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개방주의가 득세하면서 최근까지도 자본의 국적성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치부되어왔다. 그러나 주요 재벌들마저 외국 자본에 의한 M&A(기업인수-합병)의 공포에 떨게 되고 금융권의 외국 자본 지배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최고 수준에 달하면서, 마침내 자본의 국적성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인정되기 시작하고 있다.
자본의 국적은 중요하다. 세계화의 진전으로 이제 다국적 기업을 넘어 초국적 기업이 되었다는 선진국의 대기업들의 경우에도, 장기전략 수립, 연구개발, 브랜드 관리,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 등 핵심기능은 아직도 거의 전부 본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최고경영진도 거의 본국인이다. 1998년 독일의 다임러-벤츠그룹이 미국의 크라이
슬러를 인수했을 때, 처음에는 양사의 동반자적 결합이라며 이사회에 독일인-미국인 동수를 내세웠지만, 합병 후 5년이 지난 지금은 이사 11명 중 미국인은 단 1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렇게 자본의 국적은 그 자본이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그 과정에서 누구를 위해 얼마나 부를 창조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겉으로는 자본에 국적이 없다고 외치는 선진국들도 실제로는 공식-비공식적으로 국내 자본을 보호해온 것이다. 미국도 자본을 수입하던 19세기에는 외국인은 은행 이사도 못하게 하였고, 흔히 세계화의 모범으로 알려진 핀란드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이 20% 이상의 지분을 소유한 기업은 '위험기업'으로 분류하여 특별관리했다.
그러나 자본의 국적성이 중요하다는 것이 국내 자본은 무조건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행태를 결정하는 것이 국적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의 국적 이외에 그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 중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그 자본이 산업자본인가 금융자본인가 하는 것이다. 같은 국내 자본이라고 해도 설비와 기술로 승부해야 하는 산업자본은 유동성이 높은 금융자본보다 더 장기적이고 생산적인 투자를 하는 경향이 높다.
둘째, 금융자본의 경우에도 어떤 금융자본인가가 중요하다. 같은 금융자본이라고 해도 단기수익을 주된 목표로 하는 펀드형 자본은 은행자본에 비해 국민경제에 득이 덜 될 확률이 높다.
셋째,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상호관계도 중요하다. 같은 은행자본이라도 금융제도나 규제에 따라 산업자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장기적 기업금융을 통해 투자를 촉진할 수도 있고, 기업금융을 회피하면서 고수익의 소비자 금융에만 치중하여 투자를 저해할 수도 있다.
물론 자본의 '종류'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은 확률론적인 이야기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대적 M&A가 활발하여 단기적인 주가 유지가 중요해지는 경우에는 산업자본도 단기주의로 흐르게 된다. 반대로 펀드라고 해도 꼭 단기적인 관점만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관계에 있어서도 산업자본의 일방적인 지배는 금융기관의 사금고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금융기관의 대주주나 그 관련자에 대한 대출을 금지한다거나, 독일-일본 등에서와 같이 금융기관도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며 상호견제를 하게 만들면 이러한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
어떤 자본이 외국 자본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국민경제적 입장에서 부정적인 행동을 할 개연성을 높인다. 그러나 국적만이 자본의 행태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자본이 다른 면에서 좋은 점이 많다면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를 감수하고도 받아들일 수 있다.
자본의 국적성은 매우 중요하지만 정책 수립에서 그것만이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하준[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인터넷은 '범죄의 바다'
"인터넷은 범행의 온상?"
