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요와 전설
□ 사 랑 가
아침에 우는새는 배가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새는 님이 그리워 울어요. 너냐 나냐 두리둥실 너냐 낮에낮에나 밤에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 우리집 서방님은 명태잡이를 갔는데 바람만 불어라 석달열흘만 불어라. 너냐 나냐 두리둥실 너냐 낮에 낮이나 밤에 밤이나 참사랑이로구나 종로네거리 솥때우는 영감님 정떨어진데는 무엇으로 떼우나요. 너냐 나냐 두리둥실 너냐 낮에낮이나 밤에밤이나 참사랑이로구나. 정떨어진데는 돈으로 때우고 솥떨어진데는 납으로 때운데요. 너냐 나냐 두리둥실 너냐 낮에 낮이나 밤에 밤이나 참사랑이로구나.
□ 강강술래(뛰엄)
우리 고장은 강강술래를 어느 때부터인가 「뛰엄」이라고 해왔다. 설날, 보름, 백중, 추석 4대 민속 명절때마다 3일에서 5일씩 밤이면 처녀 총각들이 널직한 마당에 모여 서로 손을 잡고 뛰는 놀이다. 처녀들의 상큼한 분내음이 보리마당에 풍겨지고 송술땀이 이마에 맺힐 무렵이면 달은 중천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억세게 뛰는 「막뛰엄」으로 의쌰 의쌰 하며 절정에 오를 때면 까르르 자지러지는 웃음이 있고 똘똘뭉친 원이 풀리면 잠시 휴식을 취한다. 남녀가 한데 어울러 사이사이 손을 잡고 어우러지는 이 놀이는 도초를 비롯하여 인근 비금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나이롱 뛰엄」이라고 하여 「으여차 의쌰 으여차차」라고 합창하면서 돌아가는 놀이는 자진 걸음으로 뛰는 것이며 수십명의 몸짓과 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그야말로 도초 특유의 정통적 민속제라 할 수 있다. 협동심을 갖게 하고 둥그런 심성을 길러내는 이 「뛰엄」은 강강술래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그 나름대로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강인한 도초인의 정신적 사고를 대변해주는 요약이며 생활에 리듬을 주는 활력소 구실로 각광을 받아왔던게 사실이다.
□ 징가 바위
발매리의 발매마을의 징가바위 전설은 먼 옛날에 축지법을 이용하는 장사가 우이도 높은 산의 상산봉에서 한발은 우이도의 서리로 뛰고 다른 한발은 본마을에 있는 징가바위를 뛰고 다음은 명당리의 할미봉으로 뛰어서 지나 갔는데 이때 생긴 발자욱이 징가바위에 있다는 전설이며 지금도 징가바위의 정상에 장사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또한 징가바위는 춘경마을에서 발매마을로 들어가면 바로 마주치는 산밑에 넙바욱개(넓은바위 바닥) 라는 바위바닥을 지나면서 징가바위를 올라다 보면 징가바위가 마치 쥐(서생원)가 발매마을로 넘어가는 형국을 하고 있다. 이 바위가 원래는 쥐 바위인데 발음이 변천하여 징가바위로 불리워지고 있지않나 생각하는 설이 있고 또 한가지는 바위의 모양이 개가 짖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진개바위 또는 징가바위로 불리워 진다고 한다.
□ 고목 나무전설
발매리 춘경마을 고목나무전설은 예전 이 마을 앞은 토지가 온통 달밭과 뻘 등이었다. 마을민들은 이곳을 농토로 개간키 위해 밤낮, 계절을 가리지 않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개간하였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마을사람 꿈에 도인처럼 보이는 노인이 나타나 마을 뒷산 고목나무에 매년 음력 7월 15일에 제를 지내면 마을에 경사가 있을 것이며 만일 이를 행하지 않으면 흉사가 겹칠 것이라며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심상치 않아 타 마을인에게 얘기를 하자 반신반의하면서도 그해부터 7월 15일 고목나무에 정성드려 제를 지냈다. 그후 이상하게 마을 앞 뻘등과 달밭에 삼복더위에도 한낮에 그늘이 생겨 농토를 일구는 농부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한다. 이는 고목나무 신이 진가바위의 기운을 빌어 그늘이 생기게 됐다고 전한다.
