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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 등산로 : 함양 - 하봉 - 중봉 - 천왕봉 - 세석고원 - 백무동 - 마천
나는 영남에서 성장하였다.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은 바로 우리 고장 산이다. 그럼에도
이곳 저곳으로 벼슬살이를 하면서 세상 일에 골몰하다 보니, 나이는 벌써 40이건만 아직
까지 한번도 두류산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1471년 봄에 함양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그 경내에 있는 두류산은 새파랗게
우뚝 치솟아 고개만 쳐들면 바로 보였으나, 흉년이 들고 사무가 바빠 2년이 넘도록
한번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유호인, 임정숙과 두류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늘 간절하였다.
마침 금년 여름에 조위가 관등으로부터 와서 나와 함께 [예기]를 읽고 있었다. 그는
가을이 되자 장차 부모 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떠나기 전에 지리산을 한번 구경가
자고 청하였다. 나 역시 허약한 증세가 날로 더해가고 다리 힘이 갈수록 떨어져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내년을 기약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가을철이고 습한
기운도 이미 걷혔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에서 달을 구경하고, 닭이 울면 해가 뜨는 것
을 구경하고, 밝은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볼 수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었
다. 드디어 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극기를 불러 태허와 함께 [수친서]에 적혀 있는 것을 참고하여 산행 도구를 대충
준비하였다.
덕봉사의 중 해공이 와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한백원이 따라 나섰다. 드디어
엄천을 지나서 화암에서 쉬는데 중 법종이 뒤따라 왔다. 그에게 길을 물으니, 자못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다.
지장사에 도착했다. 길이 가닥이 났으므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 골짜기와 숲이 맑고 깊숙하여 벌써 아름다운 경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1마장쯤 가니 환희대라는 바위가 있었다. 태허와 백원이 그 마루턱에 올랐다. 그 아래는
천길이나 되는데, 금대암, 홍연암, 백련암 등 여러 절이 굽어 보였다.
먼저 선열암을 찾았다. 암자는 가파른 절벽 아래에 지었다. 그 아래로 맑은 샘 두 개가
있었다. 담장 밖에는 바위 홈으로 물이 흐르는데, 물방울이 오목하게 파인 납작한 바위
위로 떨어져 괴어 있었다. 마치 깨끗한 못과 같았다. 그 틈에는 몇 마디쯤 되는 적양과
용수초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곁에는 돌계단이 나 있고 등넝쿨 한 가닥이 나무에 매어
져 있었는데, 그것을 붙잡고 묘정암과 지장암에 오르내렸다. 법종이 "한 비구승이 참선
하면서 우란분을 만든 뒤 구름처럼 노닐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였다. 지금은 돌 위
에 오이와 무가 심어져 있고 두어 되의 곡식을 찧을 만한 조그마한 절구통이 놓여 있을
뿐이다.
다시 신열암을 찾았다. 중이 없는 빈 암자였다. 이 역시 치솟은 벼랑을 등지고 있었다.
동북쪽에는 독녀암이라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높이가 천여 자나 되고 다섯 가
닥으로 갈라져 있었다. 옛날 어떤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다 돌을 포개어 집을 만들고 혼
자 살면서 도를 닦은 뒤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런 바위 이름
이 붙었다는 것이다. 법종이 한 말이다.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있었고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었다. 그곳에 올라 가려면 사
다리를 놓고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야 하는데, 등과 배가 모두 벗겨진 뒤에
야 꼭대기에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숨을 내건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따라온 아전 옥곤이와 용산이는 벌써 올라가서 발을 구르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지방(현 경남 산청군)을 오가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았을 때, 여러 산봉
우리와 함께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이 솟아 있었다. 지금 이곳에 와서 보니 몸이 오싹하
고 황홀하여 내가 이 세상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조금 서쪽으로 돌아 고열암에 이르렀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 서쪽에는 의논대가 있
었다. 극기 일행은 뒤에 쳐졌다. 그래서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삼반석에 오르니 발 아래
에 향로봉과 미타봉이 내려다 보였다.
법공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에 석굴이 있다고 한다. 옛날 이 석굴에는 노숙과 우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해탈한 세 승려와 함께 이 돌에 앉아 불교의 진리를 논하다
가 문득 도를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의논대라는 바위 이름이 붙은 것이다.
