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한 씨족(동족)의 계통을 기록한 책.
내용
같은 씨족(동족)의 시조로부터 족보 편찬 당시 자손까지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씨족(동족)이란 성(姓)과 본관(本貫)이 같아서 동조의식(同祖意識)을 가진 남계친족(男系親族)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여러 족보에는 씨족(氏族)·본종(本宗)·종족(宗族)·종(宗)으로 나타나 있다.
족보는 동족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역사이기 때문에 족보를 통하여 종적으로는 시조로부터 현재의 동족원까지의 세계와 관계를 알 수 있고, 횡적으로는 현재의 동족 및 상호의 혈연적 친소원근(親疎遠近)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가계(家系)의 영속과 씨족의 유대를 존중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족보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따라서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며, 씨족을 단결하고, 소목(昭穆: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을 분별하는 등 동족집단의 본질을 여실히 나타내준다. 족보는 이처럼 동족결합의 물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동족조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가계의 기록 혹은 가족계보의 서(書)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개별적인 가계기록인 가첩(家牒)·가승(家乘)·내외보(內外譜)·팔고조도(八高祖圖) 등도 족보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가첩이나 가승은 동족 전부가 아닌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 초록한 세계표를 지시하는 것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대체로 족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족보에 수록되는 동족의 범위에 의하여 족보를 구분하면 일반적으로 족보라고 부르는 한 동족(동성동본) 전체의 계보, 한 동족 안의 한 분파(分派)의 세계에 한하는 파보(派譜), 국내 족보 전반을 망라하는 계보서의 3종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족보의 일반적인 명칭에 대해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족보를 조사하여 보면, 세보(世譜)·족보·파보를 비롯하여 60여 종이나 된다. 이를 빈도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족보의 수임).
세보(1,031), 족보(493), 파보(473), 가승(家乘)(41), 세계(世系)(32), 속보(續譜)(31), 대동보(大同譜)(31), 가보(家譜)(29), 가승보(家乘譜)(24), 계보(系譜)(23), 보(譜)(7), 자손보(子孫譜)(6), 대보(大譜)(6), 세적보(世蹟譜)(6), 종안(宗案)(5), 세덕록(世德錄)(5), 소보(小譜)(5), 지장록(誌狀錄)(5), 선원보(璿源譜)(3), 수보(修譜)(3), 약보(略譜)(3), 문헌록(文獻錄)(3), 실기(實記)(3), 가사(家史)(3), 총보(總譜)(3), 선보(璿譜)(2), 연원보(淵源譜)(2), 화수보(花樹譜)(2), 녹권(錄卷)(2), 분파지도(分派之圖)(2), 통보(通譜)(2), 가첩(2), 삭원보(朔源譜)(2), 연보(年譜)(1), 완의문(完議文)(1), 전보(全譜)(1), 지보록(支譜錄)(1), 세헌록(世獻錄)(1), 대종보(大宗譜)(1), 파록(派錄)(1), 세기(世紀)(1), 대동종보(大同宗譜)(1), 세승(世乘)(1), 세가(世家)(1), 외보(外譜)(1), 경편보(輕便譜)(1), 세첩(世牒)(1), 구보(舊譜)(1), 삼응보(三應譜)(1), 보계(譜系)(1), 세고(世稿)(1), 종표(宗表)(1), 가장보(家藏譜)(1), 일통보(一統譜)(1), 파첩(派牒)(1), 실록(實錄)(1), 외계(外系)(1), 세감(世鑑)(1), 회중보(懷中譜)(1), 파별록(派別錄)(1), 분가보(分家譜)(1), 세적(世蹟), 기타(6)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족보의 명칭을 정리하여 보면 ‘세보’라는 명칭이 가장 많다. 다음이 족보, 파보의 순서인데, 이 세 가지를 합하면 전체의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 흔하게 쓰는 ‘종보(宗譜)’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으며, 월남이나 유구(琉球)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가보(家譜)’라는 명칭이 거의 30번이나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족보는 수록되는 동족의 범위에 따라 한 동족 전체의 계보와 한 동족 안의 일파만을 포함하는 파보로 구분한다.
첫째, ‘대동보’의 명칭을 가진 것이다. 대개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대동보’, ‘대종보’, ‘대동세보’, ‘대동종보’, ‘대보’는 보통 ‘파보’보다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파보를 의미하기도 한다(예:≪김해김씨 대동보≫, ≪옥천육씨 대동보≫). 둘째, ‘대동보’의 명칭 이외에 파명을 부기한 것이다(예:≪전주최씨 문영공 대동보≫). 셋째, ‘족보’, ‘세보’의 명칭을 가진 것이다.
‘족보’, ‘세보’ 명칭의 족보는 동성동본의 동족 모두를 포괄하는 것도 있지만, 동성동본 가운데 그 일파만을 포함하는 파보도 상당히 있다. 특히, 대성(大姓)의 경우는 거의 전부가 그러하다(예:≪전주 최씨 세보≫. 전주 최씨 세보라는 명칭으로 1925년, 1928년, 1935년, 1937년, 1940년 등 15년 사이에 5회나 간행되었는데, 각기 편자와 발간지가 다르며 또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동족성원도 다르다. 다시 말하면 세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파보인 것이다).