□ 꿩알바위
지남리 죽도마을어귀에 바위가 있는데 옛날 꿩이 알을 없어지기를 수번 반복하자 하루는 꿩이 나무위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바위 밑에서 커다란 구렁이가 나와 꿩알을 삼켜 버렸다. 화가난 꿩이 묘책을 생각하던 끝에 구렁이 입보다 큰 알을 낳고 구렁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구렁이가 나오더니 알을 먹으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먹을 수가 없게 되자 현재 마을 앞 도로변 밭에 굴려놓고 가 버렸다. 이를 본 꿩은 그 알을 돌로 굳어 버리게 하고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그후 사람들이 이 바위를 꿩알바위라 부르고 있다.
□ 금성산(錦城山)과 석비(石碑)
도초면(都草面)에 있는 금성산(錦城山)에는 옛날 도사 한사람이 도를 닦고 있었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에 도사는 수도를 끝냈고 금성산을 떠나면서 고란리, 신교리, 수항리 등 3개부락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햇골 꼬팽이에 손수 손으로 돌에 각을 지어 비를 세웠다.
그는 현 고란리는 읍이라 칭하였고 내가 쓴 글을 해득한 사람은 금성산에 금이 있는 곳을 알게 될 것이며 하찮은 돌비석이라고 후세 사람들이 위치를 변경할 경우 재앙이 뒤따르리라고 말하면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후 밭으로 조성하기 위해 석비를 밭 모서리로 옮겼는데 즉석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다시 원상태로 옮겨 놓으니 병이 나았다는 일화도 있다.
1930년 일본 치하에서 비석의 전설을 듣고 금성산에서 채금하였던 자취를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금성산의 석비는 지형의 형태나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서 결코 금은보화가 묻혀 있다는 전설적 가설은 와전인 것 같다. 적어도 도잡도(都雜島)라고 했을 무렵, 섬의 중심이었던 이 곳은 양초재배지로서의 표시가 분명한 것 같고, 조림지로서의 표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안에는 옛날 다섯 개의 마장(馬場)이 하의 장산 등에 있었고 군마를 길렀다. 그 때 초목이 우거졌던 도초도 답사에서 마장의 적지라는 표시가 아닌가 싶다. 한가지 아집을 피력한다면 금성산(錦城山)에 금이 묻혀 있을 것이라는 낭설은 일본의 강점기에 노동력을 착취코져 한 그들의 음모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금을 캐겠다는 굶주린 무리들이 대가 없이 땅을 일구어 소작면적을 넓히는 결과로 남았으니까 말이다.
□ 넓은 통 금매 도깨비
수다리의 나포마을에 옛날 이 섬의 한 마을에서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둑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번번이 무너져 버렸다. 마을 주민들이 실의에 빠져있던 어느날 어떤 중이 이곳을 지나면서 그 내력을 듣고나서 한가지 묘책을 알려 주었는데 "둑을 쌓을 때 사람을 함께 매장하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이때 마침 건너편에서 남자중과 여자중 둘이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이 결의하여 그들을 잡아 매장한 후 뚝을 쌓으니 과연 무너지지 않았다. 그 후 뚝 저쪽으로 돌아 가자니까 남자중 도깨비가 나와 '금매(글세)'라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넓은통 금매 도깨비"가 나온 곳이라 한다.
□ 구렁이 성주(시목마을)
오류리 시목마을의 구렁이 성주 전설은 나무 장사꾼이 나무를 싣고 장사를 나가기 위해 시목리에서 배를 타고 멍에섬으로 물을 담으러 갔다. 샘에 물이 없어 큰산 하느넘에 백사장에 배를 대놓고 물을 걷기 위해 발판을 놓은 순간 갑자기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배에 올라와 돛대를 감았다. 놀란 선장이 닻을 올려 멍에섬으로 되돌아가 배를 대자 그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배에서 내려갔다.
