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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3년 음력 6월9일(생년월일 :1944년3월2일) 경북 김천시 조마면 신왕동 (송정)170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를 뫼시고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내 밑으로는 남동생2명과 여동생2명이 있습니다.
내생에 처음 찍은 사진으로 기억 하기를 아버님이 저 1~2살때 일본군에 징용되어 끌려가시기 전에 것으로 그당시는 징용되면 살아서 돌아오기란 힘들기 때문에 사진으로라도 남겨놓을 양으로 어머님이 나의 아랫도리를 벗긴채로 안고 아버님은 일본군복 차림으로 서서 찍은 사진이다.
징용으로 끌려가신지 1년 못미처 만주에서 해방을 맟아 걸어서 귀향 하셨지만,
생각해보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잘못되어 아버님이 안계신 집안에서 동생들도 없는 외톨로 자랐다면 현재 저라는 존재는 무었을 할겄이며, 일생을 어떻게 살았을까가 아찔 하다.
할아버님은 술를 좋아하시고 집안 일 하고는 좀 머신분 이었으니, 할머니와 어머님이 저를 대리고 최소의 가정을 꾸려 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할아버님은 3남중 3째로 태어나셔서 논 2마지기(400평)를 유산으로 물려 받으신것 갔으며 그 논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을 겄이며, 할아버님께서 마시는 술값으로도 모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술을 마시면 할아버님 마음데로 할머님을 구박 하시고 마음을 않마쳐 주면 짚푸라기에 불을 부처 말일것을 바라면서 화재의 위협도 하신것 같다.앞집에 김노인이 살았는데 술을 마시면 할아버님과 무슨 고함지르기 대회를 하는것 같았다. 그러신 분이니까 지금 생각 하면 아버님의 일본군으로의 징요은 아찔한 사건이 아닐수 없다.
겅북 김천시 조마면 신왕동 송정의 지리적 위치는 김천시에서 대구가는 방향으로 감천 다리를 건너 성의상업중,고등학교 교정을 못가서 경부선 철교 밑으로 난 도로을 따라 올라가면 감천면인데 긴(속칭:진)방천을 거쳐,감천면 사무소를 거쳐, 약12km(30리)을 가면 감천면과 조마면 경계 마을인 신계(속칭: 하신기)가 나오는데 신계 마을을 끼고 좌측으로 5분(車로)되는 위치에 송정(松亭)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들어오는곳만 산이없지 동,서,남쪽은 전부 산으로 둘러쳐저 있어서 논,밭 해봐야 얼마 않되는 아주 전형적인 산촌이다.
신계를 기점으로 김천에서 올라 왔던길을 계속 올라가면 대방동으로 대방초등학교가 있다. 내가 6년동안 다닌 초등학교 이다.
계속 올라가면 성주군이다. 고개를 넘어 꼬불 꼬불한 신작로를 따라 넘어가면 성주땜이 있고, 창천을 거쳐 우리 5대조 부터 윗대 어러신들이 사셨던 대가면 (속칭:발거네)도 있으며, 창천에서 좌측으로 가면 성주군이고, 직진하면 해인사 가는길과 고령군으로 가는 길이다.
신계에서 우하(右下)로 가다가 좌회전하면 조마면 사무소가 있고,조마면 사무소에서 밑으로 가면 김천 방향이고, 계속 올라가면 지레면을 거쳐 증산면으로 가는 길로 ,계속가면 경치가 수려한 가천내가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청암사가 있다.
송정 마을은 2~30호정도의 마을로 인구도 5~60명으로 조그마한 마을이다. 요사히 전국적으로 동일 하겠지만 빈집이 많고, 많이 고령화된 마을 이다. 농사는 주로 논농사가 많고, 김천지역에 유명한 자두농사가 주되고, 사과,배,감농사를 조금씩 하는편이다.
마을 앞 우측으로 올라가면 수리공사(못)가 있고,옛날에는 골짝집이라해서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중고등 학교다닐때 이골짝집에서 공부 한다고 여름방학이면 머무른적이 있었는데 밤에 자다가 보면 산 짐승들이 울어서 겁에 질렸던 생각이 새삼스럽다.
