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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보고서
영자의 뒤를 따라간 ‘나’
나는 충북 충주(忠州) 산(産)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충청북도 중원군 살미면 향산리 창동의 433 번지에서 태어났다. 옛날에는 충주시와 중원군이 행정구역 단위상 분리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요즈음으로 말하면 충북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창동이 된다.
창동(倉洞)은 충주를 품고 있는 대림산의 반대쪽 산자락에 터를 잡은 마을로서,
충주시에서 수안보 쪽으로 6km쯤 떨어져 있는 산촌(山村)이다.
창동 마을, 앞에 흐르는 강이 달래강이다.
마을 입구인 신작로 옆으로는 남한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달래강이 흐른다. 거기서 넥타이를 풀어놓은 것 같은 꼬불꼬불한 소로를 따라 2km쯤 우렁이속 같은 골짜기로 올라가면 양지바른 곳에 20여 호의 집들이 두서너 채씩 무리를 이루어 흩어져 있다. 대림산에는 산성(山城)이 축조되어 있고, 정상에는 멀리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봉화대(烽火臺)가 있어, 이곳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일대가 육로나 수로를 통해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철의 주산지였기 때문에 신라와 고구려가 첨예하게 대치했었고, 백제까지 가세한 격전지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을 여러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봉화대에서 내려오다 첫번째로 만나게 되어 있는 우리 마을은 마치 까치집을 연상시킨다. 대림산에서 뻗쳐 내린 지선들이 마을을 똬리처럼 감싸고 있어, 고개를 들어 휘둘러보면 사방이 산이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 하늘이 빠끔하게 올려다 보이는 영락없는 두메산골이다. 처음 봉화대를 지키는 군사들을 위해 개촌(開村)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아주 오래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래 되었다는 것이 아무 자랑거리도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그런 역사적 사실조차도 까마득히 모른채 농사를 지어 호구하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경주 정(鄭)씨 집성촌(集姓村)이며, 타성받이가 다섯 가구쯤 섞여 있었다. 산이 천혜의 요새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겨울이라도 포근하여 감나무가 잘되는 것은 좋은데, 그 산 때문에 논이래야 마당만한 천수답(泉水畓)이 고작이고, 밭도 모두가 산에 불을 질러 일군 화전(火田)이라는 점은 유감천만이 아닐 수 없었다. 척박한 입지조건은 사람들에게 몇 갑절의 희생을 요구했다.
우선 농로(農路)가 경운기도 제대로 다닐 수 없을 만큼 좁은 비탈길이어서 거름을 내거나, 열매 맺은 것을 거두어들일 때도 일일이 지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등골 빠지게 무지한 힘의 절규를 외치다가 잠들었던 날도 새벽이 되어 장닭이 홰를 치면 또 다시 일어나서 찬이슬을 맞으며 밭으로 나간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구슬땀을 흘린 후 달 뜨는 것을 보고 집으로 들어오는 식으로 천리마운동을 해도 가을이 되어 추수하는 것은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세월이 한 치의 유예(猶豫)도 없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흘러 소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던 내가, 고향을 떠나서 산 지 수십 년이 되어, 이제는 머리에 서리가 내렸는데도, 여전히 눈감으면 그곳에서 살던 시절의 기억들이 뇌리에 판화(版畵)로 찍혀 있다가, 언제 어느 때나 재생이 가능해진다.
고향의 뒷산에 묻힌 할아버지 할머니와 그들의 아들 며느리였던 내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 술 한 잔 따라놓고 절을 올리기 위해 엎드리면 눈물이 쏟아져서 빨리 일어설 수가 없다. 자식들에게만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것을 평생의 화두(話頭)로 삼고 뼈가 부서지도록 농사일을 하신 부모님 덕분에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으며, 누에 치고 담배를 재배하여 근근덕신 마련한 돈으로 배울 수 있었던 기억이 암만 날이 가도 여전히 생각만 하면 최루탄을 뒤집어쓴 것 같아지기 때문이다.
학용품은 그러고도 내 어머니가 간간히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산으로 올라가서 나물을 따다가 삶은 다음, 광주리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충주로 가지고 나가 팔아온 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험준한 산비탈을 헤집고 다니다가 가시넝쿨에 스쳐서 얼굴에 핏자국이 나고, 터진 데 덕지가 앉아 갈쿠리 같았던 손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두고라도, 우리 동네에서 충주까지 15리였는데, 왕복하면 30리다. 차비 아끼시느라 그때마다 다리품을 팔았으니, 뼈가 으서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식 위해 쓰러지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가르쳐 놓은 아들은 앞만 보고 내달리다 보니 미국이라는 나라의 뉴욕으로 달아나서 10년 가까이 혼자되신 노모(老母)를 찾지 않았었다. 고쳐서 다시 할 수 없으니 그것도 한(恨)이다.