조금 뒤에 중 하납이 와서 합장하며 "듣자니 원님이 구경왔다는데 어디 있는가" 하였다.
법공은 그 중에게 눈짓을 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이를 눈치 챈 하납은 얼굴이 붉
어졌다. 그래서 나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위로하였다. "불을 쬐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투는 법일세. 이제 그대가 한 늙은이를 만났으니 누
가 원님인 줄을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오늘은 첫날이라 시험삼아 거의 20리 길을 걸었다. 몹시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가
한밤중에 잠을 깼다. 밖을 내다보니,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켰다 뱉었다 하고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새벽에는 더욱 음침하였다. 중이 말했다.
"제가 이 산에서 오래 살면서 구름의 형상으로 점을 쳐보곤 하였는데, 오늘은 반드시 비
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모두들 기뻐하였다. 우리 일행은 짐꾼을 갈라서 돌려보낸 뒤 절에서 나와 즉
시 떠났다. 푸른 등넝쿨과 깊은 대숲 속에는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시냇길에 넘어
져 있어 다리가 되기도 하였다. 쓰러진 나무 중에는 절반이나 썩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지가 땅을 막고 있어 말을 탄 것 같았다. 머리를 숙이고 그 아래로 나와 한 고개를 넘
었다. 법공이 이르기를 "여기는 앞으로 넘어야 할 아홉 고개 중에서 첫 번째 고개입니다"
하였다.
계속 걸어서 서너 고개를 넘으니 한 골짜기가 보였다. 골짜기 주위는 넓고 깊숙하며 수
목이 햇빛을 가리고 다래덩굴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시냇물이 돌에 부딪쳐 구비치는
소리도 들렸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
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 기장, 삼, 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
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
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서 산능선을 따라 걸었다. 지나가는 구름이 나직이 삿갓을 스쳐가고
풀과 나무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진주 땅인데,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바라볼 수 없었다.
이윽고 판자로 지은 청이당에 도착하였다. 네 사람이 각각 당 앞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점까지는 길이 극히 위험하였다. 이곳이 바로 [봉선의기]
에서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 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인다"고 한 곳이
다. 나무뿌리를 휘어잡고서야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정오가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점에 올랐다.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고 험
준하였는데, 여기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이 올려다보였다.
이곳을 영랑점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영랑이 삼천 명의 문도를 거느
리고 산수를 유람하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는 소년대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혹시 그 소년은 영랑의 문도가 아니었을
까. 나는 바위 귀퉁이를 감싸 안고 그 밑을 내려다보니 꼭 떨어질 것만 같았다. 따라온
사람에게 그 곁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하였다.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해가 아래로 비쳤다. 그러자 산의 동쪽과 서쪽의 광활한
계곡이 산뜻하게 바라다보였다. 계곡에는 잡목은 없고 모두 삼나무, 회나무, 소나무뿐이
었다. 그중 3분의 1은 말라 죽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간간이 단풍이 들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산능선에 있는 것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가 모두 왼편으로
쓰러져 있고 앙상한 가지는 굽어진 채 머리칼처럼 나부꼈다.
이곳은 잣나무가 매우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 고을 사람들은 매년 가을이면 잣을 따다
가 곡물로 바친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에는 한 그루도 열매를 맺은 나무가 없었다. 그럼
에도 공물 액수를 모두 채우게 하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될 것인가. 수령인 내가 직접 보
았으니 참으로 다행히 아닐 수 없다.
서대초와 유사한 풀이 있었다. 부드럽고 미끄러워 깔고 앉았다 누웠다 할 만 하며 곳곳
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에 오기 전까지는 오미자가 울창한 숲을 이룰 정도로 매우 많
았는데, 여기 오니 하나도 없었다. 다만 독활과 당귀만이 보일 뿐이었다.
해유령을 넘었다. 길 곁에는 선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다. 법종이 그 유래를 말해주었다.
