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밑으로 내려가면 계곡이 있지?”
“네, 있지요.”
“김 하사와 거기서 기다릴 테니 그 녀석 잘 구슬려 데려와. 쥐도 새도 모르게 해야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 하사와 물가 바위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밤 공기가 찼다. 고지 탈환 작전을 시작했을 때는 둥근 달이었는데 지금은 반달이 중천에 걸렸다. 어디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귀뜨르르"하고 가냘프게 울었다. 산천초목이 포연에 타서 풀벌레들이 다 타 죽었을 것 같았는데……. 가을이면 서울 우리 집 뒤뜰에서도 귀뚜라미가 울었다. 잿더미 속에서 찾은 부모의 시체, 그리고 동생, 가슴이 꽉 막혔다. 2년이 지났는데도 어제 일 같았다.
드디어 발걸음 소리가 나며 이 중사의 말소리가 들렸다. “최 일병, 그동안 수고 많이 했어. 소주 한 병 숨겨놓은 것이 있는데 전투 다시 시작하기 전에 화해주나 하자 구. 힘내, 응?” 어쩌고저쩌고 하고 있었다. 내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똑똑하게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최 일병이 술을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식량 보급도 원활하지 않은 이 전쟁터에서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술타령이야? 긴장되어 기다리는 중에도 웃음이 날려고 했다.
김 하사가 최 일병의 뒤로 가만히 접근하여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최 일병의 입을 막자 그가 놀라서 뒤돌아 보았다. 이 중사가 그의 발을 걷어찼다. 고꾸라진 그의 앞에 내가 나타났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내 모습을 알아보고 최 일병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끄으윽”하며 목쉰 소리를 내었다.
“개 같은 자식.” 나지막한 나의 말이 내 귀에조차도 음산하게 들렸다. 최 일병의 눈이 공포에 질려 달빛에 번득였다.
“소대장에게 총을 겨눠?” 이 중사가 한마디 내뱉고 총구를 겨누었다.
“아니야, 내가 처치해야 해.” 나는 재빨리 총을 뺏어 그의 가슴에 명중하도록 조준했다.
최 일병의 큰 체구가 몸부림치며 곤두박질했다.
“가만있어, 이 자식아.” 이 중사가 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때렸다.
달빛 아래 한 발의 총성. 그리고 그의 심장에서 솟는 피, 잿더미같이 허연 산자락으로 흘러내렸다. 그와 나는 동갑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이 일로 인하여 나의 인생에 다가올 검은 그림자?’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나는 재빨리 이 중사와 김 하사의 도움으로 뒤처리하고 우리들의 위치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 밤 한 시경, 정상을 눈앞에 두고 적의 기관총 발사로 더 전진할 수 없자, 나의 동료 강 소위가 병사 둘과 같이 수류탄을 뽑아들고 육탄 공격을 감행하였다. 기관총 진지를 폭파하고 그 삼총사는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백마고지는 탈환되었다.
최 일병은 그날의 전사자로 처리되었다. 이 중사가 나한테 와서 가만히 말해줬다. “소대장님, 최 일병의 고향은 철원입니다. 그쪽으로 전사통지서가 갈 것입니다.”
“그래, 고마워.”
그 이튿날 오후, 아군 부대가 진지를 교대하는 중 적은 또 다시 역습하여 피아에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 전투에서 수건으로 최 일병의 입을 막았던 김 하사가 전사하였다. 내 말이라면 콩으로 팥죽을 쑨 데도 믿어주던 김 하사였다. 보고를 받고 이 중사와 나는 묵념을 올렸다.
이제 그 사건은 이 중사와 나, 둘만의 비밀이 되었다. 전쟁 중에 이유가 있으면 지휘관이 부하를 사살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 일병의 유족들이 무서웠다. 내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었으므로 그것이 그렇게 무서웠는지도 몰랐다.
끝까지 나와 같이 있어주었던 이 중사가 전투 마지막 날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열흘 동안 스물네 번이나 주인이 바뀌며 국군과 중공군 총 13,400명의 사상자를 낸 백마고지 전투는 우리 쪽의 승리로 드디어 막을 내렸다.