나의 부모님뿐 아니라 담 하나를 두고 나란히 이웃해서 살았던 숙부도 그랬고, 웃말이나 아랫말에 살던 당숙들도 다 그랬었다. 자식들에게 가난만은 물려주지 않기 위해 모두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었다. 그런데도 생각처럼 대학교는 그만두고 고등학교까지 만이라도 보내서 손에 흙묻히지 않고 살 수 있는 면서기를 만드는 일도 그리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한 집에서 형이 중학교를 가면 동생은 포기하고, 형이 양보하면 동생이 다니는 식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고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공부는 못했어도 최소한 땅두더지는 되지 말라는 부모들의 뜻에 따라 객지로 보내져서 운전을 익히거나 장사길로 나서거나 공장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는 하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내 사촌과 육촌들 중 몇 명은 지금도 운전대를 잡고 있다. 개인택시를 하는 사람도 있고, 중장비면허를 가진 사람도 있고, 트럭이나 버스를 몰기도 한다. 운전이 농사짓는 것보다 나은지 의심이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면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래도 다들 자기 집이 있고, 굶지는 않고 산다.
몇 명의 육촌들은 충주의 본전 통에서 옷가게를 하는데 제법 많은 돈을 모았다고 들었다. 처음 옷가게에서 점원 일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5일 장을 돌아다니며 난전(亂廛)을 했고, 그렇게 돈을 모아 가게를 차렸는데, 상술이 좋았는지, 억척을 떤 때문이지 모두 어엿한 점주(店主)가 되었다. 그밖에도 일찍부터 장삿길로 들어선 사람 중에는 지물포나 신발가게 같은 것을 하기도 하고, 횟집을 포함한 음식점을 경영하는 사람도 몇 된다.
나와 같은 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이자 나이는 같으면서도 생일이 늦어 동생이 된 사촌은 여자여서 중학교에 보내지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당시에는 여자가 취직할 수 있는 직장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겨우 얻은 것이 충주 일대를 돌아다니는 대성여객의 차장 자리였는데, 한 푼을 헛되게 쓰지 않고 모아서 집으로 보내주었기 때문에 그 밑으로 있던 두 남동생들은 모두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막내는 대학까지 마쳤다. 스스로도 열심히 했지만 누나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촌은 양복점을 하던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착하게 산 보상을 받은 것이라기보다 열심히 산 덕분일 것으로 여기는데, 지금은 탄탄한 중산층이 되어 가끔 동부인하여 해외여행을 다니는 식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 그만하면 운명의 골짜기를 벗어나서 모두 다 나름대로 성공을 한 셈이다.
세월이 흐르다가보니 차도 다닐 수 없는 산촌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차가 없으니 공해도 없고, 맑은 공기가 지천으로 흐르며, 자연은 말없는 가운데 철칙을 형성하여 때가 되면 꽃 피우고 새 울며 기러기 날아간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못되어도 별유천지(別有天地)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서, 나도 이제는 자나 깨나, 나 태어나 자란 곳으로 돌아가기가 소원이다. 그러나 별장을 지을 적지로 소문이 나면서 그런 벽촌까지 투기꾼들이 몰려와 땅값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그래서 한두 푼 가지고는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아주 인연이 없던 사람들이 새로 집을 지은 경우는 적고, 대개는 헐값에 땅을 팔고 미련 없이 골짜기를 떠났던 사람들이 팔았던 돈의 몇 곱절을 더 주고 사들여서 집을 지은 다음 아주 돌아와서 살지는 못해도 이따금 찾아가서 쉬어가는 곳으로 변모시키는 중이다.
이렇듯 살아 있으면 가난의 족쇄를 좀처럼 벗어날 것 같지 않았던 6〜70년대가 가고, 그렇게 20세기가 사라져가고, 새천년이 열리면서 대부분이 옛말하며 살게 되었는데, 일찍 죽은 사람들은 땅에 묻힌 뒤, 혹은 재로 만들어져 뿌려진 다음, 천당이나 극락으로 가서 천상락(天上樂)을 누리는지,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져서 여태까지도 벌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허공중에 흩어져서 소멸되었는지, 한번 떠난 뒤 소식을 전해주는 이가 없어, 당최 어떻게 되었는지 알길이 없다.
