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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천주교 의정부교구장
서울대구 교구장/관리국장/사무처장
주교회의 의장
교황청 대사관
박명기신부등에게 보낸글입니다.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2012년 이땅의 교회에 참으로 우섭고
무서운일이 일어나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농협중앙회를 김포시지부장과 파주시지부장을 역임하고 제작년에 32년만에 정년 퇴직한 사람입니다.
교회내에서는 2000년부터3년간 한국엠이 협의회교육분과장으로 발표부부에대한 교육을 담당했고 의정부교구 대표까지 했었습니다.
의정부교구 광탄본당소속이고 이름은 신동구 보나벤뚜라입니다.
내용이 장황할수도있으나
잘읽고 현명하게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비효과를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것을 저의 무덤 까지 가져가려했으나
참으로 한심한 사제들
교회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몰지각한 자들의
음해와 중상 모략을 7-8년동안 참아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기에
그동안 일기장들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하여
세상에 알리고자합니다.
기록 편의를 위해 존칭은 생략했습니다.
내용은 본인이 기록 한 것임으로 일부는 본인의 느낌이나
입장이 강하게 표현 될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내용은 엄연한 사실이며 내용의 진실성과
사실성에 대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걸어 책임을 지고자합니다.
또한 모든 사실 확인등은 관련되는 다른 분들에게 하셔도 됩니다.
(서울교구에서 관리국에서 근무하시다 의정부교구로 옮겨 근무하신
최부장님 춘천교구 화화식신부님 서울교구 유병일 신부님 김종수신부
원동일신부 김도현신부 박명기신부 김현배 베네딕도 수도회 김종필 신부님등)
시작은 한국천주교 서울교구청 관리국장으로 근무하다가
성무집행정지 되시다가 지금은 해외선교를 가신
소윤섭신부님으로 부터 출발합니다.
그 역시 약한 인간 이였고 모든게 처음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희부부(신동구 보나벤뚜라 유연희클라라)와 소신부님과는
95년 9월 실시된 서울교구 엠이주말 진행을 위한 준비를 위해
나중에 한국엠이대표와 아시아엠이 대표를 지낸
조덕 부부등과 함께 그해 7월경 처음 만나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소신부님은 현재는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된
한마음 수련장 원장신부였으며 전임신부님은 유병일 신부님입니다.
소윤섭 신부님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매사가 분명하시고
존경 받아도 좋을 만큼 열정적이며 성실한 사제로 살았습니다.
함께했던 엠이 봉사부부 7명의 멤버는 뜻이 비교적 맞았으며
친가족 이상으로 서로 친숙한 관계로 지냈고
당시 일산신도시에 살던 우리부부가 한마음수련장과
가장 가까웠기에 만나면 가끔 술도하기에
운전을 하는 분위기라 지금은 장성했지만 어린 자녀를 두고 밤늦게
운전을 해야하는 제 아내가 참으로 많은 수고를 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신앙에도 열정적이였고 무척 친숙했기에
거의 95년부터 2000년까지 몇 년간은 많으면 주1회
적어도 한달에 두번 이상은 만났고 식사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가 저의 신앙이 가장 많이 성숙된 시기였었습니다.
2000년 1월 저는 2년동안 근무하던 농협대학 교수겸 사무처장에서
승진하여 농협중앙회 일산 지점장으로 부임을 했습니다.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 걸어 다녀도 될 정도였기에
참으로 축복받은 직장생활과 신앙생활에 활력 넘치던 시절이였습니다.,
그후 2000년 9월 서울 대교구 사제인사발령에 의해
소윤섭신부께서 서울대교구 관리국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즈음 저희부부는 한국엠이 협의회 교육분과장을 맡았고
소윤섭신부님은 부대표신부를 맡으셨습니다.
교구 관리국장 직무가 뭘하는 자리인줄 처음에는 몰랐으나
관리국장 부임후에도 자주 만나면서
그 직무의 역할을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모든 재산과
재정을 관리하는 중책의 자리로서 많은 위헙성이있기에
전임관리국장께서도 불미스럽게 갑자기
자리를 비웠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되었습니다.
