(石鞋)을 신고, 돌말(石馬)을 타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신통력이 있어 소백산을 왕래하면서 밥을 날라다 먹었다고 한다.(3)
이밖에도 전설이 더있지만 대부분 위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고려(高麗) 후기의 고승(高僧) 일연(一然, 1206~1289)이 말년에 군위(軍威)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編纂)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편(義解篇)에 보면, 아성(亞聖)으로 불리는 의상대사(義湘大師)의 10대 제자 중 "오진(悟眞)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서 부석사 석등에 불을 켰다. "라는 기사(記事)가 있다. (4) 여기서의 골암사는 현재 석탑사의 동쪽 산을 조골산(照骨山)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석탑사의 원래 명칭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의 오진(悟眞)이 전설에서는 학가산 남쪽의 봉정사(鳳停寺) 창건자이자, 의상의 10대 제자로서 같은 스승을 모신 능인(能仁)으로, 그리고 친밀하여야 할 관계가 전설에서는 적대적(敵對的)인 관계로 바꾸어져 있으며, 기록에서는 부석사에다 불을 피워주고 전설에서는 부석사에서 밥을 훔치거나 얻어먹는 것으로서, 학가산에 기거(寄居)하였던 기인(奇人)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와는 분명히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화엄사상(華嚴思想)의 발원지(發源地)인 부석사(浮石寺)의 창건(創建) 설화(說話)를 보면 이렇다. 당(唐)나라 장안(長安)에서 10년간 유학(留學)하고 등주해안(登州海岸)에 살던 선묘(善妙)와 함께 고국(故國)으로 돌아온 의상(義湘)은 5년 동안 산천을 두루 편력(遍歷)하였다. 그러던 중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되었는데,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神靈)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으로 법륜(法輪)을 굴릴 만한 곳이다. 이교도(異敎徒)의 무리들이 5백 명이나 모여 있을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하였다. 이 때 함께하고 있던 선묘(善妙)는 허공(虛空)에서 변신(變身)을 하여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 일리(一里)가 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伽藍)의 지붕 위에서 떨어질까 말까 하는 모양을 하였다.
그 곳의 군승(軍僧)들은 소승(小乘)에 집착한 무리들이었는데, 그 돌을 보고 사방(四方)으로 흩어져버렸다. 그 후 선묘(善妙)는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變身)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5)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언급하듯이 부석사라는 명칭은 이 '뜬돌'에서 비롯하였고, 의상대사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 부르고, 화엄종(華嚴宗)을 부석종(浮石宗)이라 부른 연유(緣由)가 모두 마찬가지이다. 또한 고려(高麗) 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하였는데, 선달사의 '선달'은 '션돌'의 음역(音譯)이라고 한다.(6)
무량수전의 뒷편 북서쪽 모서리의 경사진 절벽 아래에 위치한 이 부석(浮石)은 길이 약 10여m의 화강암(花崗巖) 반석(盤石)으로 그 아래에는 깨어진 바위들이 이곳저곳 놓여있고 가장자리에 커다란 바위들이 고여져 있으며, 바위 아래는 사람이 들어가서 기거(寄居)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결국 뒷편의 암반(巖盤)이 절리(節理)로 인하여 떨어져서 자연적으로 돌집과 같은 모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
북송(北宋)의 찬녕(贊寧)이 펴낸 송고승전(宋高僧傳, AD 988) 의상전(義湘傳)에 수록되어 있는 위의 설화(說話)는 이 대규모의 거석이 떨어져 내리면서 여기에 모여있던 군중들이 놀라 도망가게 된 사연을 과장하여 기록하였다고 추정되며, '대석단(大石壇)' 건축에 사용된 거석들이 매우 많은 데도 불구하고 여기의 '부석(浮石)' 주변은 그대로 나두었다는 점에서 '부석'은 곧 보존 가치가 있는 유적(遺跡)으로서 반대자(反對者)에 대한 승리를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 고구려 멸망이 서기 668년이고 부석사 창건이 서기 676년(新羅 文武王 16년 2월)인 점을 감안하면, 대략 6세기 말까지는 이곳 소백산(小白山, 1440m) 아래에서는 고구려나 백제의 입김이 닿지않는 곳으로서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土俗信仰)이 우세하였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의 거석으로 민중을 교화(敎化)시켰으며, 불교의 교리에만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현지의 신앙을 바탕으로 교세(敎勢)를 확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석등(石燈), 대석단(大石壇), 당간지주(幢竿支柱)와 함께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부석사 삼층석탑은 상당히 특이한 위치를 보여주어 연구의 대상이 되고있다. 즉 탑 하나를 세울 때는 법당(法堂) 정면에 그리고 쌍탑인 경우에는 불전(佛殿) 좌우에 배치하는 것이 통례(通例)인데, 여기서는 남향의 무량수전 앞모서리인 동쪽 옆이며 무량수전 보다 높은 언덕에서 남서향으로 단 하나만 세워져 있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배치가 여기서는 예외이며, 이에 대한 의문은 이미 신라 때부터 기록으로 남기고 있고, 고유섭(高裕燮)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7) 뿐만 아니라 무량수전 내의 본존불은 건물 내 서쪽 중앙에서 동쪽을 향하여 놓여져 있으며, 당간지주는 무량수전과 같은 방향으로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제각기 다른 방향이다. (8)
