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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한국어판
진랍풍토기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는 13세기말에 크메르 제국에 원나라 사신으로 간 주달관이 쓴 크메르 제국에 대한 여행기이자, 종교, 풍습 등을 기록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책자이다.
주달관
주달관(1266년–1346년)은 원나라 성종 테무르 칸 때의 관료로 원나라 사신으로 당시 캄보디아와 앙코르 사원을 둘러보고 여행기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썼다. 그는 저장 성 온주 사람으로 1296년 8월에 앙코르에 도착하여, 그곳에 1년간 머물면서 당시 그곳을 통치하고 있던 인드라바르만 3세의 곁에서 1297년 7월까지 머물면서 기록을 남겼다. 꾸준한 교류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 그가 캄부자(깜부자)를 방문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신은 아니었지만 주달관이 남긴 진랍풍토기와 같은 기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저서는 현재 크메르 제국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기록에는 바이욘 사원과 바푸온 사원, 앙코르와트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당시의 풍습과 일상 생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원나라의 사신
1296년 중국 원나라의 사신으로 주달관(周達觀: 1266-1346)이 앙코르에 도착하게 된다. 주달관은 원나라 저장 성 온주 사람으로 원나라 테무르 칸의 사신으로 1296년 2월 20일 온주를 떠나 푸저우 항를 거쳐 하이난을 경유하여, 안남을 거쳐 캄보디아 껌뽕 짜암(캄퐁 참)의 도시에 메콩 강 수로로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떤레 삽 호수로 작은 배로 갈아타고 12일을 항해하여 당시 수도인 앙코르 톰에 도착하였다.
앙코르 톰에 대한 기록
주달관은 여러 개의 출입문을 가진 오대문에 대해서 기록하였는데, 동쪽만 2개의 문이 있고, 나머지는 각각 하나씩이라고 앙코르 톰을 기록하고 있다. 앙코르 톰은 다리로 연결된 강을 가로지르는 넓은 해자에 의해 둘러 쌓여 있는데, 다리에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나가의 머리를 당기는 54개의 조각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앙코르 톰의 대문 꼭대기에는 다섯 개의 불상 두상이 있고, 그 중 네개는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결 론
진랍풍토기의 발견
<진랍풍토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서구에 소개한 사람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발견자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다.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가 1898년 하노이에 '프랑스 극동학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遠東博古院: EFEO)을 설립하였는데, 이곳의 교수였던 펠리오가 학회 기관지에 "주달관의 캄보디아 견문록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1902년 역주를 발표하였다.
진랍풍토기의 가치
주달관은 인드라바르만 3세(인드라와르만 3세)가 통치하는 이곳 크메르 수도에 1년을 머물면서 크메르 사회를 관찰한 40장 분량의 기록 진랍풍토기(真臘風土記)를 남긴다. 그는 종교나, 법제도, 왕위, 농경, 노예제도, 새, 식물, 목욕, 의식주, 도구, 동물, 상거래 등의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은 현재 앙코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으며, 또한 재미있는 여행기로 남아 있다.
출판서적
(자료출처) 앙코르왓 디지털콘텐츠화 홈페이지
주달관과 진랍풍토기


주달관의 생몰 연대에 대해서는 원대의 학자 오구연(吾丘衍)의 죽소산방시집(竹素山房詩集) 권2에 “주달가(周達可)가 봉사(奉使)가 되어 진랍국에 갔다 와서 그 풍속을 기록한 글을 지었다. 이를 기려 시 3수를 짓는다”라는 제목으로 주달가의 책 내용을 감상하는 시가 실려 있다. 봉사가 되어 진랍국에 다녀오고 풍속을 기록한 글을 지었다면 주달가가 바로 주달관이고 그 책이 바로 진랍풍토기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주달가는 주달관의 오기일 수도 있고 자(字)를 다르게 썼을 수도 있다.
오구연의 시 중 한 수에 “이역(異域)을 두루 다니며 풍속을 듣고 진기한 풍경을 보며 장년이 되었다”는 시구가 있다. 이에 따르면 주달관이 진랍에 다녀온 1296년-1298년에는 장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장년은 대략 30세, 또는 3, 40대의 연령을 의미하므로 주달관이 태어난 해는 1260년 전후로 보인다.
한편 원대 임곤(林坤)의 성재잡기(誠齋雜記)에는 주달관이 서문을 쓰고 그 말미에 “병술년 가평(嘉平) 보름에 영가 주달관이 짓다”라고 적혀 있다. 병술년은 지원(至元) 23년(1286)이거나 지정(至正) 6년(1346)인데 지원 23년은 주달관의 나이가 20대여서 다른 사람의 저서에 서문을 써주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국 정확한 날짜는 지정 6년 12월 15일이 된다. 따라서 적어도 1286년에는 주달관이 건재했던 것으로 보여 위에서 추산한 생년에서 계산하면 이 때는 80대가 되며 그 후 오래지 않아 별세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구연의 시 내용을 보면 진랍풍토기를 읽고 나서 쓴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묘지(墓誌)에는 지대(至大) 4년 납월(臘月) 갑오(甲午)일에 운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312년 2월 5일이다. 따라서 진랍풍토기가 지어진 때는 늦어도 1312년 초 이전이다. 그리고 1297년 8월에 귀국하여 캄보디아에서 머물면서 얻은 견문을 상세히 모으고 정리하였다고 생각하면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14세기 초를 전후하여 저술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진랍풍토기는 주달관이 약 1년 동안 캄보디아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13세기 말 캄보디아의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특히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화교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캄보디아가 번성하던 시기, 즉 앙코르 시대의 사료로는 비명이 있지만, 여기에 담긴 내용은 기본적으로 궁정과 귀족층과 관련된 내용에 그쳐서 전반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내용에 그친다고 하겠다.