더올라가서 산등승이를 넘어가면 성주군 벽진면(속칭:빌미산)인데, 외가가 있던곳이다.
방학이 되면 어머님을 따라 외가집을 이험한 산을 넘나들었다. 조그마할때 기억으로는 산능선에 아람들이 소나무들이 꽉 찼었고, 겁이나서 오금이 오싹 오싹 했었던 기억이 새록 새록 하다.또한 6,25때 내 초등학교 1학년때라 기억된다. 외가에 어머님과 함께 같다가 산능선을 넘어 오는데 B29가 하늘을 날아 다니더니 집 가까이 오니까, 아버님 할머니 할아버님이 피난 보따리로 골짜기에 임시 거소를 마련 하고 있었는데 어머님은 많이 혼난것 같다.
마을 앞에서 왼쪽 골짜기로 오르면 우리집안 선산(先山)인 세마골(細馬谷)이 있는데,세마골 이곳 저곳에 흐터져 있던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산소를 2009년 7월6일(음력 윤5월14일) 가까운 한곳으로 이전 했다.할머님,할아버님을 합장하고, 아버님 어머님을 할아버님 앞에 합장 했다. 산 골짜기 이지만 시내 가에는 맑은 일급수에 고등들이 가제가 사는 물이 흐르고,방학때면 주전자 들고 가제 잡던 물과, 내가 좋아 하는 소나무로 욱어진 산~~~~~~ 그 너머로는 가야산이 보이는 그렇한 선산(先山)이다.
여름방학때면 시냇물에 멱을 감고, 산딸기가 가득하여 금세 한 주전자를 체웠었다. 잊지못할 추억으로 여름방학이면 양쪽 산골짜기로 소를 먹이려 다녔던 일이다. 소를 먹인다 해봐야 점심먹고 친구들과 소를 몰고 그래도 평지인 산에가서 소는 풀을 먹게 하고,우리들은 물장난 치던지,풀잎으로 배를 만들어 물에 띄우거나 물래방아를 만들어 손으로 시냇물을 막고 한편으로 물을 흐러게 하여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것이다.비가 오는 날이면 소나무위에 풀들을 배어 얹져 최대한 물이 세지않도록 하여 소나기를 피하곤 했었다.그러다 해가 석양에 걸리면 산에 흐터져 있던 소를 찼아 귀가 하곤 했었던 기억들을 잊을수가 없다.
지금에야 그런 낭만적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대신 도시에서 자랐던 친구들 보다는 센스가 뒤짐은 어쩔수 없는 일인것같다.
겨울 방학때에는 앉은뱅이 쓸매를 만들어 꽁꽁언 양쪽 계곡에서 친구들과 왼종일 쓸매를 탔다.
쓸매를 타다가 얼음이 약한곳에 빠지면 신발이며 양말을 다젖는가 하면 엉등이도 물에 빠질때에는 옷을 다버리는 경우도 다수였다.
불을 피우고 말리다가 솜으로 된 바지에 불이 붙어면 엉등이에 불이 붙어 벌거벗고 얼음위에 바지를 비비곤 했었다.
저녁이면 친구집에 모여서 화투를 치다가 배가 출출 하면 찬밥에 동내 적당한 집을 골라 김치서리를 하여 먹던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에 침이돈다. 남자 친구들과 여자 친구들이 같이 어울려서 무우을 서리 해서 먹던일, 감자, 고구마, 땅콩, 수박,참외등이 서리의 주된 대상 이었고, 한번은 옆 마을 까지 원정을 같었는데 닭 서리 였다.
모두들 담밖에서 망을 보고 제일 간큰 친구가 들어가서 닭장 문을 열고 닭 날게 쭉지 속으로 손을 넣어 움켜 쥐면 된다.꼬고댁 꼭고 닭이 소리를 치니 방에 있던 주인이 문을 활짝 여는 순간 다리야 날살려라 하고 밝은 달밤에 논두렁에 넘어지면서 뛰는데 뒤에서는 돌 떨어지는 소리가 쿵쿵 한다. 결국은 돌에맞아 죽지 안은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후로는 원정은 없었다.
