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켓과 옷을 이용해 빠른 구조·수색을 촉구했던 단원고 유족들이 1일 팽목항에 이어 진도군 실내체육관을 찾아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아직도 생각에 사로잡히면 일하다가도 갑자기 멍해집니다. 뉴스를 보면 더 답답해져서 일부러 소식을 멀리하기도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손 쓸 수도 없이 발만 동동 굴러야 하는 상황도 마냥 슬프고, 이런 상황에 무능하게 변명만 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도 화가 치솟아 오릅니다. 웃어야 할 일이 있어도 함부로 웃을 수 없고, 문득 창밖에 나날이 푸르게 변해가는 봄빛마저 무심하게 느껴집니다.
마음을 달랠 무언가를 찾다가, 한 영화평론가가 추천해준 ‘래빗 홀(존 카메론 미첼 감독)’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네 살 아들을 사고로 잃은 지 8개월 된 주인공 ‘베카’는, 마찬가지로 11년 전 아들을 잃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문득 이렇게 묻습니다.
“절대 사라지지 않나요?”
“그래. 날 보렴. 11년째 지니고 살잖니. 하지만 변하기는 변하지. 그게 무게의 문제인 것 같아. 어깨를 짓누르던 바위가 언제부터인지 견딜만해져. 결국은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작은 조약돌 만하게 되지.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해. 그러다 문득 생각나게 되면 그게 거기 있는 거야. 끔찍할 수도 있지. 늘 그런 건 아니야. 그건 뭐랄까. 아들 대신 너에게 주어진 무엇. 그냥 평상 가슴에 품고 가야하는 것, 그건 사라지지 않아. 그런데 그게 또 괜찮아.”
삶에 일부로 남는 '외상', 우리의 감정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어아무리 작아져도 돌맹이처럼 엄연히 실재하는 상처가 남아 삶의 일부가 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외상’이라고 부릅니다. 심하게 칼에 베이거나 화상을 당하고 나면 눈에 보이는 상처가 남아 평생 가는 것처럼, 우리 뇌에서도 기억을 저장하는 깊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일종의 상처가 남습니다. 보통의 일상적인 정서나 감각들은 신경세포에 전기적 자극을 주고 일순간 지나가 버리겠지만, 극심한 상실감과 심리적 고통은 반복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강한 반응 패턴을 남기게 됩니다. 심리적 충격이 강할수록, 신경에 작용하는 반응은 더 강렬할 것이고, 그로 인한 상처의 골은 깊어지고 강화되기 마련이지요.
뇌에 남겨진 상처는 기억을 연상시키는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당시의 아픔을 그대로 재생하며 우리를 다시 고통에 빠뜨립니다. 진화 과정을 통해 사람 뇌의 용량은 점점 커지고 감정이나 사고 방면으로는 발달했지만, 생존에 필수적인 반응으로서 위험한 것, 부정적인 것이 뇌에 깊이 각인되는 경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당한 상처로 인한 부정적인 반응은 이성적으로 이해한다해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것, 행복감이나 보상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은 뇌 신경세포의 작용들을 일으키고, 또 그런 반응들로 인해 우리의 뇌의 패턴이 형성됩니다. 쉽게 말해 밝고 긍정적인 정서적 반응을 많이 느낄수록 뇌는 더 기쁨과 평안을 느끼기 쉬워지지만, 상처를 통해 우리의 뇌는 더 우울하고 고통받기 쉬운 뇌로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 가능성을 뇌의 가소성이라고 부릅니다.
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의 트라우마,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깊은 무의식에 남겨진 상처,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대해 뇌과학적인 설명을 해본다면 이렇습니다. 한번 생긴 상처는 강한 부정적인 감정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낼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러한 경향이 평생 고정적이지는 않아서,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고통을 완화할 수도 있고, 점차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영화의 대사처럼 앞으로 고통스러울 많은 시간을 견뎌내며 살아갈 수 있다면,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다양한 긍정적인 경험과 감정에 의해 뇌가 느끼는 고통은 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돌맹이처럼 단단하게 상처가 남아있더라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점차 가라앉고, 대신 소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며 좋았던 기억들을 추억하고 바라본다면, 점차 눈물 없이 그때를 그릴 때가 올 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나 이런 말이 당장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남겨진 피해자 가족 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날인 5일 오전 서울광장 합동분향소를 찾은 가족이 노란 종이배에 추모의 글을 적어 분향소 옆 잔디광장에 띄우고 있다. 전국 분향소 찾은 조문객 115만명 넘었다.ⓒ 김철수 기자
국민이 받은 사회적 상처, '고통과 기억의 연대'로 치유해야그렇다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은 사회적 상처는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이번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생명에 직결된 안전 문제보다는 이윤을 우선시 했던 선박회사, 안전관리 시스템의 허술함, 무능한 정부의 위기관리능력, 모든 것이 엉망이었던 이번 사건은 총체적으로 한국사회의 맨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직접 책임자를 엄벌하겠다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고 한들, 결과가 얼마나 달랐을까요?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사고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그동안 사고가 나지 않은 건 다행히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 희생자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 언제든 어이없이 사람의 가치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알고 보니 우리나라는 개개인이 알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보호 좌회전 국가’였다는 것을 세월호의 침몰은 충격적으로 일깨워주었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단순히 재난사고 뿐이겠습니까. 경제적 효율성만을 따지느라 무시되고 있는 인간적인 가치와 기본적인 원칙은 수없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 사고는 우리가 처한 위험 사회의 상황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노후된 핵발전소, 먹을거리와 환경의 오염, 심해지는 빈부격차, 일자리와 교육 문제, 육아와 복지 문제, 남북·이념 갈등, 고령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문제들을 과적하고 있는 대한민국호는 무책임한 선장에게 키를 맡기고 이유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빠른 여울목으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어찌되었든 열심히 일해서 많이 벌고 우선 내 가족이 중산층답게 잘 산다면 행복할거라 은연중에 믿었던 마음은, 사고가 터지자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불행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 과연 개인의 노력으로 행복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 믿음이 환상이었음이 드러나자, 개인이 느끼는 당혹감과 허무함은 더욱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전에 이 칼럼에서 한의사로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우울증에 대해 개인이 극복하기 위해 해볼만 한 일에 대해 조언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총체적 난국에서 우리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심리치료를 받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햇빛 많이 보는 일 따위가 아니라, 대다수의 상처받은 사람들 간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행히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또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피해자 아이들에게, 어른으로서 아이들의 삶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세상에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프로필 사진에 노란리본을 걸면서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공감하고 또 기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시금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기도 하고,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챙기기도 합니다. 당신으로부터 건네진 소소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사회의 만연한 우울감을 극복하는 긍정적인 변화들을 만들어낼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충격이 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뉴스들이 헤드라인을 차지하고, 예능 프로그램이 다시 방영되고, 브라질 월드컵이 시작되면, 사건을 잊고 점차 제자리도 돌아오겠지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되, 다만 한동안은 노란 리본을 가까이 두고 타인의 고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남겨진 자로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자세를 세상을 대하여야 하는지, 노란 리본이 이정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타인을 나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고, 타인이 행복한 조건을 만들 때, 우리 자신도 평안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공감 능력을 확장하여 타인의 고통을 곧 나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윤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저항하고,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사회 곳곳의 투쟁들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거나 응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나 자신에게 희망을 만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