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정신(愛民精神)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
주세붕(周世鵬) 선생은 우리 가문을 충효우제
청풍지풍(忠孝友悌淸風之風)의 가문이라고 했
음은 전술한 바다.
우리 선조님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감내했고 또한 선정(善政)을 베
풀었다. 양반이 지배하든 당시의 계급사회에서
우리 선조들은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는 투철
한 애민정신으로 백성과 더불어 사는 생활태도
로 일관했고 청렴하게 살아 오셨다.
1. 안향(安珦) 선조와 안축(安軸) 선조의 애민사상
안향(安珦) 선조께서 주자학(朱子學)을 도입하신
것은 유학을 진흥시켜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것
이고 바른 정치를 하려 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데 있었다.
안향 선조께서 얼마나 백성을 걱정하고 사랑했느
냐 하는 것은 그 행적(行績)을 보면 잘 알 수가 있
다.
선조께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憂民未得前涂炭)고 우민상세(憂民傷世)
하면서 선정을 베푸셨다.
공이 상주판관(尙州判官 -郡守)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회는 전화(戰禍)로 인하여 생계
를 잃고 불교와 무교(巫敎)의 신앙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유독이 상주 고을은 일찍부터 무교가
성행하여 그때 합천(陜川) 지방으로부터 그곳까
지 돌아다니면서 신(神)을 빙자하여 주민을 괴롭
히는 무당 세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그러나 어느 고을
에서도 뒤탈이 있을까봐 겁이 나서 이들을 다스리
지 못했다.
그 무당들은 산신령의 딸이라 자칭하며 마치 사람
의 길흉(吉凶)을 하늘에서 들리는 것 같게 하여 사
람들을 현혹시켰다.
안향 선조는 이것은 입술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뱃
속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복화술(腹話術) 임을 간파
하고 이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이제 상주 고을이 망한다. 3년 동안 한해가
들것이다. 괴질이 번진다.…」는 등 별별 협박 공갈을
했으나 안향 선조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되였다.
어느 고을에서도 뒤탈이 무서워 해결하지 못한 것을 젊
은 판관(郡守) 안향 선조가 해결을 한 것이다.
이것은 공이 오직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도 무당에 현혹되는 사람이 많
이 있는데 730여 년 전에 미신을 타파했다는 것은 놀
라운 일이다.
그리고 안축 (6世 安軸 -文貞公) 선조는 존무사
(存撫使)로서 강원도에 파견되었을 때 이르는 곳
마다 정성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위문하고 무마하
였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이르러서 시(詩)를 지었
다.
후에 그때의 시만을 모아 발간한 것이 관동와주
(關東互注) 라는 시집(詩集)인데 그 시에는 선조
의 애민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 시집의 서문(序文)은 정당문학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썼는데 그 일부를 보면
풍월을 읖조린 것과 사물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 진실로 또한 옛 사람에 양보할 것이 없도
록 훌륭하다. 감동하고 분개하여 지은 작품들은 풍속
의 마땅함과 마땅하지 아니함과 백성의 기쁨과 근심
등에 관계되는 것이 열에 아홉이다. 이것을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슬프게 한다.
아! 누가 안축(安軸) 이전에 이렇게 읊었던가!
이렇게 쓰여 있다.
공의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시
한수를 이에 소 개 한다.
도를 구해 글 읽었어도 끝내 이룰 것 없어
태평시절 이 행차 스스로 부끄럽다.
다만 우둔함 버리고 실용학문 베풀어
감히 모난 행동으로 헛된 명예 훔치랴
도탄에 빠진 민생 구하기 어렵고
깊이든 나라의 병 생각만도 놀랍네
근심어린 베켓머리 잠은 아니 오는데
누워 듣는 산중의 빗소리 밤이 깊었네
(1330년 개경(開京)을 떠나)
(白嶺驛에서 지은 시 - 原文省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