한사공이 뒤따라 가보니 큰 바위 아래서 그 구렁이가 식식 소리를 내자 커다란 구렁이 2마리가 나와 그 중 한 마리와 싸움을 하였다.
마침내 그 중 한 마리가 죽어 바다물이 온통 피물로 덮히고 배에서 내렸던 구렁이는 다시 배로 돌아왔다. 선장은 하는 수 없이 큰 산 하느넘에로 실어다주자 구렁이가 내려서 고맙다는 듯이 머리를 세 번이나 들어 성의를 표시하였다.
선장은 곧바로 물을 싣고 목포로 향했는데 뜻밖에 태풍이 몰아쳐 화원반도 앞에 정박하게 되었다. 며칠 후 목포에 도착하자 나무가 품귀되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고 그후에도 장사가 잘되어 마침내 선장은 구렁이를 성주로 모셨다 한다.
□ 우이도 상산봉
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제주도에서 중국으로 유람가던 중에 우이도 상산에 도착했다. 때마침 우이도에는 가뭄이 극심하였는데 고운 선생을 본 주민들은 가뭄을 물리치고 비를 내려주도록 간청했다. 고운선생은 즉시 북해 용왕을 불러서 가뭄을 해결하라고 했으나 옥황상제의 명령이 아니면 용왕의 마음대로 비를 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용왕의 말을 듣고 고운선생은 화를 벌컥 내면서 속히 비를 내리라고 호령했다. 기가 꺽인 용왕은 하는 수 없이 고운선생의 명령대로 비를 내려 가뭄을 해결했다.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얼굴에 경련이 일도록 화를 내면서 용왕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고운선생은 용왕을 도마뱀으로 만들어 선생의 무릎밑에 감추어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 후 고운 선생은 중국으로 떠났는데 선생이 머물면서 상산봉 제2봉에 있는 바위에다 바둑판을 만들어 바둑을 두면서 즐겼다는 전설이 있으며 과연 바둑판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또한 고운선생은 당시를 기념하기 위해 철마와 은접시를 유물로 놓아두고 갔는데, 은접시는 주민들이 가저가 버렸고 철마는 계속 전해 내려오다가 고인이 된 주민 문모씨가 대장간에 가지고 가서 늘리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철마마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 도초의 민속
□ 고란리 장군 장승
고란마을 '장승거리' 혹은 '삼거리'라 불리는 곳에 석장승 1기가 있다. 고란마을 장승은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는 마을 수호의 기능이 가장 크다. 원래는 나무로 만든 장승이 있었는데 1938년 석장승으로 대체되었다.
장승의 뒷면에 '을축 13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장승이 만들어진 연대를 뒷받침 해준다. 본래 명문은 '소화(昭和) 13년'이라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후 '소화(昭和)'라는 일본 연호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소화 1년이 을축년임을 감안하여 을축년으로부터 13년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을축 13년'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장승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길죽한 얼굴모양이다. 눈은 앞으로 돌출되어 있고, 양미간은 좁다. 길게 늘어진 코, 역시 귀가 길게 늘어져 있다. 입은 치아를 드러내 놓고 있어 앞에서 보면 위압감을 주면서도 웃고 있는 형상이다. 몸에는 옷을 입고 있는데, 소맷자락 아래로 손가락이 새겨져 있다.
장승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크기는 높이 290cm, 너비 66cm, 두께 40cm이다. 고란마을 주민들은 장승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정월 보름날 상당제(上堂祭)·하당제(下堂祭)·죽마제(竹馬祭)라는 제사의례를 지냈다고 한다.50) 상당(上堂)에는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었으며, 당집 안에는 당(堂) 할머니·할아버지·며느리·아들·딸·마신(馬神)·천신(天神)·지신(地神) 등을 모셨다고 한다. 하당신(下堂神)의 신체(神體)는 장승이다.
고란마을 주민들은 상당과 하당을 중심으로 해서 마을제사를 모셨다. 먼저 상당제는 정월 12일부터 15일까지 3인의 제주(祭主)가 당집에서 근신하면서 기거하고 있다가 보름날 새벽에 제사를 모신다.