1953년 7월에 휴전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 두 살이었다. 보병학교 훈련 기간 6개월을 제외하고는 지난 삼 년간 전방에서만 근무하였다. 우리 조상이 도왔던지 나는 결국 살아남아 제사봉사를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자랐지만 나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이었다. 어린 시절, 방학
때 할아버지 댁에 가면 나는
낙동강 하구, 강과 바다가
만나는 그 늪지대에 자주 갔다.
제대하고 그곳에 다시 가서
바람에 물결 치는 을숙도의
갈대밭, 왜가리들의 군무,
그리고 하늘 높이 비상하는
철새들을 바라보며 외톨이로
남은 나 자신을 달래곤 했다.
어느덧 내 나이 33살, 이제 3급 공무원 시험에 막 합격하여 몸조심하며 안정된 생활을 꿈꾸고 있을 때였다. 여름 햇살이 뜨거운 어느 날, 서문 시장에 들러 시원한 모자를 살까 하고 나는 노점을 기웃거렸다. 길 한쪽에 전을 벌리고 있던 새까맣게 그을린 남자가 낯이 익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먼저 나를 알아봤다. 순간 최 일병의 “끄으윽”하던 그 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나는 움찔했다. 시침을 떼고 나는 반갑게 그의 손을 잡으며, “어이구, 이 중사, 얼마 만이야,” 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그를 얼싸 안고 대포 집으로 들어갔다.
이
중사는 나의 아래위를 훑어
보더니 무슨 직장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더니
한마디 했다. “이 소위님은
잘 나가고 있네요.”
그의 말이 어쩐지 내 귀에
빈정거리는 말로 들렸다.
이 중사가 세 살이 위였으므로
이젠 존댓말을 썼다. “소위님,
소위님 하지 마세요.”
“나를 보고 ‘이 중사, 이 중사’하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불러요?” 술에 취하자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하소연도 했다. “상점 입주금이 없어 길바닥 노점 신세. 비가 오면 거두고 순경이 와도 거두고……”
나는 그때 영숙과 사귀고 있었는데 노총각 신세를 면하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부잣집 딸이라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주말에는 명승지에도 데려가다 보니 데이트 비용이 상당히 들었다. 혈혈단신에 나이가 많다고 영숙의 부모님이 꺼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벌써 호텔 방에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3급 공무원 자리를 탈 없이 유지하자면 이유야 어떻든 과거 때문에 일어나는 말썽은 없어야 했다. 게다가 경쟁이 심하여 내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할 수 없이 내 귀한 저금통장 일부를 떼어 상점대여에 보태 쓰라고 주었다.
영숙이 경북 대학교 의과 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임신을 하자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여 우리는 드디어 결혼했다. 처음에는 영숙이 공부하느라 돈 관리에 정신 쓸 여가가 없었다. 그러다가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끝내고 살림에 관심을 보일 무렵, 어느 날 우리의 통장을 나의 코앞에 들이대며 따졌다. “이게 무슨 지출이에요? 한두 번이 아니네.” 나는 할 수 없이 10월의 그날 밤, 초토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살아남아 “뀌뜨르르……”하던 그날 밤 사건을 영숙에게 고백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나이에 관운이 틔었던 것이 문제였다. 업자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금일봉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꺼렸으나, 결국 마다치 않고 받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 이 중사는 사업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내게 왔다.
내가 46세 되던 해 봄, 경북 도청에서 건설국장으로 있을 때, 호텔 신축공사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내 얼굴이 영남일보에 연일 대문짝만 하게 나왔다. 그리하여 한창 잘 나가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할 줄 아는 것은 그 일밖에 없었으나 공직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자영사업을 시작할 자신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험한 일을 많이 당해 그런지 또는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사회로부터 매장된 것에 질렸던지 모든 일이 무섭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루는 이 중사가 자주 만나던 서문 시장 대폿집으로 나오라고 했다. 순대 썬 것을 앞에 놓고 술이 거나하자 이 중사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한마디 했다. “이 소위님, 그 와이로 묵은 거 말이오. 나도 같이 묵었으니 체할까 봐 겁나요. 그래서 술 한잔 살려고 불렀소.”
