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기 |
---|
지정 : 보물 525 호
위치 :
경북 경주군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 정분 각
1. 들어가면서
《삼국사기》는 현재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사서이다. 물론 삼국 시대에 고구려의 《新集》《留記》나 백제의 《書記》류나 신라의 《國史》등이 만들어 졌고, 그 이후 이들 계통의 자료에 의거하여 만 들어 졌던 것이라고 생각되는 《舊三國史》가 있었으나 모두 인멸되 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삼국사기》는 삼국 및 통일기 신라에 관한 기전체 관찬 정사로 서 그 구성을 보면 新羅本紀 12권, 高句麗本紀 9권, 百濟本紀 6권, 年表 3권, 志 9권, 列傳 10권등 모두 50권으로 되어있다. 또한 본 기와 열전에는 褒貶위주의 論贊을 갗추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 등에 의해서 완성 되었는데 이처럼 늦은 시기의 사서이니만큼 그간의 역사 기술의 발 전이 여기에 반영됨으로써 내용.체재가 갖추어질 것을 생각할수 있 지만, 반면에 서술대상 시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 해서 상세 하지 못한점이 많을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는 편찬자 김부식의 고려 정계에서의 역할, 그 자체의 내용과 중국 중심의 사상때문에 건조하고 왜곡된 역사상 을 심었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비판에 기초하여 《삼국사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2.삼국사기 편찬의 배경
김부식은 당시의 문벌 가문의 대립과 갈등을 실제로 겪었다. 대각국사비 의찬을 둘러 싸고 윤관 가문과 대립하였고, 이자겸의 가 문과도 대립하였다. 이러한 대립과 분열의 양상은 당시 지배층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역사적 교훈으로 현실을 비판하 는 삼국사기가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묘청의 란이 김부식에게 토 벌되자 자주적이고 政體로서의 유교는 사라지고 사대적인 유교가 득세하게 되었다.
윤관의 여진정벌 실패와 그로인한 여진의 정치적 압력은 국내적 으로 외세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을 고조시켜 뚜렷한 국가관과 자 아의식이 생겨났다. 또한 거란의 칩입으로 인한 사서의 유실은 새 로운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건국이후 200여년 이 흐른 인종대에는 사회 번영의 문화적 기념물이 요구되었다. 또 한 묘청의 난후 어수선한 사회를 수습하고, 귀족의 횡포로부터 새 로운 왕권의 확립을 꾀하려는 목적에서 삼국사기는 편찬되었다.
3.삼국사기의 성격
김부식은 문벌귀족의 역사가로 전통적인 기층문화와 체질이 다른 유교주의 사관과 중국중심의 사대적 사고방식에 의해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서기 3세기말 편찬된 《三國志》<魏書 東夷傳>을 비롯한 중국 사 서 동이전을 보던가 《三國遺事》를 보아도 삼국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문화 양상이 《삼국사기》에서 받는 인상 과 같이 단조로운 것도 아니고, 고대 관념과 중세 관념과의 차이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대적 성격이 약하지 않았다. 이것을 볼때 김부식의 사관이라는 것은 고대적인 성격과 전통적인 체질을 부인 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나타 난 전통문화의 성격이 보다 강한 것이라 보이는 자료들이 《삼국사 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이들 자료를 무시 하고 그 대신 중국 사서류들을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은 《구 삼국사》를 대본으로 놓고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삼국유사》에 채록된 것과 같은 전통문화 성격이 강한 자료를 수집 하여 보다 넓은 역사적 이해를 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다만 중국의 고전과 삼국.춘추 전국.한.당.송대의 고사를 인용하여 설득력을 증 대시키고 자신의 박학함을 과시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에 있어서 編史官은 자료 수집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편사관이 직접 편찬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모든 것 은 김부식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고,편사관을 보아도 김부식과 관계 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전통적인 체질과 먼 모방적이도 사대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할때 에 나타난 결과는 전통문화의 빈곤화요 축소화인데, 예를 들어 《삼 국유사》에는 鄕歌가 수록되어있으나 《삼국사기》에는 <三代目>이라 는 향가집의 명칭만 언급될뿐 향가는 수록되지 않았다. 또한 한국 고대문화의 주류는 불교문화인데 이에 관해서는 일체 고려되지 않 았다. 그리고 김대문의 《花郞世紀》를 기본 자료로 하여 화랑전을 따로 세우고 있으나 당시 청소년의 기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불가 결한 것인 화랑의 성격을 埋沒하고, 화랑을 위한 전기가 아니라 유 교사관 확립을 위한 화랑으로 변질시켰다. 이것만 보아도 《삼국사 기》의 편찬은 정치적 의도 (유교문화와 대치되는 고대문화를 삭제 함으로서 유교문화만을 강조) 로 편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중국 중심의 사대적 사고 방식이 지배적이다. 예를 들면 신라가 사대를 하는 나라로서 독자적인 년호를 제정하여 사용함이 옳지 않다고 논하였고, 고구려의 멸망은 隋.唐에 대한 불 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백제도 선린 우호를 하지않고 전 쟁을 일삼아 대국에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지었다고 논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중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보이고 잇 다. 신라의 왕명을 보면 혁거세.이사금.차차웅.마립간 등이 나오는 데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그대로 싣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崔致遠의 《帝王年代曆》이나 《東國通監》 등에서는 이를 鄙 野하다고 하여 중국식 왕명으로 모두 고쳐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천 자에게만 사용할수 있는 '本紀'를 사용했는데 이는 후의 《高麗史》 가 '世家'로 한 자세와는 크게 다르다.
