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앙 정기 간행물로 부터 "신앙 간증" 청탁을 받고 쓴 것입니다.
좀 많은 분량이긴 하나 솔직하게 자신을 되돌아 본 것입니다.
아직도 너무 부족하여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이 동 훈 (부산성락교회 D.Min / C.C.C)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신학을 갖고 있고, 또 그러해야 한다. 아니면 뜻도 내용도 없는 천방지축이란 말이다. 그런 의미 누군들 개인의 역사가 없겠는가마는 내게도 나 개인의 역사가 있고 역사를 지탱하는 나름의 신학이 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종교로서의 신앙」이었다.
나름대로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니 때로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고 끝없는 울부짖음의 대상이기도 하며 방황하는 세월의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해 준 그런 신앙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거기에는 마치 우리가 등산을 하여 정상에 오르면서 느끼고 확인하는 '다 왔구나!' 하는 확신이 없었다. 아직도 아쉬움이 남아있는 종교로서의 신앙이었다.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30년 전, 중학교 입학을 기다리던 겨울이었다. 아마 앞서 교회를 다녔던 형님의 인도를 받았든지, 아니면 옆집 옷가게 점원으로 있던 이웃 누나의 인도를 받았든지 했을텐데, 그 최초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기억에 남는 것은 찬송소리를 들으며 교회를 들어 섰는데 의자도 없는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나는 맨 앞자리로 인도되었다.
- 이것은 내가 교역자가 되어 예배를 돕는자로서 뒷자리로 밀려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그리곤 6년 후 고3 무렵 한 친구의 교회 부흥회에 가서 보니 그 때 그 강사는 이름도 유명한 신현균 목사님이셨던 것을 알았다. 그 날 그 강사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앞자리에 앉아서 웃기고 울리는 강사를 따라 많이 웃고 많이 울었었다.
'나는 이제 예수 믿고 천국 갈텐데, "우리 엄마"는 어떻게 되는 가'를 생각하며 그렇게 울었다. 그러니까 나의 신앙생활은 교회에 발을 딛자마자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었다. 정말 부지런히 다녔었다. 30년동안 주일예배 한 번 안 빠뜨렸으니, 관록을 위하여 믿었던 것은 아닐텐데 아무튼 철저하게 다녔다. 그러나 그 교회는 몇 달을 다니지 못했다. 동네의 별로 착해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그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아신 어머님께서 옆집 집사님을 - 그 집사님의 시어른께서 연세가 많은 장로님이셨는데, 동네 사람들이 예의를 갖출만큼 굉장히 덕망이 있는 분이셨다 - 따라 출석하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걸어서 한 20분 정도 가는 그 교회가 사실상의 나의 모교회가 되었고, 이 선택은 내 인생의 중요한 한 계기가 되었다. 나의 출신교회는 부산지방법원 맞은 편에 있는 부민교회이다. 물론 나는 교회생활을 좋아했고 그것은 나의 정신세계를 자극하고 나의 인격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했다. 당시의 일기를 보면 온통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 예장 고신교단에는 S.F.C (Student for Christ를 학생신앙운동이라고 부른다)라는 고유의 학생 활동이 대단히 활성화 되어있다 -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출신교회인 진해 웅천교회에서 S.F.C 수련회가 모였었는데 나의 유치하고 정리되지 않았던 신앙은 일단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가족의 반대에 고전하던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꼬박 밤을 세워 울며 부르짖는 회개와 간구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후 나의 신앙생활은 가속도가 붙고 중.고등학교 시절의 혼돈과 방황, 학업의 무거운 중압감중에도 신앙을 포기할 수 없는 골격을 마련하였다. 교회를 가기 위해 성경, 찬송을 숨기기도 하면서 나는 눈물이 있고, 가슴이 뜨거운 학생시절의 신앙을 계속했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인생의 중요한 매듭이 다가왔다.
대학입시였다. 지옥같은 고3의 입시 경쟁속에서 진학지도를 받을 무렵 나는 계속해서 방과후 교회로 갔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일찍 '목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한 것과 그리고 정말 목사가 되고 싶었던 것, 또 다른 이유 - 이렇게 일반대학으로 진학을 하면 나는 교회로 돌아올 것 같지않았다 - 때문에 마음은 신학대학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설득시켜야 하는 것과 고생하신 어머니의 실망을 이겨낼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교회가 뭔가를 잘 모르시던 어른들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자식이 목사가 되어도 큰 고생하지 않고 살리라 싶어 의외로 쉽게 허락을 했었다.
