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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문제cdj382763 2007.01.03 16:31 |
답변 10 조회 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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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제가 하거든요?
근데 십일조도 해야되나요? 설마 십일조 안하면 천국못가는건 아닌지?
그리고 그 외에 헌금종류가 조금 많은것 같아서요.
다해야 되나요? 교회분한테 대놓고 직접물어보기가 좀 그렇네요.
sinyak7님의 지식을 나누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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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일조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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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하나님께서 십일조와 헌물을 말씀하신적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다보니까 어려우면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워낙 다양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선 십일조와 헌물을하면 복을 넘치게 주신다고 하셨거든요..십일조와 헌물을 하면 더 잘살게 되겠죠??하나님께서 돌봐주시는 대가,계약,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뜻대로 쓰이게 되어있을겁니다.
그러니 수입의 십분의일과 헌물(선물로 해석이 되네요...물건...)...이게 다입니다.
역시 기독교는 은혜와 믿음입니다.삼위일체를 이뤄야 합니다.주기도문을 안 외우게 될때까지..
re: 확실하게 알려드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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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말하노니 십일조 뿐만아니라 어떠한 헌금도 내야한다고 말하거나 분위기라도 잡으면 그 인간은 사기꾼입니다.
혹시 교회가 어렵다면 본인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몇푼 적선한다 생각하시고 내면 됩니다.
정히 내고 싶으면 진정 어려운 불우이웃돕기에 쓰십시오. 그것이 훨씬 종교적인 모습입니다.
re: 십일조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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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율법과 율례와 규례는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데
구약의 물질적인 의미와 목적은 자기가 얻은 물질의 십분의 일을
내면(의미)모아 저축해 두었다가 가난하고 어려운 믿는이들을
구제(목적)하고 또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하는데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의 의미인 십분의 일을 내는
의미는 없고 자원하는 마음과 그리스도의 생명에 성장에 따른
믿음에 따라 십분의 일보다 더 낼수도 있고 털낼수도 있습니다.
다만 십일조의 의미인 십분의 일을 내야하는 개념은
없어졌지만 십일조의 목적(구제)은 계속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일조의 목적인 구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물질을 분배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그분이 사람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내는 것을 언급했지만(마23:23) 초대교회에
십일조의 개념이 아닌 헌금(연보)을 언급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 나온 것처럼 헌금에 목적이 믿는이들중에
어려운 가정을 관심하여 가난한 자들을 찾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물질을 분배해야 함에도 한달 들어온 헌금 중에 적어도
가난한자들에게 70%~80%정도는(본인생각) 쓰지 않고
5%나 10%정도 썼다고 생색을 냅니다..
교회가 십일조(헌금)의 목적대로 제대로 한다면 더 없이
복음전파에 효과가 클것이고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인정받겠지만 그렇치 못한 오늘날 상황속에서
과연 가난한 교회 형제나 자매의 가정에게 십일조나
헌금을 봉투에 넣어 형편에 따라 주었다면
이것을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 ?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헌금의 목적은 구제에 있습니다.
이 구제하는 헌금이 교회안에 내든 믿는자중에 가난한 자들에게
주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주님은 마태19장21절에 나온 부자청년에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라} 했지
네 소유를 팔아 오늘날처럼 교회에 가서 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교회가 진실로 믿는이들중에 가난한자들을
찾아 파악해서 분배하고 이웃(불신자)중에 가난한자들을 찾아
모은 헌금을 60~70%의 쓰는교회가 있다면 예외이지만)
또한 십일조을 내려고 한 헌금을 불신자의 가난한 자들에게
그들의 필요을채우기 위해 썼다면 이것은 십일조가 아닙니까?
교회안에서 헌금을 내었든 개인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썼든
이 모든것이 주님에게 한 것이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행위입니다.
십일조의 개념은 없어졌지만 그 목적은 계속됩니다.
십분일만큼 꼭 내야하는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고 꼭 지키는
의무가 아닌 자원의 문제요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장에 따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서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도와야 한다는 부담을 주안에 받았다면 형편에 따라
그들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인 믿는이들에게 썼든지 않믿는 불쌍한 불신자들
에게 썼든지 불문하고 십일조라는 것입니다.이것이 십분의일
이든 이십분의 일이든 삼십분의 일이든 오분의일이든 숫자와
관계없고 다만 구제를 위해 쓴 돈에 지출 은 주님께 드린 헌금이요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100만원의 월급생활자라 한다면 형편에 따라
6만원 정도를 평소에 어렵게 사는 성도에게 어떤것을 사서
지출한 것도 헌금이요 십일조 입니다.
또 믿지 않는 가난한 불신자에게 3만원을 지출하여 어떤 필요를
위해 썼다면 이것도 십일조요 헌금입니다.
교회인 믿는이들을 만나 교제하기 위해 음식점에서 자기가
음식값으로 지출한것도 헌금이요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것에서 벗아나서 꼭 교회안에서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만이 십일조나 헌금이 아니라는것입니다.
가녕 100만원의 수입을 벌어서 10만원을 교회안에 헌금하려고
봉투에 넣은 돈을 지나가다가 노숙자들이 빵 한 조각으로
세끼를 이어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주님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성령안에서 말씀한다면 그 십만원을
그들을 위해 점심식사를 위해 지출 했다면 이것이 바로 헌금이요
십일조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요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숙케 하며 성령의 충만한 축복입니다.
