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난봉가
예로부터 진주를 색향의 고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마도 색향은 기 생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같다. 꽃이 많으면 벌도 많은 법, 기생 이 많은 진주에는 기방을 출입하는 한량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진주에 는 한량무라는 춤도 전승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유명한 노래가 하나 있다. 바로 진주난봉가라는 민요이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 얘 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 진주남강 빨래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 난데없는 말굽소 리 옆눈으로 힐끗보니 / 하늘같은 갓을 쓰고 구름같은 말을 타고서 못본 듯이 지나더라 / 흰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 와보니 사랑방이 소요터라 /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시었으니 사랑방에 나가봐라 /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가지 안주에다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더라 / 그것을 본 며늘아 가 건넌방에 물러나와 아홉가지 약을 먹고서 목매달아 죽었더라 / 이 말 들은 진주낭군 버선발로 뛰어나와 내 이럴줄 왜 몰랐던가 / 사랑사랑 내 사랑아 화류정은 삼년이요 본댁정은 백년이라 내 이럴줄 왜 몰랐던가 / 사랑사랑 내사랑아 어화 둥둥 내사랑아'
진주난봉가는 굿거리로 부르는 경상도 민요이다. 채록된 노래중에는 전라 도에서 부른 것도 있어 진주난봉가는 흔히 우리나라 남부 농촌에서 폭넓 게 불려졌던 민요로 생각된다. 진주난봉가는 단지 민요로만 구전되지 않 고 1970년대말 대학가에서 대학생들이 즐겨 부르기도 한 민노래, 즉 민중 가요로도 애창되었다. 기생첩과 놀아난 남편의 외도에 분노해 스스로 목 숨을 끊어버린 어느 며느리의 이야기를 통해 대학생들은 시대상을 풍자 한 노래로 진주난봉가를 많이 불렀던 것이다.
진주난봉가의 가사를 한번 살펴 보겠다. 고된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어느 아낙네가 시집살이 삼년만에 그리운 남편을 만났는데, 남편은 사랑방에 서 기생첩을 옆에 끼고 보란 듯이 술판을 벌이며 권주가를 부르고 있었 다. 이런 참담한 일이 있을 때 첫째는 지금처럼 냅다 사랑방에 뛰어들어 가 술상을 엎어버리고 기생첩의 머리채를 잡아서 내칠 것이고, 둘째는 그 렇게 하지 못하고 속병이 들어 한을 품을 채 비련의 삶을 사는 경우이 다. 그러나 옛 여인들은 첫째처럼 당차게 하지 못하고 둘째처럼 체념하 고 만 경우가 대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여자에게 불리한 시집살 이와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주낭군 같은 한량이 활개치던 조선후기나 일제시대의 여인들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많았을 것이다. 목매어 자살한 며느리의 이야기는 정말 슬 프고도 안타까웠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자기 부인이 죽자 그 낭군이 했 던 말이다. '화류 정은 삼 년이요 본댁 정은 백 년'이라는 말이다. 그렇 다면 화류계의 기생을 첩으로 삼아 쌓아야할 정이 삼 년이면 삼 년동안 은 바람을 피워도 된다는 말일까? 그런 논리로 기생첩을 하나씩 만들어 바람을 피운다면 수십 년이라도 계속 바람을 피울 수 있겠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생첩을 끼고 실컷 놀다가 늙어서 꼬부라지면 그때서야 본댁의 조강지처를 찾아와도 된다는 말일까? 본처의 정은 백년이라서 얼 마든지 시간이 있다는 궤변이다.
이 진주난봉가의 노래를 살펴보면 시어머니의 역할이 궁금해진다. 만약 시어머니가 난봉꾼인 아들을 야단치고 타일렀다면 이런 비극에까지 이르 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며느리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자기 아들이면 무조건 싸고 도는 남아선호적인 대가족 제도 때문에 빚어 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옛날 남자들처럼 요즘 남자들도 먹고살 만하 면 유흥업소에 다니며 놀거나, 또는 새 장가를 들려는 못된 버릇이 있는 지 모르겠다.