“우린 젊은 시절에 벌써 한배를 탄 거요. 그 새끼가 개울가 그 잿더미 위에 나둥그러진 순간부터. 술이나 더 가져와요.”
그전에는 우리가 한 번도 죽은 사람 이야기를 입 밖에 내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날 진창이 되도록 마셨다. 무직인 나의 처지가 좋은 점이 있었다면 이 중사에게서 해방된 것이었다. 그의 내복가게는 이제 자리가 잡혔고, 그의 얼굴에 윤기가 돌고 신수가 훤해졌지만 나는 쭈그러들었다.
시간이
남아 돌아가니 잡념이 많아졌다.
달빛 아래, 공포에 떨던 그
얼굴, 고꾸라진 그 모습이
자주 눈앞에 어른거렸다.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 내가 짊어진
멍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에 그슬린 부모 형제의 시체는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잊을
수 있었다. 19세의 소년이 불가
항력으로 당한 일이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이어서 그런가?
그러나 내 손으로 죽인 목숨,
피를 흘리며 나둥그러진 그
모습은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또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그가 정녕코 나에게 총을 겨누었을까?
하는 의혹도 나를 괴롭혔다.
철원에 간다고 했을 때, 아내는 백마고지에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 일병의 고향에 한 번 가보기로 오랫동안 벼루고 있었다. 요즘은 컴퓨터 시설이 잘 되어 동 사무소에 가면 유가족의 신상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그의 어머니 이순녀 씨는 현재 94세이며, 아직도 강원도 철원군 무네미 마을에 살고 있다.
서울역에서 내려 철원까지 버스로, 그리고 택시로 무네미 마을로 오니 오후 3시경이다. 물 너머 마을이 무네미라고 하더니 개울 넘어 나지막한 산 밑 동네가 보인다. 한 육칠십 가구가 될까? 들에는 누런 벼가 탐스럽다. 이곳 철원 오대 쌀이 청정 쌀로 유명하다더니 비무장 지대가 가까우니 논의 오염은 덜 할 것이다.
허름한 잠바 입은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앞에 걸어가고 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그에게 가까이 가보니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소가죽 같고 주름살이 깊지만 내 나이쯤 되는 것 같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90대 노인이 사는 최씨네 집이 어디 있습니까?”
“날 따라오세요.” 그와 나는 나란히 걷고 택시는 우리 뒤를 천천히 따른다.
“초면에
이거 실례합니다.”
“괜찮아요. 저기 저 양철
집이 보이지요? 저 집인데
노인이 손수 밥을 해먹고 있어요.
정신이 아직도 말짱해요. 큰아들은 6·25때
전사했어요. 작은아들이 한
번씩 다녀가요. 그런데 댁은
뉘신데 이렇게 찾아가십니까?”
“그 집 큰아들과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 어머니를 찾아 뵈려고 오랫동안 별렀지요.”
“그래요? 나는 영팔이와 같이 자랐어요. 그 녀석 덩치는 커다란 것이 의외로 꾀가 많고 내숭스러웠어요. 어디 가나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줄 알았는데……. 참,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노인이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영팔이 유가족 수당으로 살아가는 모양이오. 영팔이가 죽어서 효자 노릇합니다. 이런 말 하기 좀 뭣하지만, 그놈이 살았더라도 이토록 오랜 세월 매달 꼬박꼬박 한 번도 빼지 않고 돈 드리기는 어려웠을 걸요.”
그 말이 묘하게 들린다. 최 일병이 살았더라면 이만큼 못했을 거란 말인가? ‘꾀가 많고 내숭스럽다’라고 하더니 혹시 자라면서 둘의 사이가 나빴던가?
“이 집이요. 들어가 보시오.” 나지막한 양철 집 녹슨 대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 그는 가던 길을 가버린다.
열린 대문을 들어서니, 노인이 낡고 때가 묻은 허연 수건을 머리에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나를 돌아보며 “어떻게 오셨수?”하고 노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묻는다.
