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본래 성은 스베드베리(Swedberg)이다. “불탄”(sved) "언덕”(berg)이라는 뜻인데, 대대로 내려오던 가문 농지의 이름이다. 아마 언덕을 태워 농지로 만든 사실이 성이 된 것 같다. 스베드베리 가문은 1718년 울리카 여왕에 의해 귀족으로 봉해졌으며, 그 때문에 성이 귀족의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스베덴보리(Swedenborg)는 귀족화한 성으로, “언덕”을 뜻하는 berg가 “성”을 뜻하는 borg로 대치되고, 거기에 정관사 en이 붙은 형태, 곧 Sved-en-borg인데, 사람의 이름에는 v를 쓰지 않고 같은 발음으로 w를 쓰기 때문에 Swedenborg로 표기된다. 발음을 살피면 w는 본래 v 발음이고, 끝자인 g는 반모음인 요드(yod)음으로 음가는 j이며, 쉐와를 취하여 '여' 또는 '예'에 근접된다. 따라서 Swedenborg는 본래 발음으로는 ‘스베드-엔-보르여’에 거의 가까울 것이다. 이의 현대적인 발음을 우리말로 적은 것이 ‘스베덴보리’이다.
에마누엘 스베드베리(Emanuel Swedberg)는 1688년 1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에마누엘의 아버지 예스페르 스베드베리(Jesper Swedberg)는 스웨덴 루터교 목사였다. 에마누엘이 태어났을 때 그는 연대의 군목이었고, 왕실 병영에서 거주하였다. 뒤에 그는 찰스 11세 국왕의 직속 군목이 되었고, 그 다음에 웁살라 아카데미의 학장과 신학교수가 되었다. 드디어 그는 스웨덴 중심인 스카라 교구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거기서 상당한 명성과 영향력을 누렸다. 그는 감독이었기 때문에 귀족에 오르게 되었는데, 귀족이 된 다음에도 성을 바꾸지 않고 예전 그대로 썼다. 오늘날 그는 많은 이들한테 찬송가의 작자로 기억되는데, 그가 지은 많은 찬송가들이 아직도 불려진다.
에마누엘은 웁살라에서 대학을 다녔고, 21세에 인문학 석사로 졸업했다. 그러나 그의 배움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1710년부터 5년 동안 영국, 홀란드, 프랑스 등지로 해외 유학을 다녔다. 영국에 있는 동안에 그는 시계제작공, 제책공, 인쇄공, 그리고 광학기구 제작공 같은 숙련공들과 함께 묵었고, 그래서 그는 그들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과도 많이 만났고, 그중에 왕립 천문학자인 플램스티드(Flamsteed)도 포함되는데, 에마누엘은 그린위치 천문대에서 그와 연구하며 천문학적 계산법들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바다에서 달을 관측하여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또 감압펌프, 기관총, 귀나팔, 글라이더형 날틀, 공기압축 난로, 그리고 열로 기관의 힘을 얻는 도구들을 포함하는 수많은 기계발명품들을 설계했다.
에마누엘은 1715년(27세) 스웨덴으로 돌아와 스카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묵었고, “북방의 발명가”(Daedalus Hyperboreus)라는 기술잡지를 출판했는데, 그것은 6호를 발간했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들을 그 출판물에 제시했고, 뒤에 폴함(Polham)으로 알려진 유명한 기술자 크리스토퍼 폴하메르가 이룬 창안물들에 관한 설명도 실었다. 폴하메르는 운하, 갑문, 염전 따위를 많이 건설했다. 이 일은 젊은 에마누엘로 하여금 폴하메르에게 개인적으로 아주 가깝게 접촉하도록 이끌었는데, 그는 에마누엘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고, 그래서 에마누엘은 그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서 에마누엘은 그의 딸을 사모하여 혼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그것은 허망한 꿈이었다.