겨울 놀이로 딲지 치기는 빼놓을수 없다. 적당한 책을 뜯어 딲지를 만들어 친구들과 찬바람도 마다 않고 딲지 치기를 했다. 찬바람에 딲지를 매일 치니까 손이 부러트서 말이 아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집단을 쌓아 놓은 곳은 우리들의 놀이터로 마치 지금의 레슬링 같은 고생밭기를 힘이 다 빠질때까지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상대를 넘어 트리고 또상대에게 넘어지고 하는 놀이 이다.
초등학교는 대방 초등학교를 6년 동안 다녔다. 우리마을이 지리적으로 외지기 때문에 학교 가기가 까다로웠다. 그러나 선배들를 따라 학교를 잘 다녔었는데 하루는 학교가기가 싫어서 학교를 않갈려고 하다가 어머님으로 부터 혼난적이 있다. 아주 호되게------ 어머님은 회초리를 들고 내뒤를 몰면서 학교 정문 앞까지 따라 오신것으로 기억 한다.결국은 울면서 선배 누님 손에 이껄려 학교에 들어 갔지만----- 학교를 안가고 무얼 하려고---?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약4km로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에 다리까지 다 놓았지만 그때는 다리가 없어 여름 장마철에는 퍽이나 힘들었고 마을이 외지기 때문에 박리 모퉁이를 돌때면 여우가 산 비탈을 오르고 있음을 목격 하기도 했으니 지금도 머리가 오싹해 온다.
가능한 한이면 친우들과 같이 등,하교해야만 했었다. 우리마을에는 내 동갑네기는 두명 뿐이고 동생 친구들과 많이 놀면서 큰것 같다. 내동갑 네기는 가난 해서 학교도 못다녔고, 지금은 서울 어디에 있다는데 얼굴 못본지 오래다. 한번은 마을에 큰 사건이 생겼다. 우리마을 제일 안집에 사는 내 동갑네기 친구인데 늑대 한테 물려 갔단다. 할아버지 하고 여름에 사랑채에서 자다가 물려 가서 온동네 사람들이 찼아 나선 결과 학교가는 길 옆 삼 밭에서 시체를 찼았단다. 학교 가고 오는데 큰 부담을 느끼면서 생활 한것으로 기억 한다.
책보따리가 기역난다. 잘못들고 가면 반찬통에 반찬물이 넘쳐서 책보를 다버렸다. 날로위에 뎁혀먹고 책보를 어께에 울려메고 뛰며는 도시락과 반찬통의 가락이 달각 달그닥 달리기에 발을 마췄다. 1학년때 6/25 사변이 벌어 젔다. 우리집 식구들은 할아버님 지시에의해 두패로 나눠서 피난길에 올랐다. 할아버님은 우리집 전재산인 소를 몰고 혼자서 성주 벽진면쪽으로 산을 넘고 나머지 식구들은 성주군으로 같는데 살티재를 넘어 어느 친척 집으로 간것 같다. 한잠 자고 나니 감나무에는 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혼자서 한참을 울고 있는데 모두 나타나서 나와 구영이는 걸어서 구삼이는 아버님 짐 위에 올라 타고 구분이는 엄마가 업고 산능선을 올라가는데 어떤 이가 물좀 떠다 주라한다.이민군 한테 할머님의 몫인것이 기억난다.
1학년때는 본교사가 아닌 가교사에서 공부 했다. 가교사 앞에는 프라타나스 고목 나무가 두거루 있었고 운동장 주변에는 수양버드나무가 서 있었는것 같다.담임 선생님이 강 선생님 이었었는데 가끔 가다가 물구나무 서기를 시키던가 수양버드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은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는 돼지를 키웠는데 한달에 한번인지 2달에 한번 인지는 불확실 하나 일요일 날 학교 가서 돼지 먹이을 주곤 했었는데 하루는 못가서 그 이튼날 학교 가서 많은 벌을 밭은것 같다.