한마음 원장시절 소신부께서는 골프를 시작했는데
함께하던 멤버들이 대부분 골프를했기에 당시
저도 이에 자극을 받아 연습장에 나가고 몇 번 필드도 나갔었습니다.
저는 직장관계로 골프모임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저녁식사는 자주 함께 합석을 했었습니다.
그때 소윤섭 신부님의 소개로 “송완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호탕한 성격에 자주 모임에 함께했고 신부님은
그를 먼 친척 여동생의 남편으로 콘도사업을 한다고 했습니다.
신부님도 그해 어머님이 돌아가시어서 상중에 만난 친척이였습니다.
송완수 부부는 당시 각각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고급 골프웨어나 용품을 신부님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저도 그가 쓰던 고가의 듀퐁라이타를 선물로 받은 일도있습니다.
소윤섭 신부님의 여동생부부와 우리 멤버들은 자주 만났었고
당시 직장생활을 하던 소신부님의 동생 소진섭(대한항공근무)
과도 모친상 이후 가끔 만나서
우리는 가족같은 느낌을 느끼며 지냈습니다.
당시 어느은행이나 지점장들은 예금유치에 심혈을 쏟을때였습니다.
함께 모이던 분들이 주선하여 관리국장이신 소신부께서
저희 지점에 몇차례에 걸쳐 총 50억원을 정기예금을 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신부님과 함께있는 자리에서 송완수는
부동산 사업이야기를 꺼냈고 담보물은 용인인근에 있는 임야였습니다.
절차에 의해 검토를 하고 감정을 해본 결과
요구한 송완수가 요구한 25억에는 훨씬 못 미치는 물건이였기에
어려우니 단념토록 완곡하게 몇자례 설득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 송완수는 거의 하루에 한두번씩 전화로 대출을 요구했으나
그의 요구는 감당 할 수없었기에 저는 완곡히 거절을했습니다.
며칠후 부터는 소윤섭 신부님이 직접 전화로 대출실행을 부탁했고
저는 대출이 불가능하며 타당성이 없음을 누누이 설명했습니다.
거의 매일 하루몇차례 소신부님과 송완수의 전화로
2개월여 기간동안 마음이 심란하여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참다 못해 소신부님께 그가 주장하는 사업의 불확실성과
제가 조사한 그의 과거경력등에 의문을 조심스럽게 거론했으나
그때 이미 신부님의 귀와 눈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는 신부님의 완벽한 신뢰를 받고있던 상태였습니다.
소신부님은 존경하는 신부님이였고
우리지점의 가장 큰 고객인 50억원의 예금주였습니다.
2개월 여를 줄다리기를 하다가 마침내는
더 이상은 거절 할 수 없어서 편법을 취하기로 마음먹고
나름대로의 비합법적인 조치를 취하고
교구 예금을 담보로 확보하는 형식으로
25억의 대출을 실행하였습니다.(이제는 공소시효가 완료됨)
당시 송은 3개월안에 상환한다는것이였습니다.
소신부님이 고맙다는 말을 몇차례나 하며
저의 불안감을 달래주었지만 불안하기만 했고
결국 약속한 3개월이 지났으나 송의 약속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편법처리에 따른 압박감과 사후처리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수 개월 동안 송완수는 저의 전화를 피했고
결국 아내 글라라와 함께 교구청에가서 소신부님께 사실을 말했습니다.
소신부는 고생 많았다고 같이 해결해 보자고하시더니
처리를 차일피일 미루더니 본인은 모르는 일이니
송완수와 둘이서 해결하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비상조치했던 해당 부동산을 조사해보니 이미 소신부와 송완수가 공모하여 당시 서울교구와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 명동 교구청 지점에서
편법으로 5억을 대출받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고민 끝에 당시 엠이 한국대표신부이던
춘천교구 하화식 신부님께 이사실을 고백하고 대책을 상의했습니다.
