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 김영이는 고려말 전객시령 영산군으로 국망의 현실을 원망하며 고향인 영산(충북 영동의 구명)으로 맏사위 순천박씨 이부시랑 원용, 두쨰사위 구례장씨 한성부윤 비, 세째사위 밀양박씨 대제학 시용 아들 영산부원군 길원을 대동 낙향하여 영산 토금리에 자리잡고 남전 기산아래 대암에서 4옹서가 갈겅야복으로 매일 북향재배하고, 멸망의 비운을 애통하며 마음을 다래고 후학양성으로 소요자락 한 곳에 4성 후손들이 설단을 하고 빙옥정을 건립하여 매년 4성 후손이 10월 1일(음력) 향사하다 순천박씨와 밀양박씨는 묘소를 찾아 이단하고 영산김씨와 구례장씨가 지금도 양문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향사를하고 혈연의 만세돈목을 기약한다.
영산김씨의 후손은 충북 영동군 용산면 구촌리의 집성촌을 이루고 영광 함평 당진 서산 상주 대구 대전 제주도등 전국에 산재하고 있으나 종세가 약한편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선대의 김수성(신미대사)은 조선 세종대에서 성종대까지 6왕을 모셨고, 훈민정음 창제의 세종 보필 주역으로 불서 및 불경 언해와 훈민정음 보급 문서 간행 등 많은 공적으로 척불숭유정책의 조선왕조 초의 불교문화를 재활재기하고 억불정책이 가장 심했던 세종을 숭불왕으로 변화시키고, 세조의 숭불을 도와 불교의 숭상 발전에 공적이 지대하다. 신미대사의 동생 기수온은 월인천강지곡과 의방유취 치평요람 명황계감 석보상절 월인석보 금강경언해 능엄경언해 등 많은 불경언해와 불서간행을 비롯 조선초 4대문장가로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00회가 넘게 오르고 한성부윤 공조판서 호조판서 보국숭록대부 살호군 등의 관직으로 정1품 정치재상의 대가였으며 영산부원군으로 성종으로부터 문평공 시호를 받고.
부조묘를 하사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