이에 비해 진랍풍토기에는 궁정과 귀족들의 모습에서부터 일반 사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내용이 담겨 있는데 앙코르 시대에 대한 캄보디아 국내의 문헌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진랍풍토기는 유일한 자료로서 귀중하다. 캄보디아와 관련하여 이 책 전후로 등장한 한문 사료와 비교해 보아도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캄보디아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특히 중요한 문헌이라고 하겠다.
진랍풍토기 개요_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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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이식이 편집한 총서로서 이 중 권103에 실려 있다. 만력(萬曆) 12년(1584) 간본이 있고 그 후 1940년 영인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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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오관(吳琯)이 편집한 총서로서 만력 연간(1573-1620)에 간행되었는데 그 일지(逸志)의 분지(分志)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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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백천학해"는 송의 좌규(左圭)가 편집한 총서인데 만력 말에 원래의 100종에 추가로 문헌을 모아 간행되었다. "진랍풍토기"는 증수된 부분 중 ‘계집(癸集)’에 들어 있다. 오탈자가 많으며 "고금설해"본에 의거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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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에 도정(陶珽)이 "설부"를 증보했다고 전해지는 총서로서 "중편백천학해" 등 여러 가지 총서의 간판(刊板)을 이용하여 120권으로 편집되었다. "진랍풍토기"는 ‘弓62’에 들어있다. 만력 38년(1610) 간본과 청의 순치(順治) 4년(1647) 간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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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서집성"은 청 조정의 명으로 편집된 것으로 옹정(雍正) 3년(1725)에 이루어진 10,000권짜리 총서이다. "진랍풍토기"는 ‘변예전(邊裔典)’에 들어 있는데 중교설부본을 기반으로 수록된 것이어서 오탈자가 많다. 레뮈사(Remusat)의 프랑스어역의 원본이 이 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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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는 청의 건륭제(乾隆帝)의 명으로 간행된 총서로 건륭(乾隆) 46년(1781)에 일단 완성되었다. "진랍풍토기"는 ‘사부지리류(史部地理類)’에 들어 있다. 고금설해본을 근거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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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문유(王文濡)이 편집하여 민국(民國) 4년(1915)에 간행한 총서이다. "진랍풍토기"는 제29책에 들어 있다. 고금설해본을 근거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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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광문서국(廣文書局)에서 민국 58년(1969)에 간행한 총서 안에 들어 있다. 설고본의 재간행으로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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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총서에 담긴 판본 외에 온주시립도서관에 소장된 1829년본(瑞安許氏 巾箱本)과 북경대학도서관에 소장된 초본(吳翌鳳 手抄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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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와 연구

그후 캄보디아에 대한 연구의 진전에 부응하여 발표한 사람이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이다.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가 1898년 하노이에 ‘프랑스극동학원(Ecole Francais d'Extreme Orient, EFEO)’을 개설하였는데 이곳 교수였던 펠리오가 학원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에 "주달관의 캄보디아 견문록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본격적인 역주를 발표(1902년)하였다. 이 역주에 사용한 판본은 고금설해본에 의거하여 중교설부본과 고금도서집성본을 참조하였다.
펠리오의 역주에 부분적으로 보완 교정을 한 사람은 같은 학원의 교수이자 후에 학원장이 되는 조르쥬 세데스(George Coedes)로서 1918년과 1933년에 두 편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단편이기는 하지만 캄보디아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여 펠리오의 주석과 함께 중시되고 있다.
"진랍풍토기"의 영어 번역은 두 종류가 있다. 길먼 다시 폴(Gilman D’Arcy Paul)이 방콕에서 1967년에 발간한 것과 머스키(J. Mirsky)가 1964년에 시카고에서 간행한 것이다. 둘 다 펠리오의 역주에서 본문만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밖에 중국에서는 많은 관심 속에 번역서와 주석서는 물론, 연구 논문이 다수 간행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72년(高橋保), 1980년(三宅一郞,中村哲夫)에 간행되었다. 특히 그동안 간행된 갖가지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와다 히사노리(和田久德)가 1989년 역주를 간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캄보디아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을 반영하듯 "진랍풍토기" 번역은 단 한 편이다. 서규석의 "신화가 만든 문명 : 앙코르 와트" (리북, 2003)가 바로 그것인데 "진랍풍토기"는 그 중 제3부에 ‘앙코르 시대로의 시간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번역은 주로 길먼의 영어 번역서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번에 앙코르왓 문화원형 사업의 일환으로 전자불전연구소에서 번역한 "진랍풍토기"의 저본은 사고전서본이다. 그리고 각주는 서규석의 번역과 와다 히사노리의 일역본("眞臘風土記 : アンコ,ル期のカンボジア", 東京 : 平凡社, 1989)에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사고전서에 실린 ‘제요’를 함께 번역하여 실었다. 캄보디아어의 우리말 표기는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발표한 ‘외래어표기법’을 따랐다. 그리고 사고전서본에 있는 한문 원문도 함께 실었다. 어쨌든 한자 원본을 바탕으로 한 국내 최초의 번역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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