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I. 해방이후 한국성결교회의 구조변화
II. 건국과 성결교회
III. 공산주의와 성결교회
맺는 말: 정리와 남은 문제
머리말
1945년 해방이후 한국사회는 매우 심각한 사상적인 혼란을 겪었다. 일제에서의 해방은 미국이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국가였다. 이것은 한국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제 기독교적인 민주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이것은 북한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정권이 들어서므로 한국의 개신교는 필연적으로 반공적인 기독교국가의 수립이라는 명제를 강하게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본 논문은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성결교회가 이런 급변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성결교회의 기록은 수난과 재건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왔다. 이것은 성결교회의 통사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성결교회가 6. 25 한국전쟁에서 입은 수난은 오영필목사가 편저한 [성결교회수난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한국전쟁과 성결교회와의 관계를 학문적인 차원에서 최초로 다룬 것으로는 정상운교수의 "6. 25 한국전쟁과 성결교회"가 있다. 그러나 이 논문 역시 한국전쟁에서 입은 성결교회의 수난과 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방이후 한국성결교회의 사회인식에 대해서 연구한 것은 없다. 본 논문은 이 점에 주목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해방이후 한국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해방이후 한국사회에 대한 연구가 역사학계와 사회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해방이후 한국교회도 연구의 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강인철과 김흥수의 연구이다. 이들의 연구는 한국교회사의 연구를 선교초기와 일제 강점기의 연구에서 최근까지 그 범위를 확대해 주었다. 아울러서 해방이후 한국기독교가 어떻게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했는지를 보여주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교회는 일본의 감시대상이었다. 하지만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미군의 진주와 더불어 한국사회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주류는 자신을 한국사회의 주체로서 인식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결교회는 어떤 입장을 가졌을까? 성결교회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해방이후 정치의 계절에서 성결교회는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또한 비정치적인 것을 주장하는 성결교회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졌을까?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성결교회가 가장 극우적인 정치세력인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한 것은 왜 일까? 이것이 본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다.
I. 해방이후 한국성결교회의 구조변화
한국성결교회는 해방후 중요한 변화를 했다. 그것은 초기부터 성결교회를 이끌어 왔던 이명직목사가 교단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났다는 것이다. 이명직목사는 명실공히 일제시대 성결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는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nary Society: OMS)의 지지를 받았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한국성결교회를 이끌어 왔다. 그는 서울신학교(원래는 경성성서학원, 경성신학교이었으나 해방후 서울신학교로 명칭을 바꿈. 그후 서울신학대학이 됨)의 책임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왔고, 대부분의 성결교회 교역자들은 그의 제자였다. 또한 그는 1920년대 성결교회가 이사회 제도를 도입했을 때 부터 이사회의 멤버로서 인사와 재정에 깊숙하게 관여하였다. 이런 것들은 그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치로 만들었다.
하지만 일제 말에 그가 보여준 행동은 해방후 그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일찍이 신사참배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비록 그가 총독부의 교단 통합을 반대하였지만 그는 대체로 총독부의 정책을 지지하였다. 특히 그는 성결교회가 해산당하였을 때 그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은 그를 친일적인 인사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해방후 그는 일선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성결교회는 곧 바로 재흥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박현명목사가 위원장이 되었다. 재흥총회를 계기로 한국성결교회를 이끌고 있던 이명직, 최석모목사등은 일선에서 물러나고, 박현명, 이건과 같은 분들이 등장하였다. 일제말 한국성결교회는 감독제도였고, 그 최고 책임자는 총리였다. 하지만 해방이후 성결교회는 재흥총회에서 대의제도를 지향한다고 못 밖았다. 재흥총회는 의장으로는 천세광목사를 선출하고, 총리로는 박현명목사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건목사가 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천세광은 일찍이 6. 10만세 사건때 일제에 항거한 인물이며, 끝까지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하지만 성결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총리였다. 박현명목사는 일제말부터 교단의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건목사는 교단정치에 큰 관심이 없이 신학교교수로서 충실했던 학자풍의 인물이었다. 이와 더불어서 해방이후 중요하게 활동한 인물로서 김유연목사를 들수 있다. 그는 [활천]의 편집책임을 지고 있었다. 해방후 성결교회는 이렇게 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성결교회의 이와같은 세대교체는 다른 교단과 비교하여 볼 때 매우 부드러운 것이었다. 이미 장로교회가 일제말의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을 겪었고, 그후에도 계속 내분을 경험한바있으며, 감리교도 재건파와 부흥파사이에 갈등이 컸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이명직, 최석모목사같은 지도자들이 일제시대의 행적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이것을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성결교회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이명직목사의 제자라는 점과 비록 지도자들에게 친일적인 요소가 있지만 그들도 교단이 폐쇄되어 다같이 희생자라는 점이 다른교단과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47년에 열린 제 2차 재흥총회에서 총리제도를 폐지하고, 보다 분명한 대의제도를 확립하였다. 여기에서 박현명목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제 박현명목사는 분명하게 성결교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당시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가장 당면한 문제로 동양선교회와의 관계회복을 들었다. 교단의 재흥을 위해서는 동양선교회와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이 최석모목사였다. 그는 원래 선교사의 통역으로 수고하였으며, 누구 보다도 선교사를 잘알았다. 한국성결교회는 최석모목사를 통하여 동양선교회와 연락을 취하여 빨리 복귀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박현명목사를 미국으로 파송하여 적극적인 조속한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1948년 11월 한국을 떠난 박현명목사는 약 16개월 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견문을 넓히는 한편 한국성결교회의 사정을 알렸다. 그리고 1950년 3월에 귀국하였다. 박현명목사가 미국에 있을 동한 성결교회의 총회장은 최석모목사였으며, 박현명목사가 귀국한 다음 다시 그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박현명목사가 중심이 된 해방이후의 성결교회는 한국교회의 연합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일제시대 한국교회는 장감만이 연합사업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일제말 일본의 종교정책에 의하여 조선기독교연합회가 만들어졌고, 여기에 성결교, 구세군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이 해방이후에도 연결되어졌다. 박현명목사는 일제말부터 이런 연합사업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해방후에 박현명목사는 한국기독교협의회 제 3대 회장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이제 성결교회는 이외에도 찬송가합동위원회, 주일학교연합회등 한국의 연합사업에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일제시대의 고립주의에서 탈피하여 한국교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활동한 것이다.