그 다음 제주는 새벽 4시경에 장승이 서 있는 하당으로 이동한다. 하당제는 제주(祭主)를 비롯한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한다. 장승 앞에는 쇠고기·돼지고기·술·포·나물 등 제사음식을 차려 놓는다. 하당제가 끝나면, 마을 주민들은 제사음식을 함께 음복한다. 하당제에 이어 죽마제를 지내는데, 죽마제는 오전 9시경에 농악대가 당마당에 당도하여 죽마제가 시작되는데, 죽마제의 신체는 상당의 죽마신(竹馬神)이다.
죽마는 대나무로 말골격과 귀, 꼬리를 만들고, 말머리는 짚으로 엮은 만든 다음 참종이를 씌우고, 먹으로 눈과 코를 그린다. 또 말잔등에 짚을 깔아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든다. 죽마제가 시작되면, 우선 제주가 죽마를 탄 마장사(馬將師)에게 제물을 대접한다. 마장사가 죽마를 타고 달리면 마을 사람들은 죽마의 말머리와 입을 때린다. 마을사람들에게 매를 맞은 말의 주둥이가 터지면 농사가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결국 마을 주민들은 마장사를 쫓아 포구에 당도하는데 이 때 마신(馬神)에게 제물을 차려주고 마을의 모든 재앙을 갖고 떠나가도록 죽마를 바다에 버린다. 죽마제는 놀이 혹은 연희적인 성격이 강한 제의이다. 그러나 현재 고란마을에는 이런 마을 제사에 관한 제의는 행하지 않고 있으며, 과거의 풍속으로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 외남리 외상마을 장승
외상마을 장승은 마을의 입구, '버터골' 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다. 일명 '장성' '장석'이라 불리는 석장승 1기가 있다. 원래 장승은 외상마을의 중앙 공동우물가에 서 있었다.
그런데 자주 마을에 재앙이 발생하였고, 그 원인이 외상마을 건너편에 입지한 발매마을의 '진개바우' 때문이로 판단하게 되었다. 발매마을의 '진개바우'는 일명 '김가바우' 혹은 '장군바우'라 칭하는데, 이 바위가 외상마을의 기(氣)를 가로 막고 있는 형국이여서 외상마을에 재앙이 발생한다고 여겼다. 이에 외상마을 주민들은 발매마을의 '진개바우'에 맞대응 한다는 의미에서 마을 중앙에 있던 장승을 마을 입구로 옮기게 되었다.
외상마을 장승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손에는 창을 들고 서 있다. 길죽한 얼굴에 옆으로 찢어진 눈매, 갸름한 눈썹, 직선으로 깎인 기다란 코, 길게 벌려진 입과 치아, 턱에는 수염을 달기 위해 구멍을 뚫어 놓았다.
몸에는 옷을 입은 듯 옷자락이 새겨져 있지만 가슴부위에 좌우로 7줄의 사선이 그려져 있어 갈비뼈를 묘사하고 있다. 장승의 하단에는 장승을 세울 때 도움을 준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나, 현재는 기단부가 매몰되어 있어 확인되지 않는다. 장승의 기능은 마을수호 외에도 아들을 점지해 주는 삼신신앙, 마을의 기(氣)를 보장한다는 비보(裨補)의 기능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없다. 장승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고 크기는 높이 240cm, 너비 45cm, 두께 25cm이다.
□ 묘지문화(초분)
신안 섬들의 고유한 섬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초분'을 들 수 있다. 초분은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으로 엮은 이엉으로 덮은 분묘형식이다. 초분은 섬 지방의 독특한 장사지내기 관습으로 몇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상주가 고기잡이 나간 사이 갑자기 상을 당해 상주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 쓰는 임시묘이다. 예전엔 흑산바다나 칠산바다에 조기잡이 나가면 열흘 넘게 있게 마련이고 통신수단도 없어서 초분을 쓰는 경우가 불가피했다.
