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 켈리(Petra Kelly, 1947-1992)
1947년 독일 바이에른 Günzburg 출생 1960년 미군이었던 양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와 함께 미국행 1970년 워싱턴 아메리칸 대학 국제관계학과 졸업 197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 석사 졸업 1971-1983년 유럽공동체(EC) 집행부 사무관 활동 1979년 독일 녹색당 창당 멤버 1983-1990년 독일 연방의회 진출, 녹색당 연방의회 의원 역임 1992년 10월 의문의 피살
2차 대전 직후 패전국 독일에서 태어난 페트라 켈리는 미군이었던 새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았다. 워싱턴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던 그녀는 대학 학생회 임원활동 및 1968년 로버트 케네디, 휴버트 험프리 등 민주당 선거운동에 참여하며 현실정치를 배우게 된다. 유럽통합문제에 관심을 갖고 암스테르담으로 진학한 페트라는 이후 10여년을 유럽공동체 집행부 사무관이자 반핵운동가로, 마지막 10여년을 독일 녹색당 의원 및 정치인으로 활동한다. ‘녹색 잔다르크’라 불리웠던 페트라 켈리가 치열한 삶을 마감한 것은 1992년 10월로, 자신의 집에서 여러 가지 의문을 안고 피살되었다. 당시 수사당국은 연인이자 오랜 정치적 동반자였던 前 나토 사령관 게르트 바스티안을 사건 당사자로 지목했다. 그녀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것인데, 그 이후 갖가지 추측들이 무성했으나 아무것도 밝혀진 것은 없다.
1992년 의문의 죽음 이후에 하인리히 뵐 재단은 인권과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세계 활동가들에게 '페트라 켈리 평화상'을 수여함으로써, 그녀가 인류에게 사랑, 평화, 희망을 뜻하는 살아있는 녹색신화로 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십대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전체주의, 핵, 전쟁과 같은 역사의 진실에 눈을 뜬 그녀는 마틴 루터킹의 비폭력 저항정신에 영향을 받고 평생 삶과 운동의 원칙으로 삼는다. 마르쿠제의 철학적 명제를 차용, 카치아피카스가 명명한 ‘에로스 효과’의 시대. 반전평화의 물결이 거리를 뒤덮은 68혁명 세대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그녀는 이들이 외치는 메시지가 여전히 남성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나는데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비폭력 저항정신의 선구자 마틴 루터킹을 기리는 집회가 폭력으로 뒤덮이고, 혁명의 이름으로 모든 문제를 하나의 창구로 환원시키는 운동방식이 의문스러웠던 그녀는 반핵운동과 녹색당 활동을 통해 여성주의 뿐 아니라 생태주의, 사회적 책임, 풀뿌리 민주주의, 비폭력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티벳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연대활동을 독일 연방의회 차원까지 끌어올리기도 했으며, 미국에서 직접 겪은 차별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어 소수민족의 인권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말 ‘정당 반대당(반정당)’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각국의 환경운동단체가 모여서 만든 독일의 녹색당은 유럽의회를 시작으로 수년 만에 지방의회와 연방의회까지 순식간에 진출했으며 그 핵심에 페트라 켈리가 있었다.
이들의 ‘녹색’이념이 지향하는 바는 본래 환경, 인권, 평화를 위한 가치를 중심으로 연대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에 있다. 지금 집권당이 된 녹색당은 어떤 의미에서 많은 가치를 양보하고 기성정당과 타협한 부분이 있지만, 과거 녹색당의 주역이었던 페트라 켈리는 독일 연방의회의 입성이 단지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인류 미래의 유일한 대안이 ‘녹색’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단순히 ‘환경보호’같은 협소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주요 목표인 전지구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페트라 켈리는 의회진출 이후,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업무형태와 원칙주의로 당에서 멀어져갔으며, 결국 10여년 만에 의원직을 포함한 당내 직위까지도 모두 잃고 만다. 이후 녹색당은 지난한 내부 노선 갈등 속에서도 정치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이어가며 1998년 총선에서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당이 되기에 이르렀으며, 2002년 9월 22일 독일 총선에서도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이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녹색당은 연정에 참여하여 환경세 도입, 자동차 휘발유 가격 인상, 원자력 발전소 완전 폐기를 단계적으로 추진하며 정부와 에너지 사업체의 동의를 얻어내며 정책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오늘날 독일 전역에 극우세력이 발호하고 있는 시점에서 녹색당은 가장 과감하게 극우파 반대 입장을 표명해 주목 받고 있으며, 그 결과 은근히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독일 유권자들로부터 외면 받아 지방선거에서 고전하기도 했지만, ‘연정 내에서 악역을 도맡아 한다’ 는 이유로 독일 지성들로부터는 오히려 더욱 지지를 받고 있는 중이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변화하는 유연성과 그 안에서 한결같이 목표로 한 가치를 버리지 않는 일관성은 바로 페트라 켈리의 유산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생전에 연정을 반대했던 페트라 켈리가 이미 떠나고 없기에 현재 녹색당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지는 미지수다.