나의 대학생활, 그것은 참으로 깊은 혼돈과 방황, 고독과의 투쟁의 연속이었다. 당시 고신대학은 정규 4년제 대학이었으나 그것은 내가 꿈꾸던 캠퍼스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캠퍼스도 없었고, 대학의 낭만도 없었다. 오직 그것은 교단이 필요로 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목회자 양성소에 불과했었다. 친구라는 친구는 부산대학에도 하나 남지 않고 서울로 다 떠나버린 나의 대학생활은 학교가 요구하는 교단 목회자로서의 신앙과 경건의 증진보다는 청년의 고독과 신학이라는 학문적 사색이 전부였다. 그 때는 그 이유를 잘 몰랐었다. 다만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질타하며 오르다 쓰러지고 또 오르다 쓰러지곤 했었다. 내 육체는 방황에 지쳤고, 영혼은 길을 잃었었다. 이제야 진단할 수 있는 분명한 안경을 가지게 되었지만, 영적 세계의 그 방대함과 장엄함과는 무관하게 왜소하고 편협하며 심지어 교조주의적이기까지 한 분위기는 아예 처음부터 내 영혼과 육체가 날뛰기에는 너무도 좁은 무대였다.
그 때 만난 것이 신학이라는 학문이었다. 학교의 답답한 강의와는 달리 사색을 자극하는 현대신학의 글들은 너무도 재미있었다. 따라서 경건한 청년 그리스도인은 못되었으나 신학이라는 학문에 매료되어 그런대로 교내활동도 하며 자신을 지탱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철저히 보수주의적 신앙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새롭게 열리어지는 자유주의 신학의 그 높이와 깊이와 폭에 경탄을 했고, 매료되어 신앙의 본질은 이미 한참이나 멀리 떠나 있었다. 곁들여 한국 70년대 초의 신학적 분위기는 서구 신학의 여파로 급 진보주의에서 부터 신 정통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 신학의 범람기였다. 뿐만아니라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 빚어낸 사회 분위기는 대학의 분위기를 진보적 경향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군사독재와 반인권 문제에 대한 투쟁이 대학 지성의 상징같이 보여졌던 그 때 처음 나를 사로잡은 이는 나찌 정권에 저항하였던 청년신학자 본 훼퍼였다. 왜곡된 질서와 더불어 싸우는 본 훼퍼의 자세와 인격 그리고 그의 섬광같은 성경해석은 신학의 맛을 알기 시작한 나에게는 정말 매혹적인 인물이었다. 곧 그것은 내게 행동하는 기독교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부각되었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국의 인권현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며 이에 관련된 모든 말과 글들을 수집하므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나아갔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민족의 현실과 함께 하는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현실의 부조리한 모습들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교회 교육 현장에서 거침없이 쏟아 내었다. 그 때 배웠던 사람들 중에서 재야 인권운동가, 인권의사, 재야 학술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여럿 나왔다. 지금 나는 언젠가 이들을 또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정말 나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래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던 길을 갔다. 이제 나는 바로 그들에게 또 다른 예수, 아니 진짜 예수를 보여줘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제법 오랜 시절 내 책상앞에는 언제나 작은 지구본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Lord, please Let me go!" 라고 어느 지역에의 선교사 꿈이 새겨 있었다.
오랫동안 잊지않고 기도하던 서원과 다짐이었으나 새로이 발견한 신학사상앞에 그것은 낡고 무력한 것으로 매도되고 신대원 1학년 말 그 지구본은 휴지통에 쳐박혀 버렸다. 그 무렵 나는 열악한 조국의 인권 현실에 순교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학에의 관심은 계속 증폭하여 궁국적으로 신학은 해석학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관심을 바르트와 불트만에게로 옮겨갔다. 결국 어떤 도화선이 생겼다. 신대원 1학년 학기말 기독론 시험을 치는데 나는 출제된 질문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여 출제자의 문제를 쓰지도 않고 그냥 한 묶음으로 "기독론"하여 K. Barth의 기독론을 요약해 제출해 버렸다. 이미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나는 옳은 점수는 주실리가 없으나 그 박식함(?)을 인정해 D로 pass는 시켜줄 것이다고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산되고 그것은 F로 처리되었다.