당시 면담 신부님께서 사태 확대시
당시 서울교구장님께도 사실을 함께가서 밝히시겠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금융사고 발각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감에 (언론문제)
최후의 카드를 꺼냈습니다.
일단은 교구청예금이 만기되어 대출금을 상환시켰습니다.
그때서야 신부님도 당황하고 당시 관리국 최부장이 저와함께
송완수를 설득 회유하여 자금을 회수하려고
갗은 방법을 동원하여
약 한달후 송완수로부터 모든 자금을 회수하고
교구청예금에대한 이자까지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그때가 2001년 12월 6일이였습니다.
저는 사제에대한 배신감은 있었으나
고의적이거나 계획적인 것은 아니였기에
다잊고 마음을 달래며 조용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훗날 의정부교구청이 분리 독립되어
서울교구에서 이동해 온 최부장께서 그때 정말 맘고생 많이 했단
이야기를 하며 서로 계면쩍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로서 저와 관계된 소신부님과 송완수 사이의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교구청에금에대한 이자까지 제돈까지 보태서 정리했습니다.
저로서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지만
해결과정에서 소신부님과는 거리감을 갖게 되었고
송완수와는 더욱 거리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사실은 당시 몇몇 신자들도 막연하게 알았습니다.
저는 1999년 부터 당시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리더의 7습관” 강사자격을 취득하여
일반기업이나 가톨릭 교회특강을 하기도하고
엠이봉사 부부들에게 부부리더십과정을 개설해서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교회내에서의 금전적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2003년 9월 당시 서울 가톨릭 대학신학부에계시던
유병일 신부님께서는
저에게2003년 서품 새사제학교 새신부님 23분에게 리더십특강을
기획 진행을 부탁하시어
3일간 새신부님들께 리더십 특별과정을 만들어 진행해 드렸습니다.
간혹들리는 소문에의하면
송완수와 소신부님은
유대를 계속하고 골프도 자주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그분들의 관계는 불안했지만 (최부장도 알았을것입니다.)
저와는 어떤 관계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송완수가 국세청 감사를 받고
검찰에 구속 수감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쯤인가 교구청 인사발령으로
소신부께서 갑자기 본당신부로 발령이 나고
교구청 후임 관리국장신부님이 자체감사를 했단 이야기등을
나중에 귀동냥으로 알게되어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저는 지금도 소신부의 그사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모릅니다.
단지 법정에서라도 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꼭 밝혀야합니다.
저는 이미 3년전에 손을 뗀일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라도 터지지 않았으면 이마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거란 짐작도 갑니다.
그러나 저의 시련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의정부 교구가 분리되어
저희부부는 한국엠이 혐의회 교육분과장 임무를 끝내고
의정부엠이교구 대표부부로 선출되있습니다.
대표지도신부님은 김현배 신부님이였습니다.
왠일인지 김현배신부는 저희부부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제가 대표부부로 선출되지 않도록 했으나 여의치 않으니
임기 2년 동안 교활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는 사제의 탈을 쓰고있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참을 수없는 것은
제가 소신부를 망가트리고 파멸시킨 사람이라는 소문이였습니다.
물론 김종수신부등 일부 동기신부가 소신부의 하소연을 듣고
나혼자 총대를 지고 망가지길 원했겠지만 당시 그랬더라면
천주교는 엉청난 혼란에 빠졌겠지요
그 소문의 진원지가 의정부교구의 김현배신부라는 사실은
저를 혼란과 분노에 빠트리고
그때부터 신앙심은 물론 제가슴이 지울 수 없는 멍들기 시작했습니다.
불면증으로 잠을 이룰수 없었습니다.
설령 제가 그랬다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명예훼손이고
엄연한 허위사실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사제가
함께 교구 엠이대표를 하면서의 고통은 이루 말할수 없었습니다.
당초 제가 대표가 되는 것을 김현배신부가 노골적으로 반대하셨다는
이야길들었으나 저는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기에
중간에 그만 두기도 어려웠습니다.