넷째, ‘족보’, ‘세보’의 명칭 외에 파명을 부기한 것이다(예:≪해주오씨 관북파 세보≫, ≪전주김씨 세보≫(장파), ≪순흥안씨 제3파세보≫). 다섯째, ‘파보’의 명칭을 가진 것이다. ‘파보’의 명칭을 가진 파보에는 다만 ‘파보’라는 명칭만을 가진 것(예:전주최씨 파보)과 파명을 병기한 것이 있다.
그리고 파명을 병기한 파보에는 파명이 지명인 것(예:광주안씨 김해파보, 수원백씨(마산)파보, 안변청주 한씨파보), 파명이 장차(長次)의 구별인 것(예:장수황씨 장파보), 파명이 파조(派祖)의 관직명 또는 호명(號名)인 것(예:순흥안씨 참판공 파보, 안동권씨 별장공 파보)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파보는 단지 한 동족의 1분파만을 수록한다는 수록범위의 차에 의해서만 한 동족전체를 포괄하는 족보와 구별될 뿐 그 내용·형식·분량에 있어서는 양자가 다름이 없다.
마지막으로 한 동족 이상의 동족을 포함하는 국내 족보 전반을 망라한 계보서로는 ≪청구씨보 靑丘氏譜≫·≪잠영보 簪纓譜≫·≪만성대동보 萬姓大同譜≫·≪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조선씨족통보≫는 ≪동국문헌비고≫의 <성씨록 姓氏錄>에 준하여 여러 성씨의 본관과 분파의 연원 등이 기재되어 있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족보를 가진 동족의 세계표를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
족보는 서양에서도 있었다고 하나 동양의 족보와 같은 것이라기보다 대체로 개인의 가계사(家系史)와 같은 것이다. 동양에서 족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족보가 등장하고 있다. 족보의 연원을 살핌에 있어 족보의 편성·간행을 촉진시킨 우리 나라 고유의 사회적 정세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두헌(金斗憲)은 “한국에 있어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현저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계급적 의식과 당파관념이 자못 치열해짐에 따라 문벌의 우열을 명백히 하려고 하였음에 기인한다.”고 말하였다.
족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으로는 ①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③ 적서(嫡庶)의 구분, ④ 친소(親疏)의 구분, ⑤ 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시대의 묘지명 등의 사료에 의하면, 소규모의 필사(筆寫)된 계보는 이미 고려시대 이래로 귀족 사이에 작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으로 이때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 永樂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는 문화 유씨의 두번째 족보인 1562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 嘉靖譜≫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1476년 발간의 ≪안동권씨세보≫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임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조선 초기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 여흥 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成氏, 1493) 등의 족보이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족보는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는데 모든 동족이 같은 시기에 족보를 간행한 것은 아니다. 어떤 종족은 16세기에, 어떤 종족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에 비로소 족보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현재까지도 족보를 간행하지 않은 종족도 적지 않은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동족의 형성이나 조직성은 종족에 따라 시대적으로 차이가 나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동족조직이 형성된 종족도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현상일 수도 있다.
조선 초기에 출현한 족보의 발간경위에 대해서는 ≪남양홍씨세보≫와 문화 유씨의 ≪영락보≫·≪가정보≫, ≪안동권씨세보≫ 등을 통해서 대체로 알 수 있다. 1454년에 발간된 ≪남양홍씨세보≫의 서문에 의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1454년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한 사람은 시조의 16대손인데, 시간(始刊) 전에는 시조부터 9대손까지의 세계를 그린 계보도만 있었다. ② 이 계보도는 수보자(修譜者)의 종당형(從堂兄, 재종형)이 선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보관하고 있었다.
③ 9대손 이후, 즉 10대손부터 16대손까지는 기록이 없어서 9대손이 수보자의 몇 대조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첩이 있어서 이것을 여러 벽에 걸어놓고 여러 날 관찰, 연구해 보니 전체의 세계를 알 수 있었다. ④ 수보(修譜)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의 경우는 고조까지의 기록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밖에 문화 유씨의 ≪영락보≫(1423), 문화 유씨의 ≪가정보≫(1562), ≪안동권씨세보≫(1476), ≪전의 이씨초보 全義李氏草譜≫(1476) 등의 서문을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향을 알 수 있다.
첫째, 족보에는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없이 모두 수록하고 있다. 둘째, 1500년대의 족보나 1400년대의 족보를 보면, 자녀를 연령 순위로 기재하고 있다.
셋째, 1400년대에 족보가 시간된 당시나 그 이전이나 또는 그 이후에 규모가 작은 가첩 또는 사보(私譜)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가첩은 도보(圖譜)일 수도 있으며 역시 내·외손(친손과 외손)이 모두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 가첩이나 사보는 큰 족보 발행의 자료가 되었다. 넷째, 가첩에 실린 자손의 범위는 문화 유씨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외 8촌의 범위 정도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