그 때 난 '이제 이 학교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 대학원에 응시를 했다. 본격적으로 교파신학이 아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뒤늦게나마 캠퍼스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너무도 동떨어진 신앙적 배경과 신학적 관점이 처음에는 적응을 어렵게 하기도 했으나 새로운 생활은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몸부림도 오래 가지 못했다. 연신원에 진학한 나는 오래 기다리지 못했다. 그 해 가을 연고전 당일 당시에는 국회의원 조차도 입에 담지 못했던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부르짖다 기숙사에서 연행이 되었고, 서대문 유치장에서 14일을 보내어야 했었다. 그 당시 고신대학에도 바깥의 학원 소요에 발맞춰 학내 문제로 뒤숭숭하던 중 교육학과를 중심으로 한 소요가 있었다. 이를 처리하던 학교 당국은 배후에 사주가 있다고 보고 내사하던 중 나를 지목하고는 내게 연락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군목후보생으로 교단의 추천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논산 훈련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나이도 평균 5살 이상 많고 대학원을 두 곳이나 휴학하고 온 고학력의 졸병인 나는 익숙하지 않은 계급사회, 신앙적 교양과 질서와 가치관과는 전혀 무관한 사회에의 적응이 참 어려웠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기간 철저히 타락하고 철저히 방황하면서 세속으로 성육하신 또 다른 신을 만나고 싶어 했었다. 나는 나의 성육하신 신이 나의 내면에서 앓고 신음하고 계심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것의 참된 의미를 외면한, 인간 실존 그 자체의 불안과 고독속에서 외로운 방황만 반복하고 있었다.
제대를 며칠 남겨 두지 않았던 나는 깨끗하게 단장된 연병장과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를 많이도 고민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이 좌절에 빠져 있던 내게 고3 시절 그리고 그 보다 훨씬 이전 '목사님이 되어야겠다'고 서원하였던 것이 떠 올랐다. '최초 내가 바랬던 것은 신학자가 아니라 목사님이 아니었던가. 내가 얼마나 우리 교단(고신측)을 사랑했던가? 돌아가 목사님이 되자. 옳으면 적응하고 그래도 옳지 않으면 개혁의 기수가 되자'는 결단이 섰었다. 굉장히 기뻤었다. 일단은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은 다 간단했다. 제대 후, 내 생활은 참 많이 바뀌었다. 내면의 어떤 변화라기 보다는 현실에 적응해야겠다는 피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현대신학에 몰두하므로 포기했던 학과들에 대한 학점 취득과 내 팽개쳐 두었던 히브리어, 헬라어를 챙겼다. 신대원 졸업 종합 시험때는 F투성이던 히브리어를 2등으로, 헬라어는 100점을 받으며 다른 과목들도 모범답안을 만들어 동료들을 도우며 함께 공부도 했었다. 그렇게 순응하려고 노력한 탓이었을까 졸업을 앞두고 전혀 뜻하지 않게 서울 서문교회 대학부를 맡아 서울로 가게 되었다. 아무런 배경이 없던 나에겐 솔직히 뜻밖의 영전이었다. 그리고 내 신앙철학과 실력을 검증받을 수 있으리라 싶어 의욕도 났었다.
김기동 목사님과 그 교훈을 알고 가장 뼈아프게 후회스러웠던 것 중의 하나는 만일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이를 접할 수 있었으면 300명 이상의 그 좋은 학생들을 진짜 복음으로 양육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나 개인의 생도 크게 바꿔 놓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3년을 대학생들과 어울려 사역하던 나는 담임목사가 교체되어지는 와중에서 교회안의 우여곡절을 보며 이제는 독립해야겠다는 계획과 함께 자신의 일터를 찾아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한 동기생인 목사님이 어렵게 개척을 해서 가꿔 놓은 작은 교회였으나 나에게는 단독목회에의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히 변화되지 않은 내게는 문제가 많았다.
