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교재의 내용은 한정식교수님의 저서 '사진예술개론'에서 발취한 내용임을 밝힘니다.
1. 주제와 소재의 뜻
주제란 사진의 의미, 곧 사진가가 사진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사물, 즉 피사체가 소재가 된다.
주제와 소재를 혼동해서 쓰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이를테면 사과를 찍은 사진에서 사과를 가리켜 주제라 하는 경우다. 그것이 "주된 소재"라는 말의 준말로 쓴 것이라면 "주재"라야지 "주제"
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주제란 다른 모든 예술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작가의 중심 사상, 곧 테마(theme)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의 subject를 미술 쪽에서 주제로 번역해 쓰는 데서 온 습관인 것 같다. 하지만 subject는 '소재' '피사체' 아니면 '대상'이란 말로 쓸 수 있을 지언정 주제란 말로 써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영어에서 theme와 subject가 다르듯이 우리말에서도 차이가 있어야 그 둘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회화에서는 그리는 것 자체가 주제일 수도 있다. 사과면 사과 그 자체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회화에서는 출륭한 작업일 수가 있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주제와 소재가 따로 구분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진은 찍는 것 자체가 작업일 수가 없다. 반드시 찍는 목적과 의미가 따로 있는 것으로 그것이 주제인 것이다.
사진도 회화의 경우처럼 주제와 소재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사과 자체를 묘사하고자 할 때, 그것은 그대로 사진의 주제이자 소재일 수가 있다. 사과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 목적이 단순히 사과 자체일 경우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사과의 외형적 아름다움이라든가 사과가 지닌 맛일 경우로, 단순히 사과 자체를 찍는 것이 목적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럴 때 그 아름다움이나 맛이 주제가 되고, 사과는 소재인 것이다. 더 분명치 못한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혹 있다 해도 사지을 찍고자 한 목적, 그 사물에 카메라를 댄 어떤 이유가 있게 마련으로, 이것이 바로 그 사진의 주제가 된다. 소재가 그대로 주제로 통하는 일은 적어도 사진의 경우 없다고 보는 것이 주제와 소재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주제의 시각화
작가가 생각하고 느낀 모든 것은 그대로 사진의 주제가 된다. 또한 자연이나 사회의 현상, 사람들의 생활 및 가정 등 그 모든 것 역시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주젯거리 중에는 사진으로 찍어서 효과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사진에 알맞은 주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한마디로 시각적으로 전달이 가능한 주제, 시각으로 전달이 될 때 가장 효과적인 주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제가 시각적으로 효과적인가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 하면 주제라고 하는 추상적이고 내면적인, 다시 말해서 형태가 없는 어떤 관념을 구체적 형태로 시각화시키려면 알맞은 대치물로 암시할 도리밖에 없는데, 이 때 그 암시가 적절해야 하고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이를 좀더 쉽게 풀어 보기 위해, 사진에 알맞지 않은 주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사진에 알맞지 않은 주제는 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애국심, 효도, 플라토닉한 사랑 등에서부터 고뇌, 갈등, 연민, 또는 선, 악 등 추상적, 관념적 주제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애국심은 사진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를 찍으면 가능한지, 받에서 땀 흘려 일하는 농부를 찍으면 묵묵히 실천하는 애국심으로 보일런지 참으로 막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기에 경례를 하는 장면이 그렇다고 애국심일 수도 없고, 국군의 씩씩한 행진을 찍는다고 애국심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그냥 경례이고, 행진은 행진이지 그것이 애국심일 수 없음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어머니를 껴안고 웃고 있으면 효가 되고,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그게 그대로 효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에게 아쉬운 청이 있어 껴안고 애교를 부르는 것이라면 효는커녕 약삭빠른 이기심 이겠고,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도, 아버님의 잔말이 언제 끝나려나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 가며 억지로 앉아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은 모두 애국이나 효도의 어떤 지엽적인 행돌일 수는 있어도, 그것 그대로는 애국이나 효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모습인 것이다.
어떤 초보자가 '민족의 얼'이란 제목 아래 무궁화 한 송이를 찍어 놓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생각하면 소박한 한 송이 무궁화에서 우리 민족의 얼, 이른 바 무궁화처럼 끈기 있고 소박한 민족성의 어느 한 면이 연상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무궁화가 그런 정신을 누구에게난 연상시켜 주기 때문이 아니라, 정책 입안자가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삼은 뒤, 그를 미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민족성과 결부시켜 교육해 왔기 때문에 무궁화 앞에서 잠시 그 기억을 되살린 것뿐이다. 아무 외국인이나 붙잡고 무궁화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아니 무궁화 꽃을 직접 보여주었을 때, 금방 한국 민족의 얼에 대해 이해를 하고 줄줄이 읊어 나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나라 사람조차도, 무궁화를 보는 순간 우리 민족의 얼을 느끼고 술술 풀어낼 수가 없다.
문학은 이 때에 필요한 예술 양식이다. 그러한 추상적 관념은 언어로만 전달이 가능하다. 사진이 비록 언어적 구실을 한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느 한계 안에서의 이야기다. '영상의 폐쇠성'이란 것도 결국은 언어로서의 한계성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고 관념이 전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또 아니며,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세계가 사진에 의해 열리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아니다. 실제로 모든 사진이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모조리 추상적인 개념이라 해도 좋다.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이 주제라고 할 때, 그 생각이나 느낌이란 것은 그대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다. 결국 관념적이고 개념적이며 추상저이지 않은 주제는 하나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이나 관념적인 주제를 피하라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는 것일까?
요는 '비문자 예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언어만이 관념을 관념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 다른 모든 '비문자 예술'은, 특히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는 사진은 관념을 관념 그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진에 나타난 대상(소재, 피사체)은 '어떤 경험을 덛을 수 있게 하는' 대상, 아직도 경험해야 할 대상이다. 사진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다.
결국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이나 관념은 어느 한계까지다. 이르테면 손으로 턱을 괴고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고민이나 고뇌에 잠긴 표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가 아파서 찌푸릴 수도 있고,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일 수도 있다. 또는 단순히 소파에 앉아 텔레비젼을 볼 때의 습관적 자세일 수도 있다. 설사 고민하는 모습이라 하더라도, 무슨 일로 어느 만큼의 고민에 싸여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는 반드시 사진에만 한하는 문제가 아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생각하는 포즈가 그런 포즈만이 아니고, 그런 포즈가 반드시 생각하는 포즈라는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다. 생각하는 포즈일 수도 있지만, 좌변기에 앉아 힘을 주는 포즈일 수도 있는 것이다. 로댕의 의도도 그것이 꼭 생각한다는 데에 의미를 둔 것은 아닐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포즈가 주는 조형적 충만감이나 밀도를 충시한 것이지, 포즈의 문학적 의미는 문제 밖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