이 구제가 교회안에서 내든 개인적으로 성령의 인도 아래
가난한 믿는자나 믿지않은 자들에게 지출한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헌금이요 십일조 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을 가난한 자들에게
베푼것에 대한 보상은 물질을 배나 받는것 보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믿는이들을 심판하는 그날에 천국을 위한 보상일
것입니다.
이제 십일조의 영적인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하나님)의집 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하나님의 성전(장막)이신 예수그리스도 자신(요1:14,2:21)이 이제
생명을 주는 성령(고전14:45)이 되어 창고인 믿는이들의 영안에
계시(거처)므로 우리는 주님을 누리므로 먼저 우리자신의 창고에
영이신 예수그리스로 충만히 채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하나님)의 집은 물질적인 집회소(건물)이 아니라
예수 믿는사람들인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건물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3:9
~너희(믿는이들 즉,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딤전3:15
만일 내(바울)가 지체하면 너(디모데)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하려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양식은 우리의 생명공급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요한6:35,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을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예수께서 가사사대
내(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라는 뜻은 예수 믿는이들이
하나님의 집인 믿는이들(교회)에게 양식이신 그리스도(말씀=그영)를
공급하라는 뜻입니다.
일주일동안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여러 방면의 누린 체험들
(계시와 이상과 간증들)을 집회에 와서 믿는이들(교회)에게
십분의 일만큼 말해(신언,간증) 내는 공급일 것입니다.
지방교회는 목사제도가 없어서 이런 일이 가능하지만 목사혼자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집회방식으로 하는 오늘날 이런 영적인
십일조의 실행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고린도 전서14장 믿는이들의 집회방식을 말하고 있는데
14:1 ~특별히 예언(신언,설교)하려고 하라
14:5 나는 (바울) 너희(믿는이들 즉, 고린도 교회)가 ~
특별히 예언(신언,설교)하기를 원하노라~
14:26~31 그런즉 ~너희가 모일때에~너희(믿는이들)는 다 모
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신언,설교)할수 있
느니라.
여기서 예언은 무당 굿타는 식의 점치는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내는 신언입니다.
바울시대의 교회는 모든 믿는이들이 신언(설교)을 했었습니다.
위에서 하늘문 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입니다.
요한3:14 ,31
하늘에서 내려온자 ~
하늘로써 오시는 이는 ~
요한10:9
내(그리스도)가 문이니
그리스도는 하늘을 여는 문입니다. 하늘의 문이신 그리스도가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믿는이들에게 공급하는 자(신언,설교)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겠다는 그 복은 바로 성령입니다.
사행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눅24:49
볼찌어다~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엡1:4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복주시되~
엡1:13
~그(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
엡1:4절에 나온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 믿는이들에게 복으로 준것은 바로 13절에 언급한
그리스도를 믿으면 받는 그 성령(삼일하나님)인것입니다.
또한 이 아브라함의 복도 바로 삼일하나님(삼위일체)이신
성령(그 영-the Stirit) 입니다.
따라서 우리그리스도인들이 집회 때나
믿는이들에게나 믿지않는 자에게나 우리가 누린 참된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십분의 일만큼 그들을 양식으로써 그리스도를 공급한다면
하늘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
성령으로 충만케 할것입니다.
우리의 체험으로 볼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떤 이들에게 전할때 우리안에서 기쁘고 즐겁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입니다. 무엇이 주안에서 복입니까?
복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말3:10절에 말씀을 물질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면 모든 십일조
내는 믿는이들은 다 부자되고 돈을 벌어야지요?
그러나 현실은 않그렇습니다.
구제를 위한 헌금(십일조)의 내는목적이 물질을 배로 받기 위함
입니까? 만약 말라기에 나온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를 물질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면 심각합니다.
물질의 복이 예수님이 말한 복입니까?
눅12장 14절은(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도 말라기 3장10절에 나온 복은 물질적인 복이
아님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믿는이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 아니면 알고 있지만
그분을 이용하여 재물을 모으려는 수단인지 모르겠지만 성도들의
모르는 것을 이용하여 십일조를 물질의 축복받기 위한 수단으로
속아 주는 믿는 사람들도 울통 터지는 현실입니다.
골3장5절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엡5장5절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예레미야6:13~15,이사야57:17)
말라기에 나온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복이
물질을 배나 얻는 수단으로 보고 십일조를 내는 것이라면
이 동기는 곧 탐심을 위한 우상숭배를 좇아가는 것이 될것입니다.
또한 말라기에 나온 복이 물질적인 복으로 여기고 부자되기
위해 십일조를 내는 자라면 이사람안에 있는 씨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시떨기에 막혀 자라지 못해 결국
성령의 충만함인 생명의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왜냐하면 마태복음13장은22절은 생명의씨이신
말씀이 되시는 그분자신이 우리안에 자라고 결실해야 할
생명의 씨로써 들어와 계시는데 세상의 염려와"재리의 유혹"
으로 결실치 못해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와 같은 상황입니다.
구제를 위한 십일조(헌금)를 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라기에 나온 위의 구절의 말씀이 십일조를 내는 목적이
부자되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바라는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하나님 자신을 더 얻고 충만히 예수믿는 사람들(교회)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충만히 누리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말씀한 복은 우리가 누리는 성령이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방면을 축복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것이 복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5장2절~12절은 물질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 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나(그리스도)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복이 있나니
위에 가난한 심령,애통,온유,의,긍휼,청결한 마음,화평,의를
위한핍박은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인격
입니다.그러면 이런 신성한 생명의 인격은 어떻게 해야 참예할수
있습니까?