학생수도 우리학년은 30명 정도 이어서 우리 윗학년과 합반을 많이 한것으로 기억 된다. 박 주하 선생님의 은득이 큰것으로 기억된다. 진외갓집 할아버님 되는 관계인데 나를 잘 인도한것 같다. 물론 공부도 좀 했지만 박 선생님의 은득이 큰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한번도 찼아 뵙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살아 계시면 찼아 뵈야 겠지요 !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김 봉주와 내가 1~2등을 다툰겄같다. 그래서 친하게 지나고 싶은 좋은 친구 였는데 중학교도 못가고 농협 조합장 까지 한 친구다.
초등학교 5~6학년 때는 마을 에서 내 혼자 늦게 하교 해야 하는 관계로 아버님이 박리 모퉁이 까지 나오셔서 불을 놓고 계셨기 때문에 무서운줄 모르고 학교를 다녔다.초등 학교 5학년때 4,5,6학년이 걸어서 합천 해인사 까지 소풍을 1박2일간 것 갔다. 기억으로는 쌀과 반찬을 들고,메고 갔는데 어머님이 내 반찬으로는 무우 장아치을 넣어 주셨는데 여자 친구들 앞에 내어놓기가 부꺼러워 반찬은 다 버리고 얻어 먹은것으로 기억 된다. 반찬 해봐야 그게 그것 이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 하면 가야산을 넘어 해인사를 간것 같다. 짐을 많이 가지고 간 친구들은 넘어 가기가 힘들어 울고 야단 법석이 난것 같다.
아버님은 정말 인자하시고 자상 하셨다. 일평생동안 내한테 꾸중 이라곤 없었고 나 하나를 키우는 맛에 힘들어도 힘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일만 하시다가 돌아 가셨다. 그때는 농사라 해봐야 2마지기 할아버님이 유산으로 밭은것이 전부인것 같았다.그런데 아버님은 열심히 나무를 해서 김천장에 팔았다.5일 마다 서는 장날에 말이다. 솔잎을 한 구루마 하면 비쌓는데 아버님은 솔 잎이 아니고,소나무 가지를 5일 마다 한 구루마씩 김천장에 같다 팔으셨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관계없이 특히 겨울 이른 새벽에 소 코에서 김이 부였게 피어 올랐다.그렇게 하셔서 논 을 한마지기 두마지기를 사 모우셨다.논을 살때면 할아버님과 상의 하시던 기억도 새롭다. 그렇게 사모은 전답이 20마지기(4만평)쯤 되었는것 같은데 지금은 5마지기(1천평)뿐이다. 자식들 공부 시키고---------------------------정말 인자 하셨다.
어머님은 할아버님,할머님,아버님과 5남매 자식들에 지처있었는것 같다.항상 시중드는데 여염이 없었으며 자식들 키우는데 여유가 없어서 인지 특별한 기억은 없어나 매일을 김매는데 시간을 보내신것 같다. 한번은 어머님 따라 밭에 김매려 같는데 정말 허리가 아파 힘들었다.
담배농사도 하였는데 그일이 말이 아니게 힘들었으나 마다 하지 않으셨다. 년로하신 할머니 할아버님 모시고 한창 가을철이면 탈곡 하랴 밥 지어시랴 일평생을 힘들게 일 하시다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 이시다. 어머님은 일평생을 자식 오기를 기다리시며 사셨다. 특히 내가 대학교 다닌 이후 부터 특히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계실때 시골에 가면 갈때마다 동네 뒤 모퉁이에 만 서 계셨었다. 자식 오기를 기다리시며 지금은 사진이 있는지 없어졎는지 모르 겠는데 내가 결혼 한후 시골집에 갔다가 돌아 오면서 찍은 사진 인데 보이지 않을때까지 처다보고 서 계시는 모습에 코잔등이 시려온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첬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무었을 할것인가에 골몰 했던것 같다.농사를 지을 것인가 공부를 할것 인가 아버님 께서는 나의 일에는 조금도 상관 하시지 않으시고 나의 결단에 마끼신것 같다.나는 공부를 하기로 결심 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김천으로 중학교를 가기로 했다. 지금도 대구,경북 일원에서는 일류에 속하는 송설제단 김천 중학교에 시험을 치러 합격 했다. 시험 발표나는날 학교 담벼락에 붙은 나의 이름을 아버님과 함께 확인하고 기쁘하시던 아버님 얼굴이 서언 하다.