당시 한국기독교협의회는 구국전도만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1950년을 구국전도의 해로 정하였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한경직목사와 옥호열선교사였다. 이들은 네 그룹으로 나누어서 지리산에 두 그룹, 삼팔선부근에 한 그룹, 대구에 또 한그룹을 파송하였다. 성결교회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지리산 지역에는 총회장 최석모목사를 비롯하여 유세근, 한명우, 양석봉, 김경식, 이정활(이상 목사), 박명원, 김영용(이상 전도사)등이 참여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같은 해 3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 한달 동안 한국기독교협의회는 선명회의 밥 피얼스목사 등을 초청하여 전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진행시켰다. 당시 서울집회는 남대문에서 열렸는데 12,000명이 운집하였다.
이렇게 전도구국운동이 한창일 때 6. 25 전쟁이 일어났다. 이 6. 25 전쟁은 한국성결교회의 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해방후 한국성결교회를 이끌어가던 주도세력들이 다 납북된 것이다. 당시 납북된 인사로는 박현명, 이건, 최석모, 박형규, 김유연, 유세근목사였다. 이들은 신학교에서 총회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던 분들이다.
사실 6. 25를 전후한 한국의 상황은 매우 혼미하였다.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하였지만 일부에서는 기독교신앙과 공산주의가 융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공산주의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북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하고 남하한 교역자들은 6. 25가 발발하자 즉각 서울을 떠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혹은 공산주의도 종교의 자유를 준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남아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납북된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이 서울을 떠니지 않고 있다가 납북된 것이다.
이들의 납북으로 인해서 성결교회는 지도력의 공백이 왔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명직목사는 일찍이 피란길에 나섰으며, 6. 25 이후에 그를 중심으로 다시금 복구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951년 부산에서 열린 제 6회 총회에서 이명직목사는 다시금 성결교회의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그 다음해에도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전쟁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중요 지도자들이 납북된 상황 속에서 이명직목사가 등장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부산 피난시절 이명직목사의 재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신학교의 재개이다. 해방이후 신학교의 명예교장으로 물러 나있던 이명직목사가 이제 교장으로 다시 취임하여 교역자 양성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명직목사는 동양선교회의 도움을 얻어 1951년 6월 14일 다시 학교를 개교하였다. 전쟁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신학교로 몰려들어 학생들은 약 200명 가까이 되었고, 이들은 후에 성결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명직은 원로였고, 실질적으로 교단의 일을 앞장서서 할 위치는 아니었다. 이때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김창근목사였다. 김창근목사는 제 1회 재흥총회부터 총회 서기 2회, 부총회장을 5회, 총회장 2회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해방후에는 박현명목사를 도와 재건에 힘썼고, 6. 25 전쟁부터는 이명직목사를 도와 교단복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박현명목사가 납북된 다음 이명직목사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교단을 이끌어 갔던 인물은 김창근목사였다.
성결교회는 전시의 연합사업에 열심이었다. 1951년 1월 9일 부산중앙교회에서 한경직목사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협의회 전시비상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 감리교(류형기), 성결교(김창근), 구세군(황종률)이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부산에서 장감성 교역자 약 60-70명이 함께 모여 수양회를 갖기도 하였다. 1952년 3월에는 장감성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재정을 마련하여 교역자들의 봄 의류를 공급하여 주기도 하였다. 이 당시 성결교회는 매우 적극적으로 한국교회의 연합사업에 참여하였다.
환도 이후에도 한국성결교회는 한국기독교협의회의 활동에 열심이었다. 1953년 성결교회의 김창근목사는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기독교협의회는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색깔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 한국기독교협의회가 행한 사업을 보면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사역을 한 것을 알수 있다. 한국기독교협의회(NCC)는 세계적인 복음주의자인 빌리 그래함과 밥 피얼스 같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전도운동을 벌였는데, 이들은 모두 미국 NCC와는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운동들을 주선하고 이끌어 간 중심에는 한경직목사가 있었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온건 복음주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NCC가 미국의 NCC와 관계를 강화하고, 이어서 WCC에 가입하게 되자 한국 NCC는 진보주의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NCC의 일부는 공산주의 교회와도 교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6. 25 전쟁을 경험한 한국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소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기독교복음동지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이다. 한국의 NAE 역시 처음에는 한국인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 몇 명이 김재준목사의 진보적인 가르침에 반발하여 진정서를 낸 사건이 있었는데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이 1948년에 신앙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후 6. 25 전쟁 중에 미국의 NAE가 구호품을 보내온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이 단체가 미국에서 진보주의에 반대하여 생긴 단체라는 것도 알려졌다. 그리하여 한국의 신앙동지회는 미국 NAE와 연결하기 시작했고, 1952년에 정규오목사를 회장으로 한국 NAE가 조직되었다.