2003년 12월 2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재판장 전봉진 부장판사)는 인터넷을 통해 강도범행를 공모한 범행에 철퇴를 내렸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공범을 모아 강도범죄를 저지른 혐의(특수강도 등)로 구속기소된 이모씨(21)에 대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또 사이트를 보고 찾아와 이씨와 함께 범죄행각을 벌이던 중 20대 여성을 성폭행한 서모씨(23)에게 징역 6년을, 고모씨(30) 등 4명에게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씨는 지난해 4월 말 한 인터넷 사이트의 '청계천 쇼핑정보'라는 카페 게시판에 '이 길에 동행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힘든 세상 어떤 길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법을 어기면서 돈을 벌려면 동참하십시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동참하기로 '결정'한 이들은 술에 취한 사람이나 부녀자 등을 납치, 그들로부터 금품 등을 빼앗기로 계획했다.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돼 있다"
이들은 지난해 5월 29일 밤 인적이 뜸한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근처를 범행지로 선택했다. 이곳에 차량을 대기시켜놓은 채 '범죄대상'을 찾던 이들은 피해자 강모씨(69)가 술에 취해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고씨는 자동차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2명이 강씨를 공격해 현금을 빼앗았다. 범죄에 재미를 붙인 이들은 지난해 6월 5일 경기 성남시 야탑동 근처에서 지나가던 20대 여성을 납치해 미리 준비한 승합차에 태운 뒤 돈을 빼앗고 성폭행을 하는 등 총 5건의 퍽치기 및 납치 감금의 범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이씨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범행 모의글을 우연히 본 한 네티즌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발각됐다.
'퍽치기' 등은 그다지 희귀한 범죄가 아니다. 한밤중에 각 경찰서 강력반을 가보면 퍽치기를 하다가 붙들려온 '현행범'이 조사받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다. 이번 사건이 문제가 된 것은 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범행을 모의했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지만 '범행'이라는 공통분모를 위해 모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재판부는 게시판에 글을 올린 이씨의 죄를 무겁게 추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특히 이○○은 처음부터 이런 강도범행을 할 목적으로 인터넷을 이용, 공범을 모집해 여러 차례에 걸쳐 죄질이 나쁜 강도범행을 주도적으로 저질러 엄히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인터넷상에서 범죄 모의는 얼마나 이뤄지고 있을까. 직접 검색창에 '○○'이라는 검색어를 적고 엔터키를 눌러봤다. 10여 개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이 중에 한 카페에 들어가봤다. 회원 수는 200명에 가까웠다.
감시 인력 부족해 단속 쉽지 않아
게시판에는 모집공고와 자신을 써달라는 요청 등 다양한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바우'라고 밝힌 한 27세 남성은 "현재 서울을 떠돌고 있다"며 "아이디어는 없지만 '깡'도 있고, 돈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돼 있다"고 적었다. 자신이 우두머리를 하겠다고 밝힌 한 회원은 "차량 소지자 한 명과 말 잘듣는 사람 1~2명 필요
하다"며 "목표 금액은 개인당 최소 1억원이며 돈 되는 건 무엇이든 한다"고 밝혔다. '끼리끼리'라고 밝힌 한 회원은 "가진 자 등쳐먹는 괜찮은 일이 있다"며 "20대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와 처음부터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적은 뒤 연락처를 적어놓았다.
막막한 현실을 타개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이 카페를 방문한 이들도 있었다. 자신을 막막한 가장으로 소개한 한 회원은 "어떻게든 가정은 지키고 싶다"며 "정보라도 얻고 싶다"고 밝혔다. 자신을 올해 30세 되는 보통남자로 소개한 다른 회원은 "이제까지 너무 착실하게 살아온 것이 억울할 뿐"이라며 "죽어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불꽃처럼 타올라보고 싶다"고 적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죽어서 악귀라도 되고 싶다"고 밝힌 그는 "문득 그냥 죽기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죽기 전에 한 번만 미친듯이 넘지 못한 선을 넘은 뒤 감방 가기 전에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미 자살할 장비를 갖춰놓은
상태라고 적었다. 2003년 말에 소년원에서 나왔다고 밝힌 21세의 한 남성은 "진짜 잘 살아보려고 했더니 사회가 짜증나게 해 적응 안 된다"며 자신을 써달라는 글을 여러 번 올리기도 했다.
인터넷상으로 범죄에 필요한 것들을 파는 이들도 있다. 흔히 범죄에 등장하는 대포통장(남의 명의로 된 통장)과 대포폰, 위조 주민등록증 등 위조서류가 대표적인 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한 뒤, 연락만 하면 된다. 인터넷을 검색해본 결과, 위조 대행 사이트도 상당히 많았다. 대부분 위조범들은 주로 카페를 개설한 뒤 자신의 연락처를 남겨놓은 글만 하나 올린다. "자신은 메일이나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확인하지 않고 오로지 전화를 통해서만 주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이트에서 한 위조범은 "등초본-인감-공문서-자동차등록증-학사증명-성적표-토익 토플 성적표-주민등록증-여권 등 수많은 작업서류 및 증명서를 만들어준다"며 "100% 후불제로 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장담했다.