5공 정권 후기인 당시, 소요는 그치지 않았고 내가 부산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일찍 가르침을 받았던 아이들이 이제는 대학생이 되어 마치 저들의 맹주를 만난 듯이 일제히 부임하는 교회로 들어와 대학생 하나 없던 교회는 30여명의 대학생들이 모이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같이 부산대학, 고신대학을 중심한 대학운동을 지원하고 또 인근 공단의 노동운동과의 연계를 시도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 활동을 비롯한 재야 운동권에 직접 참여했었다. 고신 교단의 40년 역사상 교단내 현역 목사로서는 이렇게 무모하게 공개적으로 재야운동을 한 것은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가 결국은 노회 문제가 되었다. 몇차례의 소환뒤 교단의 체질을 아는 나는 버티기 어려운 것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무엇보다도 가치관이 흔들렸으니 다 때려치우고 그야말로 자유다운 자유를 누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괴로워도 하고 몸부림도 쳤다. 그리하여 아내 몰래 이력서를 몇군데 내었었다. 학력도, 경력도 신앙과 교회일 외에는 없는 나의 이력서는 내가 보아도 가관이었다. 그러나 내심으로 사회 문화면의 글은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학력을 밑천으로 언론계에 이력서를 내어 보았던 것이다. 어느 제법 괜찮은 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백명중 최종합격자 다섯명을 불러서 면접을 하는데, 제일 먼저 이름을 불렀었다. 한 번 같이 일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곤 나머지도 면접을 끝낸 후 식사를 하자고 했다. 소위 합격통지를 받고 나온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목사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 목사가 되고 싶어 했던가. 내가 어떻게 목사가 되었던가...'
나는 그 자리에서 간다는 말도 않고 곧장 부산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교회를 개척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사실 안정된 교단에서는 부교역자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웬만한 목사 후보생들이 개척을 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거나 아니면 나이가 많은 분들이 더러 개척을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 곳은 교회 개척에 대하여 대단히 사시적이고 지식이나 관심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제 꿈은 「민중교회 개척」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러던 당시 소위 6.29선언이 있었다. '승리다. 기만이다' 말들이 많았지만 나는 극단적 인권운동의 입지가 좁아지고 시대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 후의 운동은 노동운동 아닌 환경운동같은 생존권 운동이나 통일운동으로 변모되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도 이제 내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자기 진단이 있었다.
실제 나는 그 후 여러 자리에서 그런 논지를 폈었다. 이것은 내게 중요한 변화였다. 어쨌든 흩어졌던 학생들이 다시 모이고, 교회는 또 다시 조금씩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 해 12월 겨울과 함께 아버님이 편찮으셨다. 개척 초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나는 진료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언젠가 교회로 보내어졌던 좋은 인상의 병원 개원 인사장을 따라 한 병원으로 아버님을 모시고 갔었다. 그런데 보호자가 목사라고 해서 원장실에서 여러 애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원장이라는 사람이 별 희한한 이야기를 하는 데 - 그는 장신 대학을 졸업하고 경북 의대를 졸업한 나름대로 길이 있는 이였다 - 자유니 침례니 귀신이니 별 황당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관심이 없는 자리였다. 그리곤 몇 달이 지나 아버님은 세상을 떠났다. 어느 아버지가 안 그렇겠는가마는 내 생애에 많은 것을 남겨두고 가신 아버지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병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곤 장례식후 두어달 사이 두 아이가 차례로 작은 병 치레를 하는데 그것도 당시의 내게는 무척 거슬렸다.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아프고 또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으로 가득찼었다. 그런데 그 무렵 고신교단에서 자랐지만 형편상 침신대학을 졸업하고 또 다시 고신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는 분이 우리 교회 전도사로 오게 되었다. 그 분은 나에게 많은 애기를 했었다. 그것은 대체로 지금까지는 내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부분이었고, 그 중에 '김기동'이란 사람의 이름도 있었다. 바로 그 때 교회연합신문에 김기동 목사가 주관하는 제 3차 목회자 성장대회 공고가 나와 있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등록하고 숙소를 정하니 다른 이들은 서로 면식이 많은 모양이었다. 흔히 목회자 연수회같은 곳을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동료, 선후배, 낯익은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들은 모여서 종래 귀신에 관한 애기만 하는 것이었다. - 지금 생각하면 그러지도 않았을 것이라 짐작되나 그 때는 진짜 그렇게 보였다 - 그리고 귀신을 쫓는다고 벌렁 벌렁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애당초 교회성장의 힌트라도 얻을까 해서 참석은 하였지만, 경멸하는 마음으로 가득찼었다. 힘차게 치는 박수며 꿇어 앉는 것등도 내게는 다 거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기에 마음을 다스리며 그 궁금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기다렸다.