막상 학교에는 합격을 했지만 어떻게 다니느냐가 문제 였다. 집에서 김천까지는30리 길이었다.기억에는 잘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동기 김 흥기와 김 기홍과 3명이 부곡동 어느집에서 자취를 한것같다. 아버님께서 주선해 주시는 데로 3명이 자취를 했다. 3명이 어떻게 생활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공부도 전혀 않하고 그냥 책가방 운전만 한것 같다.그러다가 무었 때문인지는 알수없어나 혼자서 부곡동 가매실 외딴집에서 혼자서 자취를 했는데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둑놈이 들어서 자취방을 뒤져 놓기도 했다. 토요일 학교가 끝나면 30리 길을 걸어서 집에 같다가 1주일 동안 먹을 양식과 반찬과 땔감인 장작을 메고 김천 까지 가노라면 특히 긴(진)방천을 걸어서 지나칠라면 다리가 몹시 아팠던 기억이 새록 하다. 그러다가 안되어서 아버님을 졸라 중고 자전거를 한대 사서 자전거 통학도 했다. 다리가 짧아 엉등이가 다 까지도록 비틀 비틀 패달을 밟은것 같다.
겨울날 비가 오는날 이면 아침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학교 갈려고 나서면 도로가 꽁꽁 얼어 얼마 못가서 넘어지면 자전거 패달이 뿌러지고 했던 기억이 새롭다. 자전거 호쿠도 왜 그렇게 잘 부질러 지던지--- 오후 하교 길에 자전거 타고 올라 오면 감천면에 사는 놈들이 애를 먹이곤 했었다. 학교가 아니라 고생길 이었다. 공부에 몰두한 기억은 한번도 없다. 이렇게 공부해서 고등 학교는 김천 고등학교에 입학 했다. 김천 큰집 이모님댁 구복이네집으로 해서 옛날 형무소가 있던 뒷편 서부 초등학교 맟은편 어느 아주머니 댁 아저씨는 김천 역에 나가시는 집에서 송 주상과 같이 하숙도 하면서--- 송 주상이는 상주가 자기 집이였는데 서울에 있다는 예기만 들었지 만나 보지는 못했다. 이집 외에 또 한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고 재삼 선배도 만나고--- 어떻게 해서 고등 학교를 졸업 했다. 큰집은 노실 고개를 넘어 가죽샘 있는곳 언덕백이 집이 였는데 큰형님은 중외 실업에 다니셨으며 작은 형님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기억 나는것은 별로 없고 방학 때이면 시골에서 신나게 논 기억 밖에 없다. 구복이 집에 있을때 하 종희를 만났다. 방학 때 선산 무흘면 종희 시골집에 놀려가서 소주 2홉 짜리를 한병 처음으로 다 마시고 정신이 잃었던 기억과 친구와 형무소 뒤에 사는 여자 친구를 만나려 갔다가 부곡동 깡폐들 한테 걸려서 호되게 혼난 기억이 난다. 친구는 몽둥이로 얼굴 부분을 빗 맞고 나는 죽어라 달아 난 기억이다.하종희 하고는 친하게 지넸었다. 대학 졸업 하고 염료 장사를 거처 오댕 공장을 하다가 지금은 대구에서 소일 하고 있다. 성옥환 교장 선생님 봄 가을 소풍 때이면 교단에 서셔서 해마다 달라지는 직지사로 직지사는 학교에서 가깝고 명찰 이기에 많은 소풍을 직지사로 간것 같다.
