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국문화체험 발자취(안양시 박문국)------------------6
o 중국을 바로알고 남보다 빨리 대처하자
o 중국어 잘하는 비결
o 중국개황
o 중국의 철도여행
o 주말 우리가 다녀온 주요도시 소개
심양시, 본계시, 단동시, 안산시, 대련시, 내몽고, 연변자치주
4. 동북지역 여행 소감
o 백두산 기행문(평택시 김상철)----------------------41
o 무단강(경기도 문영근)----------------------------46
5. 중국생활 에피소드 모음(가평군 김정범)---------------50
6. 과외활동
o 중국 교회참석 소감문(의정부시 허성윤)--------------52
o 중국역사 고찰(용인시 역삼동 박명순)----------------55
7. 중국 요녕성 중국어 연수교육 소감(경기도 정상현)------59
8. 중국 요녕성 중국어 연수교육 참가자 명단-------------62
서 론
우리도와 중국 요녕성간의 우호협력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양도성간 상호 공무원 어학연수 교류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지난 93년 우리도와 중국 요녕성간 자매결연이 체결된 이래 양 도성간에는 경제사절단 방문, 공무원 교류연수 등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으며, 2000. 9월 요녕성장의 경기도 방문시 상호간 공무원 교류연수를 합의함에 따라 금년에 제1회 교류연수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양 도성간 어학연수 교류는 각각 20명 규모로 8주과정으로 실시되었으며, 우리 연수단 20명은 5월30일부터 7월20일까지 중국 요녕성 당간부 양성학교에서, 요녕성 연수단 20명은 4월16일부터 7월7일까지 경기도 공무원교육원에서 각각 실시되었다.
금번 연수는 양 도성간 상호 우호증진과 양국의 행정 및 문화 이해의 폭을 확대시키고 어학능력향상을 통하여 서해안 교류시대에 대비한 국제인적자원 양성에 중점을 두어 실시되었다.
우리 연수단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중국어 학습을 충실히 함은 물론 연수원 교직원과 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실시하였다.
또한 가까이는 심양시내를 비롯하여 경기도내 시군과 자매결연을 체결한 단동, 금주시를 방문하였고, 멀리는 흑룡강성 하얼빈, 북경, 내몽골지방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를 등정하였고 요녕성 개혁개방의 선두기지인 대련시를 방문하여 발전상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울러 요녕성내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실상을 체험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연수단은 이러한 체험이 앞으로 전개될 서해안 시대 한국과 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확신하면서 그동안 연수소감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우리 연수단은 소중한 기회를 갖게 해 준 지사님과 중국 요녕성장께 감사를 드리며, 연수준비와 진행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경기도와 요녕성 연수관계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우리 연수단 개개인은 경기도와 요녕성의 우호협력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함께 서해안 시대를 여는데 정진해 나갈 것이다.
연 수 개 요
경기도 중소기업과 문영근
○ 과 정 명 : 경기도-요녕성공무원 어학교류과정
○ 연수인원 : 20명(도3, 시군17)
○ 연수기간 : 2001. 5. 30 ∼ 7. 21(8주)
○ 장 소 : 요녕성 정치경제학원(심양시 화평구 오리하 18호)
○ 연수목적 : 중국어 연수 및 중국문화의 이해를 통한 교류협력
○ 연수방법 : 합숙연수(숙소 : 1인1실)
○ 연수 일정표(일일)
· 06:00-07:00 기상 및 운동
· 07:00 아침식사
· 08:30 - 11:30 오전학습(중국어 학습)
· 12:00 - 14:00 점심 및 오수
· 14:00 - 17:00 오후학습(중국어-청취력, 태극권, 방문, 강좌 등)
· 17:00 저 녁 및 자유활동
· 22:00 취 침
※ 토요일은 오전 3시간 청취력 학습수업후 자유활동
○ 연수내용
o 중국어 학습
· 학습내용 : 기본학습, 청취력, 소감발표, 평가
· 반 편 성 : 처음 1개반에서 상급반과 하급반으로 구분 편성
- 기본학습은 반별로, 청취력 등 기타학습은 통합 수업
· 강사
- 상급반 : 중국인 보조강사가 담당
- 하급반 : 조선족으로 은퇴한 교수가 담당
- 청취력 : 중국인으로 전문교수가 담당
- 소감발표 및 평가 : 보조강사가 담당
o 기업체방문 : 심양제1기상창(공작기계공장 외 2)
· 최초 3주간 주1회 수요일 또는 금요일 오후에 방문
o 농업기지방문 : 동릉구 농업기지, 신농광장, 세기광장,
동릉구포도연구소
o 역사유적 탐방 : 고궁, 북릉공원
· 오후수업에 포함
o 백두산 등산
· 기 간 : 7. 6(금) ∼ 7. 9(화)· 3박4일
o 성시 방문 : 안산시, 대련시
· 기 간 : 7. 15(일) ∼ 7. 18(수)· 3박4일
· 주요방문지
- 안산시 : 옥불원, 천산
- 대련시 : 시내관람, 대련시 개발구 등
o 중국문화이해강좌
· 시 간 : 주1회 오후시간(과정별 3시간강의)
· 내 용 : 경극의 이해, 중국역사, 중국고전의 이해,
중국의 공무원제도, 요녕성개요
· 강 사 : 외래강사 또는 학원전임교수
o 체육활동
· 시 간 : 주1 ∼2회(오후시간 활용)
· 내 용 : 배구, 탁구, 태극권
o 자유체험 활동
· 시 간 : 주중 일과후 또는 주말 활용
· 방 법 : 개별 또는 2인이상 단체 활동
- 여 행 : 본계, 단동, 금주, 하얼빈, 북경, 내몽골(쯔펑), 목단강
- 심양시내 : 재래시장(오애시장), 서탑거리, 심양식물원, 하궁,
대학(요녕, 동북 등)방문
o 기 타(오찬, 만찬) : 6회
· 공식행사 : 학원(3회), 요녕성, 안산시, 대련시 각1회
· 비공식 : 단동시, 금주시 등
중국 문화체험 발자취
안양시청 국제협력과 박문국
□ 중국을 바로 알고, 남보다 빨리 대처하자
『13억 중국이 움직이고, 세계는 흔들리고 있다』
『중국의 경제는 뛰고 있고, 세계경제는 추락하고 있다』
『중국을 모르고 값싼 노동력만 보고 중국에 진출하던 시대는 지났다』
『중국이 우리보다 5~10년 뒤진 저개발국이 아니라 관료들의 의식과 일부 중국의 경제시스템은 우리보다 더 선진적이며 자본주의적이다』
『중국은 한국에서는 더이상 배울것이 없다 이제는 "실패의 사례"를 한국에서 배운다
중국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무수한 교훈들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다. 우리 경제의 유일한 희망은 대중국 수출촉진이다, 중국이 금년 11월을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여 시장이 개방되고, 더욱이 2008년 북경올림픽게임 분위기로 최근 중국을 휩쓸고 있는 한류(韓流)열풍에 편승하여 대중국 수출확대 및 중국진출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며, 따라서 중국을 바로 알고 빨리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증명하듯 현재 각 대기업체에서는 중국을 바로 알고 중국 시장을 선점하고자 사원들에게 중국어를 영어와 함께 동일하게 대우하는 등 중국어 열기가 점차 확산되고 추세이다.
이번에 함께 중국어 연수를 다녀온 우리 동학(同學)들은 先見之明이 있는 앞선가는 공무원들로서 앞으로 비록 면학여건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틈틈히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하여 각 요소요소에서 필요로하는 인재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중국을 바로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중국의 개황 및 중국어 연수기간중 문화체험 지역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면서 그 지역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중국어 잘하는 비결
1. 중국어 공부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중국에서 수업 받았던 주입식 수업방식이나 획일적으로 짜여진 중국어교재보다는 중국어 퀴즈, 유모, 노래, 명시를 활용하고, VTR, CD물등 시청각 교재를 활용하면 더욱 효과적이고, 특히 중국어 싸이트에 접해보면 공부하는 동기를 충분히 유발시킬수 있다.
2. 중국어의 정확성보다는 유창성,실용성에 비중을 두자
중국어 발음이나 어휘가 조금 틀려도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할수 있으면 의사소통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정확성도 중요하지만 중국어를 유창하게 실용회화를 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임.
3. 중국어 공부는 반복과 축적입니다
어느 외국어를 막론하고 수없이 많은 모방과 반복을 통해 습득하게 된다. 어느 통계를 보면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아이가 2,000시간 정도 지나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 한다고 한다. 어른보다 아이들이 영어를 접하는 시간이 많고, 실용회화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러분들도 출퇴근하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도 중국어 테이프를 중국 CCTV를 켜놓으면 무의식 속에서 중국어 어휘나 문장들이 조금씩 들린다고 합니다. 즉) 스스로 중국 현지의 환경을 만들어 그속에서 생활하면 중국어에 훨씬 더 친숙해지고, 빠른 속도로 놀라운 효과를 볼수 있다고 합니다.
4. 중국어 공부는 다독도 매우 중요합니다
중국어를 잘 읽는 사람이 듣기, 말하기, 쓰기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떨어지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읽기를 잘하려면 꿇어 읽기를 잘해야 하고, 꿇어 읽기를 잘하려면, 문맥과 문장구조가 잘보이고, 의미도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어휘, 문법, 문장구조, 의미 등이 반복과정에서 터득하게 된 것이다. 중국어 문장을 다독하고 암기하면 중국어가 자기에게 점점 다가오는 친근감을 느낀다고 한다
5. 핵심 어휘를 잡아라
다양한 어휘와 문장을 접하면서 많은 어휘력을 확장해야 한다. 또한 모든 어휘를 모두 소화할수 없음으로 그중에 꼭 필요한 중요한 핵심어휘를 습득하여 자기화 해야 한다
(핵심 어휘)
(1) 확장성이 크고 사용빈도가 높은 어휘 (2) 상용되는 類義語, 多義語
(3) 사용되는 기능어(虛詞) (4) 약어 또는 고정구조
(5) 성어, 숙어, 관용어, 歇後語
(비핵심 어휘)
(1) 사용빈도가 높지 않은 어휘 (2) 보아서 쉽게 이해되는 어휘
(3) 상용되지 않은 고대 어휘 (4) 방언이나 사투리
(5) 잘 안 쓰이는 글말 어휘
6. 언어에 관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배운다
중국어의 글말과 입말의 차이, 구체적인 용법의 차이, 격식을 차리는 경우와 차리지 않는 경우의 차이, 보어를 활용한 중국어다운 표현 등을 많이 알아야 경우에 맞게 사용하게 되지요.
7. 중국어의 특징을 알아야 길이 보인다
중국어는 세계의 다른 언어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1) 기본 문장이 명사(주어)와 동사(술어)로 구성되고,
(2) 형용사가 명사를 수식, 부사가 형용사를 수식
(3) 동사가 명사로 전환할수도 있고,
(4) 접속사와 진술문, 의문문, 부정문, 명령문 등 4문형을 갖고 있다.
(5) 성조언어이며, 문장의 의미가 어순에 의해 결정됨에 따라 우리말과 대조적임.
(6) 量詞와 語氣詞가 발달되어 있고, 약어와 신조어가 급증
[ 中 國 槪 況]
중국 공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며 아시아 동부, 태평양의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북한을 이웃하고, 남으로는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와 인접하고 있고, 서남과 서부는 인도, 부탄, 시킴, 네팔,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을 이웃하고 있다.
동북은 러시아, 북쪽으로는 몽고, 서북은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타지크스탄과 이웃한다.
동쪽과 동남쪽에는 황해, 동해, 남해와 이웃한 일본,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및 브루네이 등과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960만Km2으로 아시아와 세계의 최대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경제, 문화 발전이 가장 오래된 국가로, 문자 사용은 거의 4000년에 이르는 오랜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상 중국노동인민은 농업. 수공업의 발전과 풍부한 문화 전적을 만들어냈다.
기원전 21세기 하왕조 건립, 상, 서주에서 춘추말기에 이르기까지는 노예사회였다. 기원전 475년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진, 서한, 동한, 삼국, 서진, 동진, 남북조, 수, 당, 5대, 송, 요, 금, 원, 명, 청조 전기에 이르기까지는 봉건사회였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 제국주의의 침입으로 점차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하여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94년말까지 중국은 이미 세계 160여개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많은 국가, 지역과 경제무역관계, 문화교류를 하고있다.
<주민>
12억2천만으로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국가로 한족은 전체인구의 약 92%를 차지하고 있으며, 55개의 소수민족은 총인국의 약 8%를 차지하고 있다.
소수민족중 1000만을 넘는 장족, 100만을 넘는 회, 유오이, 이, 묘, 만, 장, 몽고, 토가, 포의, 조선, 통, 요, 백, 합이, 합살극, 태, 려족등이 있다.
통용어는 한어, 각 민족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같이 사용한다.
다종교국가로 주요종교는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 등이며 종교, 신앙의 자유가 있다.
<자연환경>
경지의 지세는 서고동저형으로 지형이 복잡다양하며, 산지와 구릉이 비교적 험준한 고원이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서남부지역은 유명한 "세계의 지붕" 청장고원이다. 청장고원 서북단에서 파미르 고원이 연결된 고대 산맥이다. 동쪽으로 점차 하강하는 저산, 구릉이 있고, 기본적으로 서쪽과 동부, 서남 2종류의 층향이 보편적이다. 동서층향의 산맥은 서부에 많이 분포해 있고, 산세는 점차 낮아지고, 풍경은 수려하다.
이외에 남북. 서북-동남층향의 산맥이 있다. 주요산맥은 알타이 산맥, 천산 산맥, 곤륜 산맥, 히말라야 산맥, 횡단 산맥, 기련산, 음산, 진령, 대흥안령, 백두산, 남령, 대만산맥등이 있다.
동서층향 산맥의 대부분은 중국 지리구역에 중요 분계선이며, 곤륜 산맥 북쪽가지와 기련산은 청장고원의 북쪽 가장자리이다. 음산 산맥은 내륙구와 외륙구 분계선의 하나로 진령은 황하, 장강유역의 분수령 히말라야 산맥은 청장고원의 서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동북-서남층향의 산맥 거의 2개로 대치해 위치하느데 대흥안령, 태행산, 무산, 무릉산, 설봉산 등인데, 일반적으로 서쪽 비탈은 비교적 평탄하고, 동쪽 비탈은 지세가 높고 가파르다. 내몽고 초원이 형성되있고, 황토고원과 운귀고원의 가장자리이며 하천유역에 낮은 산지가 많고, 협곡과 급류가 흐르며 유명한 장강 3협, 다시말해 장강을 가르는 무산 산지가 형성되있다.
백두산, 요동구릉, 절민(절강.복건)산지 등은 불연속적으로 중국의 동부평원 동부에 분포해 있으며 나무가 웅창하고,많은 유명한 풍경지가 많다.
이 2개 지대 사이에는 중국의 주요평원이 분포이다.
이상 산맥의 분포는 중국지형의 기본골격을 구성한다. 고도변화가 분명한 것을 기준으로, 중국지세는 서-동 3계층으로 구분한다. 청장고원의 평균 해발 4000m이상, 기세가 웅장하고, 고원에는 산봉우리와 넓은 골짜기가 병렬되어 있고, 호수가 많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제일의 고봉 주목랑마봉(해발8848m)은 청장고원의 남쪽 가장자리로, 중국, 네팔의 접경지역에 있다.
청장고원의 북,동쪽은 하강하여 해발 2000-1000m 이하의 고원과 분지로 하강하는데 주요한 지면에 험한 운귀고원이 있고, 계곡이 종횡으로 놓인 황로고원, 평평한 내몽고고원과 물이 맑고 산이 푸른 사천분지, 사막이 널리 분포되어 있는 타림분지 초원이 광활한 준갈 분지등, 이것이 제 2단계이다. 신장 투루판분지의 최고 낮은 지점은 해평면이하 155m, 중국육지중 가장낮은 지방이다. 대흥안령, 태행산, 무산에서 운귀고원동변은 해발 1000m이하의 구릉과 200m이하의 평원, 주요는 동북, 화북, 장강 중하류 평원, 동남연해구릉, 연해평원은 해발 50m이하에 있다. 이는 제 3단계에 속한다.