평소의 습관대로 양반 다리를 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문자 그대로 뇌성벽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세를 바꾸어 꿇어 앉았고 내 영혼은 깊이 깊이 어떤 세계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순간에 나는 다음 몇 가지를 생각했었다.
1. 저런 깊은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2. 도대체 저런 종류의 믿음이 언제 있었던가. 3. 지 금 설교를 하고 있는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한 마디로 그가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느껴지는 그의 신앙인격은 나를 미치도록 혼란시켰다. 나는 불쌍했고, 억울했고, 쥐어 뜯으며 어쩔줄을 몰라 했다. 정말 매시간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집회에 온전히 사로잡혔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같이 잡담을 나눌 사람도 없었기에, 혼자서 듣고 느끼며 고민하고 혼돈해 하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고 보고 들었다. 집회 마지막날 꼬박 밤을 새워 철야를 하고 다음날도 나는 깊은 생각속에 잠겼었다. 주최측에서 제공한 터미날까지의 버스속에서 시작한 상념은 부산에 도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버스를 타면 곯아 떨어질 것같이 지친 몸은 한 순간도 안 졸고 곁에 앉은 이에게 전도하는 시간외에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리고는 구입한 책을 읽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김기동 목사와 그의 교훈에 관하여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지나간 신학 수업은 나에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마저도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의 결론이 나왔었다.
1. 이 분은 성경에 대한 그림이 있구나. 이것이 나중 알고보니 "하나님의 의도"였다.
2. 그리고 그 분을 말 할 수 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부산에 도착한 나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여동생의 아이가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터라 곧장 병원으로 갔다. 가슴은 뜨겁고 할 말은 너무도 많았다. 병원 복도에서 동생을 붙들고 깨닫기 시작한 복음을 전했다. 후에 교사로 있는 동생 또한 동료 교사들을 붙들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바뀌어 진 것은 물론이다.
나와 베뢰아의 첫 만남은 계속 되어졌다.
집으로 들어와 문을 여는 순간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모친이 나를 맞았다. 나는 순간에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원수가 그리 하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옷도 벗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와 아내 그리고 어머니 세 사람이 예배를 봤다. 그리고는 난생 처음으로 귀신을 쫓았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했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모친이 붕 뜨더니 뒤로 나자빠지는 것이 아니가. 나는 '이런! 뇌진탕이라도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겁도 났으나 내심 태연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면 병원 갈 생각으로 돈을 갖고 있었는데 그 돈은 주일 교우들 점심 식사비로 쓰여졌다. 축사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맞은 주일은 무엇보다도 목이 꽉 잠긴 목사의 설교가 달랐다. 뭔가를 뜨거운 가슴으로 전하였다. 교회가 굉장히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너무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나는 연이어 있는 김기동 목사님의 대전 연합 집회에 올라갔다.
대전은 내가 전혀 모르는 곳이고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했던 나는 고신측 한밭 교회에서 잘량하고 집회를 갔었다. 첫 날 첫 시간 집회는 갈증으로 꽉 찬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고, 돈도 없고 잘 곳도 마땅찮은 나로서는 그냥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때에 주최측에서 '지방에서 오신 목사님들은...' 하며 숙식을 제공하겠다는 안내가 들려왔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과 함께 그러면 있어볼까 하고는 전혀 면식이 없는 목사님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사실 이 두번째 기간중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저들도 나같은 사람이 끼어있는 것이 신기한 듯 많은 것을 물었다. 나는 아주 신기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좀 미안한 애기지만 이렇다 할 신학수업을 받은 것 같지 않은 저들이 - 군소 신학교 출신이라는 뜻이다 - 내가 궁금해 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그냥 간단 간단하게 알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뭔가를 꿰뚫고 있구나'라고 느꼈다.