남부에 있는 룬트 궁에서 젊은 용사 찰스 12세 국왕에게 에마누엘을 소개한 것은 폴하메르였다. 에마누엘은 국왕에게 특별히 포장한 자기의 “북방의 발명가” 한 질을 드렸고, 그래서 그들은 기술 문제와 수학 문제에 관해서 생생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뒤에 에마누엘은, 국왕의 명으로 노르웨이와 붙은 전쟁에서, 군함들을 늪지와 구릉지들을 가로질러 노르웨이 하수지대까지 옮기는 일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의 성공은 무의미한 것으로 끝이 났는데, 이어지는 프레드릭샬 전투에서 왕이 전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찰스 12세가 때 이르게 죽기 전에 에마누엘을 광산국에 지명했는데, 그것은 스웨덴에서 주석과 철 산업을 조정하는 중요한 왕실 직책이었다. 그의 실제 임명은 1723년까지 지연되었지만, 스베덴보리는 1747년까지 24년 동안이나 사정관으로 봉직했다.
관계자들은 스톡홀름에 있는 대규모 정방형 석조건물에서 정규적으로 만났는데, 그 건물에는 사무실들, 도서관, 위원회실들, 그리고 금속들을 분석하는 실험실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용광로와 광산들을 시찰하면서 말이나 사륜마차를 타고 온 나라를 두루 여행해야 했고, 때로는 실제로 줄을 타고 광도를 내려가기도 했다. 그는 소유주들에게 원광에서 금속을 추출하는 개선된 방법들을 권고했다. 그는 불화를 안정시켰고, 노동쟁의를 판정했다. 그는 다른 나라들의 발전된 채광술을 연구하기 위해서 주로 독일로 세 번이나 긴 해외여행을 했고 그래서 가장 우수한 방법을 자기 나라에 도입했다. 그는 이 시기에 채광과 광석, 수학, 화학, 물리학, 천문학, 우주론, 그리고 자연과학과 철학의 주제들에 관해서 저술하여 출판했는데, 이 일이 그에게 명성과 명예를 안겨 주었다. 어느덧 그는 오십이 되었고, 가장 학식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었다.
여러 분야에서 스베덴보리는 자기 시대에 앞서서 멀리 가 있었다. 그는 별들의 생성을 설명하는 “성운설”의 선구자였고, 수정의 분자구조를 서술했으며, 산소의 발견 이전에 불을, 또 전기의 발견 이전에 자력을 탐구했는데, 원자가 분할되기 오래 전에 물질이 “순수한 운동의 지점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가정했다.
스베덴보리는 귀족으로서 귀족 의사당에 정규적으로 자기 자리에 앉았다. 스웨덴의 의회는 네 의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귀족, 성직자, 시민, 농민 의사당이었다. 스웨덴은 당시 찰스 12세의 파국적인 전쟁의 결과로 완전히 파산된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해외무역은 거의 정지되었고, 지폐는 나라에 차고 넘쳤으며, 물가상승은 완전히 통제를 벗어나, 국민들은 자기들의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가재도구와 소유물들을 저당 잡혔다. 정부 자체가 흔들렸고, 몇몇 정치인들은 독점의 폐지를 역설했다. 스베덴보리는 물가상승을 멈추게 하고 이 가공할 문제들을 푸는 시도로 “건의서들”을 작성하는 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기울였는데, 그것들은 의회와 여러 위원회들이 열리기 전에 제출된 것들이었다. 이 건의서들은 언제나 주의를 끈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스베덴보리의 탁월한 실용정신과 정치, 경제, 재정의 실제에 대해서 그가 밝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스베덴보리는 학자로서 대단히 위대했지만, 그는 자기 지식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가 자기 마음에서 끊임없이 재잘댔다. “사람의 영혼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몸에는 어떻게 작용해서 기능을 수행하는가? 죽으면 영혼은 무엇이 되는가?” 이런 질문들의 대답을 찾기 위해서 그는 해부학 연구에 착수하여 영혼을 탐구하기로 결정했다. 사람 몸의 절개는 웁살라에서 이미 수행되고 있었지만, 이 일의 중심지는 파리였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1736년 48세의 나이로 광산국의 직무에서 장기결근의 허락을 얻었고, 사륜마차와 운하의 짐배를 얻어타고 파리로 여행해 프랑스 의사들한테 해부학을 공부했다.