사실 미국 NAE는 극단적인 근본주의를 반대하고, 진리에는 타협하지 않지만 복음전도에 있어서는 협동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입장은 극단적인 분리주의자인 ICCC와는 다른 것이다. 미국의 성결운동은 처음부터 미국의 NAE 창설에 관여하였으며, OMS도 NAE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특별히 미국의 NAE의 구호단체인 세계구회위원회(World Relief Commission: WRC)는 한국의 OMS를 통하여 구호활동을 하였다. 6. 25 동란을 통하여 WRC의 도움을 받았으며, 동란 이후에는 더 큰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서 한국성결교회는 NAE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관계가 설정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한국에는 NAE의 지도자들이 많이 방문하였다. 6. 25 전란도중과 그 이후에 미국 NAE의 창설자인 풀러신학교 교장 오켕가(H. J. Ockenga)와 NAE의 회장을 지낸 라이트(J. E. Wright), 또한 WRC의 회장도 한국에 방문하였다. 특별히 1952년에 이어 1955년 3월에 내한하여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격려하였고, 이어 열린 제 2회 총회에 성결교회가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이명직목사는 NAE의 신앙이 성결교회와 일치하기 때문에 교단적으로 가입하는 것이 옳다고 제안하였고, 여기에 청중은 만장일치로 응답하였다. 이렇게 교단적으로 NAE에 가입한 성결교회는 NAE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곧 바로 김창근목사는 회장으로 천순봉목사는 총무로 활동하였다.
성결교회가 NAE에 가입하게 된 것은 동양선교회의 권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NAE가 신학적으로 복음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해방후 한국교회는 고등비평에 관한 문제로 논란을 벌여왔고, 그러는 가운데 1954년에는 예장과 기장이 분열하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는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성결교회가 본래부터 갖고 있던 성서중심의 신앙을 분명하게 하기를 원했고, 그 동지를 NAE에서 발견한 것이다. 당시 신학교교장이었던 이명직목사와 총회장이었던 김창근목사는 자유주의야말로 공산주의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NAE에 가입할 것을 역설했다.
김창근목사는 NCC에 가입하고 있는 교단이 어떻게 NAE에 가입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NCC는 교파연합단체요, NAE는 신앙동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NCC는 점점 진보적인 색채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NAE는 단지 동지적인 모임이 아니라 교회의 방향을 복음주의로 이끌어 놓으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1960년에 나타날 분열의 조짐이 이미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II. 건국과 성결교회
해방 후 한국교회는 기독교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첫째로 해방이 기독교국가인 미국으로 인해서 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연합군 사령광인 맥아더는 미국이 점령한 지역에 기독교국가를 건설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적인 변홍규박사는 "우리의 해방과 자유"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국은 본래 종교자유를 위해 건설된 국가요, 예수님의 인생과 개인을 존중하는 정신에서 나온 민주주의를 지키는 나라이다. 그래서 세계 약소민족을 보호한다.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은 다 조선을 해방시키는 공약인데 예수님의 진리에서 나왔다. 막카사 원수가 미국육해군과 일본에 상륙할 때 한 말은 "일본은 항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신학문제해결이다"고 했다한다. 연합군이 움직이는 그 배후에는 주님이 계시다.
이 글에서 우리는 변홍규박사가 기독교와 민주주의와 미국을 동일선상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해방이후 미국은 한국에 미국식 국가를 형성하려고 했고, 미국식의 국가란 어쩔수 없이 친기독교적인 국가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국가적인 성격은 단지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이후 남한에 돌아온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기독교적인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같은 분들은 다 같이 개신교신자였다. 이들은 기독교신앙을 근간으로한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고 역설했다.
해방후 [활천]은 일제시대와는 달리 상당히 정치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이명직목사는 원래 [활천]은 "원래 총독의 정치나 시사에 대하여는 일절 논설한 일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해방의 감격은 성결교회로 하여금 해방된 조국의 건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해방이후 6. 25 전쟁까지 [활천]을 편집하였던 인물은 김유연목사였다. 그는 일제말에 성결교회의 대표로 [기독공보]의 편집을 맡았고, 해방이후에도 이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활천]의 편집일도 겸임하고 있었다. 김유연목사는 연합활동을 통해서 아마도 바깥세상에 눈이 떳고 이런 측면에서 [활천]은 보다 개방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해방의 흥분이 가라앉자 사라졌다. 김유연목사는 1950년 4월 5월호 [활천]의 편집후기에서 이제 비로소 [활천]이 정궤도에 들어섰다고 말하면서 "해방직후의 잡음을 다 제하고 다시 초시대로 돌아가서 성서중심의 잡지로 나타내려 한다"고 밝힌다.