월1회의 회의 참석과 김현배신부님과의 만남자체가 지옥이였습니다.
모든걸 포기하고 그만두려는 저와
임기를 채우자는 아내와의 갈등이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후 저는 미약핬던 신앙심이 회의에 빠지고 괴로움의 연속이였습니다.
나를 보는 눈빛 가끔 들려오는 이야기들
김현배 신부의 저에대한 비난은 게속되었고 저는 불면증에
거의 잠을 못이루었습니다.
우리부부가 교구 대표임기마치고 신부님이 교구지도신부 임기를
마치면 그냥 평온을 찾겠지하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당시 소신부님 이 다산의집에 계시는 동안
당시 법원리 본당의 주임이신 원동일 신부님과 가끔 만나고 계셨지만
원동일 신부님께도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못해드렸고
막연하게 오해가 있었다고만 이야길했습니다.
김현배신부와의 일은 본인도 다른곳에서 들었던지
본인도 마음이 아프다고 하시면
저로서는 참으로 힘든시간이였지만 법원리본당
재정분과를 맡으러 하셔서 나름대로 열심히 도와드렸습니다.
그후 광탄 본당이 법원리 본당에서 분리되어
광탄 새주임으로 김도현 신부님이 부임해 오셨는데
그런 헛소문이 있었음에도 원동일 신부는 김도현 신부님께
광탄 본당 초대 사목회장으로 저를 추천하셔서 김도현신부께서
제게 부탁을 하셨지만 김현배신부와의 관계가 불편하여
고사한바있습니다.
그후에도 들리는 소문은 여러 좌석에서 당시 안식년중이던
김현배신부가 저를 신부 잡아먹는 놈이라고 헐뜯는 소리가
수시로 들려왔습니다.
저는 고통과 괴로움과 불면증과 미칠 지경이였습니다.
그리고 냉담 몇날을 고심 끝에
저는 김현배 신부님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제발 이제는 그만해 달라고 더는 못참겠다고
계속되면 저 자신도 통제를 못한다고 사정도 하고
계속하신다면 저는 신부로서 제 명예를 훼손한것에대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하고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서야한다고 겁도 주었습니다.
계속하신다면 새로 부임하신 주교님을 찾아 뵙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때 전화를 하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까지도 계속하여
저의 이야기를 거론하며 교구청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신부 잡아먹는놈 운운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저의 신앙생활에도
상처를 노골적으로 주기 시작했습니다.
교구 엠이 지도신부 자리를 노연호 신부에게 넘겨주면서
저를 엠이에서 제명시키는것이였습니다.
교구 대표를 지낸 사람을 제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였습니다.
노연호신부를 만나이야기를 했더니
당신은 그렇게 해도 신앙심이 있으니 조용히 견딜사람이라서 그러니
선배신부 이야기를 거절 하기 어려우니 참아달라는 것이였습니다.
지금 그런 분쟁으로 노연호신부께서 대표직을 물러나고
박명기 신부님이 엠이대표가 되었지만
김현배신부께서는 호메이니처럼 조정하시며 저를 왕따하고 있습니다.
교회내에 후배 사제 조직을 이용하여 저를 음해하고
저와 가까운 신자들에게도 중상모략을 계속하고있습니다.
심지어 저와 가까이 지냈던 교우들에게도
비난을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게 신부라는 자가 할일인지요
이렇게 억울하고 기가막힌 일이 교회내에서 이루어지고있으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이내용을 밝히려고 일기장을 뒤지며 준비를 했습니다.
선택할수 있는 방법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제가 생명을 끊는 방법
2. 법에 호소하여 김현배신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방법
(이 방법은 소윤섭 신부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도
저는 이일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마당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생각 끝에 2010 년 8월경 주임신부이신
김도현 신부님을 면담하여 대충 경과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김도현 신부도 김현배신부의 그런 못된 성격을 안다.
본인도 들은 이야기가 있고 그이야길 믿지 않으니까
당신과 가까이 지내는 것 아니냐하며 위로는 했습니다.