인터넷이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지만 단속체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인터넷 범행 모의에 대해 "일차적으로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으면 예비음모죄로 처벌할 수 있다"면서도 "내용을 봐서 심각하다 싶을 때에는 글쓴이를 조사하고 범죄의도가 있는지 확인하지만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먼저 잡는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근거가 없고 본인이 잡아떼면 처벌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속의 위조범은 약간 다르다. 이들은 보통 위조기계 등을 가지고 있어 처벌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단속이 쉽지 않다. 이 관계자는 "수많은 사람이 인터넷에 접속, 글을 남기기 때문에 전부 감시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다"며 "자살이나 음란 사이트 등 다른 유해 사이트도 많아 한쪽에 집중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는 인터넷업체도 마찬가지다. 한 인터넷업체 관계자는 "모니터링과 네티즌 교육, 자원봉사자의 신고 등을 통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감시하고 있는 순간에도 유해한 글이 올라와 글을 지우거나 사이트를 폐쇄하는 등의 조치에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는 "네티즌의 자발적인 신고가 꼭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세상이 따뜻해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댁의 '마일리지'는 안녕하십니까
김도형씨(가명-39)는 최근 서둘러 보유하고 있던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캐나다 왕복항공권을 구입했다. 이는 구입한 후 6개월간 성수기를 제외하고 원하는 시기에 탑승할 수 있는 항공권이다. 김씨가 올해 5월 이후에나 쓸 항공권을 황급히 산 것은 3월 1일부터 미주 왕복항공권의 마일리지 공제가 5만5천 마일에서 7만 마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현재 마일리지가 6만 마일이 안 되는 그는 3월부터는 캐나다 왕복항공권을 받을 수 없다.
항공사 누적 마일리지 3조원 넘어
항공사와 신용카드사가 잇따라 마일리지(보너스 포인트 포함) 지급 규정을 강화하거나 혜택을 축소하고 있어 소비자와 마찰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오케이캐쉬백 등 보너스카드업계와 인터넷 쇼핑몰도 마일리지 누적 규모가 늘면서 이를 소진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어, 신용대란에 이어 마일리지대란까지 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역시 항공사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합쳐서 대략 1천5백만 마일이 누적돼 있다. 돈으로 환산하면 3조원이 넘는 규모다. 이는 일종의 부채다. 따라서 충당금으로 지난해에만 대한항공이 6백억원, 아시아나항공이 1백억원을 적립했다.
신용카드사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2002년 기준 신용카드 항공 마일리지-포인트 운용에 1천8백41억원이 들었다. 문제는 이 금액이 전체 마일리지 중에서 6%만 사용한 것이라는 데 있다.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은 마일리지가 그보다 16배 이상 많다는 얘기다. 실제로 비씨카드의 마일리지 중 하나인 '톱포인트'는 지난해 기준 6백억 점이 쌓여 있다. 1포인트가 1원꼴이므로 6백억원어치가 누적돼 있는 셈이다.
오케이캐쉬백 등 보너스카드사와 인터넷 쇼핑몰의 누적된 마일리지 규모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SK(주)에서 운영하는 오케이캐쉬백의 적립 마일리지는 지난해 말 기준 3천5백58억 포인트에 이른다. 반면 사용 마일리지는 1천3백80억 포인트에 그쳤다. 고객이 돌려받을 수 있는 마일리지 잔액은 2002년 1천7백32억 포인트에서 2003년 2천1백78억 포인트로 계속 불어나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의 마일리지도 대형사의 경우 각각 1백억 포인트 정도가 누적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포인트가 1원이므로 고객으로부터 1백억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쌓인 마일리지를 빨리 소진하는 것이 기업의 관건이 됐다. 소비자가 마일리지를 사용하는 시점은 업종마다 차이가 있지만 적립 3개월 뒤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카드사의 마일리지는 6개월이 걸린다.