성령안에서 가능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인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이것은 금방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말씀을 통해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마태복음13장16절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말씀이 믿어지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을 다루는 방식은 누가복음6장
38장처럼 교회안에서만 제한 하지말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
게 줄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먼저 믿는이들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먼저 어떤것을 주어야
합니다.이렇다고 하여 위 말씀을 십일조에 개입시키지 마십시요.
내 주위에는 믿는자든 불신자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관심없고 오직 교회안에 십일조만 내는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세상사람들에게 욕먹는 행위입니다.내 주위에는
굶주려 있는사람들이 많은데 교회안에서만 주는 십일조는
균형이적지 못합니다.
누가복음6장 38장에서
주님이 "주라"한 부분의 대상이 교회안에 있는 특정한 사람만이
아닌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대상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구제의 헌금을 내면 우리 믿는이들안에서 그리스도의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까? 어렵고 가난한 믿는 가정에 물질(헌금)로 도와주면
우리안에서 기쁘지 않습니까? 이웃에 불신자에게 얼마않되
지만 돈을 쓰면 기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이것이 하늘문이신 그리스도을 통한
성령의 나타남이요 성령의 충만입니다. 즉.사람안에 하나님의
생명(인격)의 표현입니다.
마태24:44~47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그리스도)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그리스도)올 때에 그 종(믿는이들)이 이렇게 하는것을 보면
그 종(믿는이들)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그리스도)가 그 모든 소유를
저(믿는이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에게 맡기리라
이렇게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믿는이들에게 때를 따라 분배하는
공급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지 ....
못하는 자는 어떤 처벌이 있을것이다.(눅24:48~51)
오늘날 "웨이터"라는 직업이 있는데 그 역활은 음식(양식)을
사람들에게 먹이기 위해 분배(나눠)하고 나누어 줍니다.
제 체험에서 강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음식이신 그리스도 자신인
말씀의 양식을 믿는이들에게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할때(분배할때)
내안에 주님의 생명(인격)의 성장(자라남)을 막는 황충(군대,사탄)의
역사는 사라지고 주님자신인 생명의 성령이 충만함을 체험하였습니다.
누구나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때(신언함으로 분배할때)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방해하는 황충이 사라짐을 체험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믿는이들)가 자랄수 있는 것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양식을 분배하는 사역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말한 복을 보세요
이 십일조의 개념과 십일조에 실행한 결과를 물질적인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 믿는이들에게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분배(나눠)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함의 중요성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주님을 위해 쓴 것에 대한 보상은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인격)의 성숙으로써 주님이 장차 다시 오실때
천국에 대한 보상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에 나온 복이 물질적으로 보지 마시길 원합니다.
이 물질을 배나 받는 것이 장차 주님이 다시오실때 (심판때)
천국 보상의 기준입니까?
천국보상의 기준은 하나님의 생명의 성숙(자라남)입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함일 것입니다.
사람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그분자신의 인격이 충만히
나타나는 생활입니다.
목사님 만이 아닌 모든 믿는이들이 주님이 오실때 까지
일평생 양식이신 그리스도 자신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분배) 십일조의 생활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받을 것이고 그가 가진 물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형편에 따라
얼마를 은밀히 구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살아내는 생활을
할것이고 이러한 은밀한 구제로 더욱 성령인 하나님의 생명의
인격을 충만히 표현하는 생명의 성장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믿는이들인 교회(집)에 영적인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있게 하려면 모든 믿는이들이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분배하는 대언(신언)을 통해
하늘의 문이신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는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그는 그릿시냇가에 물이
이 마를때 까지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먹었
습니다. 까마귀는 무엇을 먹고 사는지 모르지만 각종 곤충과
더러운 것을 잡아 먹고 사는 그 더러운 까마귀 입에가져온
떡과 고기를 먹었으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는 하나님을
위해 혼생명(목숨)을 바쳐 말씀을 말해 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왕들의 위험과 거짓선지자들의 위험과 진흙이 있는
구덩이에 갇히고 추위 배고픔이었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70%을 쓴 그였지만 그는 간질,안질..(추정)
병명은 정확이 기록된 바는 없지만 병이 있었고 교회 밖으로는
유대교의 픽박과 반대로 인해 몸이 가혹할 정도로 매 맞고
돌로 맞고 복음을 위해 추위와 강도의 위험 배고픔을 겪었습
니다. 이것 생활은 오늘날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 였습니다.
디모데는 위장병이 있었지요. 예수 잘 믿는다고 병않걸리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기도 많이 했고 말씀을 많이
추구하여 많이 안다고 하여 그가 어떤 어려운 고난이 없나요?
천만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예수님도 바울도 선지자들도
세상이 말하고 생각하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저주함이
가까울 정도로 고난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은 물질적인
풍성은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로써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
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실제이신 성령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림으로써 그분을 믿는사람들안에 그분자신인 생명을 나타
내고 표현하는 생활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잘 지킬때의 보상과 아브라함,야곱,이삭,다윗,
솔로몬의 물질적인 것들이 신약에 와서 하나님을 잘 믿었을때
물질것인 축복의 결과 이라도 해석하고 여긴다면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말구유 마구간에
태어날정도로 가난해야 했고 왜 좋은 말이나 병거가 아닌
나귀새끼를 탔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왜 비둘기로 제사를 드릴정도로 가난해야했습니까? 그리고 하나
님의 뜻대로 행하는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있고 떠 도는 새도
집이 있는데 사람의 아들(인자)는 머리둘곳이 없이 가난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잘 수행했던 그분자신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축복은
고사하고 고난과 저주를 받은 후에 하나님은 예수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이것을 보더라고 구약의(아브라함,이삭,야곱,다윗,..) 물질적인 풍성이
신약에 와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주님을 누릴때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그리스도의 생명,)성령의 생명을 풍성하게 나타내는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구약의 물질적인 것들은 신약에 생명주는 성령이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누림을 말합니다.
