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스포츠의 한 부류인 자동차 경주는 여타의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감동과 환희를 선사한다. 게다가 다른 스포츠 종목이 가지지 못한 오락적 요소까지 가지고 있어 한층 흥미를 더한다.
세계적으로 매우 다양한 형태의 자동차 경주가 각국의 독립된 경기 주관단체들이 개최하고 있어 그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다. 각국의 주관단체들은 프랑스에 본부를 둔 FIA(국제자동차연맹)의 관장을 받으며 자동차 경주를 개최한다. 그렇지만 미국은 FIA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자동차 경주가 활성화되어 있다.
자동차 경주도 다른 스포츠 종목들과 마찬가지로 '경쟁'에 그 본질이 있다. 드라이버의 기량과 자동차 성능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경쟁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동차 경주와 일반 스포츠와의 차별성이 있다. 자동차 경주를 간단히 정의해 보면 '사람이 동일한 코스 내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며 스피드와 운전기량을
겨루는 모든 형태의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레이스, 랠리, 타임 트라이얼, 드래그 레이스 등 다양한 형태의 자동차 경주가 세계 도처에서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자동차경주는 자동차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해 왔다. 가솔린 엔진을 얹은 최초의 자동차가 1886년 세상에 나오고, 1894년 7월에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가 프랑스 파리와 루앙간의 126km 구간에서 개최되었다. 이 경주에서 푸조와 파나르가 평균 시속 17km/h로 1, 2위를 차지하였다. 그 후 파리∼보르도∼파리 간, 파리∼마드리드 간 등 도시간의 장거리 레이스가 성행했지만 사고가 잦아서 1903년에 금지되었다.
그 무렵에는 성능을 제한하는 규정은 전혀 없었고, 거대한 엔진 때문에 속도는 100km/h까지 낼 수 있었으나 새시(chassis)가 온전하지 못해 전복 등의 사고가 연발하여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주최자에 의해 제정된 것이 포뮬러(규격, 규정)이다. 포뮬러는 레이스에 참가하는 자동차의 크기나 성능을 규제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기회를 균등하게 하고 아울러 레이스의 안전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최초의 포뮬러는 차량 중량을 1,000 Kg 이하로 제한한 것으로 1904년의 제1회 밴더빌트 컵 레이스(미국)에서 적용되었다.
최초의 자동차 경주가 열린 이후 1914년까지를 자동차 경주의 태동기로 볼 수 있다. 이 기간의 자동차 경주는 경쟁으로써의 의미보다는 유아기에 있는 자동차의 성능을 시험하고 개선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동차경주는 자동차의 성능과 규칙의 길항 작용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각 시대에 활약한 주요 그랑프리 메이커로는 1900년도부터 1910년도 중에는 프랑스의 르노(Renault), 푸조(Peugeot), 이탈리아의 피아트(Fiat), 독일의 메르세데스(Mercedes) 등이 있고, 20년대 전반에는 미국의 듀센버그(Duesenberg), 프랑스의 발로(Ballot), 이탈리아의 피아트, 독일의 메르세데스 등이 있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기 중에는 이탈리아의 알파 로메오(Alfa Romeo), 프랑스의 부가티(Bugatti) 등이 있었다. 1934년의 새로운 포뮬러부터는, 레이스를 통한 국위선양을 노리는 나치스 독일의 강력한 후원을 받은 메르체데스 벤츠 및 아우토 유니온(Auto Union)의 독일세력이 유럽의 서킷을 석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는 먼저 알파 로메오가 압도적인 강세를 보였으며, 이어서 같은 이탈리아의 새 얼굴 페라리(Ferrari)가 그것을 대신했으나 1954년의 2.5ℓ 포뮬러에서는 또다시 메르체데스 벤츠가 왕좌를 되찾았다. 1955년 르망의 사고 후 메르체데스 벤츠가 은퇴한 후부터는 페라리, 마세라티(Maserati)의 이탈리아 세(勢)와 반월(Vanwall), 쿠퍼(Cooper), 애스턴 마틴(Aston Martin) 등의 영국 세의 각축이 계속되었다. 1961년의 1.5ℓ 포뮬러 이후 영국의 로터스(Lotus), BRM, 브레이밤(Brabham) , 쿠퍼, 이탈리아의 페라리, 미국의 AAR, 이글(Eagle), 일본의 혼다 등이 참가하였으나 영국세가 압도적 강세를 나타냈다. 1966년에 3ℓ 포뮬러가 발효된 다음부터는 포드 DFV형 8기통 엔진을 사용한 로터스, 티렐, 마크라렌 등의 영국 세와 이탈리아의 12기통 페라리가 그 힘을 과시하였다. 이 밖에 프랑스의 리제 마트라, 르노, 이탈리아의 알파로메오, 미국의 섀도, 캐나다의 울프, 브라질의 피티바르디, 일본의 고지마 등이 가세하여 현재의 F1은 매우 다채롭다.
