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1.18(화)-1.23(일)(5박6일) 마카오-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여행, 첫 여행지인 마카오

20세기 초반, 타이파 프라야 해안의 반얀 나무 그늘 아래는 당시 지역 관리들이나 마카오 사람들에게 완벽한 주거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몇 년 후 정부에서 이 주택들을 수거하여 새롭게 단장했다. 오늘날 한줄로 늘어선 5채의 녹색과 흰색 주택들은 옛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영화제작자들이나 신혼 여행객들에게 아주 좋은 배경이 됨).
첫번째 집은 타이파 주택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그 당시 중국과 유럽 스타일의 가구들이 재현되어 있다. 다음 집은 타이파와 콜로안에서 수집된 지도, 그림, 기념물들이 가득한 아일랜드 하우스이다. 포르투갈 하우스는 포르투갈의 의상과 뮤지컬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전시 갤러리는 그림, 사진, 포스터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이들 주택 중 가장 큰 집은 현재 회의나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 마카오- 캄보디아 여행
2005.1.18(화)-1.23(일) 패키지 여행
자세한 내용은 왼쪽 메뉴의 여행 일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마카오(MACAU)의 역사
중국의 작은 어촌에서 무역항의 요지를 거쳐, 이제는 도박과 휴양지로 또다른 중국의 모습이다. 중국의 남쪽 반도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마카오는 높은 인구 증가율과 급성장한 경제, 유럽과 동양 문화와의 융화된 독특한 마카오만의 문화를 도시 전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명칭 : 마카오(오문, 澳門, MACAU)
2. 인구 : 약 461,833명(2002년 현재, 유동인구 20만명)
3. 면적 : 23.8㎢로 홍콩의 1/45, 싱가폴의 1/29에 해당
4. 민족 : 중국인(95%), 포르투갈인& 유럽&기타(5%)
5. 주요언언 : 광동어(공식어), 포르투갈어, 영어(무역, 관광산업으로 인해
폭넓게 사용됨)
6. 종교 : 불교 45%, 가톨릭 7%, 개신교 1%, 기타 종교 1.2%
7. 지리 :
마카오는 광동성과 가깝고 홍콩에서는 38해리(70km) 떨어져 있으며, 광주에서는 45km 떨어져 있다. 과거 광동성 중산시 남단의 작은 섬이었으나, 서강(西江)의 진흙이 끊이지 않고 충적되어서 마카오와 대륙 사이의 작은 제방을 형성하였고, 비로소 대륙과 연결된 반도를 형성하였다. 마카오의 지세는 남북고저로 해발이 높지 않으며 주로 저구릉 지대와 평지로 구성되었다.
7. 기후 : 홍콩과 같이 아열대에 속하며, 평균 기온은 16-25℃, 습도는 73-90%이고 강우량은 연간 100-200mm이다.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10-12월 사이의 가을로, 이 시기에는 맑게 갠 날이 많고 따뜻하며 습도도 낮다. 1-3월의 겨울은 조금 추우나 비가 적고, 쾌청한 날이 계속된다. 4월이 되면 습도가 높아지기 시작하여 여름인 5-9월 사이는 덥고 습하다.
8. 역사
광동 지역을 흐르는 주강의 하구라는 위치 때문에 마카오가 '오문(澳門)' 또는 '무역의 관문'으로 알려졌을 당시, 마카오의 첫번째 정착민은 복건성에서 온 어민과 광동성에서 온 농민들이다. 예전에는 항구도시가 로마로 가는 비단을 나르는 실크로드의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이 세계 무역의 중심에서 멀러진 후에도 광동 지역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활발한 해상무역을 통해 번영을 이루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상인들은 1513년 중국 남부해안에 처음으로 들어와 무역을 시작한 조르쥬 알바레스의 뒤를 이어 정착한 포르투갈 상인들을 환영했습니다.
1550년대 초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마카오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은 '아마의 땅'이라는 의미인 '아마가오'로 불리고 있었다. 이는 바다의 여신인 아마를 기리기 위한 것이며 여신의 신전은 내항의 입구에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그 이름을 숭상하여 '마카오'란 이름으로 바꾸었고, 중국 관리의 허락을 받아 마카오를 중국, 일본, 인도 유럽 간의 무역 중심 도시로 성장시켜다.
이로써 마카오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선교단을 보내 성 프란시스(일본에서 많은 선교활동을 벌인 인물)의 뒤를 이었으며, 기독교 대학이 설립되어 마테오 리치와 같은 학생들이 신학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 대학이 바로 오늘날의 성 바울 성당이다. 그밖에도 많은 교회들과 요새들이 건축되어 오늘날에도 독특하게 느껴지는 유럽 풍의 도시로 변모해 가게 된다.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전성기는 라이벌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의 등장으로 서서히 쇠퇴해 가게 된다. 그러나 중국은 포르투갈이 마카오네서 계속 무역을 하도록 허락했으며, 이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100년 이상 카사 정원을 임대하여 상점을 열기도 했다. 유럽의 대 중국 무역이 성장함에 따라서 유럽 상인들은 광동에 머무르면서 교역 시즌에 중국 차와 귀중품을 사고 마카오에서 휴식을 취했다.
1841년 아편 전쟁 이후, 홍콩이 개항하자 많은 외국 상인들이 마카오를 떠나게 되어 마카오는 조용하고 예스러운 도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카오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와 역사적인 건물들 때문에 많은 여행가의 작가, 그리고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여행지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근대로로 접어들면서 마카오는 호텔, 리조트, 스포츠 시설, 식당과 카지노 등 관광 산업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섬유, 전자제품, 장난감 산업 등도 발전시켜 왔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마카오의 경제는 홍콩이나 광동 지역, 특히 아시아의 작은 호랑이로 불리는 주강 삼각주 지역의 경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마카오는 금융 서비스, 운송과 통신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오늘날 마카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으로, 홍콩과 마찬가지로 '1국가 2체제' 원칙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중국의 마지막 식민지 '마카오'가 포루투칼로부터 중국으로 1999년 12월 20일 홍콩(97년)에 이어 정식 반환되었다. 마카오 특별행정부(SAR)의 에드먼드 호 초대 행정장관(44)은 바스코 비에이라 마카오총독으로부터 마카오의 주권을 공식 이양받았다. 중국은 97년 홍콩 반환에 이어 마카오의 주권을 회복함으 로써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에 빼앗겼던 영토를 완전 회복했다. 이 작은 크기의 특별행정구역은 매립지 건립을 통해 그 크기를 넓혀가고 있으며, 다양한 관광지를 개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카오는 동양과 서양의 조화라는 독특한 분위기를 더욱 발전시켜 마카오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