"아주 옛날 바닷물이 땅을 뒤덮었을 때 이 바위에다 배를 붙들어매고, 게가 이 고개를 기
어서 넘어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나는 웃으면서 "그대 말을 믿는다
면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더위 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 하였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다함께 남쪽으로 중봉에 올랐다. 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은 모두
돌이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은 흙으로 덮혀 있었다. 판판하고 넓직하여 말을 달릴 수
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내려와 말을 쉬게 하였다. 바위에는 마실 수 있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었다. 가뭄이 드는 해에는 사람들이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면서 돌면 반드
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해보았더니, 소문대로 제법 효험이 있었다.
오후에 천왕봉에 올랐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온누리가 어둡고 중봉도 보이지 않았
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에 들어가 조그마한 부처에게 날씨가 개게 해달라고 빌었
다. 나는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속설에 이렇게 하면 하늘
이 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의관을 바르게 입고 세수하고 돌길을 더듬어 사당에 들
어가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성모에게 빌었다.
"저는 일찍이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구경한 일과 한퇴지가 형산에서 노니던 뜻을 사모하
였으나, 직무에 매인 몸이라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금년 8월에 남쪽 경내
의 수확을 살펴보다가 드높은 봉우리를 우러러보고 그곳에 가서 미력한 정성이나마 드
리고자 하였습니다. 드디어 진사 한인효,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구름사다리를 밟고 이
곳 사당에까지 왔습니다.
하오나 비를 다스리는 귀신이 마술을 부려 구름이 김 서린 듯 깔려 있어 황당할 뿐 아니
라 좋은 기회를 놓칠까 두렵습니다. 옆드려 비오니 성모께서 이 술을 흠향하시고 신통력
을 발휘하여, 오늘 저녁 안으로 하늘이 맑게 개어 달빛이 대낮과 같고 내일 아침에는 만
리가 확 트여 산과 바다가 확연히 드러나게 해주소서. 그러면 우리들이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어찌 그 큰 은혜를 잊으오리까."
이렇게 제사를 지낸 뒤 다함께 신위 앞에 앉아서 술 몇 잔씩을 나누어 마신 다음 일어섰
다. 성모사당은 단지 3칸으로 엄천리에 사는 사람이 고쳐 지었다. 못을 단단히 박은 판
자집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가기 때문이다. 두 중이 벽에다 그림을 그리
고 있었다.
이른바 성모상은 돌로 만들었다. 얼굴은 예쁘고 머리는 쪽을 지었는데, 얼굴에는 분칠을
하였다. 이마에는 파손된 자국이 있었다. 그 이유를 중들에게 물으니, 1380년에 운봉 인
월역에서 있었던 황산대첩 때 태조 이성계에게 쫓기던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칼로
찍어놓은 것을 뒷날 다시 손질했다는 것이다. 동편에는 오묵한 돌무더기에 해공 등이 빌
었던 부처가 있었다. 이는 국사의 상으로, 민간에서는 성모의 음탕한 남편으로 보고 있
다. 또 민간에서는 성모를 어떤 신으로 보고 있는지 중들에게 물어보니,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 하였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인도와 우리나라는 여러 나라로 가로 막혀 있는데, 인도에 있
는 가유국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
기]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성모가 선사에게 명한 것에 대한 주석에는 "지금의 지리산
천왕은 바로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려 사람이 선도
성모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임금의 계통을 신성화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휴는 그것을 믿고 [제왕운기]에 적
어 놓았다. 이 또한 증빙할 수 없거늘, 하물며 중들의 허무맹랑한 말을 어찌 믿을 수 있
겠는가? 또한 성모를 마야부인이라 하면서 국사를 그의 음탕한 남편으로 만들어 더러운
욕을 먹이고 있으니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에 그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날이 어두워지자 음산한 바람이 이리저리 거세게 몰아쳤다. 성모사의 지붕옷이 모두 젖
었다. 네 사람이 모두 사당 안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다시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하인들이 모두 온 몸을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 큰 나무
서너 그루를 가져다 불을 피우고 쬐게 하였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달빛이 어렴풋이 비쳤다. 반가워서 일어나보니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흙벽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았다. 천지가 아득하였다. 마치 큰 바다 한가
운데서 조그마한 배 하나를 탄 채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하여 곧 파도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웃으면서 세 사람에게 말하였다.