집회에서 돌아온 두 번째 주일도 굉장했었다. 또 다시 어딘가를 다녀온 목사는 정신없이 강단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한 열흘 금식기도 하고 오겠다고 다시 월요일 아침 떠났다. ?이 금식을 작정한 것은 은혜를 받고자 함도 기도응답을 받고자 함도 아니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정말 김기동의 이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더 이상 미루어 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열흘동안 꼬박 얻어 온 테이프와 사 온 책을 읽고 듣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테이프 하나 하나를 듣고 옮겨 가는 나는 미쳐버릴 듯 했었다. 너무 엄청났었다. 기도원에서의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세 통의 편지를 썼다.
첫째는 나에게 최초로 귀신인가 뭔가를 살짝 언질 해 준 박창국 원장에 대한 감사의 편지였고, 둘째는 김기동 목사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였다. 그리고 세번째가 고려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며 '러시아 선교'를 관심갖고 있던 동생에게 보낸 것이었다.
노동 인권운동의 전진 기지로 작정했던 교회는 분위기가 바뀌어지기 시작했었다. 대학생들은 떨어지고 몇되지 않은 교우들은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기도의 불길이 일어났다.
나 역시 성령에 대하여 깊고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성령체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흥미로운 것은 나는 그 때까지 성령체험이 없었고, 따라서 방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과 성령체험에 관한 설교를 하자 곧 밑에서는 한 사람, 두 사람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 났었다. 그러니 이는 누구의 흉내가 아닌 진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자생적 방언 현상이었다. 왜냐면 우리 중에는 방언을 들어 온 사람이 없었으니까.
교회가 뜨거워지니 이웃에서 시끄럽다는 핍박이 몰려왔다. 집을 비워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우리가 세들어 있는 주인집이 3층인데 4층 다락에서 세살난 주인집 아이가 방충망을 뚫고 세면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나와 아내는 '이젠 끝났다!' 불교도인 이들이 그냥 둘 것 같지를 않았다. 생각해 보라. 4층에서 떨어진 아이가 어떻게 살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참담한 마음으로 백병원 응급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낯 익은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물으니 아무 이상이 없어서 '작은 병원으로 요양차 갔다'는 것이었다. 진짜 아이는 상처 하나 없었다. 천사가 받들어 마치 구름을 타듯이 그냥 내려앉은 것이었다. 그 때부턴 주인의 강팍함이 사라졌다. 이웃도 많이 수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보다 며칠전 이웃 3층에서 떨어진 제과점 아이는 의식불명 상태에 아직도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끝내 정상으로 돌아오질 못했다.
7월이 지나 8월이 될 무렵 나의 영적 갈증은 극에 달했다. 성령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부산에서는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나는 대학생수련회에 참석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 보리라 싶었다. 스스로 과거의 대학생 지도를 핑계삼아 학생들 사이 어느 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서 은혜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등록을 할 때의 그 상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접수처에서 용지를 받고 보니 거기에는 마치 나를 놀리는 듯 '성령체험의 유무난'이 있었다. 그 때, 내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나는 정직해야 한다. 어린 아이같이 순진하게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나는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첫 날 저녁 식사를 하고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눈에 뜨이는 안내문이 있었다. 성경공부 조 편성을 위해 자신이 어떤 등급이냐를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놓았는데 그 분류대로라면 나는 "새신자"반에 해당되는 셈이었다. 바로 그 순간 마치 누가 나를 보는듯 해 얼마나 자괴스러웠던지 모른다. 다음 날 늦게서야 책임자가 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곤 "자기 반에 있도록 하라"고 했다. 첫째, 둘째 날이 지나면서 나는 거의 탈진상태에 놓여 있었다. 심지어 죽고만 싶었다. 그러면서 배수진을 쳤다. '주님 성령 받지 못하면 소식도 끊은 채 교회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 받지 못한 목사가 무슨 목회를 합니까'고. 그러던 둘째 날 저녁 성경, 찬송가, 수첩을 몽땅 잃어 버렸다. 그러니 마음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려졌었다.