중국대륙 동남쪽의 해상에는 섬이 많이 분포해 있으며 총 전국공유 5000개이다. 이중 대만섬이 가장 크며, 해남도도 있다. 면적은 200㎢이상의 숭명도, 주산도, 동해도, 해운도, 장흥도가 있다. 그중 대부분면적 1㎢이하의 작은섬은 지광에 분포해 있다. 중국의 하류는 동으로 흐르고 이는 태평양에 이른다. 주요한 것으로는 흑룡강, 해하, 황하, 유하, 장강, 주강등이 있고, 장강은 길이가 6397m로 중국 제1의 큰강이며 세계 최고 긴 하류중의 하나이다.
황하는 길이 5464m, 횡절산지의 대하는 남으로 흐르며 난창강은 태평양 수계에 속하고 노강, 브라마프트강은 인도수계에 속한다. 신장 서북부의 얼치스강은 북극해 수계에 속한다. 중국 서북부에는 내류강이 많이 있고, 신장의 타리무강이 최고 길어 길이가 2137km로 중국의 6번째로 큰 강이다. 고대 노동인민이 만든 대운하는 길이 1801km로 해하, 황하, 유하, 장강, 전당강 5대유역이 있다. 주요 담수호로는 번양호, 동정호, 태호, 공택호등이 있고 가장 큰 담수호는 청해호이다. 중국 대부분지역은 북온대와 아열대에 위치하고 계절풍 기후 지역이다.
영토가 광활한 이유로 지형은 복잡하고 각지역의 거리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에 기후가 복잡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흑룡강성의 북부는 1년내 여름이 없고, 해남도는 여름이 길고 겨울이 없다. 회하 유역은 사계절이 분명하며, 운귀고원의 남부는 사계절이 봄과 같다. 청장고원 서부의 겨울은 눈이 많이 오고, 서북내륙의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고 일교차도 크다. 전체적인 특징은 전국이 여름은 보편적으로 고온 강수량은 비교적 많고, 겨울은 남북의 온도차이가 크며, 연평균 강수량은 동남 1500mm이상 서북쪽으로는 50m정도이다.
<자연자원>
중국의 자연자원종류가 매우 많고 잠재력이 거대하여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 말한다. 현재 농경지는 대략 9600만 핵타르, 세계농경지 총면적의 7.7%로 세계 제4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 아직도 전국에 대략 3300만 핵타르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황무지가 있고, 6000만 핵타르의 초원지대와 9000만 핵타르의 산림황무지와, 황무지, 수림지가 개발을 기다리며 이용되고 있다.
본국은 세계 광산물 종류가 많이 있고 공장이 분포해 있고 매장량이 많으며 대부분의 광산물 자원을 자족하기 충분한 흔하지 않은 국가중 하나이다. 현재 밝혀져 일정량이 매장된 광물 종류는 거의 150종에 가깝고, 그중 비철금속이 가장 많으며 텅스텐, 안티몬, 주석, 수은, 몰리브덴, 아연, 구리, 비스무트, 바나듐, 티타늄, 희토, 리튬등이 세계 자원시장 점유율이 크다. 납, 철, 은, 망간, 니켈 등의 매장량은 세계적 가치가 있다.
전국 수자원 총량 대체적 추산이 28000억m3, 하천유량은 세계 총량의 5.8%에 달한다. 현재의 산림면적은 1.2억 핵타르, 산림이용률 13%, 또한 품질이 우수한 자원이 많이 있다. 경제가치가 비교적 높은 나무들이다. 생물자원은 굉장히 풍부하여 종자식물 2.5만종, 경제식물 2400종이 있다. 2400종의 어류와 대량의 갑각류, 패류와 해산물이 있다.
<경제개황>
경제발전은 비교적 빠른편이다. 농업에서는 생산방식과 조건을 차츰차츰 변화시키고 있고 많은 성, 시, 지구,현, 진, 현진향(縣鎭鄕)의 양식 평균 1묘당 단위 생산량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생활수준 역시 점차 개선되고 있다.
남부의 식량을 북부로 이동시키는데 공헌하고 있다. 중국의 농, 임, 목축, 부, 어업 5가지의 발전은 전국인민 생활과 공업생산을 위하여 필수상품, 원자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양식작물중 소맥과 한량은 주로 북방각성에 분포되 있고, 쌀은 주로 남방각성에 분포해 있다.
수리사업의 발전에 따라 수미, 소맥종 작물 재배 면적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경제 작물은 주로 면, 마, 기름, 설탕 등이고 화북평원과 장강 중하류 평원이 주요 생산지이다. 서북지역 또한 큰 면적의 면화밭이 있다. 거대한 산지에서는 양식생산이외에 동유, 차잎, 명주, 백랍, 약재료등 많은 종류의 농산품이 있다.
공업상, 현재 이미 비교적 제대로 가추어진 철강 공업이 건설중이고, 자동차, 트랙터, 선박, 비행기와 각종 기계의 제조 공업을 건립하고 있으며 몇가지 고급, 대형, 정밀, 신형의 기계는 이미 대량 생산을 하고 있다. 화학, 방직, 식품, 제과, 담배등의 부문은 원료 생산이 보편적으로 건립 되있다. 지방 중소형 공업으로는 석탄, 철강, 전력, 농기구, 기계제조, 화학비료, 시멘트등의 부분 우후죽순으로 건립되고 있으며 각성의 대부분 모두 자기의 공업회사를 건립했다. 과학기술 역시 빠른 발전의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철도는 본국 교통수단의 뼈대이며, 건국이후 서부지역에 대량의 신철도를 건립했고, 동시에 철도의 기술 개선이 진행되고 있고 많은 복선을 만들어 철도수송능력이 2배이상 증가했다. 현재 서장이외에, 전국 각성에 모두 철도가 있다. 주요 철도 간서은 경광선, 경구선, 경호선, 경화선, 빈주선, 빈수선과 심대선, 경포선, 포란선, 농해선, 난신선, 보성선, 성유선, 호항선, 절감선과 삼계선, 상금선등 철도 이정 53500Km 개통되었다.
도로 교통발전 속도가 빠른데, 전국 80% 정도 자동차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천장, 청장, 신장 등의 도로는 변방 지대의 도로건설이라는 이점과 국방에 많은 이바지를 할수 있다는 이점에서 만들어졌다.
내륙의 강을 통과하는 비행이정이 전에 비해 2배가 넘게 증가했고, 장강, 주강, 송화강의 운수업이 제일 성행한다. 속칭 천험의 장강 3협은 이미 야간 항행을 성공하였다. 연해에 대련, 천진, 청도, 상해, 광주, 잠강등 주요 항구가 있고, 만톤급 기선을 정박할수 있어 연해 각성과 세계각지와 관계맺고 있다.
전국 현재 민간항곡기 200대로 80개어의 도시현과 연결하고 있다. 국제항공선은 많은 국가에 운항하고 있다.
□ 중국의 철도여행
1. 먼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의 기차시간표를 확인하고 선택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처럼 역에서 그저 보고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날짜만 정해져 있고 시간의 구애는 없다면 그냥 역에 가서 며칠날 어디에 간다 라고 말하는 것이 편하다. 그렇지 않고 기차로 계속 여행할 사람은 기차 시각표를 사는 것이 현명하다. 전국 모든 역에서 팔고 있으며, 2001년 7월 현재 8원이다. 그러나 이 기차 시각표를 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므로 기차여행을 하려면 미리미리 사서 일정에 따라 기차 시각을 확인해놓아야 한다.
2. 역에 가서 기차표를 산다. 종이에 자신이 타고 싶은 열차의 번호, 좌석종류, 필요한 차표수를 적어서 건네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북경이나 서안처럼 큰 도시에는 외국인 전용창구가 있어 그곳에서 표를 사면 편리하다. 우리나라의 전산시스템을 이용한 예약 및 판매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한 역에서는 그곳에서 출발하는 기차표밖에 판매하지 않는다. 서울역에서 부산에서 서울 오는 기차표를 살수 있는 것처럼 되어있지 않다. 북경역에서는 북경역에서 출발하는 기차표밖에 살수없다.(북경서역에서 출발하는 기차표는 구매가능) 3일후까지의 표를 살수있다. 여행사에서 구매하면 더 후의 것도 가능하지만 커미션이 많이 붙는다.
3. 열차 발차 시각에 맞춰서 역에 가서 기차를 탄다. 처음 가보는 역이라면 시간을 넉넉히 두고 가서 미리 플랫폼을 확인해두는 것이 좋다. 북경이나 북경서역, 서안, 상해같은 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꼭 미리 갈것!
4. 기차가 출발하면 승무원이 기차표를 가져가고 보관증을 내어준다. 두꺼운 종이나 알미늄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잃어버리면 큰일~! 내리기 전에 와서 표와 바꾸어준다.
<기차의 종류>
기차의 종류로는 游車(뤼어우처),特快(트콰이), 直快(즈콰이),快客(콰이커),直客(즈커),客(커)등의 6가지 종류가 있다.
(游車 : Y5 ~ 27車)
차차(車次)앞에 Y가 붙는다.주로 이층기차이며 화장실이 한 차량에 2군데씩 있으며,중국에서 가장 좋은 열차이다. 짧은 거리에서만 운행된다.
(特快 : 1~99車 : 두자리수)
그 다음 고급열차..롼워(軟臥),잉워(硬臥), 롼쭤(軟座), 잉쭤(硬座)의 좌석과 식당차등이 있다. 대도시간을 연결하며 멈추는 역이 적어 빠르다. 설비,서비스,청결등도 점차 나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새마을호에 해당.
(直快, 快客 : 100 ~ 350車 : 세자리수중 앞번호)
우리나라 무궁화호쯤에 해당. 두 철도국사이를 연결하면 즈콰이라 하고 한 철도국내에서 운행하는 것을 콰이커라 한다. 란워,잉워,식당차등을 갖추고 있다.
낮에만 운행되는 열차엔 침대칸이 없기도 하다.
(直客,客)
우리나라 비둘기호쯤에 해당하여 모든역에 정차하는 완행중의 완행이므로 여행자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아직도 증기기관차가 쓰이기도 한다.
기차의 등급에 설비,서비스등의 차이가 확연하며 따라서 가격차이도 당연히 난다. 기차의 등급은 숫자게 낮은 것일수록 높다.
<좌석의 종류>
(軟臥 : 루안워)
푹신푹신한 침대. 한 칸에 4명. 양쪽으로 2층 침대. 문이 있기때문에 조용하게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가격은 잉워의 2배이상이므로 거의 이용하지 못한다.
(硬臥 : 잉워)
딱딱한 침대. 한칸에 6명. 양쪽으로 3층침대. 문이 없기 때문에 때론 불편하기도 하다. 모포와 베개, 수건등이 있으며 한칸당 한개의 보온병이 비치되어 있다. 3칸중 상,중푸의 경우 침대위에 앉아있을 수 없을 만큼 위침대,천정높이가 낮다. 고로 잘때만 침대위로 올라가고 보통때는 맨아래 침대나 복도의 보조의자에 앉아 있어야한다. 시아푸는 앉아있을 수는 있으나 상,중푸의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통에 귀찮은 단점이 있다. 가격은 하푸가 가장 높고 그다음이 중, 상푸 순이다. 우리들이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종류이다.
(軟座 : 루안쭈어)
푹신푹신한 좌석. 우리나라 일반 열차 좌석수준. 모든 열차에 다 달려있진 않다.
(硬座 : 잉쭈어)
딱딱한 좌석. 가장 싼 만큼 불편을 각오해야 한다. 은하철도999에 메텔과 철이가 타던 그 칸과 똑같은 구조다. 90도의 좌석등받이...항상 넘치는 사람들...복도까지 쌓인 짐들...담배연기...곳곳의 침들...구토물...특히 야간열차의 잉쭈어를 타기는 정말 힘들다. 낮시간의 이동이라면 상관없지만 밤을 지내기엔 불편하다. 특히 여성들에게 잉쭈어는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지저분하고 밤에는 춥고 잠을 잘 수도 없는 현실을 싸다는 이유 하나로 다 참아낼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표(좋은좌석바꾸기)>
우리 나라와는 달리 며칠씩 달리는 기차가 있는 중국에서는 부표(부피아오) 제도가 있다. 기차를 타고 난 후 자신의 좌석 종류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원하는 종류의 좌석을 얻지 못했다면 승무원에게 부피아오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된다. 좌석이 나는대로 바꿔준다. 일정 수수료(절대 비싸지 않음)와 차액만 지불하면 된다. 몇날며칠을 달려야하는 기차라면 자리가 나기 마련이니 잉쭈어나 입석표밖에 구할수 없지만 날짜가 급한 사람이라면 과감히 시도해보시길^^.
<주의점>
1. 여행시즌과 중국 대학 방학 기간이 겹친다면 표 구하기가 여간 힘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방학기간에는 암표가 성행하는데 암표도 구하지 못하여 제때 날짜를 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중국의 연휴(설날, 노동당창당기념일등)에는 말 그대로 민족대이동이 있으므로 여행자에게 타격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그 기간은 피하는 것이 상책
2. 기차 안에서 짐지키기
잉쭈어(가장 낮은 가격의 칸)에서라면 잠을 물리치기 위한 사투를 각오해야한다. 중국인들은 기차를 타면 제일 먼저 자신의 짐을 둘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가방(대부분 바퀴달린 트렁크를 소지한다. 그래서인지 이 가방이 중국내에서는 어느 시장에서나 흔하게, 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자체의 열쇠는 물론 가방을 통째로 자전거줄등으로 감아 열쇠를 채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국인들 조차 자신의 짐관리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데 외국여행자들을 말할 것도 없다. 요즘은 잉워이상이라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게 없다.
3. 환불 & 변경
우리 나라처럼 기차표를 들고 창구에서 반환하고 다른 표로 교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행 일정이 바뀌었다면 일단 먼저 바뀐 일정에 따른 표를 구입하고, 환불(退表-투이 피아오)창구에 가서 표를 환불받아야한다. 전액환불은 불가능하고, 일정의 수수료가 있다. 기차가 출발하면 표는 완전무효가 된다.
○遼寧省 沈陽市
심양시는 요령성의 수도이고 북경과 상해, 천진에 이어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오늘날 중국 동북공업지대의 중심이자 교통의 축이기도 하고, 정치·문화적으로 동북아지역에서 가장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총 면적은 약 8,500㎢이며, 지리적으로 요하평원의 중부, 혼하(渾河)의 북안에 자리잡고 있다.심양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도로 이미 전한(前漢)시대(기원전 206년∼서기 24년)에 초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 원(元)대에 심양로(瀋陽路)라 불리게 되었고, 『심양』이라는 도시명칭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이곳을 도읍으로 설치, 성경(盛京)으로 이름 붙였으나 청의 북경천도와 함께 개칭, 1945년에 다시 심양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심양시가 위치하는 곳은 요령중부이다. 전국 특대형시에 속하며 요녕성의 성도이다. 또한 요녕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심양은 역사적으로 유구한 고성으로 이미 세계적으로 100여개 국가및 지역과 무역, 경제, 과학, 문화교류관계를 맺었고 또한 일본의 삿뽀르와 가와사키, 미국의 시카고, 독일의 뒤셀도르프, 이탈리아의 뚜린, 소련의 이르쿠스크, 멕시코의 밍터레이, 필리핀의 쿠송시, 우리나라 경기도 성남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심양은 중국 동북지구의 최대교통의 요충지이다.
철로운송이 발달되어있고, 장대, 심산, 심길, 심단, 심무, 심적등 주요 간선철도가 이곳에 놓여있다.
도로는 성전체적으로 고루 건설되어있다. 더불어 심양-대련, 심양-무순, 심양-본계, 심양-철령과 심양요성등 5개 고속도로가 이미 건설되어 있다. 심양- 장춘, 심양-산해관-북경의 고속도로는 곧 준공을 앞두고 있다.
건설중인 환성고속도로, 심철, 심무, 심단 고속도로는 심양을 둘러싸 형성되었고, 항구, 공항과 연결되어 " 일환사사" 의 고속도로망을 형성하였다.
