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한국선현현창회 회장 나가도메 히사에씨가 대마도 원통사에 건립된 충숙공 이예 선생 공적비 앞에서 이예 선생의 업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마도에는 통신사와 관련되는 역사 문화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명소가 마련됐다. 바로 원통사(圓通寺) 앞 마당에 우뚝 선 '통신사 이예 공적비'이다.
지난달 21일 통신사 이예(李藝)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대마도 미네쵸(峰町)에서 거행됐다. 제막식에는 한국에서 이예 선생의 후손인 학성이씨(鶴城李氏) 후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충숙공이예선양회(忠肅公李藝宣揚會· 회장 이두철) 회원 80여명과 정영호 단국대 명예교수, 전북대학 한문종 교수 등 관계학자들이, 일본에서는 대마시의회 의장, 후치가미 기요시(淵上 淸) 전 이주하라 정장과 다치바나 아츠지(橘 厚志) 전 부정장, 그리고 대마한국선현현창 회장 나가도메 히사에(永留 久惠) 선생과 현지 주민 다수가 참석했다.
공적비문은 일본측과 한국측 학자가 각각 기초했다. 일본측 나가도메 선생의 기록을 소개한다.
"조선왕조 전기,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 국왕 사절로서 40여회 일본에 파견된 이예는 일본 왕복의 도상인 대마도에 기착했을 뿐 아니라, 대마도까지 정사(正使)로 여러 차례 내방했다. 이예의 공적은 조선 포로의 송환과 아시카가(足利) 장군 등에 기증한 대장경(大藏經)의 전달 등 양국 간 문화교류에 많은 기여를 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대마도 입장에서 본 최대 공적은 대마도와 조선간의 '통교무역(通交貿易)'에 관한 조약체결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이로 인해 왜구가 진정되고 대마도에 밝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당시 대마도주는 소오가(宗家) 7대 사다시게(貞茂), 8대 사다모리(貞盛) 시대였으며, 이 곳(원통사 경내)에 국부(國府·대마도 정청)가 있었으며, 사다시게가 사망했을 때 조문사절로 파견된 이예는 원통사에 이르러 향전(香典)을 베풀고 제를 올린 것으로 조선국왕에게 보고한 기록이 있다.
이예가 송환한 포로의 수는 667명에 달했으나 자신이 어릴 때 왜구에게 납치된 모친과는 결국 재회할 수 없었다는 사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예의 경이적인 행동은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간 해적과도 접촉해, 원념(怨念)을 초월하여 정의(情誼)를 피력하고 크게 공헌한 것을 생각할 때, 그 인품과 한없이 넓은 도량에 감동하고 경의를 표하며 공적을 현창하고자 한다"
사실 오늘날 조선시대의 통신사라하면 임진왜란 이후 에도시대에 12회에 걸쳐 파견된 사절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조선 초기에도 이예 선생과 같이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즉 외교사절이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우리나라에서나 일본에서도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작해야 신숙주, 송희경 등 당대 저명한 조정신료나 선비 정도지만, 이예 선생과 같이 큰 공적에도 불구하고 저명인사의 그림자에 가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훌륭한 분들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 공적비 제막식을 계기로 또 한번 깨달았다.
외교관 출신인 나 자신도 이예 선생과 같이 다대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 역사적 인물을 처음 알게 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알고 보니 그의 외교활동은 실로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다.
이예 선생은 1373년(고려 공민왕 22) 울산서 태어났다. 8세 때 어머니가 왜구에게 잡혀가는 슬픈 사연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어쩌면 그는 평생 잃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멀리 바닷길을 헤치고 왜구와 싸우며 그들과 타협해 많은 포로를 구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1396년(태조 5) 그가 25세 때 울산 기관(記官)으로 근무하면서 울산군수 이은이 대마도로 잡혀갈 때 자진해서 따라간다. 이듬해 이은과 함께 풀려나서 귀환, 관직을 얻게 된다. 이 때도 대마도에 감금되어 있을 지도 모를 어머니를 찾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예는 그 이후 1400년(태종 즉위)인 28세 때부터 10년간 5회에 걸쳐, 회례사를 수행하거나, 자신이 회례관, 통신사 부사 또는 회례사 정사로 파견돼 대마도, 일기도 등지에 끌려간 포로 약 500명을 구출한다. 그 동안 관직도 종5품에서 정4품으로 승격됐다.
44세 때는 통신관으로 유구국에 파견되어 왜구에게 잡혀간 백성 44명을 송환했고, 46세 때는 대마도에 경차관으로 파견돼 화통과 완구를 동철로 제조하는 기술을 도입했다. 이어 50세와 52세 때는 회례사 부사로 일본 국왕에게 파견돼 우리 대장경을 사급했으며, 1428년과 1430년(세종 10~12) 56세 때와 58세 때는 다시 통신사 부사로 다녀와서 우리나라에 일본식 자전 물레방아를 들여왔다.
또 화폐의 광범위한 유통,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을 추진했고, 또한 '단단하고 정밀하며 가볍고 빠른 선박'의 제조기술 도입을 세종에게 건의했다. 1432년(세종 14) 그가 60세가 되던 해에는 회례사 정사로 일본 국왕에게 파견돼 대장경을 사급했으며, 1438년(세종 20) 66세 때 첨지중추원사(정3품)으로 승진해 대마도에 파견됐다. 1443년(세종 25) 때는 자진하여 대마도체찰사로 현해탄을 넘어 포로 7명을 구출하는 한편 왜적 15명을 생포해 왔다. 이 공으로 동지중추원사(종2품)으로 승진했으며, 대마도에서 발급하는 입국허가제를 중요골자로 한 계해약조(癸亥約條) 체결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