[활천] 중간 첫호에 1945년 11월 28일 정동예배당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환영대회 연설문이 실렸는데 여기에서 해방 후 남한 지도자들의 국가관과 신앙관이 잘 나타나있다. 김구는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어마니로 부터 들은 신앙의 유산을 회고하면서 새 나라의 건설은 建國과 建敎의 이대 방책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즉 건국의 기초는 기독교신앙의 확립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경찰서 열을 세우지 말고 교회 하나를 세우라"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승만 역시 자신이 구한말 민족의 독립을 외치다가 감옥에 갖혀서 고문을 당하던 중 예수님을 만난 진짜 신자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제 우리는 신국가 건설을 할터인데 기초없는 집을 세우지말자. 곳 만세반석되시는 그리스도 우에 이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하였다. 김규식 역시 이 자리에 나와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새 나라의 주역은 교회가 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자신을 이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성결교회는 해방이후 첫 번째 수양대회를 1946년 4월 16일부터 일주일간 경성신학교에서 열렸다. 그 마지막날이 부활절이었는데 부활절 오후시간에 김구, 김규식 등을 초청하여 연설을 들었다. 지금까지 정치와의 결별을 주장하온 성결교회로서는 매우 큰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축사를 보내와 기독교가 사상의 통일과 도덕향상을 도모하여 국가 건설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새 나라의 사상과 도덕의 기초를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 후 성결교회는 기독교정신을 통한 국가건설에 이바지하려고 했다. 1945년 11월 9일에 열린 재흥총회에서 준비위원장 박현명목사는 다음과 같은 재흥선언서를 밝히고 있다:
성결교회 재흥선언서
인류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대설계는 마참내 실현되여 이 지구상에 또다시 평화의 종을 울니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 삼천리 彊域에도 민족적 독립, 정치적 자유, 종교적 해방이 약속되였다. 동시에 우리 성결교회에도 신앙의 해방과 전도의 자유가 차저왔다. 성결교회여 기뻐하라! 우리 과거 3년간은 다음시대를 위한 수양기였으며, 훈련기였으며, 준비기였으며, 실력배양기이였다. 어느듯 살벌의 동면은 지나고 화창한 생명의 봄은 왔다.
성결교도여! 그 동면의 집에서 나오라. 그리고 준비된 생명력을 한없이 발휘하라. 어느듯 그 구 속의 철사는 끈허지고 자유의 일터는 열니였다. 성결교직자여 이러나라. 그리고 過日에 축적된 저력을 유감업시 활용하라. 이 재흥의 대업에 임해 앞길에 어찌 난관이 없기를 기하랴. 그러니 전지전능의 삼위 하나님을 믿고, 일어선다. 여호와는 "우리의 산업"이란 신앙만이 모든 난관을 돌파할 것이다. 이 역사적 환경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신앙부흥과 다음에 일치 약속과 그리고 진격적 전도로서 재흥성결교회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 그 기초를 만세반석우에 세우고 복음적 신세계건설에 만진하려 한다.
세계사의 대전환과 함께 광복의 대업을 성취한 오날 조선의 국가 정세는 성결교회의 재출발을 강하게 요청하는 지라. 이 소래에 응하여 우리는 이에 재흥을 선언한다.
동신제위여! 이 성결의 기빨아래로 모히라. 그리고 이 재흥운동에 협력하라. 이것이 해방조선의 신국가를 위하는 최고의 사명이요 유일의 봉사이다.
재흥선언서에 의하면 지금 한국은 "민족적 독립, 정치적 자유, 종교적 해방"을 맞고 있으며, 성결교회는 "신앙의 해방과 전도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결교회는 "복음적 신세계 건설"에 매진해야 하며, 이것이 "해방 조선의 신국가를 위하는 것"이다.
해방후 한국성결교회는 새로운 나라는 하나님께 근거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명직목사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양심, 자연, 성경인데 이미 동양의 여러나라들도 양심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위에 국가를 세웠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하나님을 상제라고 하는데 그것은 황제 위에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은 아직 성경을 몰랐지만 양심으로 하나님이 황제 위에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은 자기나라 천자보다 더 높은 분이 없다고 주장하므로 결국 망하고 말았다. 일본이 망한 것은 미국보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근거하지 않은 국가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명직목사는 하나님을 섬기므로 번성하는 나라의 예를 미국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위에 서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되었으며, 금일의 부강을 가지게 되었고, 윤리와 도덕, 과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건국은 하나님으로 하자"고 결론을 맺는다.
이런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밝힌 사람이 박현명이다. 해방후 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던 박현명목사는 교회와 국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경성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정교일치가 많았다고 말하면서 정교일치도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국가중심의 국교(國敎)제도요, 다른 하나는 교회중심의 교국(敎國)제도라고 설명한다. 전자는 동방교회에서 볼수 있고, 후자는 서방교회에서 볼수 있다. 하지만 근대사회에 와서 신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새로운 제도가 생겨났는데 하나는 정치와 종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정교분리며, 다른 하나는 국가가 특정한 종교를 인정하여 감독과 특권을 주는 교회공인제도라는 것이다. 전자는 미국, 벨기에, 이태리 등이며, 후자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을 들고 있다.