얼굴은 쭈글쭈글하고 새까맣게 그을렀다. 앙상한 팔은 나무 등걸과 같다. 원래는 최 일병처럼 몸집이 컸던 것을 알 수 있고, 또 눈두덩이 두툼한 것도 그를 연상시킨다.
“큰 아드님과 같이 군대에 있었습니다.”
“우리 영팔이와 군대에 같이 있었다고?” 노인은 더듬더듬 지팡이에 의지하며 마루에 앉는다. “댁도 거기 앉으시우.”
노인 말을 따라 나도 마루에 걸터앉는다. 냉장고가 마루 한구석에 있고 마루 끝에 있는 전기밥솥에 불이 켜져 있다.
“휘…… 그 애가 죽었을 때 가까이 있었수?”
“네, 가까이 있었습니다.”
“편하게 갔수?”
“…….”
“어이구, 물으나 마나. 총알 맞아 죽은 놈이 어찌 편하게 갈 수 있나? 평생, 이 가슴에 얹힌 돌.” 빈틈없이 주름 잡힌 얼굴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나의 어머니도 그때 폭격에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이 노인과 나이가 비슷할 것이다. 영팔은 나와 동갑이었다. 아들의 전사통지를 받고도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 노인, 우리는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얽혔을까?
나는 어렵사리 운을 뗀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나, 제가 돈을 좀 준비해 왔습니다. 겨울이 가까워 오니 월동 준비라도 하십시오. 이거 오천만 원인데 쓰기 쉽게 현금은 백 만 원이고 나머지는 수표로 준비했습니다.” 나는 현금 때문에 터질 듯하게 불룩한 봉투를 앙상하게 마른 노인의 손에 쥐여 준다.
“내가 왜 댁한테서 돈을 받수?”
“아드님한테 진 빚이 좀 있어서요.”
“50년도 훨씬 넘은 세월이유.”
“네, 올해 꼭 55년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되었지. 그때 내 나이 서른아홉,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뜻을 그때 알았수. 남편을 그 애보다 먼저 잃었지만, 그때는 그렇지는 않았수. 그러나 더러운 이 목숨, 이렇게 살아남았소.”
나는 진땀을 흘린다. 노인이 어느 순간에 입에 거품을 물고 내게 덤벼들 것만 같다. 그까짓 돈 주고 네 마음이 편해지겠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이 자리를 어서 빠져나가야지.
“이거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노인이 돈 봉투를 신문지에 조심스레 싼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말한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멀리서 왔는데, 벌써 갈려고?” 노인이 미진한 듯,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더 할 말이 있지 않느냐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찌그러진 양철 대문을 허겁지겁 나와 기다리는 택시 뒷좌석에 간신히 기어오른다.
“철원 온천호텔로 모실까요?”
뒷좌석에
머리를 기대며 간신히 말한다.
“그래요.”
하루를 더 계약한 기사가 아침에 호텔로 왔다. 오늘은 백마고지로 간다. 먼저 철의 삼각지 전적 기념관에서 모여 군(軍)의 호송을 받으며 대형버스 한 대와 승용차들의 뒤를 따른다. 지금은 아무도 없는 월정역에는 서울–원산 간을 달리던 열차가 6·25 때 폭격을 받은 채로 앙상한 몰골을 드러낸 채 누워 있다.
드디어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택시에서 내려 휘적휘적 능선을 따라 올라간다. 한번은 와야 할 곳이고, 또 아내도 당연히 내가 이곳에 들르리라 예상하고 있다.
주위 지형을 보려고 가장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상승각 쪽으로 올라간다. 저 아래 광활한 철원 평야 위에 누운 야트막한 산, 백마고지 전경이 내 앞에 펼쳐진다. 우리가 최 일병을 유인한 그 계곡은 어디쯤일까? 그것은 고지 점령하기 전이었으니 삼분지 이쯤 되는 중턱이었을까?
그 당시 바위와 나무로 덮였던 고지가 포격으로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초토 (焦土)로 변하였다. 혈전 사투가 끝나 포연이 걷히고나서 허연 재에 덮힌 산 모양이 흰 말이 드러누운 형상이라 하여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었단다. 그러나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 울창한 수목으로 다시 덮인 그 야산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러기 떼들이 편대를 이루며 북방 한계선 쪽으로 날아간다.