셋째 날 새벽 실컷 울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섰다. '잃어버린 성경, 찬송부터 찾자' 찾기만 하면 다음 일들도 풀리어 지리라는 - 그것도 무슨 영감이라 할 수 있을른지 - 잡동사니같은 생각이 떠 올랐다. 그러나 그 넓은 예배당을 민망할 정도로 샅샅이 눈을 굴리며 둘러보아도 찾고자 하는 것은 없었다. 예배실을 빠져나와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마치 무엇에 빨리어 가듯 한 곳으로 눈과 걸음이 가는 것이었다. 제법 먼 거리였다. 거기에는 바로 내가 찾던 성경, 찬송가, 수첩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얼마나 반가왔던지 또 위로가 되었던지 잃었던 힘을 되찾은 것 같았다. 오전 예배가 시작되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문득, 오늘은 성령에 관한 말씀을 하시리라 싶었다. 그것은 적중했다. 본문은 행 2:38이었다. 설교자의 서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고 했다. 오직 회개하라고 했다. 힘써 부르짖으라고 했다. 그리고 방언을 하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때의 그 장면이 스치며 '걸으라!'는 말로 들려왔다.
나는 수영도 못한 채 물위를 걸었다. 내 입에는 방언이 나왔던 것이다.
사실 방언체험은 성령의 은사중 가장 기본적인 은사이기도 해서 방언을 갖고 뭘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야 방언을 시작했다. 내가 목사이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방언을 하는 순간 너무도 많은 것을 알았다. 먼저는 내가 아는 그 방탕하고 부담스럽던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지가 깨달아졌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가면 성령받기를 사모하는 누구에게나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후 정말 나는 내 생애에 일찌기 없었던 영적 들뜸과 감격속에 지냈다.
여름이 지나고 예배당을 옮겨야 할 입장에 놓였다. 현실적 어려움은 여전히 가로놓여 있었다. 그 때 사택이 있는 큰 길 입구에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들의 고민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그 신축 건물을 다녀오며 '교회 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셨다. 나는 큰 소리로 짜증을 냈다. 그건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조건일 것으로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그 공사장 현장으로 가 보았다. 너무도 괜찮았다.
90평 가량 되는 그 곳은 무엇보다도 마음 껏 기도할 수 있는 천연의 기도소였고, 넓기 또한 현재보다 세 배는 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도록 좋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상당히 낮추어 계약을 했고, 난 굶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고 한 살, 두 달의 두 아이들 우유라도 먹일 수 있으면 감사하리라 싶었다. 그 첫 달, 달세를 주고 나니 10만원의 잔금이 있었다. 얼마나 겸손히 감사했던지. 그리고 4개월 후에는 매월 100만원의 잔금이 남았다. 그리고 또 4개월 후에는 승합차를 한 대 마련했다. 교회는 신이 났다. 진리를 깨닫고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된 교우들 심지어는 아이들까지도 무섭게 달려들어 전도하고 역사했다. 생전 교회도 와 보지 못한 이를 붙들고 직격탄같은 복음을 전하고는 귀신을 쫓고 성령체험을 받게 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 사이 김기동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했다. 전 교회는 한달간의 기간동안 죽으라 뛰었다. 부산 전역을 대상으로 몇 차례 전단을 뿌리고 포스타를 붙이며 시내 중요한 곳곳에 현수막을 걸었다. 김목사님께서 집회를 마치고 숙소에서 하시는 첫 말씀이 "부족한 사람을 데리고 나팔을 많이 불었군" 하셨다. 난 속으로 (도사네!) 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집회는 발 딛을 틈 없이 많이 모였고, 그 결과 여러 새 교인들도 얻게 되었다.
