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소리>는 2004년 한국언론재단의 지원으로 '비전향 장기수들을 통한 한반도 안정화 모색'이라는 주제의 기획기사를 싣습니다. 보도분량은 20회 정도이며 매주 월, 목요일에 게재됩니다. (보도 순서는 변경될 수 있음) /편집자 주
1.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
2. 비전향장기수들을 작품화한 예술인들
3. 강제전향의 실상 - "전향으로 인한 통한의 세월"
4. "또 다른 이산의 아픔"
5. 2차 송환 희망자들의 안타까운 목소리 |
"이 사진집은 우리 나라 분단의 아픈 역사를 자신의 온몸에 문신처럼 새기며 살아온 비전향장기수들이 남녘에서 생활한 기록이다. 이들 가운데 정순택씨, 정순덕씨를 제외한 63인은 2000년 9월 2일 북으로 돌아갔다."
비전향장기수들의 남녘 생활이 기록된 사진집-"우리 다시 꼬옥 만나요".
"비전향장기수 작업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역사적인 평가는 내리지 못해도 그분들의 남측 생활을 글과 사진으로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이 결정되자 신동필씨는 2-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비전향장기수들의 진솔한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을 했지만, '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기에' 작업을 시작했다.
| △과천 '한백의집'에서 신문을 베개 삼아 읽고 있는 기자 출신의 장호씨 ⓒ신동필 |
신동필 다큐 사진가의 '기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비전향장기수들이 곁을 준것은 아니다. 비전향장기수들을 곡해하고 바라본 세월의 높이만큼 그들도 '이방인'에게 쉽게 마음을 털어놓을 입장은 못되었다.
"내가 무슨 사진을 찍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은지를 말했어요. 왜 사진을 찍는지, 어떤 용도로 사진이 쓰일지도 분명하게 약속을 했지요. 그분들의 투쟁이나 삶의 욕구들이 사진으로서 표현됐을 때 내 생각이 그분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게 아니거든요. 사진을 통해 이념의 강조보다는 객관적이고 싶었습니다."
지루한 장마비를 함께 견디는 마음으로
"선생과 함께 길을 나섰던 날은 장마비가 내리고 있었다. 낯설은 바닷가 여관에서 여독을 푼 뒤 선생의 고향집을 찾았는데, 그곳을 떠나는 순간까지 가족들과 벌이던 치열한 사상논쟁은 곁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나마저도 서럽게 했다. 그동안 빨갱이 가족이라 손가락질 당하며, 품앗이에서 조차 따돌려져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그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그날 따라 아프게 매질하듯 내리던 비가 어찌 선생의 처진 어깨위로만 쏟아졌겠는가. 분단이 낳은 현실속에서 짧게는 13년 길게는 44년동안 0.75평의 독방에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출소한 후에도 여전히 진정한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아픔을 어찌 사진으로 다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비 내리는 바닷가 집 앞 처마 끝에서 길게 담배연기를 뿜었다. 비전향장기수 문제가 개인만의 아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남과 북의 분단을 고스란히 집약해 놓은 현대사라는 것을 확인한 자리였다. 그는 비전향장기수 사진 작업 내내 내리던 '지루한 장마비를 함께 견디는 마음'으로 함께 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사진집 말미에 "내일이 될지, 또 몇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빠른 시일안에 북쪽에서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갈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적었다. 1차 송환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2차 송환, 더 나아가 남측에 남아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작업도 고민하고 있다.
| △함께 가기를 원했던 신인영씨와 어머니 고봉희씨가 다시 만날 날을 염원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신동필 |
언론에서 제외된 '현실'을 기록하다
80년대가 학창생활인 대부분이 그랬듯 신동필씨도 역사에 묻혀 살아왔다. 87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의 원인이었던 박종운씨의 수배전단에서부터 97년 한총련 수배 전단, 그리고 주한미군범죄등 그런 부분에서 기록된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비전향장기수를 담는 사진 작업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시에 광주항쟁 사진을 대자보로 본것은 충격이었지요. 기록을 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을 한거지요. 내가 기록하는 사진은 객관성을 요구하는 다큐멘터리의 정통성보다는 언론에서 제외된 현실, 어떤 의미에서는 반항이라고 볼수도 있어요."
역사적으로 불행했던 시기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사진가한테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찍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았다는 그는 그렇게 찍어 온 10만 컷의 사진을 조금씩 정리해 조만간 한권의 사진집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현장에서 찍어온 사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시금' 정리하고 싶다는 것.
"사진을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변화된 모습에 맞추어 제 작업의 내용도 변화해 갈 수 있는 부분들이 필요하지요. 경제의 고도성장으로 인해 정신적인 가치들이 파괴가 됐습니다."
신동필씨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민족문제라던가 사회변혁,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카메라 앵글에 담고 있다. 그가 기록한 사진 중 일부가 오는 29일부터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서 열리는'동강사진축전 2004'에 펼쳐진다. 다큐멘터리를 주제로 국내 대표사진가 33명을 선정한 이 전시회에서 그는 재일동포 4세들의 민족학교 모습을 선보인다.
그의 계속되는 '기록'에 대한 의미는 대학생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삶이 보여주는 모습이 사진가로서의 삶을 규정할 수 있는 코드가 될 것이다.
"대학생때 백기완 선생님 강연을 들은적이 있는데 그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연단에 오르신 선생님이 '여러분들이 하는 일들은 아주 떳떳하고 정당한것이다. 평생을 두고 할 일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도중에 때려치울꺼면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 △고난의 상징인 보라색 스카프를 선물받고 기뻐하는 조창손씨 ⓒ신동필 |
| △송환을 앞두고 손도장을 남기는 함세환씨 ⓒ신동필 |
이민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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