가끔씩 증산면에 있는 청암사로도 갔고,김천 고등학교 10회졸업 생 으로 교주는 최 송설당 여사, 재단 이사장은 그당시 함태연탄 사장이었던 김 세영님 이셨다.교사는 붉은벽돌 집으로 일제 하에 지은 교사 들이며 최송설당 동상 이 서있고, 옆에는 향기로운 향나무가 서 있었던것 같다. 채육 시간이면 뒷산으로 토끼잡이도 간것 같다. 운동장 주변에는 프라타나스 고목이 많았다. 체육시간 이면 축구도 하고 철봉도 하고 했는데 나는 철봉에 소질이 있었던것 같다. 이렇게 하여 1962년 2월 고등 학교을 졸업하고 나니 또 갈곳이 없었다. 전혀 공부를 않했으니 대학교을 갈곳이 없었다. 그래서 또 구삼이 동생과 함께 김천 포부당 절 밑 어느 할머니 집에서 자취를 했다. 1년 재수를 한것이다.
김천에서 자취 생활로 재수는 했지만 노는것은 시골이 본거지 이었다. 이수완이와 여자 친구들과 진 하게 놀았는것 같다. 재수때 할머니는 중후하게 늙어 셨으나 농담을 좋아 하신것 같다. 텃밭에 배추를 심었는데 크지는 않고 옆으로 벌어진다고 부산 가시네 모양으로 옆으로만 퍼진단다.그리하여 1년후 1963년 3월 대구에 있는 청구대학에(현 영남 대학교 본신)입학 했다. 좀 여유로운 생활 인가 싶었는데 김천에서의 생활은 청산 하고 대구에서의 생활이 시작 되었다. 이제는 자취 생활도 명수가 났다.신암동 외딴집에서 자취 생활을 했는대 가끔 할머님 이 오셔서 밥도 해주시고 할머님은 콩나물을 길러 다 크면 부대 옆으로 다니시며 파시곤 하시다가 시골 집으로 들어가신것 같다. 왜 시골집으로 들어 가신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도시 생활이 지겨워서인지 시골일이 바빠서 인지---- 할머님은 나를 괭장히 사랑 하셨다.시골집에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몇그루 있었는데 감을 따서 벽장에 넣어두면 감홍시가 되는데 겨울에 시골에가면 나에게 홍시를 주시곤 했었다. 달콤한 그 맛이 감미롭다.그러다가 먼외가 친척 누이집에서 기거 했다. 경부선 철길 따라 대부분 등,하교 했다. 외가댁 자형은 옷만드는 공장에 다니시고 누님은 아이들 키우면서 넠넠지 않은 살림 이었다. 방은 별도로 하나 얻어 밥만 누님 집에서 먹었다. 쌀은 아마 아버님 께서 같다 주셨겠지요 ? 확실 한것은 모르겟다.
서 용호와 이연승 친구를 만나다. 서용호 친구는 전남 목포 친구인데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것 같다. 왜냐 하면 멀리서 유학도 왔지만 하숙 생활을 계속 했으므로 나중에 전남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로 여행 한적이 있었는데 평야가 괭장히 넓은곳 이었다. 천석꾼의 자식 이라는것을 요즘 와서 들었다. 지금은 안양에서 퇴직후 생활을 하고 있다.서용호와의 지난 예기는 아주 많다. 신암동에 하숙 할 때와 대명동에서 하숙 할때와 군대생활에서 휴가나와 서울에서 만났을때와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누님댁에 기거 하다가 또 여의치 않아 신암동에 이 연승 친구와 차취생활을 했다.이 친구는 고향이 성주군 초전면 이었고 시골집에 놀려도가고 했었으며 지금도 월1회씩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으며 조그마한 플라스틱 사출공장을 하고 있다.둘이서 자취 생활을 하다가 친구가 군에 입대 하는 바람에 혼자서 자취 생활을 했는데 샘물이 자취집에는 없어서 뒷집으로 샘물 길러로 갔던 일 이며 점포에서 매일 파 조금 사서 된장 끌여 밥 먹었던 일이 지금도 새록 새록 하다.
자취생활시 주 메뉴로는 된장과 콩장과 무우 장아치가 전부 이다. 나는 일평생을 속이 않좋아서 소화 불량속에서 생활 해 왔었는데 가만히 생각 하면 물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결과도 있겠지만 연속 되었던 자취 생활에도 영향이 있지 않았겠나 생각 하고 있다.