한편, 그랑프리 레이스에 포뮬러가 제정되어 거기에 참가하는 자동차가 레이스로서 전문화하면서, 일반 실용차에 의한 레이스도 실시하게 되어 1910년경에 실용성과 고성능을 겸비한 스포츠카가 생겨났다. 그 결과 스포츠카 전문 레이스로서 1923년에 프랑스∼르망 24시간 레이스, 1927년에 이탈리아의 밀레밀리아(Mille Miglia:1,000마일) 등이 마련되었고, 스포츠카에서는 알파 로메오, 부가티, 메르체데스 벤츠, 벤틀리(Bentley), 선빔(sunbeam), 탈보트(Talbot), 애스턴마틴, 라일리(Riley), MG 등이 레이스에서 활약했다.
1951년에는 득점제(得點制)로 포뮬러 레이스의 연간 최다승(年間 最多勝) 드라이버에 주어지는 월드 드라이버즈 챔피언십과 1953년에는 역시 득점제로 스포츠카의 연간 최다승차의 제작회사에 주는 월드 스포츠카 콘스트럭터즈 챔피언십이라는 두 제도가 발족되었다. 드라이버에서는 1978년까지의 26년 간 4회(1951, 1954, 1955, 1956) 챔피언의 자리를 누렸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뉴엘 판디오가 최다 기록(最多記錄)을 차지했고, 그 외에 잭 브라밤, 알베르트 아스칼리, 짐 크라크 등이 명성을 떨쳤다. 스포츠카의 세계에서는 이탈리아의 페라리가 가장 많은 챔피언십을 획득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자동차 기술이 공고해지고 자동차는 성숙단계(초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동차와 자동차 경주는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대중도 경주에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자동차 산업과 자동차 경주와의 상보관계가 더욱 확고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오늘날까지 자동차는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기술수준이 완숙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자동차 경주는 일반화되어 말 그대로 대중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이 후 자동차 경주는 석유파동, 환경문제, 신기술의 등장 등 주변환경의 변화에 순응하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왔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자동차 경주 역사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경주는 1987년 3월 일종의 랠리 형태로 진부령∼용평 구간에서 열린 제1회 한국자동차 경주대회를 효시로 볼 수 있으나 규모와 진행 등이 다소 미숙한 점이 있었다. 그 해 5월 비포장 도로이긴 하지만 최초로 서킷 경기가 영종도에서 열려 자동차 경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듯 했으나 주관 단체 부재로 인하여 공백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후 모터 스포츠에 대하여 실험적인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국제자동차연맹(FIA)의 경기방식을 채택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국제 수준으로 가고자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열악한 모터 스포츠의 환경으로 인하여 아직은 국내 수준의 경기에 만족해야 했다.
1992년 용인 자연농원에 비포장 경기장이 마련되면서 내구레이스, 짐카나, 스피드 레이스 등 다양한 경기가 개최되었다. 한편 1993년 용인 자연농원 경기장이 포장도로 공사가 시작되었는 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포장도로 서킷 및 모터 스포츠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
1993년 말에서 1994년 중, 우리나라 자동차 메이커들이 국제 자동차 경주 대회에 선별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도 국제 경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 후 파리∼다카르 랠리, 아시아 퍼시픽 랠리(APRC) 등에 참가하여 좋은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모든 모터 스포츠인들이 기대했던 포장 서킷에서의 경기는 1995년에야 비로소 열리게 되었다. 1995년 3월 한국모터스포츠 챔피언쉽 시리즈 제1전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자동차 경주는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때부터는 대중 매체인 TV중계가 이뤄져 일반인들에게 자동차 경주를 적극적으로 알리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포장 서킷의 개장은 우리나라 자동차 경주를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힘입어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레이싱 팀의 창단을 맞게 되었다. 제일 먼저 극동정유사가 회사명을 오일뱅크로 개명하면서 레이싱 팀을 창단하였다. 이어 의류회사인 인터크루, 메사, 제임스 딘 등도 레이싱 팀을 창단하였으며, 성원건설에서도 인디고란 이름으로 레이싱 팀을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초기의 레이싱 팀들은 프로팀이라기 보다는 실업팀 성격이 강한 준프로팀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다만 프로팀의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데에 그 의미를 둘 수 있다.
자동차 경주가 정례화되면서 그동안 말이 많았던 주관단체의 개편 필요성이 대두되어 모터스포츠 발전의 재도약을 추구하며 한국자동차경주협회(KARA)가 출범하게 된다. KARA의 출범으로 자동차 경주의 공인, 프로모터의 등장, 국제경기 추진 등 사업이 구체화되면서 우리나라 자동차 경주도 틀을 갖추게 되었다. 1999년에 이르러서는 국내 첫 국제경기인 '인터내셔널 F-3 코리아 그랑프리'를 창원 특설 시가지 서킷에서 개최하여 우리나라 자동차 경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제 우리나라의 자동차 경주도 연이은 국제 경기 개최와 규정의 국제화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위성 방송과 인터넷의 열풍에 힘입어 청소년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모터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우리나라의 모터 스포츠는 이제 부흥을 꿈꾸며 그에 걸맞는 준비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