이처럼 소진이 더디자 각 업계는 사용 가맹점을 크게 늘리고 이벤트를 통해 마일리지 사용을 유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항공사들이 마일리지제도를 변경하겠다고 나선 것도 마일리지를 소진시키기 위한 한 방법인 셈이다. 예컨대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공제(일반석 기준)는 미주-유럽의 경우 각각 1만5천 점-5,000점 올라가지만, 일본-중국은 오히려 각각 5,000점이 내려간다.
이 때문에 대한항공은 마일리지 혜택 축소라는 비난을 받을 때마다 억울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출국자 중 대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단거리 노선의 마일리지 공제를 낮췄으므로, 혜택을 축소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에 비해 아시아나항공의 경우(이코노미 클래스 기준) 미주-유럽은 각각 1만3천 점-3,000점 올라가고 나머지는 현행과 같다.
업계, 마일리지 사용 유도 안간힘
하루 빨리 마일리지를 축소하고픈 대한항공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마일리지제도 변경에 대한 유예기간을 1년 이상으로 늘리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일본의 경우 제도 변경 시 6개월간 유예기간을 둘 뿐이며 특히 미국-유럽-동남아-중국의 항공사는 제도 개정 발표 즉시 새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한항공으로서는 선진국에도 없는 보호규정을 요구하고 있는 공정위가 원망스러운 것이다. 항공업계는 이에 더해 마 일리지를 취득한 후 사용하지 않고 3년(또는 5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소멸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꾸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으나 시행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보너스카드업계와 인터넷 쇼핑몰도 파격적인 이벤트를 벌이는 등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늘어가는 마일리지에 속수무책이다. 소진하더라도 상품을 팔다보면 또 생겨나기 때문이다.
내수 부진으로 고전하던 신용카드사들은 지난해 슬쩍(?) 마일리지 적립률을 낮추기도 했다. 고객을 뺏기지 않는 범위에서 마일리지 누적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이 때문에 신용카드사들은 지난해 말 공정위로부터 시정명령을 받기도 했다. 카드사들도 마일리지 해소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삼성카드는 지난 1월 15
일부터 마일리지 사용 기준을 기존 3만 포인트에서 2만 포인트로 낮췄다. 마일리지가 2만 포인트가 되면 인터넷 쇼핑몰 등 전국 5만여 가맹점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삼성카드 관계자는 "이번 조정으로 추가로 3백여억 포인트가 사용 가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기준 한도를 낮춰서 마일리지 사용을 촉진하기 위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비씨카드도 마일리지 중 하나인 '톱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최저 한도를 1만 점에서 5,000점으로 낮췄다.
이렇게 항공사-신용카드사-유통업계 등은 마일리지 누적 규모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마일리지가 고객 유치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악'이다. 즉, 마일리지제도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이들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항공사나 카드사들의 제도 변경을 보는 눈은 차갑기만 하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항공사 등이 고객 확보에만 집착했지, 마일리지 이용 실태나 가격 대비 효과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주먹구구식으로 제도를 도입하다보니, 중간에 제도를 바꾸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회계처리에서 마일리지가 늘어나는 만큼 부채가 커진다는 것을 예상해 사전에 적절하게 대처했어야 했다는 얘기다. 공정위도 "일방적-사후적 조치에 의해 마일리지 가치를 소급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항은 고객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으로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연구원의 한 관계자도 "마일리지 해소 촉진이 아닌 혜택 축소로 방향을 잡을 경우, 경영 실패를 고객이나 주식투자자에게 자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목숨 걸고 간도 지킨 이중하를 아십니까
"차라리 내 목을 쳐라, 그러나 국경선은 한 치도 결코 내놓을 수 없다."19세기 말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두만강 국경선을 확정시켜 간도땅을 차지하려는 청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목숨을 걸고 맞섰다. 그러나 그는 일제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역사를 거치면서 잊혀진 인물이 됐다.