둘째,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거나 죽은 즉시 묻는 게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돼 초분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드센 자연 속의 삶이란 게 워낙 모진 것이어서 섬 사람 중에는 죽은 줄 알았더니 며칠씩 깊은 잠을 자다가 벌떡 깨어나는 사람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또 비록 주검이라도 좀더 곁에 두고 인연을 새기고자 한 가슴 찡한 인정이 초분 곁에 맴돌고 있는 것이다.
셋째, 뼈에 영혼이 들어있다고 보고 지상에서 뼈를 정결하게 수습하여 땅에 묻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 번 쓴 초분은 1∼3년 뒤 이엉이 삭아 내려앉을 무렵 헐어내 토분(土墳)으로 이장하였다. 신안 섬들의 초분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도초도와 비금도 등 몇몇 섬에 여러 기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도초도에 4∼5기, 증도에 10여기가 남아있다. 어업기계화와 어촌 떠나기 현상으로 초분을 써야 할 이유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 도초의 풍수지리와 명당
□ 신안의 도읍지
목포에서 배를타고 구불 구불한 서남해안 해협을 돌고 돌면 섬들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도초도와 비금도가 보이고, 두섬을 잇는 연도교인 서남문대교가 용이 하늘로 올라 가듯이 용틀임하는 모습은 두섬이하나가 되어 서남해안 시대의 중국과 교역하는 첫관문이 되고 장차 신안군의 도읍지가 될것으로 예측 하는 미래의 섬이며. 이곳의 지역민들은 도초도의 지명처럼 신안군의 도읍지가 될것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여러 사례에서 보아왔듯이 옛 선인들이 지어놓은 지명은 언젠가 지명에 걸맞는 효과를 발휘해 왔기 때문에 이곳에도 일종의 도읍이 들어서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 도초의 8 명당
도초는 섬에서 보기 드물게 8명당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8명당은 이곳을 찾는 여러 지관들과 섬의 입도조들이 상당부분을 점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네 곳은 이미 토착 성씨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들 4개의 지역은고란리의 장흥 고(長興 高)씨, 만년(萬年)리의 김해 김(金海 金)씨, 오류리의 경주 최(慶州 崔)씨, 수다리의 파평 윤(坡平 尹)씨 등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명혈은 윤씨들이 수다리 뒷산에 잡았다는 천도낙토지지(天桃落土之地)의 채혈. 하늘에서 복숭아가 땅에 떨어진 곳이라는 풀이의 이 명당은 도초도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혈명인데 아직은 그 큰 기운이 발휘되지 않은 미완의 혈이다.
도초에서 큰 혈자리의 하나는 만년사(萬年寺)라는 암자가 자리잡고 있는 만년리 마을 뒤편의 산자락이다. 절의 창립 연대가 1백년 안팎에 불과한 이 만년사는 대부분의 사찰이 불교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달리 숫자를 지칭하는 만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주민들은 이 절이 무궁하게번창하고 지역민들에게 오래도록 복을 내려주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지어 졌다고 말하고 있으니 지명과 풍수설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만년사는 도초 주민들이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호수를 끼고도는 산중턱에 아담한 대웅전 한 채만을 지니고 있으나 주변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때묻지 않은 풍치를 갖고 있다. 계곡 사이로는 도초의 넓은 곡창지대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고 좌우엔 우람한 산세를 양팔로 감싸안듯 청룡과 백호를 거느리고 있다. 바로 이 백호의 큰 기운 사이에 김해 김씨들의 선조묘와 경주 최씨 선조묘가 시샘하듯 그 기세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섬 지역의 명혈들은 바다를 건너온 탓인지 발복 여부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발복의 기운을 보이더라도 약간의 풍파가 있는 사례가 많아 지사들에게 연구 과제로 남기고 있다. 이런 정경은 연하부수형이라는 대혈을 지니고 있는 하의도에서 김대중씨 같은 인물을 배출함에 따라 명당의 기운이 발현되는 것도 때가 있음을 일러주는 사례일까?
이곳 도초의 8명당이라는 곳 역시 점차 그 힘을 얻고 있으며 요즘에 들어 점차 인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혈기(穴氣)의 발현시기가 다가오지 않는가 조심스럽게 예견해 보아야 할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