이런 점에서 창건 당시는 지금에 비하여 지형(地形)과 진입로(進入路)가 매우 달랐으며, 각각의 건축시기도 알려진 바와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송고승전'의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기존의 신앙을 능가하고 불력(佛力)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기존의 신앙지로서 적합하였던 지형과 배치를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삼층석탑 또한 여기 석탑리의 경우에서처럼 과거 피라미드형 돌무지나 그에 버금가는 기존(旣存)의 석물(石物) 또는 석조물(石造物)을 대치(代置)하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곳에서의 기존 세력은 봉황산(鳳凰山)을 떠나게 되었고 그중 일부가 석탑리에 들어와서 석탑을 쌓으면서 재기(再起)를 꾀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부석사와 상호(相互) 적대적(敵對的)인 관계를 말해주는 전설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511년 고구려군(高句麗軍)이 원산성과 가불성을 함락하였는데, 원산성은 지금의 예천군(醴泉郡) 용궁(龍宮)으로 비정(比定)되고 있으며, 소백산 넘어 영월(寧越) 근처에 위치하는 정양산성(正陽山城)과 태화산성(大華山城?)은 고구려산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천(醴泉), 안동(安東)을 포함하여 동해안의 영덕(盈德), 청하(淸河) 지역까지 한 때 고구려 영역이었다고 하며,(9) 안동군과 영풍군 지역을 1세기 후반부터 신라(婆娑王)가 영유하다 5세기 초에 고구려(廣開土大王)가 점령하여 40여 년간 영유한 지역이라고 한다.(10) 그리고 영풍군(榮豊郡) 순흥면(順興面) 태장2리(AD 535)와 읍내리(邑內里, AD 539)에서 발견된 고분 벽화는 비록 신라시대의 수도(首都)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신라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이 일대는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接境) 지역이었으며, 석탑리와 인접한 신전리(薪田里)의 경우, 남쪽으로는 학가산을 비롯하여 전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산속의 분지(盆地)나 다름없고, 북쪽으로는 낙동강 지류가 구비구비 흐르고 있어서, 외부와의 단절이 가능한 은둔지(隱遁地)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패망(敗亡)한 고구려 장수(將帥)나 유민(遺民)들이 이 곳에 살면서 영토회복을 꿈꾸며 집안의 장군총과 비슷한 모양으로 이 피라미드를 쌓지 않았나 생각하여 볼 수 있다.(11)
석탑리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그 축조상태가 분명하여 이미 경험이 축적된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건축된 구조물로서 약간의 기념비적인 성격도 배제(排除)할 수는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4대 탈해왕(脫解王) 편을 보면, 왜국의 동북쪽 천 리에 있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의 탈해왕이 계림(鷄林)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도착한 후,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서 돌무덤(石塚)을 만들었다.(12)"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돌무지가 단지 도착 기념으로 만들어졌으며, 후대에 만들어진 경계비(境界碑)나 순수비(巡狩碑) 등과 같은 성격으로서 산 정상이나 언덕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숨어있듯이 계곡 안에 자리잡은 이 구조물은 대중에게 과시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성격보다 은밀하게 감추려는 의도가 강하여 일단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성격은 제외하여도 무방(無妨)하며, 차라리 인력동원이 가능한 귀족 출신의 무덤이라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서울 석촌동은 과거 돌산이나 바위가 전혀 없는 들판이었는데, 이곳에는 동서남북을 네변으로 한 대형 피라미드형 적석총(積石塚)과 함께 원형 봉토분(封土墳)이 있다. 또한 층위적(層位的)으로 적석총 이전의 것으로 알려진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까지 동일구역에서 발견되는데, 아직 피라미드형 적석총에 대하여는 단지 백제(百濟) 초기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묘제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여기와 의성 지역까지 백제의 영역일 수 있느냐는 점에서 이러한 적석총의 조성시기(造成時期)와 그 주체(主體)는 의문으로 남는다. 고구려와 백제의 입김이 닿지않은 곳이었으며 기껏해야 40년간 고구려 말기에 통치를 받은 지역에서 고구려 말기의 묘제(墓制)인 원형 봉토분(封土墳)이 아닌 방단형(方壇形)의 돌무지 무덤을 축조(築造)하였다는 점은 이것이 부석사의 창건설화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이교도(異敎徒)의 유적으로서 고구려나 백제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퍼졌던 돌무지 무덤으로서의 가능성을 강하게 내포(內包)하고 있는 것이다.