도산 국제 공항은 신북역에 건설되어 사통팔달의 입체적 교통체계를 형성하였다
심양은 중국의 유명한 중공업시로써 항공, 기계, 전산, 중형광산이 건설완비 되었고 중국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심양공원(沈陽公園)>
북경의 고궁, 즉 자금성에 비하면 작지만 중국에서 고궁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완전하게 보존된 고대 제왕 궁전으로 찬란하고 웅장하다. 총 면적은 6만 평방미터로 90여 개의 건물에 300여 칸에 이르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으로 지은 지 350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만주족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호젓한 분위기를 풍기는 궁이다. 청태조 누루하치가 처음으로 나라를 열고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머물렀다. 지금은 7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으며 다 돌아보는 데 몇 시간이 소요된다. 황제즉위식을 거생하던 대정전과 각종 기념관이 있고 청태종이 앉던 자리, 신하 접견장소, 황후 침실이 보존되어 있다. 건물은 包처럼 둥근 양식이라 매우 인상적이다. 고궁 가장 안쪽에 있는 청녕궁은 청태조와 태종이 기거하던 곳인데, 제사 공간과 생활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청녕궁 앞뜰에 세워진 긴 막대 모양의 장식물은 솟대다 솟대를 통해 전수되는 하늘의 뜻을 따라 정사를 베풀었던 샤머니즘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다.
시내 중심가에 있으며 현존하는 것으로서는 북경의 고궁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고궁을 둘러보는 데는 약 2~3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천천히 보는 데는 며칠이 소요된다. 북경에 있는 것보다는 아늑한 분위기의 이곳은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건축문화를 한데 혼합해 놓은데 그 가치가 있다. 특히 색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만주족의 습성이 많이 반영되어 심양 고궁은 북경의 고궁과는 달리 청색 등 다양한 색이 사용되었다. 또한 각각의 건물들에는 당시의 궁정 생활을 엿볼수 있는 다양한 보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중국에서 북경 고궁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완전하게 보존된 고대 제왕 궁전으로 찬란하고 기세웅장하다. 청태조 누루하치와 제 2대 태종 때의 황궁으로 1625년에 짓기 시작하 청나라 숭덕(崇德) 원년(1636)에 완공되었다. 총 면적은 6만㎡로 90여 개의 건물에 300여 칸에 이르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으로 지은 지 350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내부는 동·중·서로로 크게 나뉘고 출구는 남쪽에 있다. 동로에는 고궁을 대표하는 대정전(大政殿)이 있는데, 황제와 신하들이 정무를 보던 곳이다. 중로에는 숭정전(崇政殿), 봉황루(鳳凰樓), 청령궁(淸寧宮) 등의 주요 궁전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숭정전은 2층 팔각형이 특징이며 특별한 의식이 있거나 알현할 때, 봉황루는 연회가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 서로에는 황제의 도서관이나 무대가 있고, 후세에 건룡제가 증축한 문소각(文遡閣)도 있다. 교통편은 10,13,7,9번 버스를 타면 이곳에 올수 있다. 개관시간은 5월~10월 사이에는 오전 08:30분에서 오후 17:00, 11월과 4월 사이에는 오전 09:00에서 오후 17:00까지이며, 요금은 유료로서 입장료는 외국인 5元이다
<북릉공원(北陵公園)>
심양시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면적 330만㎡로 청조 2대 황제인 태종과 그의 황후가 잠들고 있는 능묘이다. 정문에서 묘릉인 소릉(昭陵)에 이르는 참배도로에는 해태, 기린, 낙타, 말, 코끼리, 사자의 6쌍의 돌짐승이 늘어서 있다. 언덕과 산기슭 전체가 공원으로 되어 있어 한여름에는 녹 이 아름답기 그지없기 때문에 봄, 가을에 걸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끊이지 않는 공원이다. 이른 아침에는 태극권이나 기공으로 땀을 흘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동릉공원(東陵公園)>
시내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상당히 벗어난 이 공원은 청나라를 건국한 태조 누루하치와 그 황후의 묘가 있다. 162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붉은 벽돌담이 능을 둘러싸고, 하마비(下馬碑), 석비루(石碑樓) 등이 서 있다. 능묘까지는 108개의 계단이 이어지며 뒤로는 천주산( 柱山)이 있고, 앞쪽으로는 운하에 면하고 있다. 공원내에는 노송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풀이 무성하게 땅을 덮고 있기 때문에 사색하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조호(柳條湖)>
북릉공원 동쪽에 있는 호수로 이전에는 유조구(柳條溝)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유조호'라고 부른다. 그러나 호수는 없으며 지금 현장에는 거대한 9.8사변 기념관이 건립되어 만주사변과 일본군의 만행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 遼寧省 本溪市
본계시는 심양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고속버스로 1시간 정도면 도착하며 전체인구 400만여명이며, 시내 인구만도 150만여명이 넘는다. 시내거리 및 건물은 비교적 깨끗하나 외곽으로 벗어나면 도로공사 및 건축공사가 한참 진행중에 있어 먼지가 많이나고 지져분 하다
또한 본계시는 지하에 물이 흐르며 보트를 타고 왕복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 水동굴이 있으며, 동굴안에는 한여름에도 군데군데 얼음이 있으며, 손이 시려울정도로 춥다.
지하동굴에 들어갈때 입구에서 겨울파카를 무료로 대여하고 있으며 반드시 입고 들어가야 건강에 도움이 된다
본계시는 자연자원이 풍부하다. 이미 발견된 광산은 100여종이며 금속 광산 중에서 철광석의 저장량이 가장크고 질량이 높아 좋은 등급을 선택할수 있다.
이는 중국의 중요한 철광석 산지의 하나이다. 비금속광산 중 석탄과 석회석이 가장 유명하다. 본계 역시 중요한 중금속 공업도시중의 하나이다. 중국의 정명한 본계 강철공사와 북대 강철창등의 대기업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 遼寧省 錦州市
금주시는 총면적 9858 ㎦, 성면적 52 ㎦이며, 총인구 301 만명, 시내인구 250 만명으로서 요동반도의 남쪽 황해와 발해로 통하는 교량지임
행정구역 2향 11진 1국영농장 7가도판사처 (향-면,진-읍,가도판사처-동규모) 있으며, 지역특성으로는 배산임해의 항구도시로 북중국 최대의 무역항 보유(대요항만) 문화유적이 많고 지방기업 육성을 위한 각종 시책이 추진되고 있으며, 대련자유무역구에 위치하여 경제개발 붐이 일고 있어, 현재 요남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이며 "북방의 홍콩" 건설계획에 따라 대련시의 미래 신도시로 확정된 곳으로 경제붐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으며, 한국의 대규모 투자기업인 (주) 진도 등 108개 기업이 진출하여 있다
기후는 온대성으로 년평균 9∼12℃이며, 건축, 화학, 식품, 방직공업의 주요산업이 있으며, 화강암, 석회석 등 풍부하다.
금주시의 관광업은 산악 경치, 해안 경치와 역사고적이 주를 이룬다. 관광 명소는 의무여산, 대필가산, 북진묘, 태국사와 요심 전역 기념비등이 있다.
<필가산>
필가산은 금주 남 35km의 천교진 요동만에 위치하여 근해에 육지와 연해있는 산섬이다. 소도는 남북길이가 1.5km 동서폭이 0.8km 총면적 약 1 평방킬로미터, 해발 78m 이다, 북쪽 해안에서 대필가산까지 1.8km의 바다를 건너 그 사이에 조석충격으로 만들어져 연결된 바다와 땅의 천연자갈 통로로 속칭 "천교" 라 한다.
<천교(금주)>
천교는 조석의 간만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여 참으로 아름답다. 매 낙조때 해수는 더욱 천천히 양쪽으로 물들어 간다. 통로는 꾸불꾸불한 뱀모양으로 바다위에 떠 오른다. 조수가 완전히 다하면 "천교"는 완전히 드러나 대필가산을 직통한다. 여행객은 이 모래돌길을 따라 섬에가고 산에도 오른다. 밀물이 되면 해수는 또 양쪽에서 "천교"로 나아가 "천교"는 파도 치면서 점점 좁아져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의무려산>
의무려산은 금주시 북녕시에 위치하여 면적은 630 평방킬로미터이다. 의무려산은 산세기복이 심하고, 마치 파도가 세차게 이는 것처럼 산 밖에 산이 있고 봉우리 위에 봉우리가 있다.
○ 遼寧省 丹東市
단동시는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한 국경도시로 인구는 약 50만명 정도 된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평양과 북경을 달리는 국경열차가 이 단동을 통과하고 있다. 볼거리로는 압록강공원과 금강산공원이 있는데,
압록강공원은 북한과의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의 강 언덕에 있는 공원으로 압록강대교가 아름답기 그지 없으며, 압록강을 따라 모터보트나 소형 유람선을 탈 수 있다. 금강산공원은 시내 북서쪽에 있는 공원으로 여기에서는 북한까지도 볼 수 있다.
압록강은 고대에 패수라 칭하고 한나라때에는 자수라 칭하고 당나라때에는 압록강이라 칭하였다. 물의 색깔이 맑고 푸르르며 흡사 오리의 머리 모양을 닯았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압록강의 발원지는 길림성 장백산 남록에서 시작하여 장백, 집안, 관전, 단동등지를 경유하여 황해로 유입된다, 전체길이는 795km 이고 중국과 조선양국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압록강은 단동의 약 300km를 경유한다.
단동시는 요녕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온대 대륙성 계절풍 기후에 속한다. 년 평균 기온은 8~9도, 년 평균 강수량은 1000mm 이상이다.
단동의 주요 하류는 압록강, 포석하, 초하, 대향하등이 있다.
단동은 산과 물에 근접해 풍경이 수려한 도시로 중국과 북한의 교류의 출구역활을 한다. 요동지역 정치, 경제, 문화 중심과 중국 최대의 변경도시이다.
단동은 경공업 도시이며 견직물, 방직, 날염, 제지, 수표, 금필, TV, 계량기등 위주를 생산한다. 경공업 생산품은 1000여종에 달한다.
단동은 중국의 유명한 멧누에 산지이다. 이 멧누에 생산품은 중국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대중교통이 편리하고, 철로는 심단철로, 단관철로, 단전철로가 있으며 그 중 심단 철로는 조선과 레일이 접속되여 있다. 북경에서 평양, 모스코바에서 평양의 국제 열차 모두 단동 줄입지역을 경유한다. 연강은 단동항. 랑두항이 있고 대련, 산동등지의 화물 운송항로이다. 년 출입수량은 수백만톤이 된다. 민항 단동비행장은 심양, 대련, 하얼빈, 장춘, 북성, 광주등지를 왕래한다.
○ 遼寧省 鞍山市
안산시는 요녕중부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교외양쪽에 말안장을 놓은것 같은 작은산이 있어 얻은 명칭이다. 위치는 동경 122.10∼123.41도 북위 40.27∼41.34도, 면적 9.252㎢ 인구는 340만여명으로 한족, 만주족, 조선족이 대다수 분포되어 있음.
기후는 온대 대륙성 계절풍이며, 행정구역으로는 철동구, 철서구, 입산구, 천산구, 행성시, 태안현, 수암만족자치현 등이 있다.
교통은 항공은 심양도선국제공항 90km, 등오공항 18km이며, 고속도로는 심양-대련고속도로 중간에 위치함
<안산시의 최고 자랑>
-철광석 저장량 100억톤 전국최대.
-활석저장량 6,000만톤 전국최대
-마그네슘저장량 23억톤 세계최대
-옥석저장량 206만톤
-옥불상 무게 260톤 세계최대
-온천머드(진흙) 아시아 유일
-누에 생산량 10억 전국최고
안산시 중국의 중요한 강철 공업기지이다. 원래 "중국강철도시" 라 불리운다. 중국의저명한특대형기업-안산강철공사가 이곳에자리하고 있다. 안산은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점토, 석회석, 규석,백운석,동,석묵대리석, 옥석등 금속과 비금속 광물이 저장되어있다. 안산은 풍부한 지열자원이 있다. 주요 분포지는 양남자,천산과 동사방대등지이다.
안산의 역사가 유구하며 풍경이 독특하다. 천산의 풍경이 빼어나고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천가지의 연화" 라고 불렀다 천산풍경의 4계절 특색은 "봄의 이화꽃, 여름의 연운, 가을의 홍엽 겨울의 백설" 이라 설명한다. 현 천산풍경구는 국가의 중요한 명승지이다.
○ 遼寧省 大連市
대련시는 랴오둥 반도 끝의 항구도시 다롄은 원래 작은 어촌이었다. 도시로서의 역사는 100년도 되지 않지만 많은 조계지의 하나로, 거리마다 그 분위기가 남아 있다. 지금은 중국의 5대 대외무역 도시의 하나이며 여행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기후가 비교적 적합하여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온난한 지역이다.
분명한 해양성 기후에서 대륙성 기후로 넘어가는 해안 기후의 특징이 있다. 년 강수량은 500~1000mm 정도 강수량이 가장 많은 계절은 여름이다.
대련시의 봄은 매화, 복숭아꽃, 사과꽃등이 만발하며 5월 하순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도화성' 이란 명명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전시장이 마련된다. 여름 평균 기온은 22도 정도 강수량은 350~1000mm 이며 대련 해변은 관광지역과 유람(산,바다,성등) 지로 유명하다.
<대련(大連)>
요동반도의 끝인 대련은 항구도시로 동쪽으로는 황해, 서쪽으로는 발해를 바라보고 있다. 러시아 풍이 물신 풍기는 대련은 '북해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다. 조그만 오촌 이었던 이곳은 19세기 말 러시아가 조차해 발전시켰으며 그 위를 이어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부동항이다.
오늘날에도 대중교통 수단인 레일 위의 전동차가 다른 중국 도시와는 또 다른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고 있다. 또한 이곳은 사과로 유명하며 여름에 찌는 듯한 더위가 없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해양성 기후 여서 살기 좋은 도시다.
일찍부터 일본인이 진출해 지금도 일본 유학생과 사업가의 정착지가 되어 있어 일본에서 수입한 차가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점차로 한국인도 많이 들어오고 한국차도 많이 보인다.
『북해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12,000㎢의 면적에 인구는 480만 명 정도된다. 해안선의 길이는 약 8,000㎞로 곳곳에 암초와 작은 섬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해수욕장, 해변 공원, 동물원, 화원 등의 관광객을 위한 시설도 갖추고 있다.
또한 이곳은 사과로 유명하며 여름에 찌는 듯한 더위가 없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는 해양성 기후여서 살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항구는 부동항 (不凍港)으로 상해와 더불어 중국 굴지의 양항인 동시에 대정(大正)새우, 복, 오징어, 해삼, 전복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어업기지이기도 하다. 대련으로의 여행은 사계절 모두 좋지만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는 5∼6월 사이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때가 되면 거리에 아카시아가 활짝 피어나 아카시아 거리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대련내에 봉수도, 노호탄, 수월봉, 포어저, 전가장, 금사평, 백운산, 관해동, 성해만, 흑석마등 12개 유명 관광지역이 있다.
대련의 자연자원은 해양자원이 가장 유명하다. 주로 해삼, 포어, 대하, 해파리, 가재등등이다. 어류중에서도 갈치, 작은조기, 가물치 등등이 유명하다.
대련은 조류도 유명하여 그 종류도 또한 다양하다. 여순노철사는 "조산"으로 유명하며 근처 해역에는 국내외에 유명한 '사도' 가 있다.금강석, 석회암등 광산자원이 풍부하며, 그중 금강석의 채석량은 전국 총 채석량의 반을 차지한다.
대련시는 중국 동북지역의 가장 큰 해안무역도시로 또 공업, 무역, 관광도시, 해상, 육지, 항공등 교통의 편리함과 공업부분정비, 풍부한 농수산물, 사회문화교류 활발과 함께 '패션도시', '축구도시'와 관광명소등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
경공업 부분에서는 유리기기(그릇), 방직품, 의류등의 유명 브렌드가 많다. 대련은 중국의 유명한 과수산지이다. 사과재배가 가장 많고 품종이 100여개가 넘는다. 또 황도와 앵두, 포도, 배, 딸기등이 유명하다.
대련은 또한 특이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고전적인 양식과 서양 현대식 건물등이 서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빛을 발한다.