요한복음10장10절,엡1장18절,2장7절,3장8절,16절,골1장26~27절
십일조 못하면 천국못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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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천국행 열쇠입니다,...
그러니 십일조 떼먹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세요..
금액은 정확히 십분의 일이 아닌...정말 정성껏 해야 합니다..
왜 냐구요?
야훼가 시퍼렇게 두 눈뜨고 지켜보고 있으니깐요..
야훼가 님이 얼마만큼 하는지 다 쳐다보고 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있는힘껏 십일조를 하는지..안하는지..
야훼가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남김없이 꼬박꼬박 십일조를 하세요...
물론 안하면.. 영원한 불지옥입니다...
예수믿으면 천국이라구요?ㅋㅋ
예수믿는지 안믿는지 어케 알죠?ㅎㅎ
예수믿는지 안믿는지 판단기준은 바로 십일조입니다..
야훼란 넘은 그거 보고 판단하거든요...
이상 개독먹사넘들의 주장입니다..
re: 십일조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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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헌금
하나님께서는 드려지는 누가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금액의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므로 금액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그것이 얼마가 되었든, 정성된 마음으로 기쁘게 예물을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예배와, 예물을 드리는 것, 각종 봉사활동, 전도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이것들 모두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성숙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나 헌금등에 대해 진정으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신앙생황을 하시면서 믿음이 성숙되어서 예배에도 더욱 열심이 참석하게 되고, 신앙이 깊어지셔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면 그 때에 십일조와 헌금등을 하십시오. - 오히려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요된(?) 예물을 드림으로서 시험에 빠지고 신앙생활에 회의를 갖게되거나 신앙생황을 아예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 이런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교회나 목회자들이 신앙과는 그렇게 상관없이 십일조와 헌금 등을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성경말씀을 잘못 해석하면서 그 말씀을 들어 헌금을 강요하거나 그렇게 유도하는 것은 정말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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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헌금의 이해
신약시대, 정확하게 말쓰드리면 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시대 이후에는 십일조는 더 이상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신앙에 따라 자신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드려지는 헌금의 금액의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므로 금액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실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변함없이 구약시대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부 교회에서 목회자들에 의해 공공연히 강요(?)되고 있는 십일조 등의 헌금은 분명히 비성경적입니다.
특히, 목회자들이 구약성경 '말라기'서의 예를 들어가면서 십일조를 요구하는데, 이는 성경해석상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십일조는 제사장 직분을 지닌 레위지파들에 대한 다른 지파들의 외면으로 인해 레위지파들이 생활조차 어렵게되자 그것을 깨우치기 위한 말씀이었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또는 교회를 위하여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목적과 또한 하나님께서 제사장 직분으로 세우신 레위지파의 생활을 위해서(이스라엘의 12지파 중 레위지파에게는 아무런 분깃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머지 11지파에게 레위지파를 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일방적인 요구사항이 아니라, 믿음과 감사와 의무에 의해 지켜진 것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이후 헌금의 정의는 분명해 졌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중에 유일하게 험금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시고 말씀하신 내용이 성경에 나오는데, 마가복음 12장 41~44절에 보면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아래 십일조와 헌금에 관한 논문 요약자료가 있어 올립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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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헌금의 의미와 사용에 대한 소고
A Study of the Meaning of Tithe, Offering and Their Use
논문 요약
십일조란 자신의 소득의 10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다.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세계 어느 나라의 신자보다 열심히 드리고 있다. 특히 십일조는 개교회의 경제적인 자립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강조되었지만 십일조의 사용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는 성직자,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떠돌이, 고아, 과부)에게 십일조를 사용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교회는 십일조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대체적으로 준수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게르만족에게 전파된 이후 십일조의 상당한 부분이 교회를 후원하는 사람과 성직자에게 돌려졌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회의 개혁은 신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실제 생활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한 예로 루터는 신자들의 헌금이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에 대한 글을 1523년 작센 선제후국의 라이스니히市의 성 마태우스교회의 헌물함에 있는 헌금의 사용에 관한 글을 통하여, 모든 복음적인 교회(루터교회)들이 이러한 규정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였다. 루터는 헌금을 공정하게 관리해야 함은 물론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 라이스니히시 전체의 복지를 위하여 사용해야할 것을 권하고 있다.
십일조와 헌금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기독교인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드릴 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며 물질은 단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것이므로 인간은 청지기에 불과하며 인간이 결코 물질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 십일조와 헌금이 교회에서 올바르게 사용되도록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성서적인 가르침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I. 서언
십일조는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개교회의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신자들이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는 없어서는 안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는 주로 십일조를 드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드려진 십일조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십일조와 헌금의 성서적인 의미와 사용법, 敎會史에서 본 십일조 그리고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헌금 사용에 관한 글을 통해 십일조와 헌금을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다루려고 한다. 십일조를 드리는데 역점을 두었다는 것은 십일조가 지니고 있는 제의적 성격과 여기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축복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십일조는 이런 제의적 성격 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격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서를 통해 가르쳐 준 내용에 확실히 드러나 있다.