"비록 한퇴지 같은 정성과 왕저 같은 도술이 없을지라도 다행히 그대들과 함께 우주의
근원을 타고 혼돈의 원시세계에 떠노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비바람이 아직도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하인을 향적사(제석봉 남쪽 장터
목 산장에서 5분 거리에 있었던 절)로 보내 밥을 지어 놓고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뚫은 뒤
모셔 가도록 하였다. 정오가 지나서야 비가 조금 그쳤다. 돌길이 몹시 미끄러웠다. 사람
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조금 내려왔다. 쇠사슬을 박아 놓은 길이 있었으나 매우 위태로웠
다. 그래서 그냥 돌 구멍을 뚫고 나와 힘을 다해 걸어서 향적사에 도착하였다.
향적사에는 중이 살지 않은 지가 이미 2년이나 지났다. 그럼에도 골짜기 물은 아직도 나
무 홈통을 타고 물통으로 떨어지고, 문 자물쇠와 향반의 불유가 옛모습 그대로였다. 깨
끗이 청소를 한 뒤 향불을 피우고 안으로 들어가 쉬었다.
어둠이 깔릴 무렵 천왕봉으로부터 구름이 거꾸로 불어 눈 감짝할 사이에 모두 흩어지고
먼 하늘에는 간혹 지는 햇볕이 비치곤 하였다. 나는 기쁜 나머지 손짓을 하며 문 앞에 있
는 널찍한 바위로 뛰어나갔다. 멀리 구물거리면서 감도는 살천이 보였다. 여러 산과 섬
이 전부 혹은 반쯤 드러나 있고, 혹은 이마만 드러나 있었다. 마치 장막 안에 있는 사람
의 상투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정상을 쳐다보니 봉우리가 몇 겹으로 구름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어제 우리가 어느 길
로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성모사 옆에서 흰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며 나부꼈는데, 그
림 그리던 중이 그 위치를 나에게 알리려고 한 모양이다. 남북의 바위를 두루 보면서 달
뜨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동쪽이 모두 밝아 오기도 전에 다시 추위가 느껴졌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솔불을 피워 향적사 방안을 훈훈하게 한 뒤 잠자리에 들었
다. 밤중에 이르러서야 달과 별이 환히 밝았다.
새벽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놀빛이 눈부셨다. 일행은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해서 더 이
상 오르지 못할 것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여러 날 동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다가 갑가지 갠 것을 보면 하늘이 나에게 많은 혜택을 준 것인데, 지금 정
상을 눈앞에 두고 힘을 다해 오르지 않는다면 평생 품었던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할 것
이 아닌가.
드디어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옷자락을 걷어붙인 뒤 지름길로 석문(오늘날의 통천문)을
거쳐 올랐다. 발에 밟히는 풀과 나무마다 얼음이 맺혀 있었다. 성모사에 들어가 다시 잔
을 올리며 감사드렸다.
"오늘 천지가 맑게 개어 산천이 활짝 열린 것은 실로 신께서 도운 덕택이니, 진실로 깊이
감사드리는 바이다."
그런 다음 극기와 해공과 함께 북쪽 봉우리에 올랐다. 태허는 벌써 꼭대기에 올라 있었
다. 비록 나는 기러기일지라도 우리 위로 날지는 못할 것이다. 때마침 비가 막 개어 사방
에 구름 한 점 없고 탁 트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게 일행에게 물었다.
"무릇 먼 곳을 보는 데에 요령이 없으면 나뭇꾼들이 바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을 보고 그 다음에 남쪽과 서쪽을 보되,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눈을 옮기면서 보아야 옳지 않은가."
그랬더니 해공이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 산은 북으로부터 달려와 남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처음 솟은 봉우리는 반야봉이고
그 동쪽으로 몇 백 리를 뻗어서 이 천왕봉에 와서 다시 높이 솟아나 북으로 서리다가 끝
난다. 그 사면으로 뻗은 곁봉우리와 골짜기는 다투듯이 흘러내려, 제 아무리 능력이 있
는 자라도 그 수효를 모두 헤아릴 수 없다.
