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비가 시작하던 날 아침, 긴 겨울잠에서 헤어나듯 웅천왜성을 올랐다.
좋은 엄마도 아니면서 방학은 그저 좋은 엄마 흉내라도 내고 싶다.
엄마가 나에게 그러했듯, 하루 세 끼 따뜻한 끼니를 마련해 따시게 먹이고 싶다.
아이들 방학은 그래서 나도 방학이 된다.
아시는 분의 부름으로 방학으로 잠수 하다 잠시 수면위로 떠 오른 날이었다.
전화를 받다 보니 도지정 기념물 79호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정확한 왜성의 소재지는 경남 진해시 남문동 산211-1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 소풍을 왔던 곳! 그때는 의미도 모르고 오르는 길의 힘들어 했던 기억들 뿐.

발 밑으로 느껴지는 폭신함과 황토의 느낌이 좋다.
약 10분 쯤 오르니 아늑한 공간에 작은 체육단련시설들이 몇 개 놓여 있다.
쑥새일까? 온갖 산새들 소리에 하늘을 한참 올려다 보고나니 뒷목이 아프다.


땅을 보며 풀을 보다가, 풀에 더불어사는 작은 생명들을 보다가,
문득 고개 들어 나무들을 보면서 올려다 본 하늘
하늘을 마음껏 나는 이들이 궁금해졌다.
0.3의 시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시간속에 습지 부근을 맴돌기만 하였다.
이제 어느 정도는 극복을 하고 습지의 이탄층 처럼 그렇게 습지에 젖어들고 있다.
숲에서 시작된 나의 짝사랑이 늪으로 철새들에게로 사랑을 넓혀가고 있다.
소나무의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마음까지 맑아 지면서 함께 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왜 그렇게 했을까? 소나무들이 너무 촘촘하여 늘씬하게 키만 웃자랐다.
떨어진 잎들 사이 송악들과 노루발의 초록의 생명들이 소나무의 향과 더불어 신선함을 더해준다.

떨어진 잎들, 예전에는 땔감으로 활용했던 작은 가지들과 잎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적당히 활용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 적당히가 어느 정도일까?
땔감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너무 보호만 하다 보니 이 잎들끼리 부대끼다 자연스레 산불까지 일으킨다.
소나무 재선충, 숲에 갖가지 해충들이 자라는 것도 적당히 이용하던 것을 줄이고
과감히 자연을 이용하다 보니 일어나는 부작용들일 것이다.

20분 남짓 솔향과 숲속 향기와 새들 소리에 젖어 산을 오르니 성의 첫자락이 보였다.
성이라기 보다 어느 집의 낮은 돌담같은 인상이다.

왜성은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쳐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의 지형은 바다쪽으로 툭 튀어 나와 있고 웅포만을 끼고 있으므로 왜군이 수많은 함선을 정박시키기 적당했을 것이다.
안골포, 가덕도, 거제도 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과의 연락도 편리했고,
본국과의 거리도 가까워 군사지역으로 유리한 지역으로
왜장 코니시 유키나가 : 소서행장(少西幸長)이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사람과 우리나라의 성을 쌓는 방법과 시대별로 성을 쌓은 방법들을 열심히 설명해주신다.
아직은 현역에 계시는 멋진 교장선생님 내외분이~~~
부모님 나이 되는 분들, 자식같은 이들과 유셈, 김셈이라 부르고 불리우며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공통된 관심사에 미쳐(그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있기에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인 것이리라.

성벽은 커다란 돌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채운 형태이며 지면에서 70°가량의 경사를 이루었다.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선생님의 설명과는 달리 우리나라 성의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 성은 약 45도 각도로 성의 정상까지 쌓아가며,
일본사람들은 암벽을 타는 도둑들로 부터 지키기 위해 아랫부분은 ) 형식으로 쌓은 후 가파른 경사로 쌓는다고 했다.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성의 입구에는 지그재그로 돌들이 쌓여 있다.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성안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3∼8m이라고 한다.
이성은 남산왜성이라고도 하며 아직까지 보수한 적이 없어서 16세기 왜성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한다.
주변의 대나무와 가운데의 키작은 대나무들을 자르고 나니 본성의 터가 고스란히 한 눈에 들어온다.
이름 모를이의 묘가 두 구가 있는게 특징이다.
다음에 아이들과 함께 산을 오르며 왜성을 올라야 겠다.
발 밑으로 느껴지는 폭신함과 자꾸 무언가 잡아 당기듯 발에 걸리는 대나무 줄기들의 독기가 예사롭지 않다.
넘어 지면 그대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듯 하다.
이 키작은 대나무들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혹 화살을 만들때 사용하려고 심었던 것은 아닐까?

산을 내려다 보니 신항만으로 인해 메워진 바다들이 흐린 날씨 만큼이나 내 마음에도 먹구름들이 흩뿌려진다.
자연을 이용하되 좀 똑똑하게 지속적으로 함께 살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연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는 것을, 사람만 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인지~~~
내 옆지기는 집이 좁아서 자기 책상 하나 놓고 책 볼 공간이 없다고 요즘들어 투정아닌 투정을 부린다.
예전에 나 였으면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도 벌써 가지 않았을까!
굳이 넓은 공간의 집이 필요하지는 않을 터인데 나이가 들면서 더 철없어 지는 옆지기이다.
조금의 돈이 생기면 카메라 렌즈 하나라도 더 구입하고자 하는 나 또한 철없는 그 사람의 옆지기이리라.

차 한잔을 나누고 잠시 쉬었다가
무거움과 가벼움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굵어지는 빗방울에 행여 카메라가 젖을까봐 애지중지하며
왜성을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