박현명목사는 한국의 헌법 11조가 정교의 분리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 둘을 분리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 둘이 각각 사명을 다하여 국가건설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건국은 법률과 정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도덕과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종교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교분리나 정교일치 같은 것을 따질 것이 없이 각각 맡은 바 사명을 다 감당할 때 이 모든 것이 국가를 위해서 유익이 된다고 한다. 박현명목사는 정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박현명목사는 성결교회가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은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 감당할 때라고 보았다. 그는 해방 후 한국교회가 해야할 일은 과거 일제시대에 저질은 죄악을 참회하는 총동원회개운동이며, 이것을 통하여 전국민의 도덕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도덕의 향상, 그것은 신국가 건설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의 지도자에도 이 사명이 있는줄 아느냐 모르느냐. 특히 성결교회 교직자여 귀를 기울여 이명령에 복종하자. 모-든 목자들이여 관직의 의자를 박차버리고, 정당의 요직에서 이러나서 문허진 교회를 보수하라.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의무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최대의 봉사이로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가 해야할 일은 관직이나, 정당활동이 아니라 교회를 재건하여 국민의 도덕을 향상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경성신학교 교장인 이건목사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이건목사는 해방이후 많은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이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지 않고, 정치에 기웃거리는 것을 심하게 책망하였다:
우리는 경성하여야 겠다. --- 모든 교직의 이름을 갖인 형제들이여 분연히 모든 성직에 돌아올 것이며 분연히 이성직의 사명을 다하여야겠다. 과거 일정시대엔 거기 아부하여 시세를 맞추고 이제는 외군주둔의 기회를 이용하여 무슨 명예나 利權睹得에 몰입할 것이 우리의 취할 길이 아니다. 교회는 일제시대에 銷沈되었던 타성 그대로 니러서지 못한다. 교직들은 무슨집회, 무슨 강연, 무슨 周旋하여 아직것 영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이건목사는 당시 한국사회가 당파로 나뉘어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복음서의 예수를 생각했다. 예수는 이런 모든 것을 초연하여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매진하셨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이 서로 애국한다고 싸우는 상황에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셨다. 그에게는 좌도 없었고, 그에게는 우도 없었다. 이건목사는 이렇게 함으로서 모든 계층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건목사는 해방이후의 정국을 요담의 우화를 비유해서 설명하였다. 한국사회가 자신의 본연의 임무는 일어버리고 모두 정치에 나섰다. 성직자는 성직에 충실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이므로 여기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였다. "금일 우리 조선의 흥왕도 정치와 종교와 교육의 각계인들이 각자가 그 천부를 발휘하며 천명의 진충에 기대되는 터이니 더욱이 우리교계에서 성직을 받은 모든 동역자들은 이 직분에 전심전력하는 것으로 --- 사명을 감당할 지니라."
이런 태도는 이성봉목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성봉목사는 해방후 목사들이 정치를 한다고 예배당에서 정당을 조직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은 목사가 할 일이 아니라고 충고하였다가 무식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성봉목사는 목사의 정치 개입은 교회의 속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최석모목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승만박사와 친분이 있었으므로 해방후 이박사가 사람을 보내어 함께 일하자고 하였으나 성직자는 세속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거절하였다.
성결교회는 성직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평신도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성결교인들 가운데서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평신도들이 여럿 있었다. 신의주 동부교회의 장로였던 이기백은 원래 이성봉목사 밑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지만 성결교회가 해산 당하였을 때 한경직목사의 신의주 제 2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방이후에 다시 신의주 동부교회를 재건하는데 참여하여 다시 성결교회로 복귀하였다.
이때 이북에서는 강량욱목사가 만든 조선기독교동맹이 있었고, 여기에 대항하여 조만식장로는 기독교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기백은 기독교조선민주당의 평북책임자가 되어서 활동하였다. 그는 1946년 3월 신의주 시민대회가 열렸을 때 34살의 김일성과 대립하여 38세의 이기백장로가 연설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신의주학생사건이후에 고향을 피하여 황해도 해주로 피신하였다가 결국 공산당에게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이북에서 이기백장로가 평신도로서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이남에서는 윤판석장로가 정치에 참여하였다. 윤판석은 원래부터 임시정부의 김규식을 후원하였다. 그는 해방후에 반탁, 반공운동에 앞장섰는데 이것은 그가 강원용목사와 함께 조선기독교 청년동맹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호남지역을 맡아 그 지역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데 앞장섰다.
이상을 정리하여 보면 한국성결교회는 해방이후 사상과 도덕적인 측면에서 국가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성직자는 성직자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야 한다. 하지만 평신도는 각자 자신의 재능을 따라 사회 각층에서 활동하여 국가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해방 후 성결교회는 장로교나 감리교와는 달리 비교적 정치에 초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국가의 근거가 기독교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성결교회의 생각은 50년대 내내 계속되고 있다. 6. 26전쟁이 끝난 뒤 오영필목사는 "하나님과 국가"라는 글을 통하여 국가의 소유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군주국가는 국가가 군주 개인의 소유로 생각하고, 민주국가는 국가를 민족이나 민중의 소유로 생각하나 국가는 분명히 하나님의 소유라고 밝히면서 다만 왕이나 대통령은 하나님의 대리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오영필목사는 국가를 지켜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국가의 국경과 연대를 정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전쟁의 승부도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하므로서 6. 25 이후 민족의 현실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영필목사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고, 공의를 실천하는 나라를 축복하시므로 국가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50년대 한국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무분별한 정치참여이다. 김기삼목사는 군정하에서 그리고 민정수립 후에 종교인들의 정치 참여가 많아졌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고, 종교가 정치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인류 역사상 수 많은 정당과 종교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타락한 실례를 언급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나는 결론으로 한마디 하려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정교일치는 불가능한 것이니, 차라리 정치와 종교는 각기 독자적인 길을 걸으면서 종교는 정치를 격려하며 그 부패를 책할지언정 정치세력에 아부하여 교권주의에 타락될 것을 스사로 自戒함이 있어야 하겠다. 정치도 종교를 정략에 유도하여서 그를 驅使함으로 종교의 순수성을 혼란케 한다든지 정책의 방편을 삼어서는 안될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불교 이조시대의 유교의 積弊를 前鑑을 삼어 一 종교를 정략에 도입하지 않고 신앙자유의 민주정치 이념에 입각해서 각자 정교분립의 노선을 걸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성결교회의 입장은 해방 후 한국교계의 일반적인 흐름과는 다른 것이다. 해방후 한국개신교는 개신교인을 정치에 등장시키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개신교는 열심히 노력했으며, 1952년 선거에서 부통령 출마자 9명가운데 6명이 개신교신자였고, 그 가운데 함태영과 이윤영은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목사였으며, 여기에 따라 교회도 각각 지지를 달리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소위 정치의 계절을 맞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본래의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우리는 한국성결교회는 해방 후 건국의 기초가 기독교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일은 정치참여가 아니라 교회의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다고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결교회는 장로교나 감리교와는 달리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해방 후 한국교회가 정치참여라는 미명아래 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성결교회는 여기에서 예외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결교회는 정치에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정치에 아부하지도 않았다.