끌어당기 듯 둘러쳐진 성은 함양의 성 같고, 푸르고 누런 빛이 엉겨 붙어 흰 무지개가 가
로지른 것은 진주의 강물이며, 물고동이 점을 찍어 놓듯 비끼어 곧장 솟은 남해와 거제
의 여러 섬이 아닌가 싶다. 산음, 단계, 운봉, 구례, 하동 등의 고을은 모두 겹겹이 싸인
산속에 숨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북쪽의 가까운 산은 황석산, 취암산이고. 먼 산은 덕유산, 계룡산, 주우산 수도산, 가야
산이다. 동북쪽의 가까운 산은 황산, 감악산이고, 먼 산은 팔공산, 청량산이다. 동쪽의
가까운 산은 도굴산, 집현산이고, 먼 산은 비슬산, 운문산, 원적산이다. 동남쪽의 가까운
산은 와룡산이고, 남쪽의 가까운 산은 병요산, 백운산이다. 서남쪽의 먼 산은 팔전산이
고, 서쪽의 가까운 산은 황산, 무등산, 변산, 금성산, 위봉산, 모악산, 월출산이고. 서북
쪽의 먼 산은 성수산이다.
이들 여러 산은 혹은 작은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이나 범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
시를 괴어 놓은 것 같거나 칼날 같기도 하다. 다만 동쪽에 있는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
만이 여러 산에 비하여 자못 우뚝하다."
계십령 이북은 푸른 기운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대마도 이남은 바다 기운이 하늘에 잇닿
아 시력이 끝까지 미치지 못하여 더는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같은 해공의 설명
을 극기로 하여금 기록할 수 있는 것만 위와 같이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로 돌아보
면서 자축하였다.
"예로부터 이 천왕봉에 오른 자가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 우리들처럼 통쾌하게 본 사람이
있겠는가?"
천왕봉 정상을 내려와 돌층계에 앉아 술 서너 잔을 주고 받으니 벌써 정오가 지났다. 멀
리 영신봉의 좌고대를 바라보니 아직도 까마득하였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석문을 뚫
고 내려와 중봉에 올랐다. 이 역시 흙으로 된 붕우리였다. 함양 사람이 엄천 쪽으로 오르
면 북쪽의 둘째 봉우리가 중봉이고, 마천쪽으로 오르면 시루봉(제석봉)이 첫째 봉우리
이나 이 역시 천왕봉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봉우리이므로 중봉이라 한다.
이곳부터는 계속 능선을 타고 가는데, 그 사이에는 우뚝 솟은 10여 개의 봉우리가 있었
다. 모두 올라가 볼 수 있고 천왕봉에 못지 않으나 이름없는 봉우리들이었다. 옆에 있던
극기가 "선생께서 이름을 지으시지요"하기에. 나는 "증거가 없어 믿지 않을 터이니 이름
을 지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였다.
숲에는 지팡이를 만들 만한 지팡이가 많았다. 그래서 하인으로 하여금 미끈하고 곧은 것
만 가려서 배어오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이나 되었다. 시루봉을 거쳐 저여원
(세석)에 이르렀다. 길가의 단풍나무가 마치 문처럼 휘어져 있어 지나는 사람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지날 수 있었다. 산마루에 펼쳐져 있는 평원은 평탄하고 광활하여 5,6리
정도나 되었다. 수풀은 무성하고 샘물이 주위에 흐르고 있어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도
있었다. 시내 위쪽에는 조그마한 초막이 보이는데, 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흙으로 만든
아궁이가 있었다. 바로 매를 잡는 움막집이었다.
나는 영랑점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골짜기 곳곳에 설치해 놓은 수많은 매잡는 덫을 보
았다. 그러나 늦가을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를 잡는 자도 없었다. 매는 구름 사이를 날아
다니는 새이다. 그런 새가 어찌 이처럼 험준한 곳에 덫을 놓고 은밀한 움막에 들어앉아
자기를 노리는 자가 설마 있을 줄로 알리오. 먹잇감을 보고 탐낸 나머지 마침내 그물에
걸려들어 끈과 방울을 차게 되니, 이런 점은 사람들 역시 교훈으로 삼을만 하다. 또한 나
라에 바치는 매는 한두 쌍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를 가지고 놀려는 자들이
헐벗고 굶주린 자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맞으며 천길의 산봉우리에 엎드려 있게
하니, 어진 마음이 있는 자라면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저녁에 험준하고 깍아지른 창불대(영신봉 밑의 영신대)에 올랐다. 그 아래는 밑바닥이
없었고 그 위는 초목이 없었다. 단지 진달래 몇 그루와 영양의 똥이 있었을 뿐이다. 그
아래로 두원관, 수관과 섬진강의 끝을 굽어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겹쳐 있어 매우 기이
하였다.