나에게 재종형 뻘이 되는 형님 한 분이 60년대 후반기에 농촌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가난하지만 죄는 짓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를 발칵 뒤짚어놓은 적이 있다. 그도 그렇게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난 지 이제는 수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편지 한 장을 보내주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때 ‘나쁜 놈’이라고 했었다. 부모 두고 떠나는 놈은 살아 있어도 양식만 축낼 인사여서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것이 나은 천하에 몸 쓸 놈이라고들 했었다. 그때만 해도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는 유교의 덕목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 가슴에 대못을 치고 음독자살한 청년에 대하여 그런 비난이 쏟아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절망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당사자의 어떤 절망도 부모 두고 목숨 끊는 이유는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적어도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을 앓아서 부모나 자식 두고 죽음을 택하는 사람처럼 턱없이 심약했던 것은 아니지 싶은데,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자살을 했다는 말을 들을 때면 그 때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형님이 떠오르며,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번에 작정을 하고 한번 헤아려 볼 요량이다.
형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서울로 올라가서 성수동 어디인가에 있던 무슨 직물공장에서 스웨터 같은 것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었다. 지금은 그런 제품들이 메이드 인 차이나의 저가 물량공세에 밀려 사양 산업이 되고 말았지만,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쳐도 팔아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때, 가내수공업 수준을 겨우 벗어난 공장에서 만드는 옷이나 가발 같은 것이 제법 오랫동안 수출 주력 상품 대접을 받았었다. 그러니까 그 형님은 농사꾼은 되지 말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서울로 가서 수출산업의 역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그 형님은 서울에 진출한지 몇 년째가 된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서울과 충주사이에 고속도로가 뚫려 1시간 30분 정도면 오갈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은 털털거리는 완행버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시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을 만큼 멀리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먼지가 들어오던 차의 창가에 기대앉아 밖을 내다보면 온통 논밭뿐이었는데 지금은 연변에 공장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서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나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은 이럴 때 써도 무방할 것 같다.
오고가기가 쉽지 않았으니 형님은 서울로 간 다음 일 년에 두 번 추석이나 설이 되어야 고향을 찾아 왔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나이 차이도 있어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마주치면 그저 인사나 하는 것이 고작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 졌을 때 왜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서 목숨을 끊었는지 땅찜도 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오래 흘렀지만 얼굴이나 모습은 생각이 난다. 서울 수돗물을 먹은 그의 얼굴색은 씻은 배추 잎처럼 뽀얗으며, 입성도 옷을 만드는 일에 종사해서 그랬는지 시쳇말로 패셔너블한 편이었다. 몇 년의 서울 생활 끝에 신검(身檢)을 받았고, 방위(防衛)로 근무하라는 명이 떨어져서 일시적으로 귀향해 있던 때였다. 집에서 중대본부가 있던 면소재지까지 매일 출퇴근을 했었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만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니 동창들을 만나 술 마실 일이 많을 거라는 식으로 여겼지만, 인사불성이 되어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당숙모께서 묵과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있는지, 어디 속 시원하게 말이나 좀 해 봐라?”
“살기 싫어서 그러는 겁니다, 엄니!”
“살기 싫다니, 젊으나 젊은 것이 늙은 에미 앞에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야. 이런 못난 놈 같으니라고!”
“네에〜 전 못난 놈입니다. 그러니 여자한테 채이지요.”
“뭐야,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여자한테 채였어! 도대체 어떤 눈깔 삔 년이 너 같이 잘 난 사내를 걷어차고 떠났다는 게야?"
"잘 나간 쥐뿔이 잘 나요."
"이 놈아, 여자가 딴 맘 먹고 거무신 꺼꾸로 신었다면, 어떻게하든 그 보다 더 잘난 여자를 만나서, 여보라는 듯이 살겠다는 각오를 해야지, 술독에 빠져 신세한탄이나 한단 말이냐. 뭐, 살기 싫다고? 예끼 이 창아리 없는 놈, 깜냥이 그것밖에 안된다면, 나가 없어지던지, 죽던지, 내 눈앞에서 얼쩡거리지도 말아!”