그는 언제나 “영혼은 어디 있는가?” 하는 의문에 싸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피의 흐름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고, 다음에는 두뇌에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심장과 폐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드디어 그는, 그것이 어느 특정한 기관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온몸에, 동시에 각 부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신체 각 기관의 작용이나 기능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가질 수 있다면 영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당시 해부학자들은 몸의 구조를 서술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생리학”이라고 부르는 기능에 관한 연구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다. 그는 해부학자들의 관찰을 대부분 받아들였지만, 그의 예리한 지성은 그 관찰들을 해석하는 일로 향했다. 그래서 그는 “해부학”에 대한 방대한 연작 저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에서 그는 이전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을 설명했으며, 특히 두뇌, 척수, 내분비선, 그리고 신경 체계에 대한 그의 설명은 두드러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루터교 감독의 아들이었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개신교의 실상들을 몸소 겪었고, 교회가 얼마나 형식화하고 세속화했는지를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고, 이제 처음으로 가톨릭 세계에 살게 되었다. 이 일은 그에게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그는 남는 시간을 수도원과 수녀원의 목록, 성직자의 수, 그리고 그들의 수입 따위를 가지고 로마 가톨릭의 상태를 자세히 연구하는 데 들였다. 이것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로마에 이르는 여행으로 이어졌고, 로마에서는 교황의 알현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성직자들이 있지만 그들이 사람들의 영적인 삶에 주는 영향은 아주 적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로, 당시에 소위 그리스도교의 종파들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모두 죽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밝혀졌던 것이다.
파리 대학에서 해부학과 생리학의 연구를 마친 다음 스베덴보리는 스톡홀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고(1740년), 삼년 동안 사람의 몸에 대한 여러 권으로 된 방대한 작품의 저술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그 저술을 “영혼”이라는 라틴말 animus를 살려서 ‘영혼계’라는 뜻으로 Regnum Animale라고 이름 지었다.
이제 1743년이 되었다. 그의 나이는 55세가 되었고, 살아있는 가장 박학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그는 종교심이 깊었다. 하지만 그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되지 못하는데, 당시는 경건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에게 비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수천 장 원고뭉치를 들고 그것을 출판하기 위해서 암스테르담으로, 런던으로 여행하면서 다시 움직이는 중이었다. 스웨덴은 그 방대한 작업을 이루어내는 자원이 부족했던 것이다. 홀란드에 있는 동안에 그는 심적 변화들을 경험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에 저항했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두려운, 부담스러운 꿈들, 경미한 발작들, 그리고 장기간 지속된 무의식…. 그의 호흡은 변했다. 그는 밤에 음성을 들었고, 빛을 보았다. 그는 곤혹스러워 땀을 흠뻑 흘릴 때까지 악령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그 많은 자연과학의 지식들이 썰물처럼 망각으로 빠져나가고, 자기는 어린아이처럼 무지하게 남아 있는 것을 느꼈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다시 받아들였다. 그는 소명 받는 중이고 새로운 과업을 준비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명성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하기를 원치 않았다. 실제로 그는 두터운 세 권짜리 출판물을 추진해 나갔는데, 두 권은 암스테르담에서, 그리고 한 권은 런던에서 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영안이 열려가는 과정을 1743, 1744년의 자기 일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적어놓았는데, 그것은 뒤에 Swedenborg's Journal of Dreams(꿈의 일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여기서 신비주의라고 일컬어져야 할 일들, 영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의식과 결부되는 프로이트적인 ‘꿈의 세계’의 어떤 것을 통과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신비가들에게 있었던 것처럼, 그의 내적 경험은 “사랑 받는 우리 주 예수, 복된 형상 보기”를 포함한다.