대련의 년내 도시 행사중 유명한 것이 "중화연화폭죽 개나리 잔치", "평곡얼음 등전" 와 "대련 수출상품 교역회"등 이미 국내외 고객 가운데 유명한 행사 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대련 경제 기술개발구와 금석탄 국가 관광지역도 세련된 건축, 우아한 아름다운 환경으로 많은 사람들의 각광을 받는 신시가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노호탄(老虎灘)공원>
노호탄은 해상공원으로 대련시 남동쪽 5㎞쯤 되는 곳에 있는 기암절경이 3면으로 둘러싸인 명승지이다. 3면이 바다인 작은 반도와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만이 연결되어 공원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맞은편 해안까지 단거리 케이
블카로 건너갈 수 있다. 해변에서는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따며 즐기는 사람도 눈에 띈다. 돌출부에는 노호탄의 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아래에 노호동이라는 동굴이 있다.
<대련자연박물관(大連自然博物館)>
동북지방에서 유일한 이 자연박물관에는 해양식물, 지질광물, 동물, 식물 등 4만여 점이 넘는 표본을 진열되어 있다. 1층에는 해양식물의 표본 및 모형과 매우 인상적인 거대한 고래화석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에는 1억 4천∼1억 5천 5백만 년 전의 공룡화석(전체 길이 22m, 목길이 11m)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화석은 1957년 중국 사천성에서 발견된 것 다. 그 외 각종 조류, 원시인류의 화석과 사람의 인체해부표본 등도 전시되어 있다.
<성해공원(星海公園)>
성해공원은 대련 시내에서 10㎞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공원과 해수욕장이 함께 있는 해변공원이다. 다양한 모양의 단과 울창한 숲, 운치있는 정자가 자랑거리로서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작은 동산에는 바다까지 뚫려 있는 동굴이 있다. 동굴 곁에는『성석(星石)』이라는 이름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라고 하여 성해공원의 이름도 여기 유래한 것이다.
<부가장 풍경구(傅家莊風景區)>
대련시의 남쪽 해안에 있는 천연 해수욕장으로 면적이 18.6만㎡이며, 800m의 해안선을 가진 대규모 공원이다. 활처럼 휘어진 해안이 500m 정도 이어지며 수심은 10∼20m 정도로서 난류가 흐르는 덕분에 북방 지역에는 자생하지 않는 산호초도 있다. 더욱이 맑고 깨끗한 바닷물이 관광객을 유혹하는 고급 휴양지로 서민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다.
<중산공원(中山公園)>
중산공원은 대련시의 중심에 있는 로터리로, 사방으로 방사형 도로가 뻗어 있다. 대련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재정 러시아 통치 당시 파리를 모델로 건설한 광장이다. 면적은 3,564㎡나 되며, 중앙에는 분수가 있고 나무도 많다. 광장의 주변은 요령성 외무국, 국은행 대련지점, 시 문화국 등이 둘러싸고 있다.
<사도>
사도는 연순강에서 25해리 떨어진 곳으로 섬길이는 115km, 이섬에 있는 주봉 해발 21.619m로 산림이 울창하고 토양이 기름지고 초목이 무성, 천연암봉과 동굴이 많다. 겨울은 춥지않고 여름은 그다지 덥지 않아 뱀이 서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섬은 아직 사람이 살지 않은 곳으로 현재 뱀이 1 만여마리 모두 살모사이다. 사도는 특수한 관광자원으로 이미 국가의 보물급 자연보호구역이다.
<조도>
조도는 대련시 금주구 동쪽의 단사도, 여순 노철사 남단의 조류지역으로 대부분 새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어떤 새들은 항상 서식하고, 어떤 새들은 그냥 잠시 머무는 곳이다. 조류와 함께 바다, 초석, 절벽, 동굴, 화초, 수목등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금석탄지질풍경구>
금석탄 지질 풍경지역은 대련 금주구 금석탄에 위치해 있으며 양수만과 대림자 일대 연해 지역을 가르키고 있으며, 해안선 길이가 20km, 면적 21㎦ 이다. 구열귀석 기록에 의하면 5억년전 금석탄 옛터가 환경상태 그대로 있어 과학 연구가치가 있으며 국가 유적지급 관광지역이다.
○ 內蒙古 自治區
중국 북부의 몽골족 자치구. 수도는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면적 118만 3천 km2. 인구는 약 1,985만(1985).
북동에서 남동으로 길게 가로놓여 있어, 동에서 남으로 지린[吉林]·랴오닝[遼寧]·허베이[河北]·산시[山西]·산시[陝西] 등의 여러 성 및 닝샤후이족[寧夏回族] 자치구와 접경하고, 북에서 서쪽으로는 외몽골과 국경을 접한다. 다싱안링[大興安嶺]산맥은 북동부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있고, 황허강[黃河] 북부에는 인산[陰山]산맥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다. 다싱안링산맥 서쪽 및 인산산맥 북쪽 지역은 해발고도 1000 m 내외의 고원지대로, 강수량이 적어 고비사막에 속하는 사막과 초원이 펼쳐진다. 인산산맥 남쪽 기슭에는 황허강의 북안을 따라 비옥하고 수리가 좋은 허타오[河套] 평원이 해발고도 900∼1000 m의 고원지대에 펼쳐지고, 그 동쪽은 분지와 구릉이 뒤섞인 황토지대이다. 황허강 이남의 오르도스고원은 대부분이 사막을 이룬다.
기후는 한랭·건조하고, 한서의 차가 커서 기온의 연교차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36 ℃ 이상을 보인다. 연강수량은 다싱안링산맥 서쪽과 인산산맥 북쪽에서 300 mm 미만이나, 연강수량의 70 % 이상이 여름에 집중하여 목초 생육에 적당하다. 인산산맥 남쪽 기슭에는 400∼500 mm의 강수가 있다.
현재의 몽골 공화국 지역인 외몽골과 구분하여 네이멍구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엽 청나라 때부터의 일이며, 이렇게 구분하여 부를 만큼 네이멍구와 중국과의 관계가 밀접했다. 즉, 네이멍구에는 일찍이 한족(漢族)의 이주가 이루어져서 18세기 말에는 인구에서 한족의 수가 몽골족을 능가하였다.
몽골족 사이에서 자치(自治) 요구가 강력하게 대두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바가 있고, 그것이 오늘날에는 자치구 구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주민은 약 90 %가 한족이고, 나머지 대부분이 몽골족이며, 그 밖에 소수의 후이족[回族]·위구르족·티베트족 등이 산다. 다싱안링산맥 서쪽에서 인산산맥 북쪽에 걸친 네이멍구고원 및 오르도스고원 북서부 등지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양·소·말·낙타·돼지 등의 사육이 활발하므로 네이멍구자치구는 중국의 주요 목축업 지역이 된다. 본래 유목으로 이루어지던 목축업이 오늘날에는 정착경영으로 바뀌었고, 특히 양털의 산출이 많다.
자치구 남동부의 허베이·산시 양성(兩省)의 경계 부근에서 후허하오터고원에 걸친 지역과 황허강 북안의 허타오평원 및 오르도스고원 남동부는 주요 농업지역을 이루며, 조·수수·콩·밀·깨·사탕무 등의 생산이 많다. 특히 남동부 지역과 허타오평원은 일찍부터 한족 농민이 이주하여 개발한 곳이며, 자치구 총면적의 20 %에 불과한 그 지역에 총인구의 약 80 %가 집중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산산맥 북쪽 기슭의 바이윈어보[白雲鄂搏] 등지의 철광석, 남쪽 기슭의 스과이거우[石拐溝] 및 서부의 우다[烏達] 등지의 석탄, 네이멍구·오르도스 두 고원의 나트륨·소금 외에 운모·석면 등 풍부한 광산자원이 개발되어 자치구 공업이 크게 변모되었다.
종래의 공업은 모직물·양탄자·피혁제품 등 축산가공업이 중심이 되어 왔으나, 최근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바오터우[包頭]에 중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안산[按山]·우한[武漢] 등지와 더불어 3대 중공업기지의 하나가 되었고, 그 밖에 우다[烏達]·하이보완[海渤灣] 등지도 신흥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교통은 징바오[包蘭]철도(北京∼包頭)·바오란[京包] 철도(包頭∼蘭州) 및 지닝[集寧]에서 얼례하오터[二連浩特]를 거쳐 몽골·러시아로 통하는 지얼[集二]철도 등이 있고, 자동차 도로는 후허하오터·바오터우·지닝 등지를 중심으로 각지로 연결되며 황허강[黃河]은 내륙수로로서 큰 몫을 한다.
<호화호특(呼和浩特)>
몽고어의 뜻으로 말하면 '청색의 도시'라는 말이다. 1581년에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내몽골자치구의 수도이다. 훅호트는 내몽골자치구의 중부, 황하지류 대흑하 이북, 경포철도선에 자리잡고 있다.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일교차가 크다. 4개 구, 1개 기, 1개 현으로 나누어져 있다. 도시면적은 257km이며 인구는 86만이다.
민족으로는 몽고, 한, 회, 만, 조선족 등 30여개의 민족이 있으며 몽고족이 11%를 차지한다. 훅호트는 건국이전에 공업이 약하였으나 지금은 초원의 신흥공업도시로 되었다.
모방직, 전자, 기계, 식품, 건축재료도 상당한 발전을 했으며 강철, 화학공업, 사탕제조, 젓 제품, 담배, 가죽, 축산가공업도 비교적 큰 발전을 가져왔다. 경제작물 호마, 당근 생산량이 비교적 많다.
훅호트는 수도에서 대서북으로 통하는 주요한 통로이며 도로가 사통발달 하여 내몽고의 교통중추 이다. 도시건설에도 근래에 비교적 발전을 가져왔으며 적지 않은 현대화 건축물을 새로 건축하였으며 녹화사업이 전국에서 선진행렬에 들어섰다. 경내에 명승고적이 많으며 천고에 이름난 소군모, 백탑, 오탑사, 대소, 처진대사등이 있다.
<만주리(滿州里)>
북경에서 북으로 2,300km 떨어진 소련과의 국경 마을이다. 1896년에 러시아 정부와 청나라가 밀약을 체결했을 때 '淸朝(滿州族)의 영토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라는 의미를 담아 '만저우리(滿州里)라 명명했다.
인구 11만 중 약 4만 명이 소수 민족이고 만주족을 비롯해 회족, 몽고족, 위구르족등 16 민족이 살고 있다. 389次 快客은 1992년 6월 시각 개정으로 없어지고 대신에 哈爾兵東과 만주리를 잇는 71次 特快가 생겼다.
현재 만주리는 러시아와의 국경을 개방했기 때문에 표 입수가 곤란하여 암표상도 많다. 동북 지방의 외국인용 창구가 있기는 하지만 표를 살 수 없다.
○ 延邊朝鮮族 自治州
연변조선족자치주는 3국 접경지대에 위치하고있으며 웅위롭고 풍경이 독특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장백산으로 하여 이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날리고 있다.주내에는 자연자원이 아주 풍부하 며 일정한 공업기초와 사통팔달한 교통조건 및 선진적 인 체신통신시설이 갖추어져있으므로 해내외 각계 인 사들이 투자하고 무역을 진행하는 리상적인 곳으로 불리우고 있다.
(지리적위치)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위 41도 59분 47초로부터 44도 30분 42초, 동경 127도 27분 43초로부터131도 18분 33초사이에 있으며 중국 로씨야 조선 3개나라의 교차점에 있고 중국해와 대면하고있다.
(기후특점)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산좋고 물좋으며 삼림이 우성하고 중온대습윤성기후에 속하나다. 봄철에는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여름철에는 덥고 비가 많으며 가을에는 시원하고 비가 적으며 겨울철에는 춥고 길다. 동쪽에 일본해와 접하고 서부 북부에 또 높은 산맥이 천열병풍으로 되어 성내의 동일한 경도의 지구에 비하여 가을철이 따뜻하도 여름철이 시원하다.
년 일조시간수는 2150~2480시간에 달하며 평균 기온은 2도~6도, 극단최저기온은 섭씨 영하 23도~34도이며 극단 최고기온은 섭씨 34도~38도, 無霜期는 100~150일, 秋霜은 대부분 9월하순에 나타나며 春凍은 5월상순에 끝나며 11월부터 이듬해 3월은 結凍期이닫. 평균 강수량은 400∼650이며 장백산은 1000~1500에 달한다. 주내 평균기온은 대체로 해발고와 위도의 증가에 따라 감소되며 동부가 서부보다 높고 분지가 산지보다 높다.
중부분지와 동북산맥 골짜기의 강우량은 비교적 적고 서부 산구와 동남부 바다에 린접된 지구의 강우량이 비교적 많다. 일반적으로 가을철에 서풍,여름철에 동풍, 바람속도는 봄철에 제일 크다.
(지 형)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아름다운 장백산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지는 전 주 면적의 54.8%,고원은 6.4% ,골짜기는 13.2%,평원은 12.3%,릉지는 13.3%, 기본상 <<八山一水半草半分田>>의 태세를 이루고 있다. 전체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서남,서북,동북 세면이 동남쪽을 향하여 기울어졌으며 훈춘일대가 제일 낮다. 전주중 해발고가 500미터이상의 토지가 20%,500~1000미터가 78%,1000~2000미터가 1.9%, 2000미터이상이 0.1%이다.
전체 지형은 산지,릉지, 분지 3개 계단형으로서 산맥이 대부분 주변지대에,릉지는 산지 변두리에, 분지는 주요하게 하천의 량쪽과 산맥가운데 분포되여있다. 주내 주요산맥으로는 장광재맥,목단산맥,대흑산맥, 하알바산맥, 장백산맥, 영액산맥, 고려산맥, 로우예산맥, 토문산맥등이 있으며 해발고가 천미터이사으이 산봉우리가 27개, 그중 장백산백운봉이 제일높은 봉우리이며 그 해발고가 2691미터이다. 장백산맥은 전 주를 가로질러 지나가며 주요평원으로는 대석두, 세전,평강,배초구, 훈춘등 평원이 있으며 주요하게 성.진에의 주위에 분포되어있다. 주요한 하천으로는 도문강, 제2송화강,목당강, 타분하 등 4개가 있으며 류역면적이 전주를 포함하고 있다..
(자연자원)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자연자원이 아주 풍부하다. 지상에는 널리 알려진 장백림해와 특산품들이 있으며 지하에는 저장량이 많고 품종이 다양하며 질좋은 광산들이 있다. 전주 활립목총축적량은 3.5억평방미터, 삼림축적량은 3.4억평방미터, 삼림피복율은 78.3%에 달한다. 삼림과 강에는 1460여종의 야생식물이 있으며 그중 인삼,령지, 황지, 천마, 오미자 등 약용식물이 800여종, 송이버섯, 검정귀버섯,원숭이대가리 버섯 등 균류식물 10여종, 산포도 휘채, 잣, 가래토시 등 식용식물과 야생과일이 널리 분포되어있다. 장백삼림지구에는 550여종의 야생동물이 살고있으며 그중 동북범, 금전표범, 꽃사슴, 검은곰 등 경제동물이 250여종이다. 록용, 사향, 웅담, 오소리기름, 하마기름등은 연변수출품의 귀중한 약재이다. 인삼, 록용, 수달피가죽은 <<동북의 3가지 보배>>로 이름있다. 이외에 연변에 특산으로 사과배는 과일이 크고 껍질이 얇고 즙이많고 달며 저장하기 쉬어서 이름있다. 잎담배는 색이 순하고 향기가 독특하여 운남의 담배와 겨룰수 있다. 연변의 지하에는 85종의 광산이 저장되어 있으며 그중 이미 탐측해낸것이 55종이고 개발 리용할수 있는것이 39종이다. 1997년, 전주 철광석보유량은 1.3억톤, 석탄보유량은 6.7억톤이다. 항공측정에 의하면 연길분지에는 1억톤이상의 석유가 있다고 한다. 연변은 하천이 많으며 수계가 발달하였다. 전주에는 크고작은 하천들이 487갈래이고 그 총길이 10926키로미터이며 류역면적이 백평방키로미터이상의 하천이 137갈래이다.
년 평균류량은 130억립방미터이다. 많은 하천들의 중상류는 산맥들을 흘러지나 물흐름이 빠르고 락차가 커서 수력발전의 제공으로 된다. 전주 수력자원량은 64만 키로와트이다.