대충 이런 식의 언쟁이 오고 갔다고 한다. 어머니가 정말로 자식이 죽어 없어지기를 바래서 눈앞에서 얼쩡거리지도 말라고 했을 리는 천부당만부당하다. 속상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옥다구니를 하고 난 다음 방밖으로 나갔던 그는 파라치온이라는 독성이 강한 농약을 찾아서 벌컥 마셔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을 만큼 취해 있었던 때문일까.
부모가 나가 없어지라고 한 말에 고까움을 느껴 불쑥 치미는 충동을 자제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 중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 술 마셨다고 농약 먹으면 죽는다는 것 몰랐을 리 없고, 부모 말에 반발하기에는 철이 없지 않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 모두가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술 마시면 이성을 잃기 쉽고, 나이 들어도 부모 앞에서는 마냥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것이 자식인데, 상처가 되는 말을 들었으니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완전하게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런 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농약을 마신 직후에 피를 토했으며, 급히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나섰지만, 구급차도 올 수 없는 산골인 것이 결정타가 되어, 들쳐 엎고 냅다 뛰어 가는데, 골짜기를 다 벗어나기도 전에 절명(絶命)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살아서 집으로 다시 들어오지 못했다.
시신은 신작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의 길가에 눕혀졌고, 가마니를 덮어놓은 상태에서 경찰에 신고 되었다. 마을마다 농약 먹고 죽는 사람이 심심찮게 나오던 때여서 그랬던지, 경찰은 부검을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육안으로 보아도 타살의 흔적이 없고, 농약에 의한 음독자살 징후만 보이니 까탈을 부리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부검(剖檢)을, 죽은 사람 또 죽이는 행위라고 여겨, 달리 의혹이 가는 점만 없으면 두 번 죽게 하는 신체훼손 행위를 자제하는 편이었다. 사망진단서는 나중에 경찰의 소견을 참고로 하여 공중보건의가 발부해 주었던 것으로 안다.
우리 고향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이 아니라 밖에서 죽은 사람은 집으로 다시 데려오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그 형님은 죽어 아주 이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고하면서도 집을 들려가지 못했다. 가마니로 덮어 놓았던 시신은 거기서 화장터로 실려 갔고, 한 줌 재가 되어, 서울로 흘러가는 남한강에 뿌려지는 것으로 장례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그렇게 떠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죄를 물어 염라대왕으로부터 지옥으로 보내지는 벌을 받았는지, 죽으면서까지 잊고 싶었던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졌는지, 소통이 되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뒤 살아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우선 내가 겪은 고역부터 짚고 넘어간다. 나는 집에서 충주까지 15리 길을 매일 뛰어다니는 방법으로 중학교를 다녔었다. 일 나가는 부모님처럼 첫새벽에 집을 나서서 어두워져야 돌아오고는 했는데, 혼자 어둠속에서 시신이 놓여있던 자리 옆을 자니가려면 농약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자연 머리털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뻗쳤다. 죽은 사람이 무슨 힘이 있어 잘못도 없는 나에게 해코지를 할까만 그 옆을 지나가려면 왜 그렇게 무섭고 싫던지 어느 때나 진땀이 흐르고는 했었다.
그러나 내가 공포에 가까운 무서움을 느꼈다고 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아들을 죽게 한 죄인을 자처하여 식음을 전폐한 당숙모에 비하면 그건 그야말로 새발에 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연풍에서 시집을 왔다고 하여 연풍댁이라고 불리던 당숙모는, 아들 죽은 뒤 몸져누운 지 한 달이 넘어도, 미음조차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었다. 그래서 다시 초상을 치를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신의 큰아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었다.
“부모 두고 죽은 놈만 자식이란 말입니까. 어머니 이러다가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그래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자 마을의 제일 어른이었던 나의 조부(祖父)께서 해결사로 나서게 되었다. 나의 조부는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판관(判官)이었다. 분쟁이 벌어져 법정에 가서 시비를 가릴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사람들은 나의 조부를 찾아오고는 했었다. 돈 들여서 재판해봐야 판사의 판결이 조부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만큼 공명정대(公明正大)하였고, 지혜로웠던 현자(賢者)며, 그만큼 누구나 머리를 숙이는 권위를 가지고 있던 분이었다.