옆에 있던 중 해공이 여러 골짜기가 모이는 곳을 가리키며 "저기는 신흥사 골짜기로 절
도사 이극균이 호남의 도적 장영기와 싸우던 곳이다" 하였다. 장영기는 좀도둑이었다.
이같은 험준한 곳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혜롭고 용맹한 이극균도 날뛰는 장영기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졸지에 장흥군수가 공을 세우게 되었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
이다.
또 해공은 악양 고을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청학사가 있는 동네이다" 하였다. 아!
바로 저곳이 옛날 신선이 살던 곳이란 말인가. 저곳은 인간이 사는 곳과 과히 멀리 떨어
져 있지 않은데, 미수 이인로는 어찌 찾지 못하였을까? 일을 좋아하는 자가 이인로의 이
름을 사모하여 절을 지어 명칭을 붙힌 것은 아닐까?
또 해공은 손가락으로 악양 동쪽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기가 쌍계사 골짜기입니다. 고
운 최치원이 일찍이 그곳에서 노닐며 돌에 새긴 것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고
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기개는 있었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 중
국에서만 불우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용납되지 못하였다. 드디어 인간 세상
밖에 은둔하였다. 산수가 깊숙하고 고요한 땅은 모두 그가 놀다 갔으니, 세상 사람들이
신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영신사에서 잤다. 그곳에는 단지 한 명의 중이 있었을 뿐이다. 절의 북쪽 비탈에는 가섭
의 석상이 하나 있었다. 세종대왕 때에는 늘 내관을 보내 향불을 피웠다고 한다. 석상의
이마 한쪽이 파손되어 있었다. 그 역시 왜구가 칼로 깍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왜구는 참
으로 잔인한 오랑캐로구나!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도 모자라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도
칼질을 해댔다. 아무것도 모르는 돌일진대, 어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저렇
게 칼질을 해댈 수 있는가.
가섭상의 오른팔에는 불에 탄 것 같은 반점이 있었다. 그것은 세계가 파멸될 때 일어난
불에 탄 것으로 조금만 더 타면 미륵의 세상이 된다고 하였다. 반점은 본래부터 있었던
자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당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미래의 이익을 갈구하
는 자들이 앞다투어 돈과 베주를 사주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증오스러운 일이
다.
가섭상을 모신 전각의 북쪽 봉우리에는 바위 두 개가 우뚝 서 있었다. 이른바 좌고대이
다. 하나는 아래가 뒤틀리고 위가 뾰족하며 머리에는 너비가 한 자쯤 되는 네모난 돌을
이고 있었다. 중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 예불하는 자는 효험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하인으로 따라온 옥곤과 염정이 그곳에 올라가 절을 하였다. 절에 있던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급히 사람을 보내 꾸짖은 뒤 내려오도록 하였다. 어리석은 자들이
저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그러는데, 이것만 보아도 중들이 백성을 속이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신사 법당에는 중국 원나라의 중 몽산화상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 위에는 "두타
제일로 번뇌를 없애고 밖으로 이미 인간 세상의 먼지를 떨치고 안으로도 티끌이 없네.
남 먼저 득도하고 맨 뒤에 입멸하였도다, 설의 계산이 천추에도 썩지 않으리"라고 찬한
글이 있었다.
영신사의 동쪽 섬돌 아래는 영계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는 옥천이 있었다. 물맛이 매우
감미로웠다. 그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중냉천이나 혜산천물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
었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져가는 절이 오똑 서 있었다. 옛날의 영신사였다. 그 서북쪽에 있는
깍아지른 봉우리에는 작은 탑이 하나 있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나 그 역시 왜구가 쓰
러뜨렸다. 그 뒤 다시 탑을 쌓고 그 가운데 철근을 박았는데 몇 층이 없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 문을 열고 섬진강을 바라보았다.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한참 그
것을 지켜보았는데 안개가 판판하게 깔려서 그렇게 보인 것이다.