성서에 나오는 십일조와 헌금에 대한 신학적인 내용은 성서 신학자의 몫이므로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보다 종교개혁시대에 헌금에 대한 사용을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어떻게 헌금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십일조와 헌금을 어떻게 드렸고 사용했는지를 성서와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II. 구약성서에 나타난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아세르'는 십분의 일을 뜻하며 (에스겔 45:11;14), 소득의 십분의 일에 대한 헌금으로 쓰이고 있다(창 14:20, 아모스 4:4, 말라기 3:8;10, 역대하 31:5;6;12, 느혜미야 10:38. 12:44. 13:5;12). 마아세르의 동사형은 아사르(???)로서 '십분의 일을 부과하다'(Qal, 사무엘상 8:15;17), '십일조를 드리다'(Pi'el, 신명기 14:22, 창 28:22), '십일조를 드리다 및 십일조를 모으다'(Hif'il, 신명기 26:12, 느혜미야 10:39)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 오경에 나타난 십일조
1)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 (창 14:17-20)
구약성서의 맨 처음에 나오는 십일조는 창세기 14:17-20에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라고 말하자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이라는 문장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십일조의 범위를 규정해주는 단서가 된다. 또 하나는 십일조의 성격 규정이다. 19절에는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멜기세덱이 하나님께 복을 빌었고, 20절에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라는 멜기세덱의 요청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는 아직 모세의 율법이 시행되지 않은 때이다. 또 멜기세덱이 노략물의 10분의 1을 아브람에게 "과세"했다는 암시도 전혀 없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세무요원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보답의 형태가 십일조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더 복을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닌 감사제의 행위이다. 이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헌금 방법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태도를 예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십일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여졌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2) 야곱의 십일조 약속 (창 28:18-22)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중 광야에서 꿈을 꾼 다음 그곳을 베델이라 칭하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데, 이 서원의 마지막 내용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십일조를 바친 구체적인 사실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해주시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라.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라.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3) 제사법전에 나오는 십일조
(1) 레위기 27:30-34
농산물의 십일조와 가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칠 것을 말하고 있다.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 그리고 소 떼와 양 떼의 십분의 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거룩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히 가축의 십일조는 새로 태어난 것 가운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가축 가운데서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있다 (32절).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께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누가 그 십분의 일을 꼭 무르고자 하면, 그 무를 것의 값에다 오분의 일을 더 얹어야 한다. 소 떼와 양 떼에서도, 각각 십분의 일을 나 주에게 거룩하게 바쳐야 한다.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짐승을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 것마다 바쳐야 한다. 나쁜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을 골라내거나 바꿔치기를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가 꼭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것을 바꾸었다면, 처음 그 짐승과 바꾼 짐승이 둘 다 거룩하게 되어, 도저히 무를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더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고 내리신 명이다.
(2) 민수기 18:20-32
레위기와는 달리 민수기에서는 십일조 전부가 레위인의 몫이고 그 중에서 십분의 일만 제사장에게 돌리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레위 사람이 십일조를 받아야 할 당위성을 먼저 언급한다. 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의 땅에서는 아무런 유산도 없다. 그들과 더불어 함께 나눌 몫이 너에게는 없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가 받은 몫, 네가 차지할 유산은 바로 나다."(20절).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기 때문에 땅의 소산물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에게는 회막 일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고 오직 레위 지파에게만 주어졌다(23절).다른 지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전적으로 성막 봉사에 대한 의무를 지닌 레위인을 위하여 십일조를 드렸다. 레위인이 받는 십일조는 회막에서 하는 일에 대한 보수의 성격을 띠고 있다(31절).
바로 여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용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레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유산이다. 특히 레위인도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25절, 28절).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비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리기 위해 들이나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얽매이지 않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비 대책이 가정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종교적 예식들이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합당하게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임한다고 믿었다.
4) 신명기에서의 십일조
(1) 신명기 12:6-19, 14:22-27
신명기 12:6-19에 언급된 십일조는 제사와 함께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서 가족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축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 축제에는 자녀들, 남종과 여종 그리고 차지할 몫이나 유산도 없이 성 안에서 사는 레위인을 다 초대하여 함께 즐거워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12절). 여기에서 드려진 십일조는 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었다(17절).
신명기 14:22-27에 기록된 십일조 규정에는 매년 농사를 지은 수확물의 10분의 1을 드리라고 되어있다. 신명기 12:6-19절과 마찬가지로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특히 이 축제에 레위인을 초대할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종들을 초대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하나로 이해된다. 십일조를 드릴 때 축제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 축제에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을 초대할 것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2)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 (신 14:28-29, 26:12-15)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 실 것이다.