자식 앞세운 부모가 응당 아파할 수밖에 없는 극한점에 이를 때까지 지켜보시다가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되겠다 싶어졌을 때 조부는 당숙모를 찾았고, 나는 조부께서 어떤 말로 설득을 했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이 찾아와서, 조부가 다녀가신 후에 수저를 들었다는 경과보고를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조부께서 꾸중을 한 것이 아니라 당숙모의 가슴을 녹여주었거니 여기고 있다.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천만년의 한기(寒氣)와 침묵으로 동결(凍結)시킨 저 북빙양의 어름보다도 더 차가운 덩어리가 하나 생기는 것이 아닐까.
당숙모는 문중(門中)의 최고 어른이 손수 납시어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건네자 일단 한 걸음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후 당숙모가 살아 있을 때까지 누구와 어울려 농담을 하거나 웃는 것을 보지 못했없다. 차가운 덩어리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견고해져서 끝끝내 녹여 내지를 못하고 말았다. 당숙모는 아들을 바로 뒤따라가는 것보다 더 힘든 형벌을 스스로 택하여 죽는 날까지 죄인을 자처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식 앞세운 당숙모의 심정을 헤아려 재종형의 친형님에 대해서는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당숙모만은 못했을지라도 동생을 보낸 사람도 망극한 슬픔의 늪에 빠져 힘들어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약 먹은 동생을 등에 들쳐 엎고 냅다 뛰었던 사람도 큰형님이고, 그렇게 비호(飛虎)처럼 내달렸어도 살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등 뒤에서 피를 토하며 축늘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큰형님은, 죽은 동생을 화장터로 싣고 가 재로 만든 다음, 강물에 뿌리는 일도 해야 했었다. 백형(伯兄)은 부모 맞잡이라고 하는데, 아저씨가 세상을 뜨신 후 아버지처럼 동생들 건사했던 백형이었으니, 모친(母親) 때문에 드러내놓고 울지도 못했지만, 비통한 마음으로 동생을 보내는 의식을 치렀을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박목월 님이 사랑하는 동생을 먼저 보낸 다음 비통한 심회를 담은 『하관(下棺 』이라는 시를 지었다.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소서.
머리밭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 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하관하는 모습
'깊은 가슴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죽은 동생의 시신을 관에 넣어 하관을 하면서, 시인은 절대자에게 아우의 죽음을 받아들여 주십사 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달한다. 그리고 아우의 영생과 편안한 안식을 바라는 종교적 기원으로 성경을 넣어준 다음 한 줌의 흙을 관 위에 뿌린다. 아우를 저승으로 보낸 후, 시인의 꿈 속에 동생이 자주 보인다.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의 동생은 ‘턱이 긴 얼굴’로 나타나서 ‘형님!’ 하고 부른다. 그때마다 매번 생시인 듯 반갑게 ‘전신으로 대답’하며 아우를 맞이한다. 그렇지만 아우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인은 죽은 사람과 교감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해 비감에 잠긴다. 둘 사이에는 이미 서로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있는 곳은 ‘눈과 비가 오는 세상’이며, 아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눈과 비’는 계절의 변화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세계를 표현해 주고 있다. 죽음의 세계는 이미 계절의 변화마저 초월한 곳이다. 볼 수는 있으되 어디에 있는 지 모르는 곳,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길을 하고 형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다.
위 시는 내 목소리가 미치지 못하는 공간으로 사랑하던 아우가 떠난 지 1년 정도 후에 쓰여졌다고 한다. 1년 동안 아퍼하며 내면을 다스린 결과인지, 슬픔과 생사의 차이를 매우 절제된 언어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절제되어 있기에 오히려 곰씹을수록 슬픔과 아픔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랑하던 육친을 사의 세계로 떠나보내는 의식을, 그 슬픔을 절제된 언어로 이 처럼 잘 표현해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시인보다 하관도 하지 못하고 불에 태워서 동생을 보낸 사람이 더욱 애처롭다. 벌컥벌컥 술을 마시는 것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무식한 농부의 가슴은 꺼멓게 타다못해 숫제 석탄과 같아졌을 것이다. 어째서 그는 이렇게 낳아 길러준 어머니의 가슴에는 대못을 밖고, 형의 가슴을 석탄으로 만들면서 홀연히 떠나간 것일까.