(역사/연혁)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역사가 유구하여 일찍 26000년전의 구석기시대에 연변땅에는 <<안도인>>들이 살았다. 기원 713년에 발해국이 나타났으며 당조에 속하였고 도읍지를 오동성(지금의 돈화시)에 두었다. "연변"이란 단어는 1920년을 전후하여 나타났는데 지리적위치가 3개나라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어 "沿邊"으로 이름지었으며 그후 연길변무공소관할에 소속되어 이름을 연변(延邊)으로 고쳐졌다.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을 침략한후 1934년 12월에 연변은 간도성으로 명명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한후 중국공산당은 연변에 인민정권을 건립하고 간도성정부를 세웠으며 그해 11월에 연변행정감동전원공소로 바꿨다. 1948년 3월성립된 연변전원공소는 1952년 9월3일 민족자치구역의 자치를 실행하여 원래의 공소를 취소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었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한개시 다섯개 현이였다. 1958년 돈화현이 연변에 귀속되었으며 1965년에 도문시가 설립되였다. 1985년, 1987년, 1993년에 돈화 룡정, 훈춘, 화룡등이 시로 승급되었다. 지금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길, 도문, 돈화, 훈춘, 룡정, 및 화룡시와 왕청, 안도 두개현으로 구분되었으며 수부를 연길시에 두고 있다.
(민 속)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나라 조선족이 제일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구이며 조선족이 자치행사, 자치권력을 행사하고있는 주체민족이다. 장기간의 생산과 사회실천중 조선족인민들은 독특한 민속을 형성하였다. 자고로 조선족은 흰옷을 입기즐겨 백이동포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조선족은 무지개는 광명과 아름다음의 상징으로 알고있다. 하여 "칠색단"으로 어린애들에 옷을 만들어어 입혀 무지개를 쓴것처럼 보여 더욱 귀여워보인다. 조선족음식은 집음식과 특제음식으로 나뉜다. 집음식은 주요하게 쌀밥, 국, 장, 짠지와 기타 김치이다. 짠지는 배추, 무우, 오이, 염채등을 원료로 하며 시고 매워 맛있으며 제법이 간단하여 이름있다. 김치는 조선족음식가운데서 민족특색을 지닌 한가지이다. 특제음식에는 주요하게 찰떡, 냉면, 개고기이다. 조선족은 찰떡을 상등음식으로 여기도 명절때 혹은 축하일때 찰떡을 밥상에 올린다. 개고기는 조선족이 특히 좋아하는 음식중의 하나로서 귀빈을 접대할때 쓴다. 냉면도 조선족음식의 한개 특색으로서 이미 전국각지에 보급되었다. 조선족은 문예를 즐기며 춤노래를 잘하여 <<노래와 춤의 고장>>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로인으로 부터 천진란만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거리와 농촌의 전야에서 명절, 축하일 때에 곳곳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흥성한 장면을 볼수 있다. 조선족은 문명하고 례절이 밝으며 깨끗함을 좋아하는 민족으로서 로인을 존경하고 부모에 효성하며 선생님을 존경하고 호상 례절을 지키며 말씨가 아름다워 <<례의민족>>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여행자원)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독특한 자연풍경과 인위풍경을 소유하고있다. 이름있는 장백산은 기세가 웅위롭고 풍경이 아름다워 중내외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여행성지이다. 우뚝 솟은 백운봉, 거울처럼 맑은 천지, 우짖는 폭포, 별처럼 널려진 온천무리, 아름다은 미인송은 사람들로 하여금 잊어지지 않게 한다. 특히 다채로운 조선족의 민속은 대랴으이 중외 관광객들을 끌고 있다. 목전에 임 7개의 여행지를 개발하였다. 장백산의 자연보호구, 연길민속여행지, 훈춘변경여행지, 룡정역사여행지, 도문두만강여행지, 화룡의 룡왕산여행지등이다. 이미 열린 12개이 여행항목으로는 장백산유람, 장백산 겨울철유람, 원지만족발원지유람, 연변조선족민속유람, 중조변경유람, 중로변경유람, 도문유람, 발해유적유람, 룡정역사유람, 화룡약물건신유람, 직승비행기하늘유람, 사격유람등이다. 주요여행지점은 장백산관광구, 장백산천지. 장백산 폭포, 온천, 은환호, 지하삼림, 천녀욕궁지, 방천유람구, 화룡선경대, 용정민속박물관, 안도홍기촌등이다.
(인구구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민족단결의 모범주이다. 여기에는 주요하게 한족, 조선족, 만족, 회족 4개민족과 23개 소수민족이 살고있다. 1997년말 전주 총 인구는 218만명이고 그중 한족이 58%, 조선족이 39.2% 만족이 2.45, 회족이 0.3%, 기타소수민족이 0.1%를 차지하고 있다. 한족인구는 주요하게 돈화, 왕청, 안도에 분포되어있으며 조선족은 주로 룡정, 화룡, 연길에 분포되어있고, 만족은 훈춘, 돈화, 왕청에 회족은 돈화 연길, 훈춘에 분포되어 있다. 전주 인구밀도는 매평방키로미터 51명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중국 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이 곳곳에서 친근하게 들려오는 70년대 쯤의 우리나라 모습과 비슷하다. 두만강이 있고 백두산이 있는 곳, 한 핏줄 동포가 있고 우리 문화가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곳. 그래서 연변에 가는 것은 단순한 여행의 차원을 넘어선다. 조선족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자신들의 미래는 밝다고 확언하는 한 핏줄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백두산>
백두산은 환태평양 화산대의 일부분으로 화산 폭발 때 생긴 흰색 부석으로 인해 한꼭대기가 사시사철 희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챵바이샨)이라 한다. 백두산 연평균기온은 -8도로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일에 달한다. 따라서 6월초까지 눈이 덮여 있는 백두산 등정은 한여름 장마철 보다는 6월 말- 7월 초, 8월말 - 9월초가 가장 적당한 시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한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자리잡고 있는 산으로 해발 2,744m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산 중의 하나이다. 산정에는 거대한 화산호인 천지(天池)가 있는데, 천지의 5분의 3은 북한, 5분의 2는 중국 소유이며 주변 봉우리들은 그 경계에 따라 나누어져 있다.
이전에는 여행증이 있어야 관광이 가능했는데, 1986년에 외국인의 백두산 관광이 자유롭게 되어 이제는 여행허가증 없이도 관광이 가능하게 되었다. 백두산은 풍부한 특색의 자연환경이 조용하고 아름다워서 여행하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식물이 수직으로 분포되어 있어서 연구기지로서도 아주 훌륭하기 때문에 식물학자들이 즐겨 찾는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690m의 백운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는 없고, 식물성 플랑크톤이 5종, 작은 동물과 곤충류가 4종, 그리고 이끼가 생장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창바이 폭포에서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쑹화 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른다. 중국의 창바이 폭포-얼다오바이허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
백두산에는 호랑이·곰·이리·늑대·멧돼지·사슴·노루 등 50여 종의 산짐승, 꿩·부엉이·딱따구리 등 137종의 새, 산천어·열목어 등의 냉수성 어류가 살며, 나비 등의 곤충도 많다
백두산의 최대자원은 적송·잎갈나무·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의 삼림으로서, 이들 목재는 철도와 압록강 및 두만강의 뗏목에 의해서 길주·만포·무산의 제재소로 운반된다. 기타 자원으로는 건축용의 골재와 단열재로 이용 가능한 부석, 천연수로 이용되는 천지의 물, 약초와 산나물 등을 들 수 있다.
<천 지>
압록강, 두만강의 발원지인 천지는 분화구로서 남북의 길이가 4.9㎞, 호수의 둘레가 13.4㎞로 상당히 큰 호 를 이루고 있다. 평균 수심은 204m이고,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312.7m나 된다. 천지 자체의 수원은 주로 대기층에 떨어진 수분, 즉 비와 눈이 고인 것이라는 설과 천지 내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다는 설이 있는데, 아직까지 정확하게 검증된 것은 없다.
천지는 장배산에서 가장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는 풍경명승지이다.
거울같은 천지높이 산꼭대기에 반듯하게 놓여있는데 그 둘레에는 여러 산봉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천지늪에서 설레이는 푸른 파도는 해볕에 반짝반짝 빛나고 그 물은 명하다.흐렸다가도 개이고 또 맑은 날씨에도 불시로 흐리며 비가 억수로 퍼부어 그 변덕스러운 조화를 가늠키 어려우며 춘하추동 사시절 종잡기 어려운 기이한 변화를 볼수 있다.
백두산천지는 화산이 분출되여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화산분출구호수이며 중조 두 나라 국계의 호수로서 송화강,두만강,압록강의 발원지이다.호수의 높이는 해발 2194메터이고 제일 깊은 곳은 373메터로서 우리 나라에서 제일 깊은 호수이다. 천지에는 약 20억립방메터의 물이 잠겨있어 하나의 거대한 천연적인 물저장고이다.천지는 외롭게 고공에 달려있고 또 물의 출구가 호수밖에 있으므로 사람들에게는 갑절 신비롭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천지의 물은 구경 어디에서 오는가?천지의 물은 주요하게 비물과 눈물 그리고 지하에서 솟아나오는 샘물로 이루어진다. 천지의 바닥이 돌로 이루어져 호수의 물은 맑고도 깨끗하고 투명하여 마치 백옥과 같고 또 거울과도 흡사하다.산봉우리들이 물에 거꾸로 비쳐 마치 곳곳마다 기암괴석이 있고 거울속에 하늘이 있는것처럼 청아하고 아름답다.
<장백폭포>
천지에서 흘러내려온 은하강은 200m 남짓 흐른 뒤 수직으로 된 절벽에 이르면 높이 68m가 되는 폭포로 되어 하늘까지도 퍼질 듯한 굉음과 함께 물이 떨어지는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하얗게 뿜어내는 장백폭포 물줄기가 시원하기 그지없으며, 옆으로는 검회색 돌산이 솟아 있고 주변에는 울창한 푸른 미인송 숲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폭포 옆에는 천지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데 간혹 낙석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천지에서 흘러내려온 은하강은 200m 남짓 흐른 뒤 수직으로 된 절벽에 이르면 높이 68m가 되는 폭포로 되어 하늘까지도 퍼질 듯한 굉음과 함께 물이 떨어지는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하얗게 뿜어내는 장백폭포 물줄기가 시원하기 그지없으며, 옆으로는 검회색 돌산이 솟아 있고 주변에는 울창한 푸른 미인송 숲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폭포 옆에는 천지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데 간혹 낙석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하늘공중에서 쏟아져내리는 장백폭포는 그 거창한 폭음이 산골짜기를 진감하면서 흰 물보라를 사방에 흩날리는데 물보라에 실려 반공중에 걸려있는 칠색무지개와 백룡이 날아내리는듯한 경상을 볼 때 <<삼천척을 곧추 날아내리니 구천에서 은하가 떨어지는가 의심했노라>>는 저명한 시구를 련상하게 된다.
장백폭포는 천지북쪽 1250메터의 낭떨러지에 위치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해발높이가 가장 높은 폭포로서 락차가 68메터이며 폭포 밑면에 12메터 가까운 깊이의 못이 이루어져있다.천지는 뭇산봉우리들로 둘러싸였는데 다만 북쪽 측면에 터진 구멍이 있어 <<벌문(출구)>>이라고 한다.
천지의 물은 여기로부터 산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데 이 한구간이 산이 높고 경사가 가파로와 쏟아져 흐르는 물이 마치도 비스듬히 세워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보는것 같다.이리하여 사람들은 이 사다리처럼 내리꼰지는 폭포를 <<천하>> 혹은 <<통천하(하늘로 통하는 강)>> 라고 한다
통천하는 1250메터의 기나긴 흐름을 거쳐 깎아지른듯한 낭떠러지에서 돌연히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그 방대한 기세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몇리밖에까지 들리고있다.멀리에서 바라보면 툭하고 약한 두갈래의 폭포가 마치 구중천으로 날아오르려는한쌍의 은백색 룡을 방불케 하고 도도한 은하가 인간세상에 쏟아지는듯하다.홀연 나타났다가도 사라져가는 비할바없이 아름다운 칠색무지개를 보고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
<비룡폭포>
중국에서는 장백폭포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폭포는 송화강의 원류이다. 천지의 달문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1km 정도 흐르다가 68m의 절벽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 절경은 장대함, 그 자체다.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비룡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듯이 폭포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정말 용의 승천에 비유될 만하다.
<백두산온천>
백두산 기슭 곳곳에는 온천이 솟고 있다. 백두산의 온천은 장소에 따 차이가 있지만 최고 82℃나 되기 때문에 이 온천에서 계란을 삶아 파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 온천은 다량의 무기질과 유화수소를 함유하고 있어 피부병과 관절염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위치는 천지와 장백폭포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장백폭포 쪽으로 접어들어 약 10분 정도 차를 가다가 도보로 걸어가면 길 양옆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나오는데 여기가 백두산온천이다.
온천 흑풍구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흑석아래에는 여라문곳에서 뜨거운 약수가 솟아나오는데 어떤 곳은 사발만큼 크고,어떤 곳은 가는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있는데 이것이 지면우에 분포되여있는 천여평방메터의 온천무리들이다
온천은 오색찬란한 빛을 뿌리고 또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열기를 발산하고있는데 관광객들의 특별한 눈길을 모으고있다.특히 겨울이면 그 둘레가 소복단장을 한 빙설천지이지만 온천두리에서는 도리여 열기가 차넘치고 뽀얀 안개가 서서히 피여올라 참말로 독특한 경치를 이루고있다.
온천은 온도가 60도-70도이상이며 어떤 때에는 82도에까지 달하여 닭알을 넣으면 인차 익혀먹을수 있는 고온온천으로 되고있다.
온천은 신비로운 샘물이라고 불리우는데 근육을 느슨히 하고 피의 활력을 증강시켜 한기를 몰아내고 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효과가 뚜렷하다.지금 온천에는 여러곳에 욕실을 세워 관광객들이 사용하고 있다.
온천부근에는 또 장백약수샘이라는 광물질샘물이 있어 위병,만성관심병에 현저한 치료효과가 있다.광물질샘물을 마시면 마치 구미에 맞는 얼음에 랭각시킨 청량음료를 마시는것과 같아 소화를 돕고 비장을 튼튼히 하며 열을 제거하고 더위를 몰아내기에 사람들은 <<천연사이다>>라고 한다.
비룡폭포로 가기 위해서는 천지와 비룡폭포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폭포쪽으로 약 10여분을 자동차로 이동, 도보로 움직여야 한다.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가다 보면 길의 양 옆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백두산 온천이다. 물의 최고 온도가 섭씨 80도 이상. 시설이 좋지는 않지만 온천장이 있어 이용할 수 있다. 폭포 입구에는 온천수에 삶은 달걀을 팔고 있는데, 노른자가 먼저 익는 이색적인 달걀이다.
<용정시>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리면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에 닿을 수 있다. 이 곳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용정은 1백년 전에 개척되기 시작했는데, 1980년 초까지는 황량한 원시림지대로 해란강 유역에 아름다리 나무가 울창했고 갈대와 가시덤불이 그득했며 온갖 맹수가 살았다고 한다. 1883년 봄, 함경도 회령에서 넘어온 조선농민이 처음으로 해란강 유역을 개척해 마을을 일구고 옛우물자리를 찾아 우물을 만들었다.
용정의 민속관에는 한국 교포들의 풍속, 항일의사들의 사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용정중학교는 일본통치시 항일의사들을 배양한 곳으로 교정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시비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용정은 한국의 항일역사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곳곳마다 한국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다.
용정에서 처음으로 조선족마을이 조성된 해는 1877년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함경북도 회령의 리재민, 장인석, 박윤언 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 등이 처음으로 14호를 거느리고 와집령(흔히 오랑캐령이라고 부른다)을 넘어 륙도하와 해란강 함수목(지금의 용정시 시교)에 이르러 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함으로하여 첫 마을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용정의 시초라 할것이다.
용정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이다.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지금도 70퍼센트이상이 조선족이므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현상이 많다.또한 용정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용정은 일제의 마수가 제일 먼저 뻗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일제는 <조선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이곳에 군경을 파견하여 <조선통감간도파출소>를 세웠다.이 기구는 나중에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바뀌였다.후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교육열이 높아져 학교가 세워지고 차차 민족의식도 싹트고 따라서 애국심도 들끓게 되였다. 그러다 끝내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3월에는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이른바 <3.13만세운동>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가장 뜻깊은 사건이였다.이후로 용정은 우리 민족의 얼은 가장 잘 지키는 요람이 되였다.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투띠)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많은 싸움터중의 하나이다.