우리 일행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절의 서북쪽으로 출발하여 고개마루에서 쉬었다. 반야
봉을 바라보니 약 60리쯤 되어 보였다. 그러나 두 발이 모두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 빠
진 상태였다. 반야봉에 가보고 싶었지만 강행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름길로 곧바
로 하산하였으나, 길이 매우 험해 나무 뿌리를 휘어잡고 돌 모서리를 딛고 내려왔다. 하
산하는 수십 리 길이 모두 그러하였다.
동쪽을 쳐다보니 천왕봉이 올려다보였다. 마치 코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대나무에는 간
혹 열매가 달려 있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따갔다. 둘레가 백 뼘이나 될 정도로 큰 소나무
가 바위 사이에 즐비하게 서 있었다. 이런 광경은 전에 보지 못하였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험한 곳을 모두 내려왔다. 두 골짜기의 물은 하나로 합해진 뒤 요란
한 소리를 내면서 흘러 내렸는데 산기슭을 진동시켰다. 맑고 넓은 못에는 고기가 뛰어놀
고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물을 한 움큼 떠 양치질을 하였다. 그런 다음 절벽을 따라 지
팡이를 끌고 걸었다. 매우 기분이 상쾌하였다.
골짜기 입구에는 사당이 있었다. 그곳에는 우리 집 종이 말을 끌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
었다.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말을 타고 실택리에 도착하였다. 마을 노을 여럿이 길가에
나와 맞아 주었다. 그들은 절을 하면서 "사또께서 아무런 탈없이 유람하고 오시니 축하
드립니다" 하였다. 나는 일도 하지 않고 놀러다니는 나를 탓하지 않는 백성들을 보고 기
뻤다.
중 해공은 군자사로 가고 범종은 묘정사로 갔다. 태허와 극기, 백원은 용유담으로 갔다.
나는 둥그점을 넘어 지름길로 관사로 돌아왔다.
내가 지리산을 유람한 것이 겨우 5일에 불과하지만, 마음이 후련하고 신수가 좋아졌다.
처자나 아전들이 보기에도 전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오호라. 만일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이 중국에 있었으면, 중국 황제는
반드시 숭산이나 대산보다도 먼저 지리산에 올라가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금으
로 쓴 옥첩을 하느님께 바쳤을 것이다. (중략)
우리들은 이번에 지리산에 오를 기회를 얻어 평소의 소원을 겨우 풀었다. 그렇지만 공무
에 얽매인 몸인지라 청학동과 오대를 찾아가 그윽하고 뛰어난 경치를 두루 구경할 수는
없었다. 이 어찌 지리산을 잘못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있다"라
는 두보의 시 구절을 읊으니, 나도 모르게 날아갈 듯 하였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8)의 호는 점필재이고 본관은 선산이다. 그는 16세에 과거에
낙방하고 29세에 급제한 뒤 성종 때에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평소 문장과 경학에 뛰어났
고 정여창, 김광필,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등 15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을 제
자로 길러냈다. 이들은 이른바 영남사림학파로서 훈구파와 대립, 수차에 걸친 사화에 연
루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김종직 때 무오사화 때 그가 쓴 [조의제문] 파동으로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김종직은 그의 나이 42살. 경상도 함양군수로 있던 1472년에 그이 제자 조위, 유호인,
한인효 등과 함께 음력 8월 14일부터 19일까지 5일 동안 지리산을 기행하였다. 그이 산
행 코스는 함양-중봉-천왕봉-세석고원-영신사-함양 마천이었다. 그는 지리산을 등반
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즐기고 그 속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등 대단한 만족감
을 보였다.
이 글은 김종직이 지리산을 다녀온 뒤 저술한 [유두류록]으로,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
서 펴낸 [명산답사기(솔)]에 실려 있는 번역문을 원문과 대조하여 수정/보완하였다.
[지리산에 가련다] 중에서... 김양식 지음 - 도서출판 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