고인이 서울에 있을 때 어떤 아가씨와 교제했을 것이라는 정황은 대강 알려진 바 있는데, 나중에 떠난 여자와 잠시지만 동거를 했었다는 것까지는 밝혀졌다. 직장에서 사귄 친구라는 사람이 친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추궁에 못이겨 알려준 사실이었다. 동거녀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어서 백방으로 찾아다니던 중, 방위 소집 명령을 받고 귀향했다가, 약을 마신 거란다. 여자의 배신이 형님에게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심증이 간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상처가 아무리 깊다고 해도 사랑 때문에 부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저지를 수 있는 거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그 상처가 죽음을 택할 만큼 깊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서울역 근처에서 데모대를 향해 쏘아대는 페파포그를 피해 행선지도 모른 채 한 시내버스에 올라 탄 적이 있다. 날카롭게 달려드는 호각소리를 피해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정류장 옆을 지나가게 된 나는, 막 출발하려던 시내버스가 눈에 들어오자, 잽싸게 그 안으로 몸을 피신시킨 것이었다. 눈물 콧물을 훔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가 을지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제야 종점이 뚝섬인 노선버스를 탔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목적지와 전혀 상관이 없는 뚝섬으로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하차를 해야 마땅했음에도 그냥 있었던 것은, 데모현장에서 가급적 빨리, 그리고 멀리 사라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당동을 통과한 버스가 왕십리를 지나 한양대학교 앞으로 해서 다리를 건너더니 머지않아 종점인 뚝섬유원지에 도착하였다.
플라타너스가 도열해 있는 유원지의 상공에는 깃털구름이 한가로이 떠있었다. 석양에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구름과 미풍에 너울거리는 플리타너스 잎새들과 한가롭게 먹이를 쪼는 비둘기들이 함께하고 있는 뚝섬유원지에는 데모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평화로움이 머물러 있었다. 같은 서울하늘 아래 이렇게 서로 다른 공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경이(驚異)였다. 나는 모처럼만에 천천히 나무들 사이를 산책하는 호사를 누리다가 유원지의 굴다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이내 무슨 직물, 무슨 섬유니 하는 간판들을 보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이곳이 자살한 내 재종형이 수출을 위해 몸부림쳤던 현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쟁터는 평화로 위장해 있다가 나를 기습해 왔다.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던 뚝섬 유원지
뚝섬에서 바라본 남산. 숲이 이렇게 변했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뚝도 극장 부근으로 해서 재래시장을 지나 어디를 어떻게 헤매는지도 모른 채 지향 없이 걷는데, 어둠이 내리면서 골목 골목으로부터, 퇴근을 맞은 남녀 공원들이 쏟아져 나와,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의 사투리가 뒤섞여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포장마차를 나선 여자가 몇 걸음 옮겨놓지도 못하고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동행한 남자가 말없이 여자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어루만져줄 수 있으니 행복한 측에 속했다. 짝이 없어 혼자 고주망태가 된 남자가 여인숙 골목으로 들어서자 얼굴에 화장을 덕지바른 여자가 달려와 부축하면서 말했다. 오빠, 오빠! 싸게 해줄게. 놀다 가〜.
나는 이때 얼마 전에 읽었던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를 떠올렸다. 소설 속에서 영자는 자살을 했었고, 이날 성수동에서 만난 ‘영자들’은 자살은 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더 살고 싶은 미련이 없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재종형도 죽지 않고 다시 서울로 왔다면 저들처럼 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성수동에 와서, 추석이 되어 때 빼고 광내고 고향을 찾아왔을 때의 형님은 멀끔한 신사였지만, 서울로 돌아와 수출역군의 전사(戰士)로 변하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전쟁을 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 농촌에서 땅두더지처럼 일하는 것만이 힘들었을까. 서울 가서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깜짝쇼를 한 것뿐이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도처에 시골에서 올라온 영자와 창수가 찢겨져 흘린 피가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영자는 농사지을 땅이라고는 두 뙈기의 밭밖에 없어서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고향을 떠나, 배곯지 않으려고 식모살이를 나섰다가, 자기 집 요강단지로만 알아서, 하루는 주인이 올라타고 다음 날은 피도 안마른 아들이 그러는 식으로 짓밟힌 뒤, 버스 차장이 된다. 영자는 만원 버스에서 튕겨져 나왔을 때 뒤따라오던 삼륜차에 치어 팔 하나를 잃고 외팔이가 됨으로써 더욱 처참한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생계조차 막막해진 영자는 청량리 오팔팔에서 몸을 팔고 있던 고향 언니 춘자를 찾아 간다. 메시아가 와도 구원할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막장에서 작중 화자 목욕탕의 때밀이인 ‘나’를 만나 기적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꿈꾸게 되는데…….그녀는 살림차릴 방 하나를 얻을 수 있는 목돈을 만들기 위해 몸을 팔아서 번 돈을 나일롱 아줌마에게 맡겨 놓고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날 서울시에서는 오팔팔을 블도져로 밀어서 철거한다는 삼엄한 포고령을 내린다. 입구를 봉쇄하고 창녀들을 잡아가기 시작하자,나는 베트콩들에게 생포된 아군을 구출하는 것 같은 처절한 작전을 개시하여,영자를 탈출시킨 다음 목욕탕으로 데려온다. 시퍼렇던 포고령의 위력이 한 풀 꺾였을 무렵, 영자는 창녀들이 빠져 나가면서 폐허가 된 오팔팔로 나일롱을 만나러 간다. 집주인인 나일롱이 보상을 받지 않고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일롱에게 맡긴 돈만 찾으면 살림을 차릴 수 있는 방 하나는 얻을 수 있을 테니, 눈치를 보며 목욕탕 신세를 지고 있는 영자로써는 쉽게 그 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팔팔 일대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자가 걱정이 되어서 달려갔던 나는,구경꾼들의 전렬(前列)에 나와서 화기에 얼굴을 익히며 구경이나 할 밖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설마 영자가 저 불길 속에 있으랴 고 생각한다.