김도현 신부는 제게 이기헌주교님을 만나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용히 모든 것 잊고 묵묵히 신앙생활이나 하라는 겁니다.
이게 제가 묵묵히 신앙생활만 한다고 사라질일입니까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 김현배가 자숙하겠지 하고 참았지요.
그러나 또 우스운일이 발생했습니다.
2010년 12월 어느날밤 한마음수련장에서 베네딕도수도회 소속
김종필 신부에게서 전화가왔습니다.
서울교구 사제 피정중인데 리더십관련 도움을 청하는 사제들이있으니
급히 와달라는 거였습니다.
내외부에 저의 고통을 숨긴채 소문없이
교회에 환멸을 느낀채 살던 저는 완곡히 거절했지만
너무나 간곡히 서울교구 사제들이라고하여 몇 번을 거절하다 만났더니
가톨릭의대 김평만신부등 3분이였습니다.
저는 몇 번을 사양했지만 부탁을하여 성모병원에 김평만신부를 찾아가
“가톨릭 메디칼 리더십”에 대하여 간단한 대화와 자문을 하고
정기적인 만남을 약속하고 다음에 만날 약속 날자를 정했습니다.
그날 법원리본당 주임이시던 이재돈 신부와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돌아온후 2011년 1월 약속 날에 찾아갔더니
김평만 신부의 표정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있었습니다.
지난번 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저를 경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게 서울교구까지 악명이 퍼진걸 그때야 알았습니다.
완벽하게 저를 교회에서 매장하려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천주교 조직 무섭지요. 사제들 입 무섭지요
그래도 참았지요
아내의 신앙심도 상처를 입었지만 아내는 열심히 다녔습니다.
작년말에는 왠일인지 교육분과장을 맡고있었는데
김도현신부께서 여성총구역장까지 맡으라고해서
제게 의논하기에 알아서 하라고했습니다.
제가 냉담중이여서 거절하려 했으나 너무 간청하여 수락했습니다.
저의 상처와 고통을 보다못한 아내가
최근에는 제문제로 김도현 본당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묵묵히 듣고 답은 없었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겠지요.
현재 한국교회 교구조직은 주교와 지구장 본당신부라인에 의한
전교와 사랑을 위한 신자 사목이 아닌 조폭운동으로 바뀌였습니다.
신학생때 부터의 용돈조달
보좌때 용돈조달 관계에 의한
일진회나 조폭 수준의 사조직으로 바뀌어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저의 행동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이겠지요
○ 그러나 누가해도 한번은 해야 할 일입니다.
○ 이제는 전쟁입니다.
○ 30년을 일요일마다 교회에 바치다가
갈곳이 없는 사람의 심정을 당신들은 모를겁니다.
○ 명예를 잃고 교회에 사제에게 배신당하고 집단적으로
왕따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시나요
○ 훗날은 한국교회가 제게 고마워할수도 있을겁니다.
○ 사제와교회는 저를 버렸지만 아직 저는 교회를 버리진 않았습니다.
○ 저는 완곡히 요구합니다.
1. 우선은 이 모든 사실을 명명백백히 조사하여 조속히 해명하십시오
2. 그리고 제 명예를 회복해 주십시오
3. 잘못이 있으면 용서를 청하십시요
4. 사제가 잘못했다면 응당한 처벌을 하십시오
(김현배.김종수.노연호.박명기.김평만.이재돈)
5. 교구와 엠이 조직에 저의 신분을 원상회복 시켜주십시오
제발로 떠날겁니다.
○ 이 글은 먼저 의정부 교구청과 서울교구청에 보냅니다
○ 소식이 없으면 5일후 교황청대사관에 보냅니다.
○ 그리고 5일후 로마 교황청에 보냅니다.
○ 그래도 소식이 없으면
대한민국의 모든 신문사에 원본그대로 보냅니다.
○ 동시에 의정부 지방검찰청에 관련사제들을
허위사실 유포에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합니다.
○ 법은 제 명예를 밝혀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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