용정은 장백산맥의 중단에 위치해있으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중간이 평원입니다. 경내에 해란강과 부르하통강이 흘러 농업이 발달하였다. 전국에서 제일 큰 과수농장이 있으며 잎담배와 사과배, 송이버섯이 특산물로 꼽힌다.
(서전서숙)
서진서숙은 연변최초의 신식 사립학교요 또한 연변 모든 조선족사립학교의 어머니이다.1906년 8월에 반일 애국지사 이 상설이 용정에 와서 이동녕,여준,왕창동,이상익 등과 함께 이 신식학교를 세우고 신학문과 반일교육을 실시하였다.이듬해 일제가 용정에 설치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서전서숙에 갖은 간섭을 하므로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유서깊은 서전서숙의 옛터는 지금의 용정실험소학교 구내에 있다.큰 고목이 몇그루 서있는 곳에 <서전서숙유지(瑞甸書塾遺址)>라고 힘있게 씌여져 있다.
(용정중학교/윤동주기념비)
용정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가 있다.그 학교에는 여전히 조선족들이 다니고 있고 교사(校舍,쑈써)앞에 윤동주 기녑비도 있다.이학교는 용정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러보는 곳 중의 하나이다.
1946년 은진, 대성, 광명 등 6개교를 통합해 만든 중학교가 후일 이름을 용정 중학교라고 바꾼 것. 그 학교에는 여전히 조선족들이 다니고 있고, 학교 본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윤동주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학교 내에서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윤동주의 시집 등을 판매하는 작은 서점도 있다.
(국무민속촌)
용정 가는 길목에 있는 꽤 큼직한 유흥지다. 수목이 우거진 강변에 조선족 민속촌을 비롯한 수상 가옥촌, 식당촌, 놀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최근에는 연길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 겨울철 스키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일송정)
용정시에서 연길로 조금 나오면 낮은 산이 있는데 그정상에 작은 정자가 있다.이 정자가 선구자라는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쑹팅)이다. 이 일송정에서 보면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나라를 떠나와 외로운 싸움을 했던이들의 깊은 서로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용드레우물)
모아산기슭의 해란강반에 자리잡은 룡정은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 아름답고 아담한 도시이다.
무릇 룡정에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시내 중심에 있는 룡정지명기원지에 와서 돌아보고 흔상하면서 한차례 관광을 한다. 이곳에는 우아하게 하늘높이 치솟은 수양버들 한그루가 서있다.바람에 나붓기는 휘늘어진 푸른 가지가 래왕하는 관광객들을 정겹게 부르고있다.수양버들옆에는 한장 남짓한 높이의 돌비석이 세워져있는데 비석의 정면에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룡정지명이 기원된 우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고 비석의 아래쪽에 있는 우물어귀를 돌로 둘러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룡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다.
용정시에 있는 이 샘은 용정시의 이름이 붙게 된 기원이 되는 곳으로 이 샘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지금은 그 자리에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룽징띠밍치왠즈징쵄)이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있다.그곳에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우물은 마치 하나의 거울처럼 흘러간 력사의 찬란한 빛발을 반사하고있다.때는 1879년전후,조선족농민 장인석과 박윤언 두 가정이 륙도구(지금의 룡정)에 이사와 황무지를 일구고 곡식을 심다가 문득 이 오랜우물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푸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부근의 한족농민들과 함께 이곳에 드레박받침대를 세웠는데 조선족들은 이를 용드레우물이라고 하였다.이로부터 륙도구를 룡정촌이라 부르게 되였다.
1934년에 지명기원우물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우물을 다시 수건하고 주위에 기둥을 세우고 우물둘레에 철관을 씌웠으며 돌비석을 세우고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백두산(장백산)을 향하여 출발
한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장백산)을 꼭 봐야한다는 교육생들이 건의를 학원측에서 수용하여 기차를 타고 백두산으로 가게 되었다
6월 29일 16:30, 심양역에 도착했다. 허름한 시골역같은 대합실분위기, 어두침침한 조명, 발디딜틈없이 들어선 사람들, 모든것이 낮설게만 느껴진다
말로만 들어본 잉워에 승차하여 문을 여는순간 이제는 사라져 버렸기에 기억저편에 자리한 비둘기호 열차가 생각나고, 상,중,하 3칸으로 설치된 침대(60개)와 좁다란 통로로 인하여 가슴이 답답하여 참을수 없었지만 꿈에 그리던 백두산에 간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참아보기로 했다.
비좁은 공간에서 딱히 할 일도 없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벼와 옥수수가 한창 자라고, 밭일하는 아저씨, 돼지몰고 나온 아낙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담소하는 노인네들......... 낡아 쓰러질 것 같은 시골집 굴뚝에는 저녘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오늘도 그렇게 평화로운 농촌의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기차의 소음과 더운날씨로 잠을 이울 수 없어 마시기 시작한 술은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고 늦은 시간에 청한 잠은 한시간 간격으로 깬다.
아침 6시, 안도역을 지나고 있다. 거리의 간판 대부분이 한글과 한문으로 표기된 것을 보니 연길이 얼마남지 않았나 보다
연길에 도착하니 연길시 외사판공실에서 조선족직원 2분이 나와서 우리를 반가이 맞이하며 아침식사 장소로 안내했다
백산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백두산으로 향했다. 기차로 14시간을 달려왔는데 4시간을 더가야 한다는 안내자의 말에 밤새 기차에 시달린 교육생들은 너나할것없이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백두산 천지, 온천, 장백폭포
숙소인 비호산장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백두산으로 향했다. 한시간 남짓 버스로 이동후 천지를 향하는 입구에서 갈아탄 짚차가 고산잉수(야산약담배꽃)가 피어있는 갈지자형의 급경사길을 따라 45분 정도 올라가니 백두산 천지가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의 정상과 그 가운데 신비스럽게 파 헤쳐진 하늘의 못, 천지를 보기위해 한달음에 올라갔지만 정상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세찬 비바람만이 교육생들을 맞이하였다
백두산은 9월 중순부터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6월까지도 그때에 쌓인 눈이 남아 있기에 입산시기도 6,7,8월의 어느부분에 한정되며, 이 기간 중에도 홍수나 도로파손등의 사유로 백두산 입구까지 오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비록 천지의 선명한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백두산 정상에서 보이지 않는 천지를 보면서도 솟아오르는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은 배달계례의 후손만이 느낄수 있는 감정일 것이고 이것 때문에 우리도 그 먼길을 달려 이곳이 오고자 했던것이리라.
한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자리잡고 있는 산으로 해발 2,744m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산중의 하나이다
산정에는 거대한 화산호인 천지가 있는데 천지의 3/5는 북한, 2/5는 중국소유이고 주변의 봉우리들은 그 경계에 따라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인 천지는 분화구로서 남북의 길이가 4.9km, 호수의 둘레가 13.4km로 상당히 큰 호를 이루고 있으며, 평균 수심이 204m 이고 수심이 가장 깊은곳은 312.7m나 된다고 한다
천지의 물은 6줄기로 나뉘어져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기도 하고, 일부는 지하로 흘러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흘러 간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의 주변에는 16개의 봉우리로 둘러쌓여 있는데, 그 중 가장높은 주봉은 2,750m의 백두봉으로 북한측에 있으며, 주요 봉우리는 향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제비봉, 천문봉이 있다. 16개의 봉우리중 6개는 중국측에, 7개는 북한측에 있으며, 나머지 3개의 봉우리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선에 있다고 한다
천지의 선명한 모습을 보지못한 아쉬움을 몇장의 기념사진으로 달래고 온천과 장백폭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니 조선족 아낙네들이 천막을 치고 계곡의 온천수에 삶은 달걀을 3개에 1000원, 5개에 10원(중국돈)을 받고 팔고 있었는데 온천수에 삶은 달걀은 일반달걀과는 달리 노른자
위부터 익는 것이 특징이고 온천수의 온도가 최고 82℃라서 그런지 달걀이 반숙정도로 익은 상태였다
주변의 온천목욕탕은 계곡에서부터 쇠파이프를 연결하여 온천수를 공급받아 운영하는데 백두산의 온천은 다량의 무기질과 유화수소가 함유되어 피부병과 관절염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온천을 지나 20여분을 걸어가니 말로만 들어본 장백폭포가 웅장한 모습을 들어내고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장백폭포는 천지의 물이 200m 남짓 아래로 흐른후에 수직으로 된 절벽에 이르면 높이 68m가 되는 폭포가 되어 하늘까지도 울리듯한 굉음과 함께 물이 떨어지는데 새파란 하늘아래로 하얗게 뿜어내는 장백폭포의 물줄기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장백폭포 옆에는 검회색 돌산이 솟아있고 한곳에는 아직 녹지않은 눈이 백두산의 기온을 가늠케 하였고 폭포우측으로 천지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으나 부수중이라 올라갈수 없음을 알았을때는 또한번 실망을 했다
천지와 인연이 닿지않음을 깨달은 일행은 온천수로 삶은 달걀을 먹으며 다음날의 일정을 위하여 숙소로 향했다
술을 곁들인 저녁식사후 교육생 일동은 노래방으로 향했고 낮에 보지못한 천지에 대한 아쉬움과 비구름에 둘러쌓인 백두산에서 느낀 배달후손의 하나된 느낌을 노래에 담아 백두산에서의 하루일과를 끝마쳤다.
장백산 자연박물관 관광
심양행 기차시간을 맞추기 위해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장백산 자연박물관으로 향했다.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백두산은 자연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존된 지역으로 1980년 유네스코에 의해 "백두산 자연보호구"로 지정 되었으며, 백두산에는 173종의 조류와 동북호랑이, 반달곰, 담비등 300여종의 각종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또한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는 미인송을 비롯한 주목과 들메나무 등 희귀나무류와 산삼, 영지등 불노초로 불리는 한약재들이 많이 번식하고 있고, 백두산은 고도에 따라 암침엽림대, 활엽홍송림대, 아고산악화림대,
고산태원대로 뚜렷이 분포되어 초목의 생태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학습장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장백산 자연박물관 관광을 마치고 버스로 4시간을 달려 연길시내에 도착하여 홍태양미식성이라는 식당에서 냉면까지 나온 푸짐한 점심을 먹은후 윤동주시인의 친필과 생가가 있다는 용정(중학교)에 갈수있으라라 기대하였으나 거리가 멀고 기차 출발시간 내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아 안된다는 학원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에 연길역에 도착하여 1시간 30여분동안 시내관광을 하였고 17:02분 심양행 기차를 타고 아쉽기만 했던 백두산 천지와 연길을 떠나 학원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끝마치고
이번여행은 교육일정에 없었던 것을 교육생들의 건의와 학원측의 배려로 성사되었으나 여행일정에 비해 관광시간이 너무 짧아 백두산 주변의 관광지를 충분히 보지 못했으며, 그나마 학원측의 철저하지 못한 준비로 인하여 시간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용정(중학교)를 둘러보지 못함에 대한 서운함이 있었고,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의 신비한 모습를 보지 못함과 장백폭포에서 천지로 향하는 계단이 있어 천지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으나 계단이 보수중이어서 천지를 직접 보지못한 것이 이번여행의 가장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흑룡강성 무단장 기행
경기도 중소기업지원과 문영근
무단장시(牡丹江市)는 중국 동북부 헤이롱장성(黑龍江省)에 위치한 도시이다.
내가 이 도시를 방문하기로 결정한 것은 중국교류연수가 확정된 때부터였다.
이곳은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잠들어 계신 곳이고 현재도 고모님과
작은 어머니를 비롯한 사촌형제들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한국에서 중국어 전문연수과정중 나의 스승이셨던 이명순老師의 본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심양에서 무단장까지는 기차로 14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고 토요일
오후까지 수업이 있는 관계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고, 연수생의 안전을
위하여 최소한 3인이상 동행하여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귀국 2주전인 7월6일에야 출발하게 되었다.
여행이 아닌 친지방문이라 1인여행 신청을 했는데도 학원측에서는 허락을
해 주셨는데 뜻밖에도 반장을 맡고 있는 정상현同學가 흔쾌히 동행하기로
하여 나와 학원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금요일 저녁 5시 40분에 차에 올랐다.
기차는 심양을 출발하여 북으로 길림성의 장춘, 흑룡강성 성도인 하얼빈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다음날 아침 7시40분경에 목단강에 도착할 것이다.
딱딱한 침대칸(硬臥)에서 우리는 두사람의 동행객을 만났다.
한사람은 심양시내 약대를 졸업하고 상해에 취업하기전 고향 목단강에 다니러
가는 금년 21세의 史有爲(일명 "유키")였고 또 한사람은 목단강에 위치한
장안자동화공정유한공사에서 高級工程師로 있는 呂榮이라는 남자였다.
중국에 와서 처음 혼자서 사귀어 본 사람들이어서인지 못하는 말이지만
열심히 주고 받았다.
그렇지만 중국의 열차는 밤 9시30분이면 일제히 소등하고 잠을 자야 하는 관계로 많은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기차는 새벽을 넘기면서 하얼빈에서 방향을 북한쪽으로 틀었다.
동트는 새벽의 대륙은 황홀했다. 우거진 삼림과 그 속에서 가끔씩 보이는
방목하는 소나 말, 양 등이 눈에 뛰었다.
그리고 농토, 이곳은 90%이상이 밭농사다.
또한 대부분이 옥수수인 것 같았다.
한때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이 동토를 달리며 노숙했을 선조들을 생각하면
또한 한없는 비애가 가슴에 스며든다.
그들의 꿈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가없는 후손인 나는 그들을 위하여 또 어떤 꿈을 꿀수 있을까?
아침이 짙어지고 기차는 목단강에 닿았다.
입장료 1원을 내고 플랫폼까지 들어온 마중객들과 막 도착한 승객들이 서로를 연호하면서 흩어진다.
그렇게 유키는 마중나온 남자친구(?)와 플랫폼에서, 여영은 차표검사대에서
차례로 헤어졌다. 역광장에 나와서야 사촌형을 만났다. 목단강시에서 가장 큰 弘旗醫院 내과의사인 사촌형과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집은 약8층정도의 엘리베어터가 없는 아파트 였는데 허름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넓고 깨끗했다. 5층의 집에는 고모님과 고모부님이 와 계셨다.
약6년만에 만나뵙는 고모님과 고모부는 전보다 여위어 보였다. 고모님은
췌장암 수술을 한번 받았다고 한다. 사촌형은 오전 11시에 큰 수술이 있어 베이징에서 특별히 모셔온 의사선생님 때문에 출근해야 한다며 바로 나갔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오전에 목단강시를 구경키로 했다.
목단강시를 관통하는 강은 이름 그대로 목단강인데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관광객도 일부 있었다. 배를 타보고 산보도 좀 하다고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백화점에 들렀다. 시간이 있어 먼저 이老師댁에 먼저 들르기로 하고 차, 연필, 공책 등 약간의 선물을 샀다. 전화를 해보니 공교롭게도 이老師댁은 고모님댁과 동일한 거리(西五路)에 있었고 거리는 약300미터정도 되었다. 집에 갔더니 딸만 있었다. 5시에 어머니께서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점심을 주변 식당에서 해결하고 인터넷도 좀 하고 거리를 서성거리다 5시경 이老師댁에 도착했다.
다행히 거의 동시에 이老師어머니도 들어오셨다. 인사를 드리고 딸과 기념사진도 찍고 얘기도 좀 하다 다음 일정 때문에 바로 나왔다.
고모님댁에 도착해서 고모님 일행과 인근 영안시에 사는 따님댁에 가기로 했다. 택시로 20분정도 걸리는 영안시에는 딸 내외분과 작은어머니, 사촌형님, 동생 내외분 및 조카등 약20여명이 모여있었다. 처음만나 조금 어색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척 반가왔다. 다만, 여행중이라 많은 선물을 가져오지 못한게 정말 서운했다.
이웃 한국식 음식점에서 우리들은 모두 모여앉아 즐겁게 晩會를 즐겼다.
2차로 노래방까지 가서 즐겁게 노래하고 춤도 췄다.