간도되찾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뉴스메이커]는 이중하 선생의 행적을 발굴했다. 두 장의 바랜 사진을 통해 100년 동안 잠들었던 그의 당당한 위풍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증손자인 규영(78)-규청(70)씨 형제는 집안에서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이중하의 모습을 공개했다. 관복을 입고 앉은 이중하의 사진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젊 은 시절과 중년 시절에 찍은 것이다. 특히 젊은 시절의 사진은 당시 패기만만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규청씨는 "증조부가 외국 선교사들과 자주 교류했는데 이때 선교사가 증조부의 사진을 찍어 준 것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한 일간신문 칼럼에서 '이미 나라의 지배 밖으로 떠난 유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이중하를 '의인'이라 평했다. 함경도 안변부사였던 이중하는 1885년 조정으로부터 감계사로 임명받았다. 조선과 청나라 간 국경선을 결정하는 을유감계담판(국경회담)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이 된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서울 용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청은 조선에 대해 종주국임을 자처했다. 원세개가 가마를 타고 궁을 드나들고 선 채로 고종을 알현할 정도로 청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박용옥 전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청나라 대표가 조선의 종주국 행사를 하며 아주 위협적으로 경계를 획정하려 하였으나 이중하는 국토 수호에 강한 의지를 내비치며 이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간도를 '분쟁 지역'으로 이끌어내
청나라는 간도땅에서 조선족 유민을 쫓아내려 했다. 조선족 유민은 청에 귀화하든지 두만강 이남으로 다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압록강-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하려는 청의 압력에 맞서 이중하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에 나타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임을 끝까지 주장했다.
이중하는 청측 대표 덕옥-가원계-진영 등과 함께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논란이 된 강의 원천을 조사했다. 이 답사로 청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가지 않게 됐다. 결국 양국은 경계를 결정짓지 못했다.
1887년 정해감계담판에서 청측은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때에도 감계사로 임명받은 이중하는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로 청측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는 양보를 하는 척하면서도 현명하게 대처, 협상을 결렬시켰다.
경인교육대 강석화 교수(사학)는 "국가간의 국경회담에서 일단 영토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게 이중하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하면서 "이분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영토 문제에 관한 한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이때의 회담 덕택으로 간도의 영토 문제가 아직도 '분쟁 지역'으로 유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감계일기] 영유권 주장 소중한 자료
백두산정계비 답사를 통해 당시의 협상 내용과 정계비-토문강의 현장 기록을 세세하게 남겨놓은 것도 이중하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감계일기] [감계전말]은 간도 영유권 주장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계일기]에서는 청측 대표와 함께 1885년 10월 거의 한 달 동안 겨울의 백두산을 답사하면서 고초를 겪은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10월 17일 30리를 가서 절파총수의 엽막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어서 잤다. 이 막사는 지어진 것이 매우 열악하였고 또한 온돌도 없었다. 종일토록 눈과 싸워온 나머지 사람과 말이 모두 얼었는데도 노천에서 새벽을 기다렸다. 어렵게 하룻밤을 지냈다."
9월 말 함경도 회령을 출발, 무산을 거쳐 10월 18일 백두산정계비에 갔다가 다시 10월 27일 무산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청측 대표들이) 천천히 좇아오는 것이 마지 못해 하는 모습이어서 또한 가소로웠다"라는 일기에서 이중하의 대담한 기개가 드러나고 있다. 그는 또 답사 중에서도 몇 편의 시를 지어 왕명을 받고 백두산에 오른 심정을 담담히 서술했다.
취재팀은 이중하의 후손을 통해 백두산정계비 답사 당시의 생생한 일화를 발굴해냈다. 이 일화는 아들 이범세가 집필한 이중하의 행장에 실려 있다. 청의 가원계가 복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보고 이중하는 미리 준비해둔 환약을 써보라고 주었다. 그러나 약을 먹은 후 복통이 더욱 심해지자 청측 대표는 자기를 죽이려고 독약을 준
것이라고 흉기로 이중하를 위협했다. 이때 이중하는 청측 대표 앞에서 남은 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다음날 아침 복통이 가라앉자 청측 대표는 사과했다고 한다.