세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면, 너희는 너희의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따로 떼 어서,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여라. 그렇게 할 때에 너희는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는 주께 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 집에서 성물을 내어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다 나누어 주어서, 주의 명령을 잊지 않고 어김없이 다 실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애곡하는 날 에, 이 거룩한 열의 한 몫을 먹지 않았고, 부정한 몸으로 그것을 떼놓지도 않고, 죽은 자에게 그것을 제물로 바친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십일조에 관하여 명 령하신 것을 그대로 다 지켰습니다.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고, 주의 백성 이 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주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주신 땅, 곧 젖과 꿀 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는 십일조가 사회복지적인 목적과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가장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십일조는 일단 다 모아져서 성소가 아닌 '성 안에 저장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람은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인데 이들은 일정한 경제적 생산수단이 없던 사람들이다. 거룩하고 구별되게 드려진 것이, 성 안에 저장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했던 대로 쓰임을 받게될 때 거룩해지는 것임을 암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매 삼 년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복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물론 복을 받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복을 내리시는 것은 결국 더욱 많은 나눔을 생산하기 위함이라 여겨진다. 이 십일조 제도는 그 당시의 사회사업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십일조를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2. 말라기에 나타난 십일조(말 3:6-12)
한국의 개신교 강단에서 선포되는 십일조에 관한 설교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성경 본문이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8절).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이 범죄 행위에 해당되는 까닭은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인간은 단지 이것을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10분 1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간은 나눔의 최소화를 실천하게 되는데 이것은 물질소유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훈련의 기본단계이다. 이 훈련을 통하여 인간이 물질의 종으로 타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의 운용을 통하여 복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소득의 재분배를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십일조의 규례를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인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여기에서 특기할만 한 것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사람에게 저주를 경고하고 바치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주가 무섭기 때문에 바치거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바친다면 이것은 중세 시대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발행되었던 사면부(indulgentia)와 조금도 차이가 없다. 구약의 십일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현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물질이 필요하지만 물질세계의 지배는 받지 말아야 함을 암시한 것이다.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받게 되지만 궁극적인 바치는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서 재산이 있는 자는 그 재산을 나눌 수 있는 최소단위를 하나님께 바치게 하셨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는 위정자들이 세금으로 거두어가는 십분의 일세와는 성격이 달랐다 (참조 삼상 8:15;17). 제사장과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내게 된 것도 이들에게는 토지분배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이들의 유산이 되기 때문이다).
III. 신약 성서에 나타난 십일조
1. 복음서에 언급된 십일조 (마 23:23, 눅 18:9-14)
신약 성서에서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이 별로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구약시대의 십일조 전승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십일조는 유대인의 형식적인 경건의 요소로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십일조는 드리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지 않음을 비판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십일조는 바쳐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누가복음 18:9-14에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외적 종교적 행위를 하는 사람과 내적 심령의 종교를 가진 사람을 대조한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은 성전에서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2절)라고 기도했다. 바리새파 사람의 외적 종교적 행위에는 십일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데 그는 내적 심령의 종교를 가진 사람에 해당되며,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14절).
2. 히브리서에 언급된 십일조 (히 7:1-4)
창세기 14:17-20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내용을 멜기세덱과 예수를 비교하는 가운데 히브리서 7:1-4에 언급하고 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만나서 축복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 그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족장인 아브라함까지도 가장 좋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IV. 교회사에 나타난 십일조와 헌금
1. 고대 교회
고대 교회에서 헌금은 자발적 이었다. 구약 성서적인 모범에 따른 십일조에 대한 요청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대단히 오래된 것이지만 (Did.13) 서방교회에서는 3세기까지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 세상의 소유의 한 부분에 대한 포기로서의 구제는 금욕적인 행위가 되어 내세에 대한 보상을 상속하는 한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것은 예배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교회에 바칠 헌물로 정해진 것들(농산물과 돈)을 예배 때 가져와 교회의 장로에게 전달하였다. 장로는 이 헌물을 성찬대 위에 봉헌(Oblationen)한 다음에 집사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선물로 자유 재량에 따라 궁핍한 사람들과 선지자, 교사, 교회 직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2. 중세 시대
중세 시대에 십일조의 자발적인 실행은 585년에 열린 제2차 마콘(Mâcon) 종교회의에서 법적인 의무로서 고시되었다(제5조). 그 후 프랑켄 왕국의 카롤링어家 출신인 칼 대제(Karl d. Gr., 768-814)는 교회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배를 왕의 의무로 여겨, 외부의 적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 문제까지 관여하였다. 779년 프랑켄 왕국에서 카롤링어가의 법령은 헤리스탈(Heristal)의 주교좌 성당 참사 회원에게 십일조를 국법으로 인정해주었다. 그 결과 교회의 경제적인 기초가 든든해지게 되었다. 십일조의 인정으로 교회는 그들의 반환권리에 대한 과제를 국민의 비용으로 맡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은 이보다 늦게 십일조의 의무가 법제화되었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은 11세기에 덴마크와 아이슬란드는 13세기에 이루어졌다. 십일조는 거의 전적으로 소득의 십일조였다(개인 십일조: 개인의 수입에서 바침, 물질의 십일조: 농작물과 가축에서 바침; 이 십일조는 밭에서 나온 소산물로 바치는 대십일조와 정원과 과일나무 열매의 소득에서 바치는 소십일조로 구분됨).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곡물의 십일조에서 달성하였다. 십일조에 대한 의무는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식민지 지역에서 지배받고 있는 주민들의 감소된 십일조 의무(슬라브족 십일조)는 1036년 트리부르(Tribur)의 종교회의에 의하여 표준 십일조로 균등화하게 되었다. 다만 교회 성직자의 소유지, 수도원 그리고 때때로 귀족에게는 십일조 의무가 제외되었다.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 492-496)의 분배규정은 십일조의 수령 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주교, 성직자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교회의 필요를 위한 것(건물, 시설유지 등)을 위해 각각 4분의 1을 지급한다. 사유재산화된교회제도(Eigenkirchenwesen)의 발전은 교회 후원자가 예배당의 건축과 유지(Baulast)에 대한 보상으로서 교회의 십일조의 많은 부분(일반적으로 3분의 2)을 요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나머지 3분의 1은 성직자에게 지급되었다. 규칙적으로 이 "십일조의 3분의 1"(tertia pars decimarum)은 18세기까지 성직자에게 지급되었다. 사유재산화된 교회제도에 대한 투쟁은 또한 평신도에 대한 십일조 권리를 일으켰지만 이 목적은 결코 달성되지 못했다. 겔라시우스의 분배규정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십일조의 사용 목적에 부합되었으나 교회의 사유재산화는 십일조를 교회 소유주와 성직자에게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에 농민들로 하여금 십일조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게 하였다.