이런 기회에 고신교단으로부터 나올 때의 정황을 한 번 밝혀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교회가 열심히 전도하되, 복음을 분명히 하니 여러곳에서 마찰이 있었다. 그리하여 해 시찰을 비롯하여 여러곳에서 샘터교회에 대한 질의가 쏟아졌다. 자연히 샘터교회가 화제에 오르고 직접적인 도화선은 김기동 목사를 청하여 집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신교단은 지도층 목사님들도 잘 지키지 않지만 예장합동측과의 강단교류도 총회결의로 불허하고 있다. 전권위원회가 구성이 되었고, 두 차례나 소환이 되어 질문도 받고 본인의 진술도 있었다. 전권위원들중에는 개인적으로 면식이 있는 분도 없잖아 솔직하게 애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결론은 노회앞에서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사과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과연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권위 보고가 되고 어물쩡 넘어갈려는 때에, 아니나 다를까 노회내 원로라 할 수 있는 목사님들이 연이어 발언을 했다. 재단 이사장과 총회장을 역임한 한 목사님의 발언이 찬물을 끼얹었다. 과거 인권운동때의 전력마저 들먹이며 이 자리에서 김기동씨는 이단이라고 시인하고 인권운동에 대한 견해와 김기동씨는 이단이라는 생각을 함께 「월간 고신」(고신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 기고하라는 것이었다. 발언을 얻은 나는 간단히 그러나 단호히 증거했었다. "여기에는 나를 잘 아는 동기와 가까운 선후배도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을 여러분들은 압니다. 그리고 어떻게 변화된 것도 압니다. 김기동 목사님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분이며, 그 분을 부인하는 것은 곧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분을 부인하느니 여러분들을 떠나겠습니다." 그리고는 노회장 중앙 복도를 따라서 걸어나왔다.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모든 것을 배우고 자라온 교단과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제법 견실하게 자리잡아가고 베뢰아를 알고 만 2년이 되던 때, 전 교회가 죽기를 각오하고 176평의 땅을 계약했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 붙어있는 공터였는데 매각 소식이 전해지자 동네 유지 몇 분이 붙었었다. 그러나 그 땅은 현금 200만원도 없는 교회의 소유가 되기로 주님이 작정하신 것이었다. 4억 5천만원의 그 자금은 오직 주님 자신이 마련하셨었다. 한 변화된 목사의 모습을 보고 모여든 새 교인들이었으나 재직 평균 한 가정 700만원을 하여 2개월내에 1억 4천만원을 헌금하였으니 그것은 진짜 우리들 자신도 놀란 결과였다. 물론 욕을 얻어먹는 것으로 말하라면 끝이 없다. 이단시비로 교회가 겪어야 했던 상처일랑 아마도 베뢰아사람 모두의 아픔일 것이다. 더욱 가까운 동료들로부터 마치 '아까운 목사 한 사람 버렸다'는 듯이 매도당하고 교제하는 친구 한 사람 없이 다 떨어져 나갈 때는 처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리의 위로와 힘은 항상 핍박위에 겸하여 왔던 것을 기억한다. 항상 힘들기만 했던 것도 아니고 항상 좋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힘든만큼 위로도 많았고, 역사했던만큼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다 정리되었다.
그 동안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하면서도 받은 바 은혜는 말할 수 없이 크다. 마음에 남은 소원이 있다면 이제는 오직 주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으로만 살고싶을 뿐이다.
있는 대로 진술을 하려 했으나 어쩌면 실제보다 미화된 것 같아 죄송스럽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최초의 생각같으면 2.3년내 1,000명 교회는 되리라 싶었다. 그러나 게으르고 악하여 복음을 아는 만큼 역사하지 못했다. 실력이 딸리고 인격이 부덕하여 될 것 같은 문턱에서 많이 주저 앉았다. 사실 이 곳에서 겪는 '이단시비'는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복음전도의 치명적 장애인 것이 사실이다. 실컷 전도해 놓으면 이리저리 연결되어 이단이라고 고민하다 쳐지는 것을 보면 의욕을 잃을 만도 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솔직한 고백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이나 시련이 아니라 목사인 자신이 부족했다.
말씀의 지혜가 부족했고 지식도 부족했고 능력도 부족했다.
목회의 지혜도 부족했고 지식도 부족했고 능력도 부족했다.
많은 무리를 끌만큼 성숙하지 못한 목사의 인격과 믿음 없음은 참으로 탄식스러운 한계였다.
지난 수년 김기동 목사란 한 개인과 그 분의 가르침은 실로 나를 휩쓸고 강타했다.
지금도 계속해서 그 이론과 체계를 살피며 연구하는 것이 내 중요한 일과이다. 이제 끝으로 소망이 있다면 세월이 좀 걸릴지라도 반드시 권세있는 말씀으로 목회를 성공하고 싶은 것이다.
들여 한계에 부딪친 한국과 세계의 복음전도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는 거대한 성령운동에 일익이나마 감당하고 싶은 것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