III. 공산주의와 성결교회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사회의 가장 큰 이념적인 문제는 공산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특별히 한국교회에서 더욱 중요하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일제시대부터 반공산주의 입장을 유지했으며, 이것은 해방이후 냉전체제가 강화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기독교의 반공입장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면 이런 맥락에서 한국성결교회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해방이후 한국성결교회가 공산주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다. 한국성결교회가 공상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면서이다. 따라서 한국성결교회의 공산주의 인식은 종말론과 구분해서 다루기가 어렵다.
일제말 한국교회로 하여금 일제의 모진 고통에서 순수한 신앙을 지킬수 있도록 한 것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다. 하지만 해방되었다고 해서 한국교회가 이런 종말론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해방이후에서도 전천년설은 여전히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였다. 이것은 성결교회에서는 특별히 분명하다. 전천년설은 일종의 역사철학이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전에 환란시대가 있으며, 이 환란시대가 지나간 다음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세운다는 종말론의 일종이다. 한국성결교회가 해방이후 한국사회를 보는 역사관이 바로 이 전천년설이었던 것이다.
해방이후 복간된 [활천]의 중심 주제는 종말론이었다. 이명직목사와 김응조목사는 종말론을 시리즈로 연재하였다. 종말론은 단지 글로만 전달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종말론은 해방이후 이성봉목사와 더불어서 한국성결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였던 김응조목사 집회의 주된 주제는 역사 종말론이었다. ""성도여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니까?"하는 것이 교제가 해방후 남한 각지를 도라다니면서 부르지즌 호소이요, 이 호소에 호응하야 많은 성도가 경성하고, 많은 영혼이 회개하고 도라온다." 그는 부흥회에서 강의한 종말론을 1954년 [말세와 예수의 재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명직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방이후 6. 25 전쟁을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가 종말론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런 시대의 여러 모습들이 종말의 징조로 보였기 때문이다. 전천년설은 종말의 징조로 사상의 혼란,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세계의 분열을 든다.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에 많은 세월을 보냈다. 이것은 해방이전부터 있어왔지만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이 논쟁은 해방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증거의 하나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전천년주의자들을 흥분시킨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전천년설이 등장한 이래 일관된 주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의 회복이 먼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된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948년 5월 이스라엘은 독립되었다. 이것은 전천년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믿었던 종말론이 분명하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여기에 대하여 이명직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재림의 징조를 말삼하시기를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울찌니 ---"하셨으니 이것을 해석하야 말하면 무화과는 이스라엘민족의 표요 가지가 연하고 잎이 난다는 것은 기원전 606년에 바벨론에 멸망되었던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부흥되어가는 것은 곳 예수재림의 전조라하심이라.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어떻한가하면 기원 606년에 바벨론에 망한 후 2520년간 죽은 것 같았으나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본토에 귀환하는 기회를 얻었고, 1948년 5월 15일 영시에 독립을 선언하고 국제연합에 승인을 받았으니 이것이 바로 무화과 나무가지가 연하고 잎이 나는 것이요, 이것이 재림의 징조가 되나니라.
한국 기독교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증거는 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해방이후 한국사회의 상황이 바로 사상의 혼란과 영적인 전쟁의 상황이며, 이모든 것이 재림의 징조로 해석되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성결교회는 이런 종말론적인 틀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면 6. 25 전쟁과 공산주의에 대한 성결교회의 이해는 무엇인가? 원래 전천년설은 말세의 징조로 사상의 혼란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들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천년설은 정치적인 보수주의와 결합하게 되었다. 소련에서 볼세비키의 혁명을 본 전천년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말세의 징조 리스트에 첨가하였다. 그 후 미국에서 전천년주의자들은 공화당과 비슷한 정치관을 갖게 되었다.
이런 전천년설의 주장은 한국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1920년부터 시작된 한국에서 사회주의 논쟁에서 전천년설을 믿고 있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방해하는 가장 큰 위협임과 동시에 말세가 오기 전에 드러나는 말세의 징조이기도 했다. 성결교회는 이런 입장을 갖고 있었다.
성결교회의 이런 입장은 이명직목사의 글에서 확인된다. 1938년에 쓴 "적룡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이명직목사는 말세의 붉은 용은 소련의 공산주의이며, 그 증거로서 종교박해, 인명살상, 사상혼란 등을 들었다. 그는 "우리는 진리의 말슴으로 이 사단 즉 赤龍來의 사상과 건전히 싸움을 하여야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명직목사는 일본, 독일, 이태리의 반공연맹이 기독교의 입장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신앙의 자유를 박해하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하여 일본, 독일, 이태리의 연합전선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직목사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근본적인 입장은 공산주의가 반종교적인 집단이라는 것이다. "공산의 사상이라는 것은 一曰 종교를 무시한다. 그 뿐 아니라 종교박멸에 운동을 도와주고, 무신론을 장려하여 인생의 전도를 암흑화시키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지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의 보수주의가 공산주의와 싸우는데 있어서 일본과 연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개신교의 국제관을 살펴 볼 수 있다. 1904년 노일전쟁 때 개신교선교사들은 일본을 지지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는 서양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없고, 독재자가 지배하기 때문에 일본이 승리하는 것이 한국의 선교를 위해서 좋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은 개화되었기 때문에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선교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개신교는 선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를 항상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런 입장은 해방후 개신교가 반공의 보루가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성결교회의 공산주의 인식은 해방이후에도 다르지 않다. 전천년설은 근본적으로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해방정국의 혼란을 보면서 전천년주의자들은 1차 세계대전 보다도, 2차 세계대전보다도 더 무서운 3차 세계대전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한다. 해방후 전국을 다니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했던 김응조목사는 지혜로운 사람은 때의 징조를 살필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할 것을 외치고 있다:
땅에서는 전 세계가 아마겟돈 전장을 목표하고 다름질하고 있다. 보라 원자탄의 연기도 사라지기전에 또는 강화회의도 하기 전에 또 다시 3차 대전설이 떠돌고 있지 않은가? 제 일차전에 무서운 무기가 독일에 잠항정, 영국의 전차이다. 그러나 제 이차전에는 그보다 백배나 더 무서운 원자탄이다. 그러나 제 3차 대전을 위하야 원자탄 보다 백배나 무서운 무기가 숨어있나니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을 위하여 준비된 비밀무기이다. --- 뭇노니 성도여 하나님 맛날 준비가 되였나뇨?