3. 헌금의 사용에 관한 루터의 견해
루터가 살았던 시대에도 십일조는 있었다. 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525년 2월말에 독일 슈바벤(Schwaben)에서 농민들이 제시한 "12개 조항"에는 곡물의 십일조는 성직자에 대한 사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시의 곤궁을 대비한 비축식량으로 써줄 것을 요구한 항이 있다. 그리고 가축에 대한 십일조는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한 루터의 답변은 십일조의 폐지는 "도둑"이다 라는 강경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루터는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십일조를 폐지할 생각은 없었으며 그것이 또한 성서에 명시되어 있는 경우 그러했다. 그리고 그는 십일조는 아니지만 교회의 헌금에 대한 용도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를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 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오늘 우리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은 전제해야 한다.
1) 교회의 헌물함에 대한 규정(Ordnung eines gemeine Kasten, 1523)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온 복음적인 교회들은 교회 생활의 실제에 있어서 복음적인 견해의 구체화와 더불어 성직자와 교회 직원들의 보수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와 관련된 교회 재정규정에 대한 새로운 제정이 불가피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루터는 1523년 작센 선제후국에 있는 작은 도시인 라이스니히시에 있는 聖 마태우스 市敎會(die Stadtkirche St. Matthäus)에 보관되어 있는 헌물함에 있는 재물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실례를 '교회의 헌물함에 대한 규정'이라는 글을 통해 자세하게 밝혔다. 루터는 라이스니히시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이곳에 있는 교회가 부흐(Buch) 수도원으로부터 보증된 교회 후원자의 권리를 깰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하여 조언을 주기도 하였다. 헌물함인 라이스니히의 "게마이네 카스텐"(der gemeine Kasten)은 라이스니히市의 교회 안에 4개의 자물쇠로 채워져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이 자물쇠 4개는 각각 다른 것이었는데 그것은 귀족, 시의회, 市 敎會, 농민의 대표가 각각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교회에 있었던 이 헌금함은 교회 자체 보다는 市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루터는 이 글이 라이스니히에 있는 교회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독일에 있는 모든 루터교회에 모범이 되어 다른 교회들도 이를 본받도록 인쇄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 라이스니히 헌물함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
오늘날 교회에서 헌금을 바칠 때 대부분 화폐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16세기에는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께 드렸다. 라이스니히시의 헌물함은 상시의 지출을 위한 재산이기 때문에 한 방향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려운 시절을 위한 비축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헌물함에 포함된 것들은 무엇인가? 루터는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이자들, 전답, 조세, 돈 그리고 재산 모든 것이 모아져서 영구히 헌납되고 한데 모아져야만 한다." 루터는 이 헌물함의 몇 가지 수입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① 목사의 재산과 조세에서
② 교회의 재산과 조세에서
③ 네 개의 제단(그리스도의 몸의 제단, 수태고지 제단, 마리아의 수태 제단, 십 자가 제단)들의 수익금, 자선 기관들의 재산과 조세에서
④ 형제단들로부터
⑤ 수공업자들과 농민들이 낸 헌물에서
⑥ 빈민구제함과 헌금함에 있는 음식물과 돈에서
⑦ 건강한 날들에 대한 감사 헌금과 유언을 통해 언급된 헌금에서
(2) 라이스니히 헌물이 사용되는 곳
라이스니히의 헌물이 사용되는 범위는 라이스니히 교구에 한정되어 있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몇가지 예외적인 조항도 있다. 루터는 이 헌물이 사용되어야 할 곳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목사를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② 교회의 사찰을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③ 학교를 위해서-교사들의 사례비-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④ 장애자, 병든자와 가난한 사람들, 병과 노년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열명의 위원들이 매 주일 또는 부정기적으로 위와 같은 어려운 사람들 을 돌본다(이들이 살 수 있는 집, 옷, 먹을 것). 이렇게 함으로써 구걸행위를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⑤ 버려진 고아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이들의 교육과 생계를 돌보아야 한 다.
⑥ 구걸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⑦ 나그네들을 위해서
⑧ 교회당, 다리, 목사관, 학교, 사찰 사택, 구빈원의 건축과 유지
⑨ 비축할 수 있는 곡식을 사들이기 위해
(3) 라이스니히 헌물에 있어서 행정적인 사항들
루터는 이 헌물을 지급하기 위해서 10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위원들은 두명의 귀족, 두명의 시의원, 일반 시민들 가운데 세명은 도시민 그리고 세명은 농민으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이들이 선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일해줄 것과 사사로운 것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목사관이나 시청에 모여서 그들에게 위임된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고 토의와 협의를 해야 한다. 10명의 위원들은 일년에 네번(사순절 첫째주일 다음의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령강림절, 9월 14일, 12월 13일)에 걸쳐 헌물의 수익상황을 점검하고 부족함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루터는 라이스니히 헌물함의 규정을 통하여 교회 재산의 사회적 기여도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그는 철저히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이상은 초대 교회의 재산의 공동분배에 있었다. 그는 사도행전 2:44과 4:32과 유대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에 대해 언급한 고린도후서 9:2을 교회 재산의 사용에 있어서 이상으로 보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35-46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최후심판 날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루터는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섬기는 기독교적인 사랑보다 더 큰 예배는 없다고 말한다.