진주 난봉가. 1970년~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학교 앞 주점에서 막걸리 두어잔 들이키고 나서 나무 젓가락 장단으로 한 곡 걸죽하게 뽑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진주 낭군 오실것이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음정 박자 무시하고라도 대충 애절하게 청승(?)맞게 한 곡 뽑고 나면 또 술이 한 순배 돌아가곤 했다. 장단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진주 난봉가 장단’은 누구나 쉽게 맞출 수 있었다. 느린 굿거리 장단으로 우리네 애환이 가사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원래 난봉가는 황해도 민요의 일종이었다. 일명 ‘긴난봉가’라고도 불리며 경기·서도지방 여러 민요의 원형에 해당된다. 곡명은 옛 사설(辭說)에 “난봉이 났네, 난봉이 났네…….”로 시작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난봉난 사람의 허튼 사랑 행각을 노래한 것이다. ‘난봉’이란 허랑방탕한 것을 말한다. 허랑방탕한 사람을 난봉꾼 또는 난봉쟁이라 하고 그러한 행동을 난봉짓 또는 난봉났다고 한다. 주색에 빠지는 일도 난봉꾼의 일이었다. ‘진주 난봉가’는 진주 난봉꾼의 허랑방탕한 사랑 행각을 노래한 내용이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터이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진주남강 빨레가니 산도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소리 고개들어 그곳보니 하늘 같은 갓을쓰고 구름같은 말을 타고서 못본듯이 지나간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하다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시었으니 사랑방에 들어가라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가지 안주에다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더라 울도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이것을 본 며늘아가 아랫방에 물러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서 목 매달아 죽었더라 이 말들은 진주낭군 버선발로 뛰어나와 내 이런줄 왜 몰랐던가 사랑사랑 내사랑아 화륫정은 삼년이요 본댁정은 백년인데 내 이럴줄 내 몰랐다 사랑사랑 내 사랑아 너는 죽어 꽃이되고 나는 죽어 벌나비되어 남녀차별 없는 곳에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어화둥둥 내사랑아
‘진주난봉가’는 본처는 놓아 두고 기생의 품에 빠져 돌아올 줄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들의 심정을 드러낸 노래로,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한 슬픔과 애환을 나타낸 한탄이 서린 원망의 노래이다. 누가 불렀을까. 길쌈할 때 아낙네들이 불렀다고 한다. 길쌈할때 뿐만 아니라 아낙네들이 고된 일을 하면서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내가 약을 먹고서 목 매달아 죽고 나니 진주 낭군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슬퍼하면서, 후회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진주 난봉꾼의 사랑 행각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보다 조강지처를 버리면 후회한다는 교훈적인 내용도 담고 있는 것이다. 진주 난봉가는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진주에서 불려졌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명쾌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진주 난봉가의 발생을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를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고려사’를 읽고‘월정화, 위제만을 유혹하다.’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월정화(月精花). 꽃이름이 아니라 진주 기녀이름이다. 기록상 나타나는 진주의 최초 기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진주 사록 벼슬에 있던 위제만을 유혹해 그의 부인을 결국 울화병으로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사록은 당시 진주 행정의 실무 책임자라고 보면 된다. ‘고려사 71권’악지에 나오는 기록을 그대로 옮겨보자. “月精花晋州妓也司錄魏齊萬惑之令夫人憂에(성낼에)而死邑人追言夫人在時不相親愛以刺其狂惑也” “월정화는 진주 기녀이다. 사록 위제만이 그에게 매혹되었다. 그래서 그의 부인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그만 죽었다. 진주 고을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기어 그 부인이 살았을 때 서로 친애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어 사록이 여색에 미친듯이 미혹됨을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진주 사람들이 ‘월정화’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노래는 전하지 않는다. 진주 사람들이 위제만의 부인을 추모하고 위제만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풍자하기 위해 불렀다는 ‘월정화’라는 고려 가요의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진주난봉가의 내용과 흡사한 측면이 많을 것이라고 추측은 해볼 수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월정화의 이야기가 진주 난봉가의 설화적 배경과 유사한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고려사’의 ‘월정화’ 이야기는 이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임하필기(林下筆記)’등 조선 시대 기록들에도 나타난다. ‘진주난봉가’는 진주에서만 전해지는 노래가 아니다. 인근의 하동 거창 등지에서도 전한다. 거창 민요중 ‘시집살이 노래’의 내용은 이러하다.“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접 삼년을 살고나니/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야야자야 며늘아야/진주낭군을 볼라거든/진주남강에 빨래를 가라/진주 남강에 빨래를 가서…” 뿐만 아니라 전남 지방에서도 ‘진주낭군’이라는 제목으로 ‘진주 난봉가류’의 노래가 불려지고 있다. 진주난봉가류의 노래가 이처럼 널리 불려지고 있다는 것은 진주난봉가가 아주 오래 전부터 진주지역에서 불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주 난봉가’는 이야기가 있는 ‘서사민요’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진주 기생 월정화에 빠진 진주 사록 위제만의 아픈 사랑 행각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암울했던 시대, 시대를 한탄하며 불렀던 ‘진주 난봉가’는 지금 잊혀진 노래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만약, 진주기녀 이름을 딴‘월정화’라는 고려 가요가 전해져 왔다면, 최초의 진주 노래로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을 해본다.
|
강동욱 기자 <kang@gnnews.co.kr> |
|
|
윗 글 둘다 인터넷 검색에서 찾은글입니다.
윗 글은 영남일보,아랫글은 디지털 경남일보에서 퍼온 글입니다.참고가 되셨기를```
참고로 진주가 종가를 지키기로 유명한 안동보다 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라는 진주 여자의 말이 생각나네요.
자기는 될수있으면 진주남자랑은 결혼하기 싫다고````
더 좋은 자료 많으니까 찾아보세요.
|
첫댓글 제 남편은 경남 밀양에서 생산된 제품입니다. 리콜없이 잘 사용(?)중입니다. 제가 가끔 업그레이드 시키느라 좀 힘을 쓰지만요. 싸울때 빼고는 아주~~ 만족합니다. 사랑으로 극복(?)하지요.서로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