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봄을 기다리며
양해광
철들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알고부터 해마다, 해마다 새봄이면 몸도 마음도 아프도록 바쁘다.
응당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자람을 위해 생명활동을 하게 되는 계절이 새봄이지만, 언제나 새봄이면 온갖 새 생명들을 두루두루 만나야 하는 예사롭지가 않은 계절이어서 아프도록 바쁜 것이다.
따뜻한 바람불고 봄비 내려 꽃 피고 새가 울어서가 아니고 하루가 다르게, 아니 금방금방 자라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형형색색으로 살아가는, 저마다의 신비스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싶어서다.
새봄은,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 잘 다듬어 가꿔진 개나리 벚꽃이 보기 좋아서가 아니라 들판 여기저기 논밭언덕에서 스스로 꿋꿋하게들 자라나 꽃피우는, 아무리 보아도 정다운 내 누이 같은 들꽃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어서 나는 새봄을 기다려 마중을 하고 보낸다.
이른 새봄마중을 하면서부터 신록이 우거지는 오뉴월 초여름까지, 아직은 채 새봄의 흔적이 다가시지 않았는데도 또 벌써 이듬해의 새 봄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게 되는, 부질없는 내 마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어언 약 50년 전, 초등학교 3학년 말, 국어시간이었다.
맨 마지막 단원에 이런 동시童詩가 있었다.
동시내용에 딱 어울리는 그림도 함께.
봄 꽃 나비
입김으로 호호호
유리창을 흐려놓고
썼다가는 지우고
또 써 보는 글자들
봄 꽃 나비
봄 꽃 나비
봄아 봄아 오너라
어서 오너라
봄이 되면 나는 나는
새로 사학년
내 마음엔 벌써
봄이 와 있다
봄을 찾아 산으로 들로 나가자
노랑 봄을 찾아서 산으로 가자
파랑 봄을 찾아서 들로 나가자.
담임선생님께서도 무척 봄을 기다리기라도 하신 듯이 설레는 듯 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한 줄 한 줄 리듬 맞춰 읽어주시던 그 때, 어느 예민했던 여자동무는 가슴 설레는 분위기에 취했던지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봄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표정을 엿볼 수가 있었다.
일부러 외우지 않았는데도 그 때부터 이 동시 「봄 꽃 나비」는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언제나 내게 새봄은 경이롭기만 했고 시도 때도 없이 기다리게만 했다.
그래서 그 시절 이른 봄 어머니를 따라 따뜻한 바람 부는 들판의 보리밭을 매면서 보리를 알고 새봄을 알며 기다리게 되었다.
보리밭골에 돋아나는 오만들꽃들을 알아보면서 응당 새봄인데도 새봄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내내 새봄을 사랑해 오고 있다.
그러면서 보리밭의 골칫거리인 독새풀, 명아주, 냉이, 꽃다지, 꽃마리, 민들레, 여뀌, 별꽃, 봄맞이꽃, 자운영, 토끼풀, 봄까치꽃, 광대나물꽃, 주름잎꽃 등등, 이런 것들이 호미질에 무참히 뽑혀죽게 되는 것이 철없이 어린 마음에도 못내 안쓰러웠다.
그렇게 새 봄날 내내 보리밭의 들꽃들은 미처 피어보지도 못한 채 호미질로 죽어가는 모습에 새봄은 내게 마냥 서러운 계절로도 찾아왔다가 야속하게 떠나가곤 했다.
그래도 살아남은 새 봄날의 들꽃들은 하도 자람이 빨라서 단 한나절의 시간에도 먼눈을 팔았다가는 조금 전의 모습과는 딴판이어서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을 뜻밖에 되찾은 듯 생경스럽다.
하늘이 파랗게 열려 먼 산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고 시냇물도 새파랗게 흐르는 날, 풋풋한 봄 냄새 가득한 논밭언덕에 앉아 온종일 봄날의 들꽃들을 뚫어지도록 보고 또 보아도 새파란 이파리들은 싱그럽다 못해 찬란하기까지 해서 하얗고, 노랗고, 빨간 꽃들의 돋보임을 더해준다.
손끝으로 문지르기라도 한다면 온갖 고운 색깔들의 물이 흐를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서 봄을 그냥 봄이라 하지를 않고 새 봄이라고들 했을까?
어느 것 하나 새 것 아닌 것이 없는 때가 바로 새 봄이다.
뻐꾸기가 울어 아카시아꽃잎이 바람에 흩날려도 아직은 여름 아닌 봄이어서 새 봄이다
아침이슬이 아직 깨어나기 전, 지천에 자라는 들꽃들을 보라.
그 이름들을 다 몰라도 어떠랴! 어디서 한두 번 쯤 무심코 본 적이라도 있다면 좋으니 종류별로 하나씩 하나씩을 살펴보라.
그리고 오후나절이면 들판에 나가 새봄바람에 일렁이는 갓 팬 보리이삭의 물결을 보라.
조금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새봄을 살펴본다면 두 눈이 시려 시방 지켜보는 중에도 새 봄은 그립고 자꾸자꾸 새로워지기만 할 것이다.
이렇듯 새 봄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라면 모두를 새 봄이 다가도록 내내 지켜보며 함께하고 싶어서 안달하지만 제풀에 지쳐 그러질 못하고 물러가는 새봄을 붙잡을 수도 없어 허둥대기만 한다.
새 봄의 귀한 새 생명들을 보고 만나는 것이란 기껏 한 해에 한 번씩만의 소중한 기회여서 아무리 미리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본들 못다 본채 떠나보내고 아쉬워하는 지난해의 어리석음을 결코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어도 역시 올해도 기어이 모두를 못다 보고 말았다.
이제 다시금 일 년 뒤의 새 봄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며 기다려야 한다.
다가올 올겨울엔 성에 낀 유리창에다 손가락으로 ꡐ봄 꽃 나비ꡑ 글자들을 써 놓고 그 옛날 어린 시절처럼 초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여느 때처럼 또 새봄을 기다려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