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사피르의 명저, "세계화의 종말"이 번역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에게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자크 사피르가 주는 강력한 카운터가 되겠네요. 특히 친애하는, 그리고 존경하는 유승경 박사님이 이 책을 번역하여, 더욱 글이 매끄러워졌습니다.
일단 이책은 다양한 방면에서 '신자유주의 교리'의 허구성을 밝힙니다. 자유무역이 성장을 촉진한다거나, 시장이 정부 등의 감독기구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등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다양한 사례와 증거, 통계를 통해 낱낱히 밝히죠.
먼저 리카르도가 주장했던 '비교우위'의 모형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밝힌 아래 부분은 매우 신선하고 또 통쾌했습니다("GDP와 총량통계의 착시효과" 부분).
"쌀과 커피라는 두 가지 재화만을 생산하는 나라를 가정해보자. 이 나라가 커피에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어 쌀을 버리고 커피만 재배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이 나라의 GDP는 증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쌀은 주민들이 상업적으로 팔기 위해 재배한 것이 아니라, 자체 내에서 소비하기 위해 배재했던 것이기에 쌀의 생산 감소로 인해 GDP의 감소는 나타나지 않는 반면 커피 수출로 획득한 외화는 GDP 계산에 추가되기 때문이다. 이 예는 매우 단순하지만 실제로 서부 아프리카에서 자주 접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수출품의 생산이 늘어나긴 하겠지만,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같다면 노동투입량이 증가한 비율만큼 증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커피의 공급증가는 국제 커피가격의 하락으로 연결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반면 가족단위의 식량 생산활동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 대문에 쌀에 대한 식량 수요가 증가해 세계 시장에서 쌀의 가격은 상승할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쌀과 커피 사이의 상대가격은 구조개혁 이전과 달라지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쌀 수입가격이 커피 수출가격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아져, 커피 수출로 올린 수익으로 구매할 수 있는 쌀의 양이 줄어들게 된다. 이 나라는 수출상품의 생산이 증가하여 GDP가 증가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부는 결과적으로 감소한다. 물론 세계은행을 비롯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전파자들은 매우 만족해 한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GDP는 이전보다 상승했기 때문이다."
웃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나라가 자유무역으로 이득을 얻는다?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원화의 미래"를 쓰면서 비교우위 관련 글을 읽어보는 데.. 참으로 엄격한 조건에서만 성립한단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나라처럼 교역조건의 악화를 겪을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더욱 말할 필요가 없죠.
이 책의 멋진 부분은 이렇듯 '신자유주의' 이론의 파산을 실증적인 사례를 통해 논박한다는 것입니다. 시장에 내 버려두면 뭐든 잘 풀려간다는 '시장만능주의'의 교리에 대해서는 거미집 이론이 역시 결정타를 먹입니다("거미줄 이론이 보여준 불균형의 덪" 부분).
"세계무역기구가 농업 부문에 대한 보조금 금지를 기본 방침으로 정한 것은 부유한 나라, 특히 미국에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여러 연구들은 개도국이 농산물의 무역자유화 결과 완전한 패배자의 자리로 굴러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결론은 사실 조금도 놀라운 것이 아니며, 근 80년 전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1920년과 1938년 사이, 미국 통계청에서 근무했던 농업경제학자였던 이지키엘은 수요와 공급의 조정 속도가 같지 않으면 완전경쟁은 반드시 불균형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결론은 '거미줄 모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기술적으로 보다 더 정교화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이 이론의 핵심은 보조금이나 보호조치가 농업생산의 효율성 달성 조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농업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조선이나 원유 생산과 같이 공급의 탄력적인 조절이 불가능한 업종도 해당됨), 특히 농업의 경우에는 수요와 공급 간에 큰 괴리가 발생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수요는 가격변화에 따라 빠르게 조정될 수 있지만 공급은 그렇지 못하다. 공급량은 일단 결정되면 다시 바꿀 수 없는 속성이 있다. 농업의 경우 이 문제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돼지고기 가격이 상승하면 돼지를 많이 키우기 위해 사료가 더 많이 필요하므로 옥수수를 심을 유인이 생긴다. 그런데 옥수수 파종면적을 늘리기로 결정하면 당장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일정기간 공급은 수요보다 훨씬 더 경직적으로 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가격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 다루는 게 타당하다. 다라서 농산물의 가격 책정을 시장에 맡기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없는 짓이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이 부분은 아래 <그림>에 보듯, 이미 제가 "호황의 경제학 불황의 경제학(군터 뒤크 지음)"에서 소개했던 내용과 알맥 상통합니다만... 이걸 이론적인 근거와 함께 보여주니 더욱 확실합니다. 군터 뒤크는 이런 현상을 "인간의 제한적 합리성"에서 풀었지만, 제가 보기엔 거미집 모형으로 설명하는 게 더 명확한 듯 합니다.
암튼.. 이 책 정말 멋집니다. 제가 지금껏 본 책 중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가장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책이며, 또 그 논리 근거가 감정적이지 않고 객관적입니다. 이 책에 인용되어 있는 수 많은 논문을 찾아보느라 요즘 바쁘며, 또 많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를 들르는 모든 분들에게 강력 추천합니다.
끝으로 쉽지 않은 책 번역하시느라 고생한 유승경 박사님에게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그림> 돼지고기 사이클의 전개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