나는 날이 샐 무렵, 잿더미 속에서 길거리로 끌어내 놓은 세 구의 시체를 보았다. 그 화재 속에서 타죽은 사람은 모두 네 명이라고 했다. 한 명은 구출하여 인근 병원까지 옮겼는데, 병원에서 숨졌노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나일롱 여편네였는데, 불은 바로 그 여편네의 집에서 갑자기 솟아올랐다고 했다.
세 구의 시체들은 마치 화염방사기에 타죽은 베트콩처럼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물집이 터진 자리는 군데군데 시뻘겋게 익은 살덩이가 드러나 있었다. 그 세 명 속에서 영자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영자는 외팔뚝이었으니까. 불에 그슬려 알아 볼 수 없게 되었어도 영자의 시체에는 역시 팔뚝 한 짝이 없었다. 나는 영자의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이를 악물어 울음을 삼켰다.
“이 바보야 누가 널 보고 이 불길 속으로 뛰어 들랬어. 누가.” 그러나 영자는 마치 장난기까지 섞인 말투로 “불은 내가 질렀는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나라도 지금 심정 같아서는 어디라도 한 군데 싹 쓸어 불질러버리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소설은 네 명이 불에 타죽는 처참한 상황을 연출하며 끝난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근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많은 시골 여성들이 상경하여 겪는 좌절에 대한 보고서다. 70년대 우리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살림을 차릴 수 있는 방 하나를 얻기 위해 몸을 팔아서 마련한 목돈도 착취당할 수밖에 없던 영자의 아픔이 있었다.
속성 산업화 시기의 폭력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 버려진 하층민들이, 어떤 식으로 억압당하고 꺾이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한국 경제의 성장 이면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영자가 불쌍해서 부지불식간에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나 성수동에 와보고는 영자도 불쌍하지만 뒤에 남은 작중 화자인 나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창녀지만 의지가 되었던 영자가 죽어서 떠난 뒤 혼자 남은 내가 무엇을 희망으로 알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죽어서 떠나는 것이나 동거를 하다가 제 갈 길로 가버린 것이나, 뒤에 남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 같이 버려지는 것이었다. 버려졌다는 상실과 소외를 견디기가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떠난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저 나름대로 절박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힘든 공장일이 아니라 편한 방법으로 빨리 돈을 벌고 싶어서 웃음이나 몸을 파는 일을 선택해 떠난 것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60년 대 말까지만 해도, 성수동이나 구로공단에서 재봉틀을 밟아대고 염색을 하고 세타를 짜던 누나들이, 제 몸뚱이 하나 편하자고 보다 좋은 조건을 따져서, 남자를 배신하고 떠나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당장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 병원에도 가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병든 부모나, 학비를 대주어야 하는 동생들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농부를 부모로 둔 탓에 딸 노릇하고 누나 노릇하려다보니, 사랑은 뒷전으로 밀어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주어야 할 일이다.