<자료출처> http://en.wikipedia.org/wiki/Petra_Kelly http://explanation-guide.info/meaning/Petra-Kelly.html http://blog.naver.com/earlbae/60011285081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페트라 켈리" (함께하는 시민행동, 장상미) http://blog.naver.com/ahnxyz/934139 "페트라 켈리"(자유기고가, 김천) <희망은 있다>페트라 켈리(이수영 역) 위 자료와 싸이트를 참고, 편집하여 정리하였음.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 1948~ )
1948년 독일 남부 랑엔부르크 출생 1965년 고등학교 중퇴 1983~1985년 독일연방의회 의원 1985~1987년 헤세 주정부 환경부 장관 역임 1991~1993년 헤세 주정부 환경자원부 장관 역임 1994년 독일 연방의회 의원 및 원내 의장 취임 1998년 슈뢰더 내각 부수상 및 외무부 장관 취임 2002년~ 부수상 및 외무부 장관 연임
연합당과 녹색당 대변인을 거쳐, 1998년 적녹연정 이후 독일연방공화국 외무장관 겸 부총리를 맡고 있다. 녹색당이 많은 의석을 차지했던 2002년 선거에서 녹색당 최고 후보자로 꼽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헝가리에서 독일로 귀국한 푸줏간 주인 요제프 피셔와 엘리자베스 피셔 사이의 일남 이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요제프 마틴 피셔이다. 1965년에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사진사로서의 직업 교육을 시작하여 1966년에 그만 두는 등 갑작스러운 아버지와 작은 누나의 죽음으로 방황의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러던 중, 스튜트가르트에서 학생 운동의 메카였던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면서 68혁명에 가담하는 것을 계기로 마르크시즘을 접하고 반전․반핵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나도르노, 하버마스 강의 등을 청강하고 자신을 ‘직업혁명가’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1971년 노동자 계급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동차 회사인 Opel에서 일반 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나 몇 달 후 그의 정치활동이 발각되어 해고되었고, 1976년부터 1981년까지 택시운전사로 일하다가 프랑크푸르트의 ‘칼 맑스’ 헌책방에서 일했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피셔는 독일 녹색당의 일원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하였고, 1985년 적녹 연정 초기에 주정부 환경부장관이 되어 1987년까지 활동하였다. 1989년 헤센 주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 사민당과의 연정에 참여하여 1991년 다시 헤센 주 환경자원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1994년 다시 연방의회에 진출한 그는 녹색당을 연방의회 제3당으로 끌어올리면서 녹색당 연방의회 원내의장에 취임한다. 1998년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16년간 지속되어온 헬쿠트 콜 시대를 사민당과의 연정으로 종식시키고 슈뢰더 내각의 부수상이자 외무장관 자리에 오르게 되며 2002년 선거에 다시 당선되었다.
거리의 직업 혁명가에서 외무장관까지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유럽 통합의 질적 향상, 유럽 통합의 동유럽 확장 또한 유럽연방 신속 대응군 창설 문제에서는 유럽 통합의 개척자 격인 콜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나토의 원자탄 선제공격 원칙 포기, 무기 수출의 엄격한 제한, 인권 신장에 중심을 둔 외교 정책 수립 등으로 녹색당 이상에 충실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그의 변신 능력을 두고 캐리어에 집착하는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외무장관 자리에 오른 후에 느껴지는 보수화를 걱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의 보수화가 현실성을 담보한 68세대의 정신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한번 쯤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지.
<자료출처> http://www.answers.com/topic/joschka-fischer http://www.absoluteastronomy.com/encyclopedia/j/jo/joschka_fischer.htm <나는 달린다>요슈카 피셔(선주성 역)
안나 뤼어만(Anna Lührmann, 1983~ )
1983년 독일 출생
2002년 독일 연방의회 하원의원 당선
2003년 정치학, 조직학 학사 취득
2004년 독일 연방의회 예산 위원회 소속
안나 뤼어만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의 나이로 독일 의회 사상 최연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2002년 9월 22일 총선에서 프랑크푸르트 서부 교외 오프하임에서 출마한 안나 뤼어만은 지역구 투표에서는 7.1%의 득표율로 4위에 그쳐 떨어졌지만 소속당인 녹색당의 높은 득표율에 따라 비례 대표로 당선됐다.
사회문제에 대해서 항상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아서 어린 나이에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린피스에서 활동 했었고, 1998년부터 녹색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최근에는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연방의회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유럽 녹색청년연맹 간부와 녹색당 청년위원회 중앙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그녀는 환경 보호나 경제와 평화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계회의 시류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유럽연합은 보다 국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환경 보호, 교육 시스템, 사회 안전 시스템과 같은 이슈들에 대해 현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수 있는 지속가능한 정치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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