오래전 한민족은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동이족이라고 했다는데, 이곳 동포
들은 춤을 춰도 어깨춤을 춘다. 살포시 한쪽은 들어올리고 한쪽은 내리는
어깨 꼭 어렸을 적에 시골동네에서 보았던 춤과 똑같다. 정同學를 제외하고 우리 친척은 모두 돌아와 한집에서 잤다. 술이 취해 정신없었지만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던 같다. 다음날 아침은 경박호로 올라가 북경에서 온 의사일행과 함께 관광하도록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을 찾으니 만원이란다. 그래서 집앞에 있는 중등학교
화장실에 갔다. 양옆으로 배열된 변소는 위와 앞이 공개된 변소였다.
앞을 보고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사촌동생이 들러서 화장지를 가져다 준다.
허허, 나도 중국사람이 다 되었구나, 하나도 어색하지 않으니.........
작별인사를 뒤로 한 채 사촌형과 동생, 그리고 우리 두사람은 홍기의원에서
준비한 봉고를 타고 경박호에 도착했다. 경박호에는 전날밤에 미리 도착해서 여장을 푼 북경대 의사(邵永孚)와 홍치의원 외과 주임, 부주임등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경박호 관광에 나섰다.
폭포와 주변관광을 한후 7인승 보트에 타고 2시간 동안 경박호를 유람했다.
해발800미터에 위치한 경박호는 우리나라로 치면 포천 산정호수와 비슷한데
면적은 10배도 훨씬 넘는 것 같았다. 1시간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중간에 두 개의 섬에 내려 관광도 하고 놀다가 돌아와 중국 전 국가주석
유소기 낚시터를 구경하고 점심을 했다. 점심은 경박호에서 생산되는 산천어, 가물치, 김일성이 선물했다는 고기 등 진귀하고 푸짐한 해물들이 많았다. 즐겁게 담소하면서 백주와 곁들어 배부르게 먹었다.
오는길에 비행장에 들러 북경의사를 배웅하고 홍기의원에 들러 구경좀 하다
목단강시 외곽에 준비한 저녁식사에 참석했다.
의사와 친구, 지인등 15명 정도 모였는데 개한마리, 닭한마리, 거위한마리를
잡아 한적한 시골에서 두상으로 나누어 흥겹에 놀면서 즐기는 저녁식사였다.
우리는 술과 고기를 즐기면서 모두 웃옷을 벗고 흥겹게 먹고 마셨다.
중국의 식사문화는 즐거우면서도 우리처럼 난잡하지 않고 시간이 되면 질서
정연하게 흩어져 집으로 간다. 오늘도 그렇게 즐겁게 놀았지만 시간이 되니
모두 일어나 간단한 수인사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사촌형이 준비한 택시를 타고 함께 시내에 위치한 숙소까지 도착해서 숙소앞에서 맥주와 양고기좔을 앞에놓고 밤이 깊도록 즐겁게 놀았다.
대륙의 밤은 어째서 나그네의 마음을 이렇게 흥분시킬수가 있을까?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수많은 상념에 젖어들게 하니 말이다.
내일이면 귀향이다. 숙소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또 안마도 받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사촌형이 와 있었다. 어제 저녁에 맥주먹은 집에서 소고기국을 먹었다. 같은 소고기국인데 맛은 우리와 영 달랐다.
사촌형이 저녁 8시40분 발차인 기차표를 주면서 저녁에 퇴근후에 배웅하겠다면서 출근했다. 8시40분발차면 다음날아침 10시경이 되어야 도착할것이다.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사촌형댁을 찾아갔다.
사정이야기를 하고 작별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목단강시에서 기차표를 환불하고(약80%정도) 역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얼빈행 소형버스에 올랐다.
지저분한 버스지만 새로운 경험이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버스는 출발시간이 정해진 것이 없었다. 사람이 모이면 출발하고 부족하면
마냥 기다렸다. 가다 도중에 태우기도 하고 내려주기도 하였다. 특히 만원일 경우에는 통로에 의자를 급조하여 태우기도 하였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도중에 내릴경우에는 문까지 나갈수 없어 창문으로 내리는 진풍경도 눈에 띄었다. 승객의 편의, 안전 그 어느것도 고려대상은 아니었다. 운전사가 차장 역할까지 겸비하면서........... 특히, 무서운 속도와 아울러 앞에 오는 차가 보이는데도 중앙선을 넘어 태연히 달리는 그 용감무쌍함. 나는 기겁을 했지만 정작 승객들은 너무나도 평화로왔다. 이들은 모두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있을까? 차도 튼튼한 것 같지 않고 부딪히면 정말 심각할 텐데.
그러나 눈을 들어 밖을 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들....
애써 먼 발치로 눈을 돌려 대륙의 풍경을 쉼없이 감상하며 그렇게 4시간
가량을 달려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하얼빈역은 심양, 장춘, 하얼빈을 관통하는 만주선철도의 중심으로 이곳에서
심양에 가는 기차는 많았고 철도 사정도 좋아 지류인 목단강선보다는 빠르게 달릴 수 있단다. 3시경 기차를 타고 심양에서 내려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10시가 채 안되었다. 8주간의 중국연수기간중 처음으로 혼자(독자적으로) 여행을 해 보았다.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등 동북3성은 옛적에 만주라고 불리던 곳으로 중국의 중심지인 중화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이다.
그 변방의 한곳을 둘러보는 데도 이처럼 많은 시간이 소요되니 그 넓은 중국을 여행하자면 도대체 얼마나 걸릴까?
이번 여행은 나에게 중국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음을 느끼면서 다음에는 좀더 알찬 기행문을 선보일 것을 다짐해 본다.
중국문화 체험 에피소드
가평군 농촌지도소 김정범
중국어학연수 현지 및 주말활동 체험중에 한국과 중국 문화의 관습차이로
일어났던 재미있고 또한 한번쯤 되새겨 봄직한 에피소드를 정리해보았다
1. "2"도 "2"이고, "1"도 "2"이다
중국 언어중 "일" 이라는 숫자 발음이 한국의"이"발음과 같아 가장 많이혼동하는 단어중 하나이어서 특히 물건 살 때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예) 심양시 지도를 구입할려고 가격을 물어봤는데 주인이 이원(1원)이라고 했지만 우린 자연스럽게 2원을 지불하자 그 다음부터 그집 지도값이 2원으로 상승하였다
2. 중국먹거리는 못먹는게 없다 비록 손앃는 물일지라도......
주말에 진주시 정부의 저녁 초청을 받았을 때 일이다 식탁에는 많은 음식들이 가득해 있었다 그중 왕새우구이 엽에 2가지 작은 그릇이 있었는데 우린 2개 다 쏘스줄 알고 왕새우를 찍어 맛보았는데 아뿔사 하나는 간장쏘스 또다른 그릇에 있는 검푸른물은 왕새우 먹을 때 손 앃는 물이라나......
3. "뚜이야~~"에 놀라 엉덩방이 찍다
20명 동료 각기 개성들이 많아 다들 열거 할 수는없지만 우리 동료중에한사람은 대화시 맞장구칠 때 "뚜이야~~"를 잘하는 동료가 있어 유행어가 됬다. 한번은 중국선생님집 방문할 기회가 있어 맛있는 음식과 술로 기분이 고조되 다들 노래를 불르게 됬는데 그중 한명이 노래를 부르다 옆에서 흥을 돋구기 위해 "뚜이야~~"했더니 다들 웃느라 가시를 중간에 잊고 멋쩍어 그냥 자리에 앉다가 춤추기 쉽게 의자를 옆에 치운줄도 모를고 그냥 바닥으로......
4. 백두산 정상에서 외치는 소리 " 나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야 "
백두산에 갔었던 일이다 백두산 장정일은 너무 많은 사연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모두 백두산 정상에 올라 갔을 때 일이다 정상엔 비바람으로 눈을
못 뜰정도로 악천우라 간신히 일어서 사진을 찍는데 우리동료중 제일 작은
동료는 아에 백두산 정상에서 딱 달라 붙어 내려 올때까지 마냥 백두산
바닥을 끌어 안고 "나 날아갈 것 같아``"
5. " 조금만 비겨주세요"
중국에 재미있는 곳중에 공중화장실을 빼놓을 수없다 중국 공중화장실은 문이없다 특히 시골은 벽조차 없어 그냥 구덩이만 있을뿐이다
간혹 구덩이는 없이 한줄로 쭉 연결되어 있는곳도 있는데 굴비 역겨 있듯이
나란히 뒤을보고 볼일 볼 경우가 있는데 그중 빈공간이 애매할 때 사람이오면 볼일 보는중에 엉금엉금 오리거름으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풍경도 머지않아 중국에서 사라질 것이다 없어지기전에 한번쯤은......
6. "쭈구리"
수이동 동굴 체험에 있었던 일이다 수십킬로 되는 어두운 동굴을 배로 지나 가다보면 여러 암석들이 여럿모양을 하며 앞옆을 막을때가 있다 그럼 운전하는 사람이 오른쪽 왼쪽이라고 중국말로 외치는데 급하다보니 알아듣지못해 왼쪽을 오른쪽으로 오른쪽을 왼쪽으로 피하다보니 나중 운전사가 소리만쳐도 다같이 이렇게 외쳤다 "쭈구리!!!"
7. " 고만 해그래이 나 폭 빠졌당 "
심양시 인근 식물원에 가면 여럿 재미있는 놀이기구가 있는데 위아래 왜줄타고 강건너기가 있었다 첫 여성들이 무난히 건너가길래 쉬운줄알고 두명이 건너가면서 둘이서 서로 장난하는 줄 알았는데 아쁠사 그게 미끼줄이야 양쪽에 사람들이 줄을 마구 흔들어대는데 "애고애고 고만해라 나 폭 빠졌당"
8. 용기있는자 만이 중국어를 배운다
기초지식이 없는 동료가 선생님이 누가 읽을꺼나고 하자 용기있게 제가
읽겠습니다 하며 영어식으로 읽자 동료들이 웃지도 못하고 참느라 나중엔 다들 손수건으로 눈물을 딱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 참 잘 읽었다" 용기가 있어야만 중국어를 배운다며 칭찬을 했지만 선생님 역시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9. 발을 밟아놓고 미안한 표현의 중국말은? " 감사합니다"
역시 중국어가 생활화 되지 않아 버스안에서 상대방 발을 밟아놓고 다급해서 한다는 말이 "씨에씨에"
10. 온면 추가 서비스로 냉면이라?
내몽고 현지 체험에 있었던 일이다 점심때 주문을 하는데 메뉴는 면종류라 우린 서로 온면과 냉면을 나누어 시켰는다 첨에 따뜻한 칼국수 같은 음식이 나오길래 "음~~ 온면이군" 하며 먹었다 조금 늦게 다시 또 따뜻한 국수가 나와 더 덤으로 나오는 줄알고 더 먹고 냉면시킨 사람들이 음식이 나오질 않차 독촉 했는데 주인하는 말 " 다 나왔는데요 " 알고보니 내몽고는
워낙 더워 찬음식을 잘먹질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냉면은 우리나라 처럼 찬국수가 아니라 덜 뜨거운 즉 미지근한 국수를 지칭하여 냉면이라고 한다
이렇게 9명이 온면과 냉면, 공기밥, 맥주 등 실컨 먹은 음식값이 중국돈 25원이라니......
중국교회 예배참석 소감문
의정부시 재난관리과 허성윤
遼寧省 沈陽的 宗敎
중국에는 불교(티벳교 포함),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 등 5개 종교로 크게 나누어 있다.
요령성 심양에는 1982년에 심양 기독교 신학원 (동북기독교 신학원으로 개칭)이 설립 되었고 1983년에는 심양 천주교 학원과 심양 이슬람 교경 학원이 각각 설립되었다. 요녕성에는 성급 종교 단체가 7개정도 있다.
(사실 중국은 1982년 이후부터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으며 중국헌법 36조에 보면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어떤 국가기관 사회단체 개인이든지 인민에게 종교를 믿을 것과 믿지 말 것을 강요하지 못하며 종교의 유무로 인민을 차별할 수 없다. 국가는 인민의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하며 종교단체와 종교사무는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개혁 개방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과거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공산화과정 및 문화대혁명을 치루는 동안 종교는 숱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되면서 헌법에 명시된대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고, 종교의 자유를 되찾게 되어 교회도 복구되었으며, 만 18세 이상의 성인(단 공산당원은 제외됨)은 누구나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교회에 출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최근 기독교인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심양은 또한 동북3성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현재 서탑교회, 북시교회, 동관교회, 동북신학교를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있음을 느낄수 있다
특히 서탑교회는 1913년 5월 20명의 信徒로 출발, 90년 역사의 오래된 중국인 교회로 신도가 2천 여명으로 2층 구조의 구서탑교회 옆에 새로 신축한 8층 건물의 서탑교회가 있다.
또한 동관교회는 1주일에 10,000여명 정도의 중국인들이 모이는 교회로 서탑교회와 마찬가지로 구건물 옆에 5층으로 된 신관건물이 세워져 있으며 모여드는 중국인들로 인해 1주일에 4번씩 나누어 예배를 드리고 있다.
向西塔敎會
한국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6월 2일 토요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중국교회를 찾아 나섰다. 한국인 및 조선족이 상가를 이루고 있다는 서탑가(西塔街) 어디쯤에 있다는 소문은 미리 들었기에...지리도 익힐 겸 걸어서 가기로 하고 우선 심양시 정부광장으로 향했다.
도보로 한시간 남짓 걸려 시정부 광장에 도착해서 물어본즉 서쪽으로 가면 금방 도착할 거라는데 20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역사적 유물로 남을 만큼의 깊은 연륜을 느낄 수 있는 오래된 교회건물과 바로옆 웅장하게 서있는 6층 짜리 현대식 교회가 바로 "심양기독교 서탑한인교회". 중국에 체류하는 8주중 처음 맞이하는 주일, 전날 잠깐 들렸을 때 예배를 위해 지도교사가 열심히 찬양준비를 함이었을까? 1시간 30분 정도 드려지는 예배가운데 마음의 평안과 감격을 느낄 수 있음은 아마도 먼(그리 멀지 않지만 쉽게 오갈 수 없기에) 이국 땅에서 드려지는 예배이기 때문이리라 !
예배 후 떡과 음료수로 코이노니아(교제의 시간)를 가질 때는 심양에 거하는 많은 학생들과 교민들이 서로가 잘 모르지만 아주 오래된 이웃같이 정다운 시간들을 나누는 모습가운데 중국 속에 한국인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在東關敎會
중국에 있는 목적이 어학연수이기 때문에 중국인들만 모이는 동관교회를 가기로 하고 둘째주 토요일 역시 동관교회를 찾아 나섰다.
버스타고 택시타고 돌아서...다행히 교회는 쉽게 찾았는데 입구가 보이지 않아 헤매다가 굳게 닫힌 교회 문을 두드려보니 토요일은 들어갈 수 없다한다...
다음날 5명의 일행이 동관교회로 향했다. 교회에는 수많은 중국인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대략 계산해보니 2,500여명, 4번 예배를 드리니 1만여 명이나 된다. 교회로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구건물 옆에 새로 지은 5층건물이 서있다.
예배시간내내 중국어로 들려지는 설교말씀에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중국인들의 진리를 찾고자하는, 순수하고도, 영적으로 갈급해 함을 느낄수 있었다.
넷째주, 또 다시 찾은 동관교회에는 역시 많은 중국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후 이곳 저곳 둘러보고 기념사진도 찍고 하다보니 몇몇 중국인들이 관심을 보이나 짦은 중국어실력에다가 보통화로 말을 하니 그네들이 이해가 안되는 모양인지 젊은 여자를 소개하는데 그녀는 우리 숙소인근의 심양약학대학 老師인데 미래의 불확실성과 고민과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 왔다한다.
난 邵波에게 제대로 찾아왔으며, 아마도 머지않아 문제의 해결과 영적인 갈급함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귀국이후 지금까지 e-mail을 통하여 만나고 있으며 신앙의 조언자로서 그녀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계속 격려하고 있으며, 현재 그녀는 박사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以後 !
지금 중국은 개혁·개방이후 많은 중국인들이 정신적인 혼돈상태와 빈부격차로 인한 소외감을 겪고 있으며 국가나 사회의 체제가 채워줄 수 없는, 급변하는 거대세계에 대항할 수 없는 한 인간의 나약함에서 오는 불안함과 초조감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받고자 교회로 교회로 몰려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종교법(거리제한 - 800만명이 살고 있는 심양에 교회는 6개밖에 없는 것 처럼)에 의해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여 현재 중국에는 처소교회, 가정교회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 실정에 있다.