그렇더라도 '그대 빈자리'를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떠난 여자 그리워서 그토록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을 마셔댔던 것으로만 알아서도 안 될 일이다. 술은, 떠나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이 괴로웠고, 여자가 필요로 하는 돈을 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서도 마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형님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와의 말다툼이 원인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비극은 가난이, 운명의 골짜기에서 태어났을 때 이미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자살의 형식을 빌렸지만 농촌이 붕괴되고 급속도로 산업화 되는 과정 속에서 겪어야 하는 시대적 아픔을 삭이지 못한 데 따른 혼돈의 한 현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국은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지만 그들에게 마음 놓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나 물질적인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젊은이들이의 희생해서 거둔 열매를 일부 자본가가 독식하였지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부당함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페파포그를 쏘아대는가 하면, 주동자들을 잡아다가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공산주의자들이라는 누명을 씌우기 위해 모진 고문을 가했었다.
소설에서는 영자가 나를 두고 먼저 죽는데, 영자가 떠나도록 만드는 암담한 현실을 아파하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지면, 현실에서의 나도 농약을 벌컥 마셔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좀 참았으면, 인내할 수 있었다면, 설움의 날이 가고, 가난의 굴레도 벗어내고, 그런대로 한 세상 살만해질 수도 있는데…….시대가 만든 질곡(桎梏)을 벗어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듯싶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를 한다고 해도 그의 죽음을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박목월 님의『하관(下棺) 』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한 번 이별을 하면 생자(生者)와 사자(死者)가 함께하는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자가 사자에 대하여 생각할 수는 있어도, 그래서 꿈에 볼 수도 있지만, 사자는 생자에게 안부도 묻지 못하며, 자기 소식을 전해줄 수도 없다. 죽음을 통한 이별은 그 한 번으로 다시는 소통할 방법이 없는 영원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이것이 최선인가.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일까. 한번 선택하면 도리킬 수 없다는 것 등을 충분히 따져 보아야 하는데, 술을 마셔댄 이외에 진지하게 고뇌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목숨을 그토록 초개처럼 내동댕이 치는 것은, 적어도 살고 싶어서 몸부림쳤던 내 숙모를 생각하면, 생명에 대한 모독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제 2탄으로 8남매의 자식을 두고 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죽은 내 숙모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계속적인 성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너무 장문의 글이라 단박에 읽질 못하고, 한 줄 한 줄, 써내려가신 스님의 글속에 제가 앉아 머문듯...아련하고도 횅한 바람 한자락 불고 지나갑니다. 고향을 만나고...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고뇌를 만나고..인연을.. 그리고 운명이란 단어도 되짚어 봅니다.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글 자주 뵙길 청합니다. 건필.건강을 기원합니다 ()
꼭 써야지 했던 소재여서 오랫동안 가슴에 있었던 것인데도 막상 써보니 쉽게 쓸 수 없는 글이었습니다.
이제서야 이 글을 접했습니다. 가슴이 아련합니다.가슴아픈 가족사를 써내려 가신 스님의 마음을 조금 헤야려 봅니다.
무언가 느낀 것이있다면 쓴 사람로써 더 큰 보람은 없을 것입니다. 늘 관심을 가져 주어서 고맙습니다.
죽은 영자보다 살아남은 영자가 더 아픈 이런 이야기는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립니다. 암으로 투병하다가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신거죠? 제 2탄을 보채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2탄 3탄을 읽을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여름에 읽었다가 오늘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그때보다 가슴이더 아려옵니다...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촌 제게는 삼촌이었는데 큰삼촌께서 농약을 마셔 자살을 하셨습니다..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제가 염을하는걸 보았고 그주위에서 슬피울던 가족들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그 삼촌의 아들 딸이 저보다 서너살 어렸는데...왠지 내용이 그 시대의 가난때문에 겪은 아픔이 비슷한거 같습니다...
아버지 4촌은 나에게 5촌 당숙입니다. 어쨋거나 농춘의마을 마다 농약 먹고 죽은 사람이 한 두 명은 있었지요. 이유도 가지가지겠지만 뼈꼴 빠지게 농사지어봤자 느는 것이 빚이요 한숨이어서 콱 죽어버린 사람도 있고, 신병을 비관하거나, 계모의 눈총이 너무 싫어 꿀걱 농약을 마셔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어릴적 제가 살았던 마을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는 듯한..
내 친정마을 칠십가구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깊게 헤아리지 못했던 이웃들의 아픈사연들을 어릴적엔 몰랐었던것을
제 나이들면서 친정마을 경로당의 할머니들의 얼굴마다에서 읽어 내려가고 있는
현재의 심정을 대신 표현하신 것 같은 느낌으로 아픈마음으로 또 한번 읽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