부활절을 지낸 지 얼마 되지 않는 1744년의 4월 6일 밤이었다. 그는 홀란드 헤이그 근처에 있는 델프트의 한 호텔에 있었는데, 그때 그는 고통스러운 시험을 겪고 깊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주 예수의 가슴에 안겨 그분의 얼굴을 마주보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 일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분의 얼굴을 묘사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거룩한 풍채에 미소 띤 얼굴이었다. 나는 그분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런 얼굴을 가졌으리라고 믿는다. 그분은 나에게 ‘너는 건강증서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주님, 나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그렇군, 그렇게 하라.’ 나는 이것이 ‘나를 진실로 사랑하라’ 또는 ‘네가 약속한 것을 행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오 하나님, 그 일을 위해서 저한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깨어나서 몸을 떨었다.”
그 뒤로 그는 또 1745년 4월, 런던에 있는 한 호텔 자기 방에서 혼자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에 주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일을 경험하였다. 이 당시는 그의 영안이 충분히 열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때 주께서 ‘새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세상에 진리를 새롭게 계시하는 사명을 그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과학의 저술 작업을 포기하고 스톡홀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새 과업을 시작했다. 그는 히브리어를 배웠고, 성경을 원어로 읽으면서 그 뜻을 알아보고, 또 라틴어 성경을 읽으면서 번역을 살펴보고, 여러 가지 성구목록을 만들어 가면서 그가 주님한테서 부여 받은 과업을 수행할 준비를 해나갔다. 그는 그 당시부터 죽기까지 27년 동안 이승과 저승 양세계의 주민으로 살았는데, 하늘에 있는 천사들, 그리고 중간지대인 ‘영들의 세계’에 갓 깨어난 영들과 친근하게 만나서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있는 악마들과 사탄들과도 이야기했다. 그는 그들을 집으로 방문했고, 생을 이야기했으며, 그들과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그는 1747년부터 1765년까지 20년 동안 그 경험들을 하나하나 적어 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사후에 “영계 일기” 또는 “영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스베덴보리는 1747년 그의 나이 59세에 광산국을 물러났고, 생의 마지막 24년을 “하늘의 가르침”(Doctrina Coelesti)을 담은 저술들을 출판하는 일로 보냈다. 그의 모든 저술은 당시 학술서들이 취했던 서술방식인 라틴어로 집필되었다. 그의 과업은 1749년 『하늘의 비밀들』 첫 권이 출판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혼인애』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든 저술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1771년 마지막 저술인 『순정기독교』를 출판하기까지 그는 27권에 달하는 크고 작은 책들을 펴냈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나온 유작들을 포함시키면 그가 집필한 글들은 출판한 책에 거의 배에 가깝다. 스베덴보리는, 1770년 그의 기념비적 저술인이 『순정기독교』의 집필을 마치자 주님은 그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다음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 그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으리라”는 새 복음을 온 영계에 전하도록 보내셨는데 그 날은 1770년 6월 19일이었다고 이 책에 기록하였다.
스베덴보리는 1772년 3월 29일, 그의 나이 84세에 죽었다. 그의 몸은 런던에 있는 스웨덴 교회에 묻혔다. 그러나 1908년 이 교회당이 허물어지게 되자 그의 유해가 수습되었고, 스웨덴으로 보내져 웁살라 대성당에 있는 웅장한 대리석 석관에 영예롭게 안장되었다.
|
첫댓글 이름의 발음에 설명을 곁들입니다. Swedenborg의 g는 발음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g(게)는 단어 끝에서 요드음가를 가지는 글자인데, 자음만 있기 때문에 발음하기 위해서 성호 Yehowah처럼 쉐와를 가지게 됩니다. 쉐와란 정상적인 모음은 아니고, 모음 없는 자음의 발음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가성입니다. 성호가 '여호와'로 표기되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예호와'로도 발음될 수 있습니다. 쉐와의 발음과 표기는 전통과 견해에 따라 다릅니다. 아무튼 Swedenborg도 같은 경우인데, 본래 모음이 붙어있지 않고 발음만 쉐와를 붙이지만 우리말은 자음만 적는 방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음을 붙여서 '여'나 '예'로 적게 됩니다
오랫만에 들러서 잘 읽고 갑니다. 처음 읽는 내용들도 있군요.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