(1995년, 1996년 9월, 1997년 12월 촬영, 1996년 9월 작성, 1997년 12월 보충)
(1)이 피라미드에 대한 연구를 책으로 펴낸 유우식(兪禹植)은 1층의 서쪽 길이를 12.8m, 남쪽 길이를 13.6m, 1층에서 5층까지 각각의 높이가 80Cm~1m이며, 탑꼭대기의 입석(立石)을 포함하여 전체높이 5.23m로 적고있다. 또한 '안동신문(安東新聞)'에서는 서측의 기단(基壇)을 포함하여 전체높이 6.5m로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막돌과 깬돌들을 쌓아놓은 것이라 각층의 정확한 높이를 산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필자는 꼭대기의 입석 높이를 제외시켰다. (유우식, '고구려·백제의 바위유적', 서광학술자료사, 1994. 80쪽)
(2)'안동신문(安東新聞)', 1992.4.20.
(3)위의 책, 169쪽
(4)이재호 옮김, '삼국유사(三國遺事) 2', 솔출판사, 1997. 262쪽
(5)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 발췌된 것임, 한국불교연구원, '부석사', 일지사, 1976. 60~61쪽 참조, 그러나 현지 안내판에는 "의상이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절을 지으려 할 때, 여기에 살고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善妙神龍)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고 쓰여있다.
(6)위의 책, 21쪽
(7)고려 문종 8년에 세워진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의 비문(碑文) 참고. 범종루(梵鐘樓) 앞에 세워진 석탑 2기는 근처의 속칭 약사골 동방사지(東方寺址)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위의 책, 60~61쪽
(8)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높이 4.8m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상당히 우아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하부에는 원석(原石)이 노출되고 조각된 부위의 높이가 서로 달라 당시의 지표면이 지금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의 석당간(石幢竿)의 건축 방법이 우선 거친 원석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 다듬는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현재 상태로 보면 선돌을 세워놓고 조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 앞에 옹기종기 모여져 있는 선돌과 돌들은 약 20여년전에 관상용(觀賞用)으로 조성된 것이다.
(9)박진욱, 조선고고학전서(고구려), 1991. 189쪽 참조
(10)유우식, '고구려·백제의 바위유적', 서광학술자료사, 1994. 58쪽
(11)유우식은 광개토대왕이 이곳 학가산에서 죽었으며, 여기에서 광개토대왕의 기념비 석재를 낙동강으로 반출하였고, 그 기념으로 이 탑을 조성하였다고 주장한다. 위의 책 참조
(12)이재호 옮김, '삼국유사(三國遺事) 1', 솔출판사, 1997. 120~127쪽 참조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정말.....상제님에 참진리가..너무나도 와닿네요..시간이 흘러갈수록..
위에 상제님? 뭔 말씀이요? 세계적으로 피라밋무덤이 있는나라는 이집트하고 고조선지역인데 한반도가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역사왜곡되서 그렇지 조선(단군조선)- 고구려(고려)때까지 우리무덤은 피라밋인데 이조때 중국식무덤으로 바뀌어 맥이 끊겼고, 이집트 기자피라밋은 한국사람들인 반달국사람들작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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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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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봅니다.스크랩해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