VI. 결론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와 온전한 십일조를 바친다고 양심있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첫째, 교회의 회계는 투명해야 한다. 모든 교인들이 낸 헌금이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를 단 한푼까지 정확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를 해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건강하게 한다. 이렇게 된다면 신자들이 헌금을 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는 십일조를 바치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치지만 말고 교회 스스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이 교회의 십일조는 교회 경상비에서 10분의 1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일이 아닌 곳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 교회의 십일조는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내는 것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가난한 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다. 가난한 신자에게 십일조는 면제가 되는 것인가? 교회의 경상비의 10분의 1에서 모아진 교회의 십일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제용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십일조는 개교회가 연합한다는지 지방회 또는 노회별로 연합한다든지 아니면 총회적인 사업으로 발전하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 십일조를 총회적으로 모은다면 한국의 개신교회도 독일 루터교회들이 하는 사회봉사국(Diakoniewerk)을 설립하여 대대적인 사회 복지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헌금이 꼭 필요한 일에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교회는 과거의 습성에 젖어 필요하지 않는 일에 재정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 한 예로 매주마다 한번보고 버려지는 주보의 발행을 들 수 있다. 과연 주보를 계속 발행해야할지 우리는 한번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주보를 매주 발행하는 것 대신 그날 부를 찬송과 성경말씀을 교회의 벽이나 앞면에서 알려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매주 마다 바꾸는 강단의 꽃꽂이이다. 꼭 비싼 생화를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 경비가 소외되고 그늘진 이웃들에게 전해진다면 그곳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지 않을까? 이런 일을 할 때에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일은 교회나 어떤 목사 또는 장로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골 3:17)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넷째, 십일조와 헌금은 신자의 소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준 것의 십분의 일 또는 그 이외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경제관은 물질이 그의 소유가 아니라 단지 위임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점이 아닌 공유이며 나눔이다. 십분의 일이라는 나눔의 훈련을 통하여 십분의 일 이상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세상을 향해서 전파해야할 복음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교회가 진정으로 십일조를 한다면 세계의 굶주림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서구 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십일조에 난색을 표한다. 십일조와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물론 제의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가르치신다. 문제는 이것을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참고문헌
1. 원자료
Luther, Mart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A), Bd.12, Weimar: Hermann Böhlau, 1891.
―――. Taschenausgabe (LTA), Bd. 3,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81.
2. 단행본 및 논문
- 임태수.「구약성서와 민중」,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3.
- 정기덕. "십일조의 강조는 타당한가?", 신학과 문화, 제4집, 1995.
- Erler, A. "Zehnten", in 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Bd. 6, Tübingen: J.C.B. Mohr (Paul Siebeck), 1963, 3.Aufl.
- Heussi, Karl. Kompendium der Kirchengeschichte, Tübingen: J.C.B. Mohr (Paul Siebeck), 1981.
- Loewenich, von Walter. Martin Luther. Der Mann und das Werk, München: List Verlag, 1982.
- Wilson, J. Christian. "Tithe", in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 6, Doubleday: David Noel Freemann, 1922.
- Vischer, Lukas. Tithing in the Early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6.
3. 번역서
- V. S. 아자리아.「그리스도인과 헌금」, 곽안전·심재원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2.
- R. T. Kendall. 「십일조」, 송성진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5.
출처 : 성경말씀 + 주석성경 + 신학자료 및 레포트 참조 + http://blog.naver.com/jjkkhh2232?Redirect=Log&logNo=50010785244 + 직접작성
re: 십일조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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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
11조는 이미 외국에서는 폐지 되었고요....
우리나라 교회와 미국에서도 일부 교회만 걷는다고 합니다.
돈 잘 버는 4대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신앙을 떠나서 보세요.
우리나라 교회들은 돈에 미친 거 같지 않습니까?
아래 글을 차근히 읽어 보세요~
re: 십일조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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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제법집요경 보시품』『방등경』『잡보장경』에서 석가모니는 재물이나 착한 일을 베풀 때, 그 재물이나 도움을 받는 특정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체의 모든 중생이 다 구제받게 되기를 원하라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자신에게 보시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 당신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다고 당부했다.
불경『근본설일체유부』『현우경빈녀난타품』『본생경』『잡보장경』의 '가난한 여자걸인'이야기와 성경『마가복음 12:41∼44』의 '가난한 과부'이야기는 헌금에 하는 데 있어서 그 액수의 많음을 칭찬하지 않고 액수가 적더라도 그 정성과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누가 보아도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khi4040 님의 말씀 여기 사탄교에도 있내염.
re: 십일조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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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십일조와 천국가는 것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둘. 헌금은 자의로 하되 인색하게 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기 싫은 것 억지로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셋. 교회에 있는 헌금 중에는 성경에 기록된 것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성경과 상관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헌금이건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가운데 자의로 하는 것입니다. 부담이 되거나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안하느니만 못합니다.
넷. 그러나 나의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re: 십일조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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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의 일을
어려운 자들 위해 사용 하는것은 좋은것이지요
서로 나눔으로 평강의 세상 될수 있는것이라 봅니다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 정신의 근본 이지요
헌금은 나를 헌신하여 남을 돕기 위해 내는것입니다
십일조를
어떠한 대가를 위해 지출 한다면
그건 헌금이 아니고 투자 일뿐입니다
탐욕자들에 주어지면
빼앗기는 현상이나 같지요
십일조를 옳바로 활애 하면
님에게도 그이상의 평강이 있을겁니다.
한곳에 내는것만이 십일조헌금은 아닙니다
지정된 곳에서만 꼭 내어야 한다는것은
마음속에 이면적인 대가를 원해서 입니다
그것은 가치 없는 도박성 투자 일뿐 입니다.
로또복권 사는 심정이랄까..?
re: 십일조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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