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의 근원은 중국이라 알려지고 있으며,개인이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나라 시절 현량과라는 제도 때문인데 과거 응시생의 집안내력을 올리게 하여 조상이 우수하면 벼슬을 주던 것이 그 시초라 할 수가 있다.
특히 북송(北宋)의 문장가 소순, 소식 형제가 만든 족보는 후에 편찬되는 족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 족보의 서(序)라는 것의 형태가 바로 이들이 만든 족보에서 본 따 만든 형식이며 이 서문(序文)에도 이들 형제의 이야기가 가끔씩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중국의 성씨제도라 할 수 있는 한식씨족제도를 근본으로 삼고 발전하여 왔으며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 시기는 1000여년 전인 신라말·고려초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삼국사기나 옛 문헌에 보면 고구려나 백제 계통의 성은 그 계보가 후대와 거의 연계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신라의 종성과 육성이 이(李), 최(崔), 정(鄭), 설(薛), 손(孫), 배(裵) 및 가락국계의 김해김씨만이 후대의 계보와 연결 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시대 왕실계통을 기록한 왕대종록(王代宗錄)이 그 시작이며 훗날 족보편찬의 근원이 되게 하였다.
또한 고려사 열전은 부자관계를 명확히 적었으며 특히 고려사 절요에는 고려에서도 양반 귀족은 씨족계보의 기록 보관을 중시하여 " 종부시(宗簿寺)라는 관제를 두고 관리하였다." 라고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의 일부 귀족들은 이미 족보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그 이후에는 귀족 사이에서 가전(家傳),가첩(家牒),사보(私報) 등으로 기록하여 왔는데, 이러한 가계기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오면서 족보형태를 갖추는 가승(家乘), 내외보(內外譜),팔고조도(八高祖圖)등으로 발전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성씨의 족보가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한마디로 단언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 족보에 관하여 살펴보면 고려 숭의회(사단법인)에서 편집한 려말 충의열전이란 책에 “고려조 공민왕 말기에 성리학자로써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내신 운암공(차원부)께서 려흥왕(驪興王) 우왕(禑王) 14년 무진(戊辰 1388)년에 종문의 역사를 정리하여 왕씨 차씨 류씨 삼 성(王氏 車氏 柳氏 三 姓)의 보판을 판각하고 해주 신광사(海州 神光寺)에 보관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서울 대학교 한국사 교수인 한우근선생과 이태진선생 등이 편저한 한국문화사의 조선 전기편에서도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고려 말엽에 해주 신광사(海州 神光寺)에 보판 판각이 보관되었다는 연안 차씨 족보(延安 車氏 族譜)가 가장 오래된 족보이며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라고 기술하고 있다.
*박팽년이 기술한 차원부 설원기참조
일반적으로 최초에 간행된 족보는 문화유씨의 족보라 알려지고 있다.이 문화유씨 족보는 1522~1566(중종 16~명종 21) 가정년간에 나왔기 때문에 이를 흔히 ≪ 가정보≫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온 족보 가운데 문헌적으로 오래된 것으로서 신뢰할만한 것은 안동권씨의 ≪ 성화보≫로 성종(1476)때인 명나라 헌종 성화 12년에 간행된 것으로, 문화유씨의≪ 가정보≫보다 약86년 앞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