토문감계사였던 당시 행적만 나와 있을 뿐 이중하의 모습은 이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909년 일진회가 한-일합병을 주장하자, 민영소-김종한 등과 함께 국시유세단을 조직,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취재팀이 발굴해낸 이후 행적에서 그는 뒷모습조차 아름다운 의인이었다. 종1품 혹은 2품에게 주어지는 '규장각 제학'이라는 벼슬에 이르렀지만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자 아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으로 낙향했다. 퇴직한 은사금으로 나라에서 3,000원을 주었다. 그러나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이후 그에게 합병기념 훈장까지 내려졌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박문과 함께 돌려보냈다. 증손자인 이규청씨는 "나중에는 증조부가 눈이 멀어 총독부가 주는 후작 작위를 받지 못한다고 했더니 일제가 이를 시험하기 위해 눈에 송충이를 넣었다고 한다"며 "그때 증조부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부릅떴다"고 부친이 해준 이야기를 전했다.
한-일합방이 된 지 7년 후인 1917년 이중하는 나라를 잃은 분노를 잊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선산에 있다.
아들 이범세 역시 이중하의 뜻을 이은 올곧은 선비였다. 그는 이시영-이상설과 함께 '한양의 세 천재'로 불렸다. 이들과 함께 신학문을 배우며 교분을 두텁게 했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지만 아버지인 이중하와 함께 한-일합방 후 낙향했다. 이후 서울에서 [시대일보] 사장을 맡으며 항일의 뜻을 펴려 했지만 신문은 곧 폐간되고 말았다. 그도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0년 별세, 부친인 이중하와 나란히 양평 창대리 선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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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증손자 이규영씨 이렇게 찾아냈다
이중하에 대한 취재는 그가 구한말 당시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에서 시작됐다. 그는 전주 이씨 종친이었다.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광평대군 종친회를 통해 족보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아들인 이범세, 손자인 이흥종의 이름이 나왔다. 종친회 자료와 족보를 통해 취재팀은 증손자인 이규영씨의 집을 찾았다. 이씨의 집에서 이중하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났다. 사진 이외에도 아들 이범세가 아버지의 문집을 모아
엮은 [이아당집]을 찾을 수 있었다. 이아당은 이중하의 호이다. 손자인 이흥종싸는 한국전쟁 때 이 문집을 지고 피난을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중하의 관복과 훈장, 칼 등 유품은 강원도 홍천의 고택에서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규영씨의 동생인 규청씨는 증조부의 이름이 실린 신문기사와 간도 관련 기사를 오려 보관하고 있었다. 이씨는 부친인 고(故) 이흥종씨가 해방이 되던 날 맨 먼저 사당에서 이중하-이범세 부자에게 '일제가 드디어 망했습니다'라고 고할 때의 모습을 회상했다. 이씨는 그날을 회상하며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렸다.
또다른 후손으로는 이중하의 손녀인 이석희씨(여-90세)가 생존해 있다.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최근 할아버지인 이중하의 송덕비를 찾아다니고 있다. 이중하는 함경도와 경상도에 걸쳐 청렴결백한 관리로 이름나 있었다. 동학혁명 당시에는 관리들이 많이 희생당하였으나 그는 후덕한 인품덕택에 무사했다고 한다. 이규청씨는 "전국에 있는 송덕비 76기 중 8기가 증조부(이중하)를 기려 세워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까지 2기의 송덕비를 더 찾아내 모두 10기에 이른다고 한다.
이인호 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이석희씨의 딸이자 이중하의 외증손녀이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를 거쳐 러시아대사까지 역임했다. 증조부의 외교적인 기질을 이어받은 셈이다. 구한말 당시 이중하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한 탁월한 외교관으로 평가받았다. 조정에서는 적임자를 찾지 못하면 이중하에게 임무를 맡겼다. 나라의 이익을 앞세운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증손자인 이규영씨는 취재팀이 인터뷰 사진을 부탁하자, 한사코 사양했다. 증조부의 뜻을 제대로 잇지 못해 오히려 부끄럽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이중하의 후손이 아니었다. 한 의인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간도땅을 잃어버린 이땅의 모든 후손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