또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신분을 노출하지 않은 채 비밀스럽게 전도활동을 하기 위해 유학생으로 혹은 어학연수를 구실로 학생의 신분으로 많이 나와 있다.
이들의 활동이 사실상 미약하고 극히 제한적인 것이지만 "작은 불꽃하나가 큰불을 일으킨다"는 소박한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중국에도 진정한 기독교의 부흥을 기대해보는데 멀지 않은 장래의 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中國歷史考察
용인시 역곡동 박명순
題目 : 民族復興을 향해가는 文明古國
1. 들어가는 말
우리와 마찬가지로 5000년의 悠久한 歷史를 가진 中國의 歷史를 짧은 時間에 理解한다는 것은 不可能에 가까울 것이다.
그 不可能을 可能하게 하는 方法을 苦心하던중 찾아낸 한가지 方法이 中國人이 쓰고 中國에서 發行된 中國의 歷史책을 한두권 읽는것과 아울러 中國人 친구와의 交流를 통해
그들이 自身들의 歷史를 어떻게 理解하고 考察하고 있는지를 確認하는 것이 先行되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韓國에서 發刊된 中國의 歷史書도 많고 情報의 바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들의 歷史를 理解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제3자의 視覺이 다분히 클것이기 때문에 可能한 中國人의 視覺으로 그들의 歷史를 바라볼 수 있는 機會를 만들고자 努力하였음을 序頭에 밝혀두는 바입니다.
2. 中國文明의 成立과 發展
中國은 悠久한 歷史와 燦爛하게 빛나는 文化傳統을 가진 人類文明에 커다란 貢獻을 한 國家로 일찍이 5000년 以前에 華夏民族(中國의 古代 民族 : 漢族을 指稱하는 것은 아님)이 黃河와 長江변에서 繁盛하며 中華文明의 原始形態를 이루었다.
紀元前 21세기에 中國 最初의 國家인 夏朝가 나타났으며 이후 紀元前 8세기로부터 시작하여 中國은 古代文明에 있어 가장 輝煌하고 豊饒로운 創造性의 時期인 春秋戰國時代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時期가 4∼5백년간 持續되면서 世界的으로 큰 影向을 미칠 創始的인 한무리의 大思想家들을 배출했는데 孔子, 孟子, 老子, 庄子등을 包含하며 그들은 各自의 學派를 創立하여 儒家, 道家, 墨家, 法家등 諸子百家爭鳴의 形局을 이루면서 發展하였다.
그중에서도 特別히 孔孟으로 代表되는 儒家와 老庄으로 代表되는 道家는 中國古代史上 文化의 兩大傳統이자 또 동아시아 傳統文化의 重要한 內容으로 作用했으며 人類文明에 대하여 巨大한 貢獻을 하였으며 또한 亞洲 地域의 많은 民族과 國家에 重大한 影向을 끼쳤다.
春秋戰國이후 紀元前 3세기에 中國에는 最初의 統一大帝國인 秦朝가 세워졌으며 뒤를 이어 漢, 唐의 强盛한 統一國家의 繁榮時期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로도 宋대로부터 元, 明, 淸(前期)까지 中國은 줄곧 强大國의 地位와 世界 各 民族중의 領導的인 地位를 지녔는데 人類의 發展에 크게 貢獻한 "四大發明" 즉, 製紙述, 羅針盤, 火約, 印刷術은 世界의 그 어떠한 發明品보다도 훌륭하다는 讚辭를 받고 있으며 그 밖에도 아주 多樣하고 豊富한 思想文化와 文學藝術 方面에 偉大한 成就를 이루었다.
特別히 四大發明은 유럽에 전파된후 西歐의 近代文藝復興과 新行路를 개척하는데 있어서뿐 아니라 新世界 大發見내지 政治革命 모두에 있어서도 필수 불가결한 物質條件을 提供하였으며 西歐의 歷史發展에 推進力을 發揮했다.
3. 近代以後 中國歷史의 展開
1840년대의 시작으로부터 中國은 西方의 侵略과 挑戰에 直面하게 되었으며 이후 많은 義人과 志士가 배출되어 民族復興의 길을 探索하기에 奮鬪 努力하였다.
그들은 여러면에서 人民群衆을 領導하고 團結시켰으며 勇敢하게 外國侵略에 抵抗하였으며 民族의 尊嚴과 國家의 權利 그리고 그 밖의 여러면에서 努力하였는데 西方의 先進文化, 思想, 制度를 學習하였으며 中國의 經濟, 技術, 國防, 政治등 各方面의 現代化의 轉形을 推進하였다.
反侵略 方面에 있어서도 中國人民은 一白年 이상에 걸쳐 두 번의 阿片戰爭과 청불戰爭, 中日甲午戰爭을 겪었으며, 특히 1931년 9·18事變의 시작으로부터 1945년 解放이 되기까지의 장장 14년의 오랜 세월 동안은 全民族 抗日運動, 民族解放戰爭을 展開하였다.
現代化 進行 方面에 있어서 一白年 이상의 時間의 흐름속에서 中國人의 現代化 努力을 보면 우선 洋務運動, 戊戌維新變法, 辛亥革命, 五四新文化運動 등을 들 수 있다.
가. 洋務運動
洋務運動은 太平天國의 反亂을 鎭壓하는 科程에서 西洋式 武器의 優秀性에 注目하게 된 것이 契機가 되어 發生했으며 그로 인해 洋務運動에서 가장 먼저 推進된 것이 近代的 軍需工業의 育成이었다. 이후 洋務運動은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範圍가 擴大되어 近代的 鑛工業, 綿業의 發達, 電信線과 鐵道의 부설, 近代的 敎育機關 設立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運動推進 主體의 分裂을 契機로 洋務運動은 失敗하게 되었다.
나. 戊戌維新變法
洋務運動이 한참 궤도에 오른 1880년 후반부터 西歐의 政治制度 導入 즉, 制度的 改革을 주장한 變法論이 나왔는데 淸日戰爭을 契機로 變法運動으로 具體化 되었다.
變法運動은 中央 차원에서가 아니라 호남성이라는 地方에서 먼저 實踐에 옮겨졌으며 이후 1898년 4월 23일 태후의 同意를 얻어 광서제가 改革을 하겠다는 命令을 내리면서 戊戌變法의 막이 올랐다.
變法運動의 窮極的 目標는 議會制의 開設을 포함한 立憲君主制로의 改革이었으나 推進勢力의 弱體性과 守舊派의 抵抗으로 인하여 挫折되고 말았다.
다. 辛亥革命
辛亥革命의 出發은 1894년 淸日戰爭에서 敗色이 짙어가던 중에 亡國의 危機意識을 느낀 孫文등이 淸朝로는 이러한 危機를 막아낼 수 없으니 그를 타도하자는 趣旨로 하와이에서 興中會라는 비밀결사를 만든 것을 出發點으로 하고 있다.
이후 孫文은 民族, 民權, 民生의 三民主義를 革命의 指導的인 理論으로 내세우고 革命을 展開해 나갈 3단계 革命方案을 規定하였다.
무창봉기의 成功, 孫文의 中華民國 제1대 臨時總統 就任, 淸의 마지막 皇帝 宣統帝의 退位의 뒤를 이어 원세개가 제2대 臨時總統에 就任하게 되었으며 이후 원세개는 中央 集中的인 權限 强化 努力을 기울여 어느 정도 實效를 거두자 1915년 스스로 皇帝가 되겠다는 帝制運動을 추진하다가 1916년 帝制反對鬪爭의 와중에 病死하게 된다.
이후 中國은 軍閥割據時代로 접어들게 되었으니 帝制運動의 失敗는 復古的 형태의 執權努力이 分權指向的인 勢力에게 屈伏한 것이라 하겠다.
라. 5·4新文化運動
5·4運動은 좁은 意味로는 1919년 5월 4일 이래 약 2개월간 전개된 5·4愛國運動을 가리키고 넓은 意味로는 5·4 사건을 전후한 시기(1915년경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의 新文化 運動을 가리킨다.
5·4運動의 經驗은 이후 中國 歷史發展에 重大한 影響을 미치게되는데 우선 新文學 運動의 産物인 白話文의 使用이 急速히 擴大되어 1920년에는 모든 敎科書가 白話文으로 쓰여지게 될 정도였으며, 프롤레타리아文學의 登場, 中國共産黨의 結成, 女性解放運動의 活性化등이 그것이다.
4. 中華人民共和國의 成立
이후 1949년에는 以前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獨立統一中國인 中華人民共和國이 成立되기에 이른다.
계속적인 施行錯誤와 路線의 修整을 거쳐 1978년 改革開放 政策의 成功을 契機로 最近 中國은 高速發展의 新時期를 맞아 超常의 發展速度는 中國을 迅速하게 우뚝 솟아나게 하였으며 그로인해 中國은 國際社會에서 廣範圍한 注目을 받게 되었다.
이제 中國의 綜合國力은 世界의 前列에 位置하게 되었다. 그러나 經濟, 科學技術, 文化, 敎育, 衛生등 全方面에 걸쳐서는 아직 進步의 段階에 있으며 人民의 生活水平은 크게 提高되었으나 아직도 貧富隔差등 解決할 問題가 散積해 있다.
5. 맺는말
體制改革으로 不斷한 發展의 進展으로 中國은 나날이 世界 一流國家로 發展하고 있다.
經濟發展에 있어서 뿐 아니라 世界平和와 公正하고 合理的인 國際 新秩序의 創造에 있어 中國은 周邊國家와의 關係를 不斷히 改善하고 鞏固히 해야만 한다는 점이 나날이 强調되고 있다.
中國은 이미 國際 大家庭의 重要한 成員이 되었으며 2008년 北京올림픽 開催 成功이 그것을 證明함에 틀림없으며 中國은 앞으로 人類의 平和와 發展에 더욱 큰 貢獻을 하게 될 것이다.
以上으로 5000년의 中國歷史를 大略的으로 考察해 보았다. 歷史上 韓國과 中國의 關係는 周邊의 어느 國家보다 密接하게 維持되어 왔으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兩國 모두의 繁榮을 위하여 더욱 緊密한 協助體制 構築이 要請되고 있다.
以後의 兩國 關係는 새로운 歷史의 시작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賢明하게 對處한다면 分明 後孫에게 부끄럽지 않은 歷史를 물려주게 될 것이다.
1. 중국 현지교육에 대한 기대
가. IMF이후 구조 조정이란 엄청난 시련앞에 우리공무원들은 놓여 있었으며 직원수는 줄어들고 업무는 늘어나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2달이라는 긴 시간을 어학공부를 하느라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상사는 물론이고 일을 처리해 줘야하는 동료들에게 너무도 어려운 부탁이 되었던 것이다.
나. 금번교육에서는 남자 11명,여자9명 모두 20명이 연수를 가게 되었는데 어려운 여건에서 외국에 나가서 연수를 하게되는 만큼 이번기회에 각자의 중국어 실력을 업그레이드 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다. 물론 초보자도 몇 명 있었지만 모두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았나 생각된다.
2. 중국교육에서 우리가 얻고자 했던것들
가. 이번교육은 우리만의 일방적인 교육위탁이 아니고 상호 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져 양쪽의 교육방법을 비교하기가 아주 쉬웠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오신분들은 나이도 많고 직급도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 특징적인 것은 그분들은 한국어의 기초가 거의없는 상태에서 어학보다는 한국에 대하여 배우려는 자세였고 이와반대로 우리공무원들은 어학의 기초가 있고 목적 또한 중국어를 보다 심도있게 공부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 중국분들은 나름대로 목적을 달성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당초목적을 두고간 중국어 공부에는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말하고 싶다.
라. 우선 반편성에 있어 기초가 부족한 초급과 동시통역도 가능한 학생을 한교실에서 가르치려는 교육계획이 그것이고,중국어 수업이 오전시간에만 있고 저녘시간에는 없는 것이 그 두 번째이다. 수업방식에 있어서도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단에서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전부 였다.
마. 그래서 우리는 먼저 분반을 요구했고 개인별로 과외공부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했다. 아마 이 학원도 이런 교육을 처음 시행하는 것이라 경험부족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앞으로의 교육에 있어서는 일정한 선발교육을 거쳐 학생실력을 평준화 한다던지 교육목적을 뚜렷히 하여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 중국사회 시스템과 학생들간의 갈등
가. 우리사회와 공산국가 중국의 차이는 외견상 같은 동양인으로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지만, 중국은 국가와 사회의 규칙을 지키며 산다고나 할까. 예를들어 저녘 10시이전에 귀원해야 된다면 그것을 지켜야 하고 교수가 강의를 2시간해야 되다면 학생이 졸든지 다른생각을 하던지 그 시간을 강의를 한다. 백두산 여행시 연길에서 있었던 일인데 서정주 시인이 다니던 용정중학교가 연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그곳에 가려 했으나 책임을 맡고있는 주임이 승낙을 하지않아 가보지 못한 경험이 있다.
이유를 물으니 거리가 멀다느니 길이 나쁘다느니 기차시간을 놓친다느니 여러 가지 이유로 변명을 했지만 당초계획을 변경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들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원측에서도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 우리를 여행시켜 주었지만 용정일로 인해 효과가 반감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 이런 제반사항을 볼 때 그들은 그 어떤 규칙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들보다 더 많이 중국도 여행하고 자유도 많이 누린 우리가 그들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은 조금은 갑갑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가르치러 간 것이 아니고 배우러 간 것이라면 이해 못할 것이 무엇인가.
4. 중국에 대한 이해와 우리가 얻은 것들
가. 2001.7.12 저녘 10시 2008년 올림픽 개최지로 중국의 베이징으로 결정되었을 때 중국인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모두 기뻐했다. 파리,토론토,이스탄불,오사카 그중에 그래도 베이징이 결정되기를 기원하며 박수를 보낸 것은 옛부터 같이 이웃해 온 문화적 동질성과 개방이후 우리나라와 협력해 아시아의 발전을 도모해 나갔다고나 할까. 어쨌든 중국이 되기를 바랬고 그렇게 되었다.
나. 세계화의 물결속에 적자생존, 강자만이 살아남는 무한경쟁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조금 앞선다고 우쭐 된다던지, 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경쟁력의 시작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시작되며 자기를 조절할줄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다. 교육과정에서 여러 가지 미진한 것이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약속을 잘 지키고, 의리가 강하며 손님을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 여유를 즐기는 자세, 근검절약하는 자세,말과 행동이 일치하려는 자세, 분야별 각자의 맡은바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 외국어 특히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는 학생들, 힘든 농촌일도 천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는 농민, 새벽일찍 시장에 가서 아침을 준비하는 서민, 저녘시간 광장에 모여 운동하는 대부분의 노인어른들, 남녀 차별없이 서로 사회에 이바지 하는 모습등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은 나라임에 틀림없다.
5. 앞으로 서로 협력해나가려면
가. 중화사상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중국에게 이것만은 고쳐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느낀것이지만 남들이 주는 것을 잘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감사한다고 말을 전하면 감사하지 않다고 하고, 수고했다고 말하면 수고 안했다고 말한다. 不 그것은 부정을 말할 때 많이 쓰지 않는가. 주는것만이 강자가 할 일이 아니고 도움도 받을 줄도 아는 것을 주문하고 싶다. 또 하나는 환경문제이다. 앞서간 서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환경오염의 전초를 그대로 밟는다면 불행을 알면서도 답습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속도는 늦을는지 모르지만 환경쪽을 생각하고 일을 했으면 한다. 개인집을 방문해 보면 깨끗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공동구간인 복도는 쓰레기와 먼지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올림픽 개최국이 될것이니 이제는 고쳐 지겠지만 우리들의 눈에 비친 중국의 고쳐야할 부분들이다.
나. 반대로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말만 많고 약속을 안지킨다 든지. 앞에서 웃고 뒤에서 욕하는 이중적 성격을 경계할 것이다
다. 그러나 단점을 역으로 보면 중국인의 포용과 느긋함, 한국인의 민첩성과 적응력등 장점을 서로 보완 한다면 향후 21세기를 열어가는 동반자로서 꼭 필요한 이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