성결교회는 당시 벌어지고 있는 사상의 혼란을 영적인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의 후예인 적룡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다. 하지만 적 그리스도는 적룡을 보내서 예수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이 적룡은 공산주의를 상징한다고 본다. "이 적룡은 색도 흉하거니와 그 생김 생김이 괴한 동물이다. 1848년 2월 24일에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어로 공산당선언을 인쇄하여 발표하였는데 "한개의 괴물이 歐澔를 배회한다. 공산주의의 괴물이 곳 이것이다." 또한 이명직목사는 적 그리스도를 정의하여 "무신론을 주장하며, 모든 종교를 부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자기를 가르쳐 하나님이라하야 완연히 적대행동을 할 것이니 금일의 무신론, 유물사상은 다 그 전조니라"고 하여 공산주의가 적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명직목사는 당시 벌어지고 있는 국제연합 같은 평화를 위한 노력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류가 지금까지 평화를 외쳐 왔지만 정작 평화보다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그에 의하면 제 1차 대전이후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실패했던 것처럼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국제연합도 실패할 것이다. 이명직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다시 평화를 위하야 國聯이니 [유엔]이니 하는 국제회합이 구성되어 전쟁을 방지하고 세계평화를 수립한다고 떠들고 잇지만 공산주의 독재정치는 세계인류를 노예시키려하고 원자탄무기는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잇으니 평화는 언제나 잇을 것인가?
또다시 세계평화의 수단으로 민주주의라하나 민주주의가 엇지 평화를 가져오리오. 또 다시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세계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아인슈타인씨가 제창한 후 발서 二十여 나라가 공명하고 잇다. 이모든 사상을 종합하여 보면 세계평화하여야 하겟고, 평화하려면 무기를 제한하여야 하겟고, 그러케 하려면 세계정부를 세워야 한다하니 이 이상을 가장 조흔것이로되 이기주의와 정욕으로 충만한 인간으로 말매암아 과연 실현될 수 있을가? 이것은 의문중에도 의문이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니라.
이명직목사의 주장은 분명하다. 국제연합같은 기구가 평화를 지향하기는 하지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실효성이 의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천년주의자들의 비관적인 역사이해를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은 6. 25전쟁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왕에 세상은 하나님과 악령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를 근본적으로 둘로 나눌 수 밖에 없다. 이명직목사는 6. 25가 일어나기 전 [활천] 1950년 4월호에 실린 "말세와 재림의 징조"라는 글에서 세계가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말세의 징조라고 말하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세계는 두조각으로 쪼겨졌나니 곧 민주주의와 독재주의, 이것이 곧 철발가락과 흙발가락이니라. 극동으로 태평양 한끝 일본의 천도열도에서 부터 우리나라의 38선을 지나 중국의 몽고와 팔레스틴을 쪼개고 헬라를 남북으로 짜르고 독일 백림을 나누고 지구를 동은 태평양으로부터 서는 대서양까지 금을 그어 놓았으니 "각 종류의 사람으로 더불어 서로 석겨 피차에 합하지 못함과 같음이라"(단 2: 43)하였고, "이 두왕의 마음이 서로 해코자하여 한자리에 앉었을 때에 거짓말을 하려니와 그러나 일이 형통하지 못함은 대개 결국은 정한 기한이 됨이라"(단 11: 27)하였으니 그러면 합작 위원회나 남북협상이나 국제 연합회가 과연 성공할 것인가는 의문일 뿐 않이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라. 이와같이 세계가 두 조각으로 나누어있는 것은 그 말세의 징조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우리는 이명직목사가 매우 분명하게 역사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결교회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밑 바닦에는 영적 전쟁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흥미있는 부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이다. 이미 이명직목사가 공산주의를 적룡이라고 분류한 것을 보았다. 그러면 이명직목사가 민주주의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명직목사는 민주주의 역시 인류의 소망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민주주의도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전천년주의자들은 공산주의도 반대하지만 민주주의 역시 복음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두 세력은 결코 섞일 수 없는 것이며 말세에 다 같이 멸망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두 세력은 멸망하며, 그 뒤에 새로운 세계가 건설된다는 것이다. 그는 다니엘 20장 32-34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 발과 열 발가락은 로마국이 망한 후에 그 판도 안에서 일어날 나라들인데 반은 철, 반은 흙인 것은 말세에는 두가지로 사상이 분열될 것을 가라침이오,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뜬 돌이 그 우상의 발을 쳐부숨은 이 산 돌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서서 모든 불의한 일을 멸하시고, 정의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가라침이라. 그러므로 금일 두 사상의 대표자가 한 자리에 모여 일을 의논하나 서로 해코자 하여 거짓말을 하려니와 그러나 일이 형통치 못함은 대개 결국은 정한 기한이 됨이라(단 10: 27)하였으니 이것이 분명히 말세의 징조로 되여있나니라.