돌아오는 길에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노동당 당사를 지난다. 그 당시 규모로서는 상당히 큰 시멘트 골조였다. 얼마나 많은 청년이 저기서 고문을 받았으며 또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까? 그 당시 스물 안팎의 젊은이들, 이 땅에 벌어진 내 나이 또래의 일대 수난이었다.
능선을 내려와 대기 중이던 택시 기사에게 이른다. “도피안사 (到彼岸寺)로 가요.”
오래전부터 이 절이 아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절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가보고 싶었다. 모르긴 하지만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 (彼岸) 에 이르러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한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 아닐까?
절이 가까워진다. 전에는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출입이 제한되었던 곳이었으나 민통선이 북쪽으로 더 올라감으로써 이제는 자유로이 이곳을 드나들 수 있다. 가을로 접어든 청명한 날씨에 아름다운 산하가 안식처로써 손색이 없으나, 이곳은 남북 분단의 냉엄한 현장이다.
택시를 세워놓고 아무도 없는 한적한 경내에 들어서니 화강암으로 된 삼층석탑이 고즈넉이 서 있다. 통일신라 후에 처음 지었다가 몇 번 보수했다고 하는데 아담한 절이다. 이곳에 있는 유명한 국보 철조 비로자나불이 봉안 되어 있는 대적광전을 먼저 들른다.
금빛이 번쩍번쩍하는 불상만 보아 온 내 눈에 이 철불은 서민적이고 소박하며 친근감을 준다. 게다가 갸름한 얼굴, 단정한 눈매, 미소 띤 입술,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조화, 그 아름다움에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본다. 가지런한 상의의 옷 주름, 그리고 독특한 손 모양,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오른손으로 왼손 엄지를 잡고 높직한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이 평화롭다.
소박하고 친근감이 넘치는 비로자나불 좌상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인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중생이 가지고 있다는108번뇌를 생각해본다.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내 나이 76세, 이제 그만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불전을 넣고 비로자나불 좌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무수히 절을 한다. 나 자신도, 최 일병도 또 이 중사도 영원한 안식처에 안주하기를 빌며…….
첫댓글 저의 '황보(皇甫)' 친척 어른이신 '미세스 황보(皇甫) 박 숙자' 선배님을 지면으로나마 뵙게 되어 더욱 더 반갑습니다^^*
저의 친척 어른이신 선배님이 쓰신 글이라 그런지 글의 내용이 너무나 감명적으로 마음에 와 닿는 듯 합니다^^* 친척 선배님 항상 건강하십시오^^*
6. 25를 겪은 나이라 위의 글을 읽으면서 그때의 상황들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마음도 아픕니다.전쟁속에서 어쩔수없이 죽이고 죽고... 그래서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생각하면 우리 형제들이 너무 많이 죽어 용서가 잘 안됩니다.
황보야 너거 손위 시누이이다.
선배님박숙자 선배님께서 저희 '황보(皇甫)'씨 명문 가문에 시집을 오신 것이니, 제가 손아래 시누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시누짓 해도 될까용
앞으로 못된(
황보 姓씨도 희성인데 여기서 만났으니 더욱 반갑죠, 요즘은 촌수를 당겨서 다정히 부르는 세상인데 올케, 시누이 사이 좋지요. 시누이 노릇 잘못하면 시누이님이 시누년으로 부른다나 올케님한테 잘 해야해요
네 아주 사이좋은 올케와 시누이로, 박숙자 선배님을 큰 올케님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잘 써진 단편소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여러 장르의 문학작품 중에 제가 가장 선호해서 많이 읽는 것이 단편소설입니다. 앞으로도 선배님의 훌륭하신 작품이 이 백합글 난을 꽉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선배님의 건필을 빕니다.
이렇게 좋은 글이 여기 실린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6.25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문학소재를 주었지만, 이런 얘기도 있을 수있군요. 철원 지빙은 문학기행으로 다녀 온곳입니다.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주홍글씨 마음이 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