삼국을 처음으로 완성된 국가로 본 점, 역사서술을 현실비판의 도구로 사용한 점, 지도층의 내분과 백성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최 후를 역사의 필연으로 기술한 점,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역사를 내 세운 점 등은 주목할만 하다.
4.삼국에 대한 태도
삼국에 대한 기술이 신라에 편중된 것은 일찍부터 지적되어왔다. 김부식이 경주인 이었다는 데서 그러할 뿐 아니라 신라가 다른 두 나라를 통합하여 오래 존속 하였으며, 신라의 문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어서 이것이 가장 많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조의 정통론으로 보아도 고려조가 형식상 신라의 선을 받은 후계자이기 때문에 고려조의 신하인 김부식이 신라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는 그 국호에도 나타나듯이 고구려의 후신으로 자처하였으므로 고구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배려를 하였을 것이다.
우선 외관으로 살펴본다면 삼국 각국의 기사의 분량이 본기에 있어서는 대략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신라 본기 12권 중 통일 전의 것은 7권, 고구려 본기는 10권, 백제 본기는 6권이 된다. 그런데 지에 들어서는 祭祀이고 거복(車服)이고 屋舍이고 신라의 것이 월 등하다. 또한 地理志에 잇어서도 신라 것이 위주가 되어 있으며 職 官志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신라의 관제.관직만이 기술되어 불균형 을 이룬다.
한편 열전에서는 신라의 편중이 훨씬 현저하게 나타난다. 열전 에 입전된 인물들의 국적은 신라인 40(통일전 30, 통일후 10)명, 고구려인 8명, 백제인이 3명이다. 이러한 원인은 먼저 신라측 자료 만의 존속, 고구려.백제측 자료의 희소로 볼 수 있다. 아니면 계속 하여 지적되는 것이지만 김부식이 사료의 채집에 인색하였기 때문 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가지 원인이 모두 작용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형식을 살펴보면 삼국에 대해서 공평한 자세를 취 하려고 한 것 같다. 첫째로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삼국의 기사를 '本紀'로 배당해 서 삼국을 동등하게 보려는 듯하다. 후대의 《高麗史》의 경우처럼 '世家'로 하든지, 《晋書》의 경우 五胡十六國을 '재기(載記)'로 한 것처럼 다르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주목할만 하다.
둘째로 삼국 각국의 기사에서 그 나라를 제일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본기에서는 신라측을 我.我軍.我兵 등으로 표현 하였다. 고구려 본기에서는 중국 왕망과의 관계기사에서 고구려측 을 我.我將.吾王 등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초고왕(肖古王) 24년 신라와의 싸움에서 백제가 패한것을 아군.패배(我軍.....敗北)라고 표현한 것을 비롯해서 마지막 당과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백제측을 我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형식상으로는 삼국을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5.마치면서
《삼국사기》 편찬시 참고한 서적의 양을 보면 지나친 산삭은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변개는 상당하게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사학적 인 견지에서 볼때 김부식은 고대의 설화 중심적.신화 중심적인 역 사 서술로부터 합리성을 추구하는 역사서술로 역사학을 발전시킨 역사가였다. 그러나 그의 사대적인 성격은 분명히 민족의 주체성을 손상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화랑의 경우에는 이를 유교적인 성격으로 바꾸어 놓기 까지 하였다.한 마디로 전통문화의 부정이라고 할 수있다. 《삼국사 기》 이후에 《삼국유사》 등 우리 문화의 이해를 위한 노력이 있었으 나 《삼국사기]로부터 시작된 중국 중심의 유교적 사관이 역사학을 주름잡게 되었다.
이렇게 볼때 《삼국사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우리 역사의 주체적인 인식이요, 우리 문화의 올바른 이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高柄翊, <三國史記에 있어서의 歷史敍述>《金載元博士回甲紀念 論叢》, 1969; 《韓國의 歷史認識》, 創作과 批評社,1976
金哲俊,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韓國史硏究》9, 1973;《韓國의 歷史認識》, 創作과 批評社, 1976
韓國古代史硏究會 編, 《韓國古代史資料集》, 知識産業社, 1992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