성결교회는 공산주의를 반대함은 물론이려니와 민주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해방이후의 정국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성결교회는 물론 좌익에 서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익에 서서 활동하지도 않았다. 이런 입장을 가진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해방 후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정치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점은 장로교나 감리교와 매우 구별되는 점이다. 개신교 주류인사들은 미국의 승리는 곧 기독교의 승리라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은 정치에 초연할 것을 강조했다.
이명직목사는 미국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국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명직목사는 6. 25 이후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사대국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북에는 소련강도괴수, 황해를 격하여 서에는 중공이라는 국제 강도, 동으로는 40년간 반도에서 착취하던 일본이 금일도 미련을 버리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 남으로 경제의 세력이 들어와 우리의 피를 빨고 있다." 여기에서 남이란 미국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이명직목사가 미국의 경제적 침략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이명직목사는 미군의 진주로 인한 한국의 윤리적인 타락에 대해서 심각하게 공격하고 있다. "남여가 모여들어 양춤을 춘다고 음란행위를 하며, 유엔군을 위로한다는 소위 양갈보 지진머리 그린 눈썹 빨간 입설 검은 칠한 눈구멍 검둥이 나서 육아원 보내고 흰동이 나서 양노원 보내고 또는 낙태, 압살. 뛰어 다니는 이 꼴악선이 타락 또 타락 울어도 시원챦고 통곡하여도 시원챦고 이 현상을 보고 좋게 여기는 자는 타락자 무관심한자는 죽은자니 마음이 있는자 분하지 않을 수 없고, 피가 있는 자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명직목사가 세상을 보는 눈은 성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미군의 진주로 인한 한국사회의 타락을 그는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성결교회가 다니엘서의 10개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 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하나는 앞서 말 한대로 철과 흙이 뒤섞인 열 발가락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하나는 이 십 개국은 소련의 위성국인 10개국의 나라이며, 철과 흙은 소련 공산당기의 망치와 낫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망치는 공업, 곧 철이며, 낫은 농업 곧 흙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해석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다같이 심판의 대상이라고 보는 반면에 후자의 해석은 공산주의만을 심판의 대상으로 본다고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6. 25 이후에 한국성결교회는 말세의 붉은 용은 주로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한국성결교회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서 멸망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게 된다. 여기에 역사현실에 대한 참여 보다는 초월적인 역사의 종말을 기다리게 된다. 이 종말론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입장은 1950년대 중반 부터 나타나는 WCC의 용공시비에 한국성결교회가 취할 수 있는 태도를 예견케 한다. 한국 기독교연합회는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 NCC 및 WCC와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 NCC와 WCC의 모호한 태도가 한국교회에 소개되었다. 1954년 미국 애반스톤에서 열린 제 2차 WCC대회에서 일부 대표들은 WCC에 공산권 교회의 참여를 주장하게 되었고, 1957년 8월 미국 감리교 전국청년회에서는 공산국가의 유엔가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다. 1958년 미국 NCC가 "공산국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중공을 승인하라"는 결의문을 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소식을 듣는 보수적인 한국성결교회는 한국 NCC에 대해서도 의문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고,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NCC가 용공적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1960년대에 NCC 탈퇴를 둘러싼 성결교회의 분열이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성결교회가 NCC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가장 심각하게 반대한 인물은 바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철저하게 믿고 가르친 이명직과 김응조목사였다.
맺는 말: 정리와 남은 문제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기독교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기독교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해방후 대다수의 교회가 기독교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데 비하여 성결교회는 엄격한 정교분리를 주장하였다. 성결교회는 교회의 건국활동은 정치에 참여함으로서가 아니라 교회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여 국민의 도덕을 향상시켜 시민의식을 높이는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 교회의 본래적인 사명을 잃기 쉽고, 또한 교회가 세속화된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성결교회는 이런 원칙에 비교적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평신도의 경우를 제외하곤 성직자 가운데 성결교회가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런 성결교회의 태도는 성결교회로 하여금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꺼리는 풍토를 만들게 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성결교회의 이런 비정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는 반공이라는 매우 분명한 정치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성결교회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취하게 된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존엄을 부정하는 반종교적인 집단이라는 것이다. 성결교회에 있어서 공산주의는 단지 정치집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의 집단인 것이다.
이런 반공의 입장은 성결교회로 하여금 친미적인 입장을 갖게 만든다.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미국식 민주주의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복음전파에 유익을 주는 친 기독교적인 이념이다. 성결교회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절대적인 제도라고 보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의 퇴폐와 물질만능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비해서 민주주의 속에서 기독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성결교회의 입장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입장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남북대화를 앞두고 이념적인 혼란을 겪고 있다. 한국교회는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운 신앙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여 왔다. 하지만 최근에 일어난 일부 통일운동은 반공이념이 냉전체제의 분단이데올로기를 고착시킨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반공은 통일을 가로막는 반민족적인 이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반공이념은 잘못된 것이었는가?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입장이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붕괴는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평등을 가져다 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 이념이라는 것이 입증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시 공산주의는 한국교회가 인식한대로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는 잘못된 이념은 아니었을까?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한국전쟁이 남긴 이데올로기에 대한 평가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문제는 해방이후 한국교회사를 규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초점이 될 것이다.