그러다가 나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 했다.군에 간다고 술을 많이 마셨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송별연을 한것이다. 술에 취한체 입대를 위해 뻐스에 몸을 싣고 대구 50사단 신병 훈련소로 입대 했다. 들어가자 마자 늦게들어온 입소병들을 곡괭이 방망이로 업드려 뻣처 해 놓고 않죽을 정도로 후려치는것을 보고 군이란 이런 곳이구나 정신이 아찔 했었다.
늦게들어온 친구들 득에 정신을 잔뜩 차리고 훈련에 임 했다. 사복은 전부 벗어서 고향으로 보내고 군복으로 갈아 입고 훈련에 임했다. 재식훈련 이며 매일 와룡산 기슭으로 훈련을 나갔는데 사격훈련에 낙재점수를 맞아 철모 벗고 머리 박아 꺼꾸로 서기가 유난히도 기억에 난다. 아침에 기상하여 식사하고 치솔질 하다가 단수가 되어 입도 행구지 못한채 탁탁 뱃고 치솔은 보켓트가 정 위치 였다. 옆 친구의 밥이 더많아 보이고 어쩌다가 특식인 소고기가 나오면 먹고 싶긴 먹고 싶은데 두더러기 때문에 못먹다가 두더러기 보다 먹고싶은 충동이 더크서 먹고는 진짜 두더러기가 나서 선임 하사에게 이야기 한결과 PX가서 까스명수 활명수 또하나 기억에 없는데 3가지를 한거번에 먹고 이후는 두더러기는 나로 부터 살아젔다. 어릴때 시골집에 있을 때에도 두더러기가 나면 할머니 께서 내 옷을 벗기고는 지붕위에 집을빼어 불을 부쳐서 나의 몸을 쓸어주시곤 했었다.
화장실에 앉자 볼일을 보노라면 누가 와서 모자을 가지고 달아나기 때문에 모자를 쓰지도 못하고 볼일 보던 일이며 아무리 정량을 먹었다 해도 돌아서면 배가 고팟다.와룡산 정상 까지 갔다가 선착순 집합은 정말 엄청난 기억 이다.이외에도 여러가지숫한 것들을 기억에 새기면서 훈련을 마치고 대전 병참 학교로 배정 받았다. 진정한 병참병이 되기 위한 교육 이었다. 병참 학교에서의 기억은 아주큰 새멘트로된 김치통에 장화을 신고 삽을 이용해 김치담던 생각들이 서언 하다.
병참 학교를 졸업하고 의정부에 있는 101 보충대로 명 받고 기치로 이동중 인솔병에게 이야기 하고 군 따불백을 메고 고향에 다녀올 기회을 재공받고 시골집에가서 하루 져녁 자고 의정부로 혼자 올라간 기억이 난다.입대후에는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하루저녘 외출이 정말 이를 줄이야 혀를 내어 저었다.하루 이틀 101보충대에 머무러다가 저녘에 군 추럭을 타고 꼬불 꼬불 고게를 넘어 부대에 도착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꼬불 꼬불 넘어 왔던 고게가 의정부 송우리 건처에 있는 투와이 고개 이었고 우리부대 이름은 자동차 수송 대대 였다.
여기서 3년 6개월 이라는 군대 생활이 시작 되었다. 본부중대 인사 행정과 상벌 안전 업무을 명 받았다. 사수로는 김 병록 상병 이었는데 대단히 인자하신 분이었고 절실한 크리스찬 이었다. 겨울에 교회을 다녀 오면 귀가 얼어서 애를 먹곤 함도 생각 나는데 한번은 추운 겨울 저녘에 교회을 같이 가자고 해서 송우리에 있는 교회를 따라 갔었는데 눈 감으라 해놓고 무엇하는가 싶어 눈을 떠보니 잠자리채 같은곳에 돈을 거두고 있는것을 보고 후로는 일체 교회에 가지 않는다. 중대장 강 중위 선임